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心者는 人之所以主於身者也니 一而不二者也요 爲主而不爲客者也요 命物而不命於物者也라
故以心觀物이면 則物之理得이어늘 今復有物以反觀乎心이면 則是此心之外에 復有一心하야 而能管乎此心也라
或者曰 若子之言이면 則聖賢所謂精一과 所謂操存者 皆何爲哉오 應之曰
此
는 言之相似而不同
이 正
이니 而學者之所當辨者也
라
能如是면 則信執其中而無過不及之偏矣리니 非以道爲一心, 人爲一心하고 而又有一心以精一之也라
夫謂操而存者는 非以彼操此而存之也요 舍而亡者는 非以彼舍此而亡之也니 心而自操則亡者存하고 舍而不操則存者亡耳라
然其操之也
에 亦曰 不使旦晝之所爲
로 得以梏亡其仁義之良心云爾
니 非塊然兀坐
하야 以守其
不用之知覺而
라
大抵聖人之學은 本心以窮理하고 而順理以應物이니 如身使臂하고 如臂使指하야 其道夷而通하고 其居廣而安하고 其理實而其行自然이어늘 釋氏之學은 以心求心하고 以心使心하야 如以口齕口하고 以目視目이라
其機危而迫하고 其途險而塞하고 其理虛而其勢逆하니 蓋其言이 雖有若相似者나 而其實之不同이 蓋如此也라
原注
“여기 《맹자孟子》의 주註에 실려 있는 범씨范氏의 〈심잠心箴〉은, 범씨范氏가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다만 스스로 식견이 지극하여 이러한 일을 말하기를 이와 같이 좋게 하였는데, 지난번 여백공呂伯恭(呂祖謙)을 만나보니, 이것을 매우 소홀히 여겼다.
‘이러한 말을 딴 사람들도 많이 말하였는데, 모름지기 이것을 취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고 묻자, ‘바로 사람들 중에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 자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셨으니, 이는 뜻이 〈크게〉 있는 것이다.”
原注
“염念은 생각함을 이르고 경敬은 곧 성誠을 보존하는 방법이다.
한 성誠이 만 가지의 거짓을 사라지게 할 수 있고 한 경敬이 천 가지의 간사함을 대적할 수 있으니, 이른바 ‘먼저 큰 것을 세운다’는 것은 이보다 더 간절함이 없다.”
○ [按]주자朱子는 이미 범씨范氏의 〈심잠心箴〉을 취하였고, 또 관심설觀心說을 말씀하여 석씨釋氏의 오류를 바로잡으셨으니, 더욱 성학聖學에 공功이 있다.
이제 이것을 뽑아 붙이니, 배우는 자가 이의 바름을 힘써야 하고 저의 간사함을 분별해야 함을 분명히 알아서, 널리 구하여 의혹함이 많은 데에 이르지 않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原注
혹자가 “불가佛家에 마음을 본다는 말이 있으니, 옳습니까?”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마음은 사람의 한 몸을 주장하는 것이니, 하나이고 둘이 아니며 주인이 되고 객이 되지 않으며, 물건을 명령하고 물건에게 명령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사물을 관찰하면 사물의 이치를 얻을 수 있지만, 이제 다시 사물을 두어 도리어 마음을 관찰한다면 이는 이 마음의 밖에 다시 딴 마음이 있어서 이 마음을 관섭管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마음이라는 것이 하나인가, 둘인가?
물건을 명령하는 것인가, 물건에게 명령을 받는 것인가?
이 또한 따질 필요도 없이 그 말의 잘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혹자가 “그대의 말과 같다면 성현聖賢의 이른바 정일精一과 이른바 조존操存은 모두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이는 말이 서로 비슷하나 〈뜻이〉 같지 않음은 바로 벼싹과 가라지, 붉은 색과 자주색의 사이이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분별해야 할 점이다.
인심人心을 위태롭다고 말한 것은 인욕人欲이 싹트기 때문이요, 도심道心을 은미하다고 말한 것은 천리天理가 오묘하기 때문이니, 마음은 하나이지만 바르고 바르지 않음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였을 뿐이다.
유정유일惟精惟一(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함)은 바름에 거하여 잘못됨을 살피고 다름을 내쳐 같음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진실로 중도中道를 잡아 과過‧불급不及의 편벽됨이 없을 것이니, 도심道心을 한 마음으로 삼고 인심人心을 한 마음으로 삼고, 또 한 마음이 있어서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하는 것이 아니다.
‘잡아서 보존한다’는 것은 저것으로써 이것을 잡아서 보존하는 것이 아니요, ‘놓으면 잃는다’는 것은 저것으로써 이것을 놓아서 잃는 것이 아니니, 마음이 스스로 잡으면 잃었던 것이 보존되고, 버리고 잡지 않으면 보존된 것이 잃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마음을 잡을 적에 또한 ‘낮에 하는 바로 하여금 인의仁義의 양심良心을 곡망梏亡하지 않게 할 뿐’이라고 말씀하였으니, 흙덩이처럼 오똑히 앉아서 밝기만 하고 쓰지 않는 지각知覺을 지키면서 이것을 일러 잡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대저 성인聖人의 학문學問은 마음에 근본하여 이치를 연구하고 이치를 순히 하여 사물에 응하는 것이니, 마치 몸이 팔뚝을 부리고 팔뚝이 손가락을 부리는 것처럼 하여 그 도道가 평탄하고 통하며 그 거처가 넓고 편안하며 그 이치가 진실하고 그 행함이 자연스러운데, 석씨釋氏의 학문學問은 마음으로써 마음을 찾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부려서 마치 입으로 입을 물고 눈으로 눈을 보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그 기틀이 위태롭고 박절하며 그 길이 험하고 막히며 그 이치가 허황하고 그 형세가 거슬리니, 그의 말은 비록 서로 비슷함이 있는 듯하나 그 실제의 같지 않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살펴서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는 군자君子가 아니면 또한 누가 이에 의혹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原注
“희喜‧노怒‧애哀‧낙樂이 발하기 전에는 오직 경敬하여 잡아 기르고 이미 발한 뒤에는 또 경敬하여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발한 정情은 바로 마음의 용用이니, 이를 자세히 살피면 마음으로써 마음을 보는 병통을 면치 못할 듯합니다.
어떻습니까?”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이미 발한 곳에 마음의 본체本體인 권도權度(저울과 자)로써 마음의 발하는 바를 살펴서 〈마음에〉 경중輕重과 장단長短의 착오가 있을까 두려워할 뿐이니, 이른바 ‘사물이 다 그렇지만 마음이 더욱 심하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만약 발한 마음을 가지고 별도로 마음의 본체本體를 찾고자 한다면 이런 이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