然嘗諦觀之하니 心經은 有先生所自贊하야 其出于手訂이 無可疑者어니와 若政經則雖首以經訓이나 而附以漢晉隋唐守令之事하고 凡先生所歷州郡榜示諭告之文을 亦雜附之하니 乃自名之爲經은 竊恐未然이라
豈先生
이 嘗手錄經史牧民之要
하야 備省覽
이어늘 而後人
이 附會以成之
하야 欲與心經相
故邪
아
或者以心爲體하고 政爲用하야 庶幾成一家之說이라하니 此尤不然이라
程子曰 心은 一也로되 有指體而言者하고 有指用而言者라하시고
朱子大學章句에 亦以心之全體大用爲言이어시늘 茲乃獨指心하야 以爲體면 豈非舛之甚邪아
況聖人之政은 必由身而家而國而天下하야 凡制禮作樂, 修內攘外, 用人理財 皆政之大者어늘 不一及之하고 而規規于民社之間, 擧措禁戒之蹟하니 誠有不可知者라
故今獨取心經하야 爲附註하고 而政經은 未暇及焉하노니
以爲誠有得于心學이면 則擧而措之에 無施不宜하리니 其體備하고 其用周를 有不俟乎他求者矣리라
心經附註는 我篁墩先生이 本西山眞文忠公心經하야 爲綱하고 採摭程朱以下大儒之言의 互有發明者하야 疏於下하니 蓋備忘之書也라
惟道原于天하고 散于事而具于心하야 古今無一息間하니 自堯舜禹湯文武立法以治天下하고 孔曾思孟垂敎以詔後世하야 更相授受하야 雖若不同이나 大抵敎人守道心之正하고 遏人心之流耳라
中古以來로 在上者는 溺好尙之偏하야 而狃于功利하고 在下者는 各以意之所便爲學하야 而鑿于見聞이라
故心學晦焉이러니 千四百年而濂洛諸大儒始出하고 曁我文公朱子 廓而著之하야 由是로 心學이 粲然復明於世矣라
西山은 出數君子之後하야 實嗣其傳일새 摭爲此經하니 誠大有功于學者라
第所摭經語 詞約理備하고 而註亦渾然如經하야 學者未能遽了라
先生이 講授之暇에 爰輯舊聞하고 折以己見하야 附註其間然後에 操存省察之功과 全體大用之學이 如指諸掌하니
學者得之豁然하야 冥途之覺이요 醉夢之醒이라 蓋於此에 見道之在人心하야 不可泯如此라
祚執經門下하야 敬誦之餘에 不敢自私하야 請刻以惠後學, 傳四方하노니
使天下後世之人으로 曉然知心學之正傳하야 而加存存之功이면 則先生此書 將大有裨于斯道하리니 豈獨備忘而已哉아
工旣告完에 謹述所聞于先生者하고 倂識歲月於末云이라
서산선생西山先生의 《심경心經》과 《정경政經》 두 책이 간행된 지 이미 오래이다.
그러나 일찍이 자세히 살펴보니, 《심경心經》은 선생이 직접 지은 찬贊이 있어서 손수 수정修訂을 거쳐 나온 것임이 의심할 나위가 없으나 《정경政經》으로 말하면 비록 경전經傳의 가르침을 앞에 놓았지만 한漢‧진晉‧수隋‧당唐의 수령守令들의 일을 붙이고 무릇 선생이 역임했던 주군州郡에 방문榜文으로 써 붙이고 유시諭示했던 글들을 또한 섞어 붙였으니, 마침내 스스로 경經이라고 이름한 것은 적이 옳지 않을 듯하다.
이 어찌 선생이 일찍이 경사經史 중에 백성을 기르는 요점을 손수 기록하여 보고 살핌에 대비하려 하였는데, 후인後人들이 부회附會하여 이루어서 《심경心經》과 서로 짝하고자 한 까닭이 아니겠는가.
혹자는 “마음을 체體로 삼고 정사政事를 용用으로 삼아 거의 일가一家의 학설學說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더욱 옳지 않다.
정자程子가 말씀하기를 “마음은 하나인데 체體를 가리켜 말한 것이 있고 용用을 가리켜 말한 것이 있다.” 하였으며,
주자朱子의 《대학장구大學章句》에 또한 마음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을 가지고 말씀하였는데, 이제 마침내 홀로 마음을 가리켜 체體라고 한다면 어찌 심히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성인聖人의 정사는 몸으로 말미암아 집에 이르고 나라에 이르고 천하에 이르러서 무릇 예악禮樂을 제작하며 내치內治를 닦고 외적外敵을 물리치며 인재를 등용하고 재정을 관리하는 것이 모두 정사 중에 큰 것인데, 하나도 언급하지 않고 인민人民‧사직社稷의 사이와 거조擧措‧금계禁戒의 자취에만 규규規規(급급)하였으니, 진실로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 오직 《심경心經》만을 취하여 주註를 붙였으며, 《정경政經》은 미칠 여가가 없다.
생각하건대 진실로 심학心學에 얻음이 있으면 들어서 조처함에 베푸는 곳마다 마땅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체體가 갖추어지고 용用이 완벽함을 달리 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홍치弘治 5년年(1492) 임자壬子 8월月 초하루에 정민정程敏政은 다시 쓰다.
《심경부주心經附註》는 우리 황돈선생篁墩先生이 서산西山 진문충공眞文忠公의 《심경心經》을 근본하여 강綱으로 삼고, 정주程朱 이하 대유大儒들의 말씀 중에 서로 발명發明함이 있는 것을 뽑아 아래에 주소注疏하였으니, 비망備忘(잊음을 대비함)의 책이다.
도道는 하늘에 근원하고 일에 흩어져 있으며 마음속에 갖추어져서 고금古今에 한 순간도 간단間斷함이 없으니,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가 법法을 세워 천하天下를 다스리고 공자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가 교훈을 남겨 후세를 가르침으로부터 번갈아 서로 전수하고 받아서 비록 내용이 같지 않은 듯하나 대체로 사람들로 하여금 도심道心의 바름을 지키고 인심人心의 흐름을 막게 한 것이다.
중고中古 이래로 위에 있는 자들은 좋아함과 숭상함의 편벽됨에 빠져서 공리功利에 익숙하고, 아래에 있는 자들은 각기 자기 마음에 편리한 대로 학문을 해서 보고 듣는 데에 천착穿鑿하였다.
이 때문에 심학心學이 어두워졌는데, 1천 4백년이 지나 염락濂洛의 여러 대유大儒가 처음 나오시고 우리 문공文公 주자朱子에 이르러 이것을 넓혀 드러내시니, 이로부터 심학心學이 찬란하게 세상에 다시 밝혀졌다.
서산西山은 제군자諸君子의 뒤에 출생하여 실로 그 전통을 이었기에 책을 뽑아 이 《심경心經》을 만들었으니, 진실로 배우는 자들에게 큰 공이 있다.
다만 뽑은 경전經傳의 내용이 말은 간략하나 이치가 구비되고 주석註釋 또한 완전히 경문經文과 같아서 배우는 자들이 대번에 알 수가 없었다.
선생先生(程敏政)은 강講하여 전수傳授하는 여가에 옛날에 들었던 것을 모으고 자신의 소견을 절충折衷하여 그 사이에 주註를 붙이시니, 그런 뒤에야 조존操存‧성찰省察하는 공부와 전체全體‧대용大用의 학문이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분명해졌다.
그리하여 배우는 자가 이것을 얻어 환히 알아서 어두운 길을 깨닫고 취한 꿈을 깨게 되었으니, 여기에서 도道가 사람의 마음속에 보존되어 있어 없앨 수 없음이 이와 같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생先生이 정밀히 분석하고 크게 종합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나는 문하門下에서 경전經傳을 잡고 공경히 왼 나머지 감히 이 책을 혼자만이 사사로이 할 수가 없어서 판각板刻하여 후학後學들에게 주고 사방에 전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천하 후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히 심학心學의 올바른 전통을 알아서 보존保存하고 보존保存하는 공부를 가하게 한다면 선생先生의 이 책이 장차 이 도道에 큰 도움이 있을 것이니, 어찌 다만 비망備忘일 뿐이겠는가.
판각板刻하는 일이 이미 끝남에 삼가 선생에게 들은 바를 기술하고 아울러 연월年月을 끝에 적는 바이다.
홍치弘治 임자년壬子年(1492) 12월月 보름에 문생門生인 흡서歙西 사계沙溪 왕조汪祚는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