養心
이 莫善於
하니 其爲人也寡欲
이면 요 其爲人也多欲
이면 雖有存焉者
라도 寡矣
니라
原注
然多而不節이면 則未有不失其本心者니 學者所當深戒也니라
原注
有所向則爲欲이니 多欲則百慮紛紜하야 其心外馳하니
原注
治心之道 莫善於少欲하니 少欲이면 則耳目之官이 不蔽於物而心常寧矣요 心常寧이면 則定而不亂하고 明而不暗이니 道之所由生이요 德之所自成也라
不存者는 梏亡之謂니 寡欲之人은 則無梏亡之患矣라
其爲人也多欲이면 則好動而無節하고 妄作而失常이니 善端所由喪而天理虧焉이라
原注
天下之難持者 莫如心이요 天下之易染者 莫如欲이니라
原注
天理與人欲相對하니 有一分人欲이면 卽滅一分天理요 存一分天理면 卽勝一分人欲이니라
原注
當初
엔 大段做工夫
하야 하야 至今日
하야는 於器用之類
를 置之只爲合用
이요 更無健羨底心
이로라
原注
하니 屋柱
는 無根
하야 折却便倒
어니와 樹木
은 有根
하야 雖剪
이나 枝條相次又發
하나니라
原注
○ 問 養心이 莫善於寡欲이라하시니 養心이 也只是中虛닛고 朱子曰
若眼前事事
에 這心
이 便
하나니 所以伊川敎人
에 直是都不去他用其心
하야 하시니 이라 道理是合如此
니라
하니 以湯武聖人
으로도 라하시니 如
只爲要復此心
이라
觀
컨대 一箇犬
을 受了 有
大事
리오마는 而反復切諫
하니 於此
에 見欲之可畏
하야 無小大
히 皆不可忽
이니라
原注
有人
이 奉身
之甚
하야 充其操
하면 로되 却只愛官職
하며 有人
이 奉身淸苦而好色
하나니 他只緣私欲不能克
하야 臨事
에 니라
原注
孟子嘗言求放心矣라하시고 又言 存其心矣라하시니 操之則存하고 舍之則亡하야 心之存亡이 決於操舍어늘 而又曰 莫善於寡欲은 何也오
操存이 固學者之先務나 然人惟一心을 攻之者衆이라
聲色臭味交乎外하고 榮辱利害動乎內어든 隨感而應하야 無有窮已면 則淸明純一之體 又安能保其常存而不放哉리오
出門如賓, 承事如祭
는 夫子之告仲弓
이니 操存之謂也
요 니
二子之問仁則同이로되 而夫子告之異者는 豈其所到 固有淺深與인저
高城深池
와 이 固足以自守矣
어니와 投隙伺便
하야 一有少懈而乘之者至矣
라
良將勁卒과 堅甲利兵으로 掃除妖氛而乾淸坤夷矣니 此孟子發明操存之說이요 而又以爲莫善於寡欲也라
雖然이나 寡欲이 固善矣나 然非眞知天理人欲之分이면 則何以施其克治之功哉아
“마음을 기름(수양함)은 욕망(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그 사람됨이 욕망이 적으면 비록 보존되지 못함이 있더라도 〈보존되지 못함이〉 적을 것이요, 사람됨이 욕망이 많으면 비록 보존됨이 있더라도 〈보존됨이〉 적을 것이다.”
原注
“욕欲은 입과 코와 귀와 눈과 사지四肢의 욕망을 이르니, 비록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많이 하고 절제하지 않으면 그 본심本心을 잃지 않을 자가 없으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깊이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原注
“반드시 깊이 빠진 뒤에야 욕欲이 되는 것이 아니요, 다만 향하는 바가 있으면 욕欲이 된다.”
原注
“향하는 바가 있으면 욕欲이 되니, 욕欲이 많으면 온갖 생각이 분분하여 마음이 밖으로 달려간다.
原注
“사람이 천리天理에 어두운 것은 다만 기욕嗜慾이 천리天理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기욕嗜慾이 깊은 자는 천기天機가 얕다’ 하였으니, 이 말은 도리어 가장 옳다.”
原注
사람들이 좋아해야 할 것을 잃으니, 사람들이 이욕利慾의 마음이 있으면 학문學問과 서로 배치背馳된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들은 욕欲을 적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原注
“욕欲(욕망)은 외물外物에 느껴 동하는 것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도는 욕欲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욕欲을 적게 하면 이목耳目의 관官(기능)이 물건에게 가려지지 않아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마음이 항상 편안하면 안정되어 어지럽지 않고 밝아서 어둡지 않으니, 도道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덕德이 이로부터 이루어진다.
보존되지 못한다는 것은 곡망梏亡함을 이르니, 욕欲이 적은 사람은 곡망梏亡의 근심이 없다.
그 사람됨이 욕欲이 많으면 동하기를 좋아하여 절도가 없고 망령되이 행동하여 떳떳함을 잃으니, 선善한 마음이 이로 말미암아 상실되고 천리天理가 이지러진다.
그러므로 비록 보존함이 있더라도 적은 것이다.”
原注
“천하에 잡기 어려운 것은 마음보다 더한 것이 없고, 천하에 물들기 쉬운 것은 욕欲보다 더한 것이 없다.”
原注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이 상대가 되니, 일분一分(10%)의 인욕人欲이 있으면 곧 일분一分의 천리天理가 없어지고 일분一分의 천리天理가 있으면 곧 일분一分의 인욕人欲을 이겨 내게 된다.”
原注
혹자가 사씨謝氏에게 “이익에 있어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나는 이 관문을 통과한 지 십여 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대단하게 공부를 하여 버리기 어려운 것을 가려서 버렸는데, 뒤에는 점점 쉬워져서 금일에 이르러서는 기용器用의 종류를 둠에 다만 써야 할 것만 남겨 두고 다시는 크게 부러워하는 마음이 없노라.”
原注
“외간外間의 일(外物)을 일체 놓아버려야 합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실로 〈외물外物의〉 상면上面에 나아가 공부하여야 한다.
모든 일은 반드시 뿌리가 있으니, 집의 기둥은 뿌리가 없어서 부러지면 곧 쓰러지지만 나무는 뿌리가 있어서 비록 자르더라도 가지가 차례로 또다시 나온다.
예컨대 사람이 부귀富貴를 구함은 저 무엇을 하려고 해서인가.
반드시 쓰려는 곳이 있을 것이니, 쓰려는 곳의 병근病根을 찾아서 가져다가 끊어버린다면 곧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原注
“상채上蔡의 이 두 말씀은 바로 인욕人欲을 버리고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절실한 공부이다.”
原注
“마음을 기르는 것이 욕망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마음을 기름은 또한 다만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까?”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만약 눈앞의 일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쓸 때에는 이 마음이 곧 일제히 달려 나가니, 이 때문에 이천伊川이 사람을 가르칠 적에 단지 모두 저기에 가서 그 마음을 쓰지 못하게 하여, 사람들에게 글씨 쓰는 것을 배우지 못하게 하고 또 시문詩文을 짓는 것을 배우지 못하게 하신 것이니, 이것은 편벽된 것이 아니요 도리道理가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다만 하나의 마음이 있을 뿐이니, 어떻게 마음을 나누어서 허다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다만 쓸데없는 곳에 마음을 써버린다면 마땅히 써야 할 곳에 이르러서는 본래의 일에 모두 힘을 얻지 못하게 된다.
욕망을 적게 하려고 할 경우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니, 탕湯‧무武와 같은 성인聖人에 대해서도 맹자孟子는 오히려 ‘탕湯‧무武는 본성을 회복했다’고 말씀하였으니, 예컨대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은 것과 재화財貨와 이익을 증식增殖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은 다만 이 마음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오旅獒〉의 글을 보면 한 마리의 개를 받는 것이 무슨 큰일이 있겠는가마는 소공召公은 반복하여 간절히 간하였으니, 여기에서 욕망(욕심)이 두려울 만하여 작은 것과 큰 것에 관계없이 모두 소홀히 할 수 없음을 볼 수 있다.”
原注
어떤 사람은 몸을 받들기를 매우 검소하게 하여 그 지조를 채우면 위로는 마른 흙을 먹고 아래로 누런 물을 마시면서도 도리어 다만 관직을 좋아하는 자가 있으며, 어떤 사람은 몸을 받들기를 청고淸苦하게 하면서도 여색女色을 좋아하는 자가 있으니, 이는 다만 사욕私慾을 이기지 못함으로 인하여 일을 당함에 다만 이것을 중하게 보기 때문이다.”
혹자가 “이러한 사람은 분수分數가 가장 낮은 사람보다는 낫겠습니다.”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조금이라도 병이 있으면 곧 좋지 않으니, 다시 분수分數로 논할 수가 없다.
저가 다만 관직을 좋아하면 곧 부모와 군주를 시해하는 것이라도 또한 감히 할 것이다.”
原注
“맹자孟子는 일찍이 ‘방심放心을 구하라’고 말씀하시고 또 ‘그 마음을 보존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마음의 보존되고 잃음이 잡고 놓는 데에서 결정되는데, 또 ‘욕망을 적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말씀한 것은 어째서인가?
잡아서 보존함은 진실로 배우는 자들의 급선무이나 사람의 한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매우 많다.
성색聲色과 취미臭味가 밖에서 교차하고 영욕榮辱과 이해利害가 안에서 동하거든 감동함에 따라 응하여 다함이 없으면 청명淸明하고 순일純一한 마음의 본체本體가 또 어찌 항상 보존되어 잃지 않음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문을 나가서는 큰손님을 뵙는 것처럼 하고 일을 받들기를 제사를 받드는 것처럼 한다’는 것은 부자夫子(孔子)가 중궁仲弓에게 말씀한 것이니, 조존操存을 말한 것이요,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동하지 말라’는 것은 부자夫子가 안연顔淵에게 말씀한 것이니, 욕망을 적게 함을 말한 것이다.
두 사람이 인仁을 물은 것은 똑같으나 부자夫子가 말씀해 줌이 다른 것은 아마도 도달한 경지가 진실로 천심淺深의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城을 높게 쌓고 해자垓字(해자)를 깊이 파는 것과 성문城門을 이중으로 하고 목탁木鐸을 치는 것이 진실로 스스로 지킬 수 있으나, 안의 간사한 무리와 밖의 적들이 틈을 엿보고 편리한 기회를 노리고 있어서 만약 조금만 게을리 하면 이를 틈타는 자가 온다.
훌륭한 장수와 정예병, 견고한 갑옷과 예리한 병기로 요망妖妄한 기운을 깨끗이 소제하여야 하늘이 깨끗하고 땅이 평화로울 것이니, 이것이 맹자孟子가 발명한 조존操存의 말씀이고, 또 욕망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말씀한 것이다.
그러나 욕망을 적게 하는 것이 참으로 좋지만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구분을 참으로 아는 자가 아니면 어찌 극치克治(욕심을 이겨 다스림)하는 공부를 베풀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격물格物과 치지致知가 또 욕망을 적게 하는 요점이 되는 것이니, 이는 배우는 자가 마땅히 살펴야 할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