君子反情以和其志
하고 比類以成其行
하야 姦聲亂色
을 不留聰明
하며 淫樂慝禮
를 不接心術
하며 惰慢邪僻之氣
를 不設於身體
하야 使耳目鼻口心知
로 皆由順正
하야 以行其義
니라
原注
發於聲하고 見乎四支어늘 謂非己心이면 不明也요 欲人無己疑면 不能也니라
失於聲하고 繆迷其四體어늘 謂己當然이면 自誣也요 欲他人己從이면 誣人也니라
原注
橫渠學力絶人하야 尤勇於改過하시되 獨以戲爲無傷이러시니
一日
에 忽曰 凡人之過
는 猶有出於不知而爲之者
어니와 至戲則皆有心爲之也
니 其爲害尤甚
이라하시고 遂作
하시니라
○ [按] 戲言戲動
이 雖與姦聲亂色
으로 有間
이나 然一向流蕩而不知檢
이면 則求其能反情和志
하야 以
于順正之域
이나 不可得矣
니
原注
戲謔
은 不惟害事
라 志亦爲氣所流
하나니 不戲謔
은 亦是
之一端
이니라
原注
蓋牛刀之言은 夫子特以發子游而非正言이라 故曰戲爾라하시고
之戲
는 曰善, 曰不爲虐
이라하니 則和而有節
을 可知
요
은 蓋是日也
에 恣民之燕樂
하야 以休其勞
니 非文武自爲戲也
라
若張子則持志養氣之功이 嚴하야 惟恐戲言戲動以害之라
故旣爲東銘
하시고 又發此語
하시니 學者誠以身體之
하야 能不爲氣所流否然後
에 知張子眞藥石之言
이니 未可以夫子武公自諉也
니라
原注
情欲信, 辭欲巧
라하고 詩稱仲山甫之德曰 令儀令色
이라하니 然禮所謂辭欲巧 亦鮮仁乎
아
至於
以出之
하야는 辭亦巧矣
요 逞顔色
하야 怡怡如也
도 色亦令矣
니 豈以好其言語, 善其顔色
으로 直以爲鮮仁也哉
아
至於小人
하야는 蓋嘗
니 言何嘗巧
며 雖
하니 色何嘗令
이리오
若能知出辭氣可遠
면 則知之矣
니 此宜學者深思力索
이요 不可以言語道也
니라
原注
容貌辭氣之間은 正學者持養用力之地나 然有意於巧令하야 以悅人之觀聽이면 則心馳於外而鮮仁矣라
若是就此持養
하야 發禁躁妄
하고 動必溫恭
하야 只要
自家直內方外之實事
라야 乃是爲己之功
이요 求仁之要
니 復何病乎
리오
故夫子告顔淵以克己復禮之目이 不過視聽言動之間이요
仲山甫之德
이 維
, 令儀令色
은 則大賢成德之行而
者
요 夫子之逞顔色, 怡怡如也
는 乃聖人動容周旋中禮之事
니 又非仲山甫之所及矣
라
至於小人訐以爲直, 色厲而內荏하야는 則雖與巧言令色者로 不同이나 然考其矯情飾僞之心이면 則實巧言令色之尤者라
上蔡於此에 不肯明言其所以然者는 將使學者로 深求而得之也라
然今學者 反求之於冥漠不可知之中하야 失之愈深이라
故詳論之
하야 使學者無
力索之苦而有以審夫用力之幾焉
이로라
○ [按] 聖賢所論巧言令色與姦聲亂色處를 宜參觀이니라
原注
非禮勿視勿聽은 卽所謂姦聲亂色不留聰明이요 淫樂慝禮不接心術이니 非是耳無所聞, 目無所視니라
原注
古人衣冠容止之間에 不是要作意矜持요 只是循他天則合如是라
爲尋常因循怠弛라 故須著勉强自持니 外之不肅而謂能敬於內 可乎아
原注
詳考從古聖賢論下學處
하면 莫不以正衣冠, 肅容貌爲先
하니 蓋必如此然後
에 而不流於邪僻
이니
原注
故姦聲亂色을 不留聰明者는 所以養其外也요 淫樂慝禮를 不接心術者는 所以養其內也니 外無聲色之誘면 則內亦正矣요 內無淫慝之惑이면 則外亦正矣라
惰嫚之氣는 自內出者也요 邪僻之氣는 自外入者也니 二者不得設於身體라
如是면 則外而耳目鼻口四肢百體와 內而心知가 皆由順正하야 以行其義니 自養之功이 畢矣니라
原注
反情은 復其情性之正也니 情不失其正이면 則志無不和요 比類는 分次善惡之類也니 不入於惡類면 則行無不成이니라
曰不留, 不接, 不設은 如論語四勿之謂니 皆反情比類之事라
如此
면 則百體從令而
矣
리니 此一節
은 乃學者修身之要法
이니라
군자君子는 성정性情의 바름을 회복하여 뜻을 화和하게 하고 유類를 나란히 비교하여 행실을 이루어서, 간사한 소리와 어지러운 색을 총명聰明(耳目)에 머물러 두지 않으며, 음탕한 음악과 간사한 예禮를 마음속에 접하지 않으며, 태만하고 사벽邪辟(간사)한 기운을 신체에 베풀지 아니하여, 이목구비耳目口鼻와 마음의 지각知覺과 온몸으로 하여금 모두 순하고 바름을 따르게 하여 의義를 행한다.
原注
“반정反情은 정욕情慾을 돌이켜 제거하는 것이요 비류比類는 선善한 유類에 견주는 것이다.”
原注
“희롱하는 말은 생각에서 나오고 희롱하는 행동은 계획에서 나온다.
소리에 나타나고 사지四肢에 나타나는데, 자기의 마음(진심)이 아니라고 하면 지혜가 밝지 못한 것이고 사람들이 자기를 의심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될 수 없는 것이다.
잘못된 말은 진심眞心이 아니고 잘못된 행동은 성심誠心(眞心)이 아니다.
소리에 실수하고 사체四體(四肢)를 잘못하였는데, 자기의 잘못이 당연하다고 한다면 자기를 속이는 것이고 타인이 자기를 따르기를 바란다면 남을 속이는 것이다.
혹자는 마음에서 나온 것을 허물을 돌려 자기의 희롱이라 하고, 생각에서 잘못된 것을 스스로 속여 자기의 성심誠心이라고 하여, 너(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경계하고 너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에 허물을 돌릴 줄을 알지 못하니, 오만함을 자라게 하고 또 비행非行을 이룬다.
原注
“횡거橫渠는 학문한 공력이 일반인들보다 뛰어나서 허물을 고치는 데에 더욱 용감하였으나 오직 희롱하는 것만은 해로울 것이 없다고 여겼는데,
하루는 갑자기 말씀하기를 ‘무릇 사람의 허물은 오히려 부지不知에서 나와 〈무심無心히〉 하는 것이지만 희롱에 이르러서는 모두 마음을 두어 하는 것이니, 그 폐해가 더욱 심하다’ 하고는 마침내 〈동명東銘〉을 지으셨다.”
○ [按] 희롱하는 말과 희롱하는 행동은 비록 간사한 소리와 어지러운 색과는 간격(차이)이 있으나 한결같이 흘러가서 검속檢束할 줄을 모르면 성정性情의 바름을 돌이켜 뜻을 화하게 해서 순하고 바른 경지에 이르기를 구하나 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장자張子가 통렬히 끊으신 것이니, 배우는 자는 더욱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原注
“희학戱謔은 비단 일을 해칠 뿐만 아니라 심지心志 또한 기운에 흘러가게 되니, 희학하지 않는 것도 기운(뜻)을 지키는 한 가지 방법이다.”
原注
“한자韓子(韓愈)가 장적張籍에게 준 편지에 ‘옛날에 부자夫子도 오히려 희롱한 바가 있었고 《시경詩經》에 「희학을 잘함이여!
지나침이 되지 않는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조이기만 하고 풀어놓지 않으면 문왕文王과 무왕武王도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 하였으니, 〈희롱하는 것이〉 어찌 도道를 행함에 해롭겠는가’ 하였다.
그런데도 장자張子가 이처럼 말씀한 것은 어째서인가?
소 잡는 칼을 말씀한 것은 부자夫子가 다만 자유子游에게 말씀하신 것이요 바르게 말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희롱이라고 하신 것이며,
무공武公의 희롱은 ‘잘한다’ 하고 ‘지나침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화和하면서 절도가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백일百日의 납향臘享제사와 하루의 은택은 이 날에 백성들이 마음껏 잔치하고 즐기도록 내버려두어서 수고로움을 쉬게 한 것이니, 문왕文王‧무왕武王이 스스로 희롱한 것이 아니다.
장자張子로 말하면 뜻을 지키고 기운을 기르는 공부가 엄격하여 행여 희롱하는 말과 희롱하는 행동으로 해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이미 〈동명東銘〉을 지으시고 또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니, 배우는 자가 진실로 몸으로 체행하여 희학戱謔할 때에 심지心志가 기운에 흘러가는 바가 되지 않는가를 살핀 뒤에야 장자張子의 말씀이 참으로 약석藥石임을 알 것이니, 부자夫子와 무공武公의 말씀을 가지고 스스로 핑계대어서는 안 된다.”
原注
“교언영색巧言令色(말을 잘하고 얼굴빛을 좋게 함)을 알기가 또한 어렵다.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정情은 신실信實하고자 하고 말은 잘하고자 한다’ 하였고, 《시경詩經》 대아大雅 〈증민蒸民〉에 중산보仲山甫의 덕德을 칭찬하기를 ‘위의威儀를 좋게 하고 얼굴빛을 좋게 한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예기禮記》의 ‘말은 잘하고자 한다’는 것도 인仁한 자가 적은 것인가?
중산보仲山甫의 덕德도 인仁한 자가 적은 것인가?
성인聖人의 이른바 ‘공손히 하여 낸다’는 것도 말을 또한 잘하는 것이요, ‘얼굴빛을 펴서 화하게 한다’는 것도 얼굴빛을 좋게 하는 것이니, 어찌 말을 잘하고 얼굴빛을 좋게 하는 것을 곧바로 인仁한 자가 적다고 말하겠는가.
소인小人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고자질하는 것을 곧다고 여기니 어찌 일찍이 말을 잘하겠으며, 비록 안은 나약하나 얼굴빛이 엄숙하니 어찌 일찍이 얼굴빛을 좋게 하겠는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교언巧言이 되며 어떤 것이 영색令色이 되는가?
만약 사기辭氣를 낼 때에 비루함과 도리에 위배되는 것을 멀리 할 줄 안다면 이것을 알 것이니, 이는 마땅히 배우는 자가 깊이 생각하고 힘써 찾아야 할 것이요, 언어言語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原注
“용모容貌와 사기辭氣의 사이는 바로 배우는 자가 지양持養(잡아 기름)하여 힘쓰는 곳이나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뜻을 두어서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기쁘게 하려 한다면 마음이 밖으로 달려서 인仁한 자가 적게 된다.
만일 여기에 나아가 지양持養하여, 발설發說함에 조급함과 경망함을 금하고 동動함에 반드시 온순하고 공손하여 다만 자신의 경이직내敬以直內‧의이방외義以方外하는 실제 일을 체당體當(체득)하여야 바로 자신을 위한 공부이고 인仁을 찾는 요점이니, 다시 무슨 병폐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자夫子가 안연顔淵에게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조목을 말씀해 준 것이 시視‧청聽‧언言‧동動의 사이에 지나지 않았고,
증자曾子가 장차 임종할 적에 하신 선언善言도 용모容貌와 안색顔色과 사기辭氣의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부자夫子의 이른바 ‘공손히 내고 말을 잘하고자 한다’는 것도 이 한 가지 일이다.
중산보仲山甫의 덕德이 유순하고 아름다워 법이 될 만하며 위의威儀를 잘하고 얼굴빛을 잘한 것은 대현大賢의 성덕成德한 행실로 이보다 더 나아간(진보한) 자이고, 부자夫子의 얼굴빛을 펴서 화하게 한 것은 바로 성인聖人의 동용주선動容周旋이 예禮에 맞은 일이니, 또 중산보仲山甫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소인小人들이 고자질하는 것을 정직하다고 여기며 얼굴빛은 엄숙하나 속마음이 나약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자와는 똑같지 않으나 실정을 속여서 거짓을 꾸미는 마음을 상고해 보면 실로 교언영색巧言令色함이 심한 자이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이것을 미워하신 것이다.
사상채謝上蔡가 이에 대하여 그 소이연所以然을 분명히 말씀하지 않은 것은 장차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깊이 찾아서 스스로 알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배우는 자들이 아득하여 알 수 없는 가운데에 돌이켜 찾아서 잃음이 더욱 심하다.
그러므로 이것을 자세히 논하여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지나치게 생각하고 힘써 찾는 수고로움이 없이 힘쓰는 기미를 살필 수 있게 한 것이다.”
○ [按]성현聖賢이 교언영색巧言令色과 간성난색姦聲亂色을 논한 부분을 참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原注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마는 것은 곧 이른바 간사한 소리와 어지러운 색을 총명聰明에 머물러 두지 않는다는 것이요 음탕한 음악과 간사한 예禮를 심술心術에 접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는 귀로 듣는 바가 없고 눈으로 보는 바가 없는 것이 아니다.”
原注
“옛사람들이 의관衣冠과 용지容止의 사이에 뜻을 두어 긍지矜持하려고 한 것이 아니요, 다만 저 하늘의 법칙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함을 따른 것이다.
평소 인순因循하고 태이怠弛하기 때문에 모름지기 면강勉强하여 스스로 잡아 지키는 것이니, 외모가 엄숙하지 못하면서 속마음에 공경한다고 이르는 것이 될 수 있겠는가.”
原注
“예로부터 성현聖賢들이 하학下學을 논한 곳을 자세히 상고해 보면 의관을 바루고 용모를 엄숙히 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마음이〉 보존하는 바를 얻어서 사벽邪辟함에 흐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주역周易》의 이른바 ‘사邪를 막아 성誠을 보존한다’는 것과 정씨程氏(伊川)의 이른바 ‘밖을 제재하여 마음을 기른다’는 것이 이것이다.”
原注
“군자君子가 스스로 기르는 바는 딴 것이 없다.
안과 밖이 서로 그 공부를 지극히 할 뿐이다.
그러므로 간사한 소리와 어지러운 색을 이목耳目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은 밖을 기르는 것이요, 음탕한 음악과 간사한 예禮를 심술心術에 접하지 않는 것은 안을 기르는 것이니, 밖에 소리와 색의 유혹이 없으면 안이 또한 바르게 되고, 안에 음탕하고 간사한 유혹이 없으면 밖이 또한 바르게 될 것이다.
태만한 기운은 안에서 나오고 사벽한 기운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니, 이 두 가지를 신체에 베풀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밖으로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사지四肢‧백체百體와 안으로 마음의 지각知覺이 모두 순하고 바름을 따라서 그 의義를 행할 것이니, 스스로 기르는 공부가 다하게 된다.”
原注
“반정反情은 성정性情의 바름을 회복하는 것이니 정情이 그 바름을 잃지 않으면 뜻이 화하지 않음이 없고, 비류比類는 선악善惡의 유類를 나누어 차등하는 것이니 악惡한 유類에 들어가지 않으면 행실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머물러 두지 말라 하고 접하지 말라 하고 베풀지 말라 한 것은 《논어論語》의 사물四勿이란 말과 같으니, 모두 성정性情의 바름을 회복하고 유類를 나누어 차등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하면 백체百體가 명령을 따라서 의義를 따르게 될 것이니, 이 한 절節은 바로 배우는 자가 몸을 닦는 중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