滉少時에 游學漢中할새 始見此書於逆旅而求得之하니 雖中以病廢하야 而有晩悟難成之嘆이나 然而其初感發興起於此事者는 此書之力也라
及其每讀至篇末也에 又未嘗不致疑於其間하야 以爲吳氏之爲此說은 何見이며 篁墩之取此條는 何意오
旣而又自解하야 以爲朱子之學이 大中至正하야 無墮於一偏之弊矣로되
猶自謂有浮泛之失이라하야 力戒門人以收斂著實功夫하시니
自今而遡求之컨대 其從游之士와 私淑之徒 或未能深體此意하야 流而爲口耳之習者 不少하니
二公이 生於其後而任斯道捄流弊之意切하야 不得已而爲此言이리니 是亦朱子之意耳라
所可疑者는 草廬之爲陸學이 當時에 已有其議하고 後世公論이 亦多云云이요 又未知篁墩之爲人與爲學이 畢竟何如耳라
頃者
에 橫城
이 因讀皇明通紀
하야 錄示其中篁墩公事實數三條
하니 然後
에 略知篁墩之爲人與爲學
이 乃如此
하니
於是에 慨然而嘆하고 惄焉而傷者 累月이로되 而猶不釋也로라
蓋其三條內
에 其一
은 賣題事也
니 而此事梗槩
를 曾於
에 見之矣
라
公與劉健齊名이러니 而嘗偶言健短於詩하여 健銜之라
此獄之成은 健이 爲之也라하니 滉以爲賂賣之事는 稍知自好有廉隅者도 不爲온 而謂以公之賢으로 求古人心學하야 負天下重名而爲之乎아
況彼時에 健이 方入閣用事하니 安知其誣構發劾者 不由於承健風旨而然乎아
其二는 汪循之論에 謂公於勢利二字에 未能擺脫得去라하니
此未知所指爲何事
어니와 若果有實事之可指
인댄 則是自不免
니 其於心學之傳
에 固難議爲
라
不然이면 吾恐循也 徒見斯人이 曾被賣題之累하고 因以勢利目之也니 則其事之虛實을 旣未的知라
其說云 篁墩이 欲彌縫陸學하야 乃取朱陸二家言論早晩하야 一切顚倒變亂之하야
矯誣朱子하야 以爲早年에 誤疑象山이라가 晩年에 始悔悟而與象山合이라하니 其誤後學이 甚矣라하야
因爲之著
하야 編年考訂
하야 以究極同異是非之歸云
이라 噫
라
信斯言也인댄 篁墩이 其果誤矣라 其爲學이 果有可疑者矣로다
蓋嘗思之호니 朱陸二氏之不同이 非故有意於不同也라
此儒而彼禪이요 此正而彼邪요 此公平而彼私狠이니 夫如是어니 安得而相同耶리오
二者之相須 如車兩輪하고 如鳥兩翼하야 未有廢一而可行可飛者니 此實朱子之說也라
吾儒家法이 本自如此하니 老先生이 一生從事於斯二者하야 纔覺有一邊偏重이면 卽猛省而痛改之라
故其見於書尺往復之間者 互有抑揚하니 此乃自用吾法而自相資相捄하야 以趨於大中至正之道耳니 豈初年에 全迷於文義之末이라가 及見象山然後에 始悟而收歸本原乎哉아
余未見道一編하니 未知其爲說如何어니와 然執書名而揆陳語컨대 其必謂道一而無二라
陸氏는 頓悟而有一하고 朱子는 早二而晩一이리니 苟如是면 則是陸無資於朱요 而朱反有資於陸矣니 斯不亦謬之甚耶아
昔
에 程允夫欲援蘇而附於程
하야 有蘇程之室之語
한대 朱子斥之曰 是無異於雜
冰炭於一器之中
이니
欲其芳潔而不汙나 蓋亦難矣라하시니 愚謂篁墩之欲同二家 殆亦同歸於允夫之見矣라
向使朱子眞有晩同之實
이면 則陸氏之死也
에 與人書
에 何以嘆其平日
이라가 며
又何以憂其說頗行於江湖間하야 損賢者之志而益愚者之過哉아
又象山이 嘗告其門人曰 朱元晦如泰山喬嶽호되 惟恨其自是己見하야 不肯聽人說話라하니 〈不能盡記本語요 大意如此라〉
是則二氏之平日에 未嘗有一語相許以道同也어늘 而後人이 欲牽合附會하야 强使之同歸하니 豈可得耶아
至以是
로 著爲成書
하야 將以誤天下後世之人也
하니 殊不知已往之跡
이 一定而難
이요 是非之明
이 無時而可欺
라
其所勤苦而僅就者 適足以見吾心之罅隙하야 而來天下之譏議하니 由是觀之컨대 賂賣之獄은 雖曰誣陷이나 而勢利之誚는 恐或有以自召之也니
吾觀是書하니 其經則自詩書易으로 以及于程朱說하니 皆聖賢大訓也요 其註則由濂洛關閩하야 兼取於後來諸賢之說하니 無非至言也라
曰 其他는 固然矣어니와 至於末章之註也하야는 旣以朱子說로 分初晩之異하고 而以草廬之說로 終焉하니
此正與道一編으로 同一規模議論也어늘 子何譏斥於道一而反有取於此註耶아
故朱子於當時에 其憂之戒之之切이 誠有如此註所引十二條之說이요
其門人之述行狀
에 又云 晩見諸生
이 於文義
하시고 始頗指示本體云云
하니
則尊德性以救文義之弊는 非篁墩之說也요 乃朱子之意固然也라
若其遵朱子之意하고 贊西山之經하야 註此於篇終하야 欲以捄末學之誤는 實亦至當而不可易也라
況只引朱說而補以諸儒하야 發明朱說之條하고 未嘗一言及於陸氏之學하야 以爲朱子晩悔而與此合을 如道一編之所謂乎아
故滉竊以謂今之學者 當知博約兩至는 朱子之成功이요 二功相益은 吾儒之本法이라
以此讀此經此註요 而不以篁墩道一編之繆로 參亂於其間이면 則所以爲聖爲賢之功이 端在於此矣리니
許魯齋嘗曰 吾於小學에 敬之如神明하고 尊之如父母라하니 愚於心經에 亦云하노라
惟草廬公之說
은 反復硏究
에 終有
氣味
하니 之論
이 得之
라
學者當領其意而擇其言하야 同者를 取之하고 不同者를 去之면 其亦庶乎其可也리라
皇明嘉靖四十五年歲丙寅孟秋日에 眞城李滉은 謹書하노라
내가 젊어서 한성漢城에 유학할 적에 처음으로 이 책을 여관旅館에서 보고 구하여 얻었으니, 비록 중간에 병 때문에 포기하여 ‘늦게 깨달아 이루기 어렵다’는 한탄이 있었으나 처음 이 일(학문하고 수양하는 일)에 감발感發하고 흥기興起한 것은 이 책의 힘(功)이었다.
그러므로 평소 이 책을 높이고 믿음이 또한 사자四子(四書)와 《근사록近思錄》보다 못하지 않았는데,
매번 읽다가 편말篇末에 이르면 또 일찍이 이 사이에 의심이 들지 않은 적이 없어서 생각하기를 “오씨吳氏가 이 말을 한 것은 무슨 소견이며 황돈篁墩이 이 조목을 취한 것은 무슨 뜻인가?
천하 사람들을 데리고 육씨陸氏에게로 돌아가고자 한 뜻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윽고 또 스스로 해명하여 이르기를 “주자朱子의 학문이 대중大中하고 지정至正하여 한 쪽으로 추락하는 병폐가 없었으나
오히려 스스로 부범浮泛한 잘못이 있다 하여 문인門人들에게 수렴收斂하고 착실着實히 하는 공부로써 강력히 경계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찾아보건대 주자朱子를 종유從遊하던 선비와 사숙私淑하던 무리들이 혹 이 뜻을 깊이 체득하지 못하여 흘러 구이口耳의 익힘을 하는 자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두 공公(吳澄과 정민정程敏政)은 그 후에 태어나 이 도道를 자임하고 유폐流弊를 바로잡으려는 뜻이 간절하여 부득이 이러한 말을 하였을 것이니, 이 또한 주자朱子의 뜻일 뿐이다.
〈다만〉 의심스러운 것은 초려草廬가 육상산陸象山의 학문學問을 하였다 하여 당시에 이미 이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후세後世의 공론公論 또한 많이 이렇게 말하고 있으며, 또 황돈篁墩의 사람됨과 학문이 필경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난번 횡성橫城 조사경趙士敬(趙穆)이 《황명통기皇明通紀》를 읽고는 이 가운데 황돈공篁墩公에 관한 사실 세 조목을 기록해서 보여주니, 이러한 뒤에야 황돈篁墩의 사람됨과 학문이 마침내 이와 같음을 대략 알게 되었다.
이에 나는 개연慨然히 한탄하고 실심失心하여 서글퍼한 지 여러 달이 되었으나 아직도 석연치 못하다.
그 세 조목 중에 하나는 제목題目을 팔아먹은 일인데 이 일의 대강大綱을 일찍이 《고수부담孤樹裒談》에서 보았다.
공公은 유건劉健과 명망이 같았는데, 일찍이 우연히 유건劉健이 시詩를 잘하지 못한다고 말하여 유건劉健이 이것을 원망하였다.
이 옥사獄事가 이루어진 것은 유건劉健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였으니, 내가 생각하건대 뇌물을 받고 제목을 팔아먹는 일은 조금 자신의 명예를 아낄 줄 알아 염우廉隅(염치)가 있는 자도 하지 않는 것인데, 공公의 어짊으로 옛사람의 심학心學을 찾아 천하天下의 중한 명망名望을 지고 있으면서 이러한 짓을 했겠는가.
더구나 그 당시 유건劉健이 막 황각黃閣(朝廷)에 들어가 권력을 행사하였으니, 모함하여 탄핵하는 자가 유건劉健의 풍지風旨를 받들려 하여 그러한 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는가.
그리고 두 번째는 왕순汪循의 논평에 “공公은 세리勢利 두 글자에 초탈하지 못했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무슨 일을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만약 과연 가리킬 만한 실제 일이 있었다면 이는 자연 상채上蔡의 앵무새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니, 심학心學의 전수傳授에 있어 진실로 의논하기 어렵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생각하건대 왕순汪循이 단지 이 사람이 일찍이 제목을 팔아먹었다는 누명을 쓴 것을 보고는 인하여 세리勢利로 지목한 것일 것이니, 이 일의 허실虛實을 분명히 알 수 없다.
또 어찌 이것을 가지고 이 분(程敏政)의 정론定論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세 번째는 진건陳建이 공公의 《도일편道一編》을 논한 내용이다.
그의 말에 “황돈篁墩이 육상산陸象山의 학문을 미봉하고자 하여, 마침내 주자朱子와 육상산陸象山 두 분의 언론 중에 초년과 말년의 언론을 취하여 일체 이것을 전도하고 변란시켜
주자朱子를 속여서 초년에는 잘못 육상산陸象山을 의심하였다가 말년에 비로소 뉘우치고 깨달아 육상산陸象山과 부합하였다고 하였으니, 후학後學을 그르침이 심하다.” 하였다.
진건陳建은 “인하여 《학부통변學蔀通辨》과 《편년고정編年考訂》을 지어 동이同異와 시비是非의 귀결을 연구해서 다했다.”고 하였으니, 아!
진실로 이 말 대로라면 황돈篁墩이 과연 잘못하였고 그 학문이 과연 의심할 만한 점이 있는 것이다.
내 일찍이 생각해보니, 주자朱子와 육상산陸象山 두 사람의 같지 않음은 일부러 같지 않으려는 데에 뜻을 둔 것이 아니다.
이(朱子)는 유학儒學이요 저(陸象山)는 선학禪學이며 이는 바르고 저는 간사하며 이는 공평公平하고 저는 사한私狠(사사롭고 사나움)하니, 이와 같으면서 어찌 서로 같을 수 있겠는가.
공자孔子는 “글을 널리 배우고 예禮로써 요약하여야 한다.” 하였고,
자사子思는 “덕성德性을 공경하여 받들되 문학問學으로 말미암아야 한다.” 하였고,
맹자孟子는 “널리 배우고 자세히 말하는 것은 장차 돌이켜 요약함을 말하고자 해서이다.” 하였으니,
‘지知와 행行 두 가지가 서로 필요함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새의 양 날개와 같아서 하나를 버리고서 갈 수 있고 날 수 있는 것은 있지 않으니’ 이것은 실로 주자朱子의 말씀이다.
우리 유가儒家의 법法이 본래 이와 같으니, 노선생老先生(朱子)은 일생동안 이 두 가지에 종사하여 조금이라도 한쪽으로 편중함이 있음을 깨달으면 즉시 맹렬히 살피고 통렬히 고치셨다.
그러므로 서찰書札이 왕복하는 사이에 나타난 것이 서로 억양抑揚이 있으니, 이는 바로 우리 유가儒家의 법法을 사용하여 서로 자뢰하고 서로 구원해서 대중지정大中至正한 도道에 나아간 것일 뿐이니, 어찌 초년에는 지엽적인 글뜻에 완전히 혼미하였다가 육상산陸象山을 만나본 뒤에야 비로소 깨닫고 거두어 본원本原으로 돌아가셨겠는가.
나는 아직 《도일편道一編》을 보지 못하였으니, 그 말(내용)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으나 책의 이름을 가지고 진건陳建의 말을 헤아려 보건대 반드시 ‘도道는 하나요 두 가지가 없다.
육씨陸氏는 돈오頓悟하여 하나를 가졌고 주자朱子는 초년에는 두 가지였다가 말년에는 하나였다’ 라고 말하였을 것이니, 만일 이와 같다면 이는 육상산陸象山이 주자朱子에게 의뢰함이 없고 주자朱子가 도리어 육상산陸象山에게 의뢰함이 있는 것이니, 이는 심히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에 정윤부程允夫가 소동파蘇東坡를 끌어다 정이천程伊川에게 붙이려고 하여 소동파蘇東坡와 정이천程伊川이 한 집이라는 말을 하자, 주자朱子는 배척하기를 “이는 훈유薰蕕(향기로운 풀과 악취 나는 풀)와 빙탄氷炭(얼음과 숯)을 한 그릇 가운데 뒤섞어 놓는 것과 다름이 없다.
향기롭고 깨끗하여 더럽지 않고자 하나 또한 어렵다.” 하였으니, 내가 생각하건대 황돈篁墩이 주자朱子와 육상산陸象山을 똑같게 하고자 한 것은 아마도 또한 정윤부程允夫의 소견에 함께 돌아갈 것이다.
가령 주자朱子가 참으로 말년에 육씨陸氏와 같아진 실제가 있었다면 육씨陸氏가 죽었을 때에 사람에게 준 편지에 어찌하여 “평일에 머리를 크게 흔들고 어지러이 고함치다가 대번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고 한탄하셨겠으며,
또 어찌하여 “그 말이 자못 강호江湖 사이에 유행하여 어진 자의 뜻을 덜고 어리석은 자의 허물을 더한다.”고 걱정하셨겠는가.
그리고 육상산陸象山이 일찍이 그 문인門人에게 말하기를 “주원회朱元晦(朱子)는 〈기상氣象이〉 태산泰山 교악喬嶽과 같으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스스로 자신의 견해를 옳다 하여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으니, 〈본래의 말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고 대의大意가 이와 같다.〉
이는 두 분이 평소에 일찍이 한 마디 말씀도 도道가 같다고 서로 허여한 적이 있지 않았는데, 후인後人들이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억지로 같은 데로 귀결시키고자 한 것이니, 어찌 될 수 있겠는가.
그의 견해가 이미 잘못되면 그 마음 또한 구차하게 된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이것으로 완성된 책을 만들어서 장차 천하 후세의 사람들을 그르치려 하였으니, 이왕已往의 자취가 한 번 정해져 바꾸기 어렵고 시비是非의 분명함이 속일 때가 없음을 매우 알지 못한 것이다.
부지런히 애써서 겨우 성취한 것이 다만 자신의 마음의 하자瑕疵를 보여 천하의 비난을 오게 하였을 뿐이니,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뇌물을 받고 제목을 팔았다는 옥사獄事는 비록 무함誣陷이라 하더라도 세리勢利의 비난은 혹 자초한 점이 있는 듯하다.
이 때문에 내가 한탄하고 서글퍼한 지 여러 달이 되었는데도 석연치 못한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과 같다면 《심경心經》은 높이고 믿을 만한 책이 되지 못하는가?” 하기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내가 이 책을 보니, 경문經文은 《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으로부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말씀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현聖賢의 큰 가르침이요, 주註는 염락관민濂洛關閩으로부터 그 뒤 제현諸賢들의 학설學說을 겸하여 취하였으니, 모두가 지극한 말씀이다.
어찌 황돈篁墩의 잘못 때문에 성현聖賢의 큰 가르침과 지극한 의논까지 아울러 높이고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혹자가 말하기를 “딴 것은 진실로 그렇지만 마지막 장章의 주註에 있어서는 이미 주자朱子의 학설學說을 초년과 말년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구분하고 초려草廬의 말로 끝마쳤으니,
이는 바로 《도일편道一編》과 동일한 규모이고 의논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도일편道一編》은 배척하고 비난하면서 이 주註는 취하는가?” 하였다.
“한갓 박문博文만 힘쓰고 조금이라도 약례約禮를 늦추면 그 병폐가 반드시 구이口耳의 익힘에 이른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당시에 간절히 걱정하고 경계하셨으니, 진실로 이 주註에 인용한 바 열두 조목의 말과 같은 것이 있으며,
문인門人들이 지은 행장行狀에 또 이르기를 “말년에 제생諸生들이 글뜻에 얽매이는 것을 보시고는 비로소 자못 본체本體를 가리켜 보여주셨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덕성德性을 공경히 받들어 글뜻에 얽매이는 병폐를 바로잡은 것은 황돈篁墩의 말이 아니요 바로 주자朱子의 뜻이 진실로 그러한 것이다.
황돈篁墩이 이에 있어 다만 초년과 말년을 나눔에 구구해서는 안 될 뿐이다.
그가 주자朱子의 뜻을 따르고 서산西山의 경經을 도와서 이것을 책의 끝에 부주附註하여 말학末學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한 것은 실로 또한 지극히 마땅하여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다만 주자朱子의 말씀을 인용하고 여러 유자儒者의 학설學說을 보충하여 주자朱子가 말씀한 조목을 발명發明하였고, 일찍이 한 마디도 육씨陸氏의 학문學問을 언급하여 ‘주자朱子가 말년에는 이와 합했다’ 하기를 《도일편道一編》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 것이 없음에랴.
그러므로 나는 삼가 말하기를 “지금의 배우는 자들이 마땅히 박문博文‧약례約禮 두 가지가 지극해야 함은 주자朱子가 완성해 놓은 공부功夫요, 두 공부가 서로 유익함은 우리 유가儒家의 본래 법法임을 알아서
이러한 방법으로 이 경經과 이 주註를 읽고 황돈篁墩의 《도일편道一編》의 잘못을 그 사이에 뒤섞어 어지럽히지 않는다면 성인聖人이 되고 현인賢人이 되는 공부가 분명히 여기에 있을 것이니,
허노재許魯齋(許衡)가 일찍이 말하기를 ‘내 《소학小學》을 공경하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하고 높이기를 부모父母와 같이 한다’ 하였는데, 나는 《심경心經》에 있어서 또한 이렇게 말하노라.
다만 초려공草廬公의 말은 반복하여 연구해 봄에 끝내 이포색伊蒲塞(佛敎)의 기미가 있으니, 나정암羅整菴(羅欽順)의 의론이 맞는다.
배우는 자가 마땅히 그 뜻을 알고 그 말을 가려서 같은 것은 취하고 같지 않은 것은 버린다면 또한 거의 옳을 것이다.”
황명皇明 가정嘉靖 45년年 병인년丙寅年(1566) 맹추일孟秋日에 진성眞城 이황李滉은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