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其衣冠하고 尊其瞻視하야 潛心以居하야 對越上帝하라
* 〈此對字는 有對配之意하고 有瞻對之意하니 對配之對는 程子所謂毋不敬이면 可以對越上帝是也요
以淸廟對字言之하면 王氏所謂肅雍秉德故로 能對越在天은 以對配解之也요
嚴氏所謂對越在天之靈하여 如見文王洋洋在上은 以瞻對解之也니 未知此篇所言이 其取何居오
心者는 一身之主宰요 萬事之綱領으로 而所以居敬之本也라
* 〈心은 固是一身之主宰로 而所以爲居敬之本也요 帝則은 又上天之主宰而所以爲此心之源也라
故推本言之하니 與尊德性齋銘, 求放心齋銘의 首句同義라
今只言心而不反於帝하니 此處에 恐更有一語라야 其義乃備니이다〉
足容必重하고 手容必恭이니 擇地而蹈하야 折旋蟻封하라
足容重, 手容恭은 禮記九容之目이요 擇地而蹈는 出史記伯夷傳이라
古語云 乘馬에 折旋於蟻封之間이라하니 言蟻封之間에 屈曲狹小어늘 而能乘馬折旋於其間하여 不失其馳驟之節이니 所以爲難也라하시니
上帝는 天也요 蟻封은 地也니 立心은 要高明故로 以天言이요 箚脚은 要平實故로 以地言이라
然이나 於天而言上帝者는 取其主宰也어늘 今乃以高明言之하고 於地而言蟻封者는 取其狹小也어늘 今乃以平實言之하니 一似少偏이요 一似少緩이라 盖不必如此取類而言也니이다〉
○ 此二章은 言表之正이로되 而上章은 靜之無違者也요 此章은 動之無違者也라
出門如賓하고 承事如祭하야 戰戰兢兢하야 罔敢或易하라
出門如賓, 承事如祭는 臼季薦郤缺時에 告晉文公語라
出門如賓은 未接物時敬也요 承事如祭는 已接物時敬也라
然如賓은 實通貫已接物未接物而言이요 如祭는 只就已接物而言也니 此意를 亦不可不幷看이니이다〉
守口如甁
하고 防意如城
하야 洞洞屬屬
하야 敢或輕
하라
守口如甁, 防意如城은 富鄭公年八十에 書坐屛語라
守口如甁은 言不妄出也요 防意如城은 心不妄動也라
先生嘗曰 守口如甁은 不妄出也요 防意如城은 閑邪之入也라하시니 此語를 當引用이니이다〉
○ 此二章은 言裏之正이니 而上章은 動之無違者也요 此章은 靜之無違者也라
* 〈表裏動靜을 似此分屬은 恐長於魯齋所圖也니이다〉
* 〈先生嘗曰 此篇은 是敬之目이니 說有許多地頭去處라하시니
請就此處하여 刪去持字하고 而目字下에 繼以先生所謂許多地頭是也十字면 則未知如何니이다〉
不東以西하고 不南以北하야 當事而存하야 靡他其適하라
程子曰 不之東하고 又不之西하며 不之此하고 又不之彼라하시니 上兩句 盖出於此라
或曰 不以二字는 互文이니 謂不以東, 不以西也라
語類에 只一心做東去라가 又要做西去하며 做南去라가 又要做北去니 皆是不主一이라하니라
程子曰 無適之謂一이라하시니 此論無適은 言必有存養之功然後에 心無所偏하여 常爲一身之主하여 而敬之體 始可以無間也라
然此亦就事說이니 與大學安而后能慮之安字로 同意라
若直以爲存養之事하여 而偏屬於敬之體면 則似未安矣니이다〉
但此章本意 主在動表어늘 今此語意는 則主在靜裏하니 恐因存養格致之分屬하여 而賺連推移也니이다〉
弗貳以二하고 弗參以三하야 惟心{精}惟一하야 萬變是監하라
書曰 德二三이면 動罔不凶이라하고 詩曰 士也罔極하여 二三其德이라하니 上兩句 盖本於此라
程子有曰 且欲涵養主一之意니 不一則二三矣라하시니 當引用이니이다〉
精은 心經及性理大全에 作心이나 而先生手筆本에 亦作精하시니 今從之하노라
惟精惟一은 大舜告禹之心法也니 精者는 知之明而無所惑也요 一者는 心之正而無所雜也라
* 〈精一을 若依本訓이면 則當曰精者는 察之明而無所雜也요 一者는 守之常而無有離也니이다〉
語類에 初來有一箇事어늘 又添一箇면 便是來貳他하여 成兩箇요 元有一箇事어늘 又添兩箇면 便是來參他하여 成三箇也라
程子曰 主一之謂敬이라하시니 此論主一은 言必有格致之功然後에 心得其正하여 以察萬事之變하여 而敬之用이 始得以不差也라
若以惟精으로 專屬此章主一之功이면 則所謂惟一者 反屬於上章無適之功耶잇가
抑精一이 皆屬於格致하고 而存養則獨在精一之外耶잇가
○ 謹按程子曰 主一之謂敬이요 無適之謂一이라하시니
先生이 嘗解之曰 無適은 卽是主一이요 主一은 卽是敬이니
展轉相解요 非無適之外에 別有主一이요 主一之外에 又別有敬也라하시니
據此면 則今此兩章之論主一無適者는 直不過接連一事也니 初豈有彼此顯然之分哉잇가
然細究四不對待之語와 與夫二惟承結之意하면 則接連一事之中에 自有燦然底地頭焉이라
盖上章은 言精以察之하여 不使吾心東西走作而流於物欲之私니 敬之用이 所以不差也요 下章은 言一以守之하여 不使吾心二三變易而離乎天理之正이니 敬之體所以無間也라
然當事而能存이면 則用之行也而體未嘗不具於其中이요 惟一而能監이면 則體之立也而用未嘗不涵於其中이니 此又互根相資之妙也니이다〉
從事於斯를 是曰持敬이니 動靜弗違하고 表裏交正하라
* 〈自外安內하고 由內制外故로 曰交正이요 動也如此하고 靜也如此故로 曰無違니 此意를 須有解釋이라야 乃爲明備니이다〉
須臾有間이면 私慾萬端하야 不火而熱이요 不冰而寒이리라
莊子在宥篇에 老子曰 其熱焦火하고 其寒凝氷은 其惟人心乎아하니라
此言存養不熟하여 而或有一息之間斷이면 則眩騖飛揚하여 而陷於人欲之私也라
毫釐有差하면 天壤易處하야 三綱旣淪하고 九法亦斁리라
三綱은 君爲臣綱, 父爲子綱, 夫爲婦綱也요 九法은 九疇也라
此는 言格致不精하여 而或有一事之差繆면 則顚倒錯亂하여 而失其天理之正也라
* 〈夫持敬之功이 一有所失이면 則須臾之暫也에 而已萌萬端之欲하고 毫釐之繆也에 而遽致天壤之倒하리니 而況於久者大者乎아
○ 已上兩章은 論不敬之失하니 亦該動靜, 兼表裏而言이라
墨卿은 揚雄長楊賦에 子墨이 爲客卿하여 以諷이라
此篇은 作於宋孝宗淳熙癸巳正月하니 寔先生三十四歲時也라
及至洙泗輟響이러니 而伊洛崛起하여 特拈出此字하야 揭作宗旨하시니 則前後一揆矣라
先生이 私淑密傳하여 千橫萬竪 無非此事로되 而求其體用本末該括無遺하면 則又未有若此篇者也라
今以先生雅言參之하면 有曰持敬은 不過以正衣冠齊容貌爲先이라 故로 一章爲首요 二章次之하며
又有曰 無事則敬在裏面이요 有事則敬在事上이라 故로 三章次之요
又有曰 外不妄動하고 內不妄思라 故로 四章次之하니
此皆制外安內하고 由粗及精之序로 而敬之條目備矣라
* 〈篇首四章은 對說之中에 有互資之義하니 盖制於表는 所以正其裏也라 裏有主면 則表自正矣라
今只如此說이면 則無以見交正之義也요 且表裏上에 各具動靜이어늘 而今不提及此二字하니 似亦略矣니이다〉
條目雖備나 而不言持敬之節度防範이면 則又無以知其方而從之라 故로 五章六章次之하니 而敬實通貫乎知行之間이라
故로 五章은 言存心하고 * 〈若用鄙說이면 此當曰省察이니이다〉 六章言致知라
* 〈若用鄙說이면 此當曰持守니이다〉 雖知其方이나 而不言不敬之蔽害闕失이면 則又無以知其病而袪之라
故로 八章九章次之하니 而八章은 言心不存之病하고 * 〈若用鄙說이면 此當曰不能持守之病이니이다〉
九章은 言知不至之病하여 * 〈若用鄙說이면 此當曰不能省察之病이니이다〉 以應五章六章之義라
而又一篇之中에 以心起頭하고 以心結尾하여 以見敬之體用本末이 不出乎心하니 其丁寧反覆之意深矣로다
의관衣冠을 바루고 시선視線을 공손히 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거처하여 상제上帝를 대하라.
‘정기의관正其衣冠, 존기첨시尊其瞻視’는 공자孔子가 자장子張에게 일러준 말씀이다.
‘대월對越’은 《시경詩經》 〈청묘淸廟〉의 주註에 “월越은 어於이다.” 하였다.
이 대자對字는 대배對配의 뜻이 있고 첨대瞻對의 뜻이 있으니, 대배對配의 대對는 정자程子가 말씀한 ‘경敬하지 않음이 없으면 상제上帝를 대월對越한다’는 것이고,
첨대瞻對의 대對는 정자程子가 말씀한 ‘군자君子가 종일토록 하늘에 계신 분을 대월對越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청묘淸廟〉章의 대자對字를 가지고 말한다면 왕씨王氏(王柏)가 말한 ‘엄숙하고 화락하여 덕德을 잡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분을 대월對越한다’는 것은 대배對配를 가지고 풀이한 것이고,
엄씨嚴氏가 말한 ‘하늘에 계신 영혼을 대월對越하여 마치 문왕文王이 양양洋洋하게 위에 계신 것을 보는 듯하다’는 것은 첨대瞻對로 해석한 것이니, 이 편篇에서 말한 것은 어떤 뜻을 취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한 몸의 주재主宰이고 만사萬事의 강령綱領으로 경敬에 거하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로 말하였으니, 바로 이 한 편의 요체要體이다.
마음은 진실로 한 몸의 주재主宰로 경敬에 거하는 근본根本이 되고, 상제上帝의 법칙法則은 또 상천上天의 주재主宰로 이 마음의 근원根源이 됩니다.
그러므로 근본을 미루어 말해야 하니, 〈존덕성재명尊德性齋銘〉과 〈구방심재명求放心齋銘〉의 첫구와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 단지 마음만 말하고 상제上帝의 법칙法則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 부분에 다시 한 말씀이 있어야 비로소 그 뜻이 완비될 듯합니다.
발 모양은 반드시 무겁게 하고 손 모양은 반드시 공손히 하여야 하니, 땅을 가려 밟아서 개밋둑도 꺾어 돌아가라.
‘족용중足容重, 수용공手容恭’은 《예기禮記》 구용九容의 조목條目이고, ‘택지이도擇地而蹈’는 《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에 나온다.
‘절선折旋’은 《어류語類》에 “곧바로 가다가 또 횡橫으로 가는 것이다.” 한 내용이 이것이다.
‘의봉蟻封’은 개밋둑이니, 협소한 곳을 말하는 바, 《진서晉書》 〈왕담전王湛傳〉에 보인다.
이 구句를 선생先生(朱子)은 일찍이 스스로 풀이하기를 “의봉蟻封은 개밋둑이다.
옛말에 ‘말을 타고 개밋둑 사이에서 꺾어 돈다’ 하였으니, 개밋둑 사이는 구불구불하고 협소한 곳인데, 말을 타고 이 사이에서 꺾어 돌아 말을 달리는 절도節度를 잃지 않으니, 이 때문에 어렵다고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선생朱先生의 이 말씀을 마땅히 요약하여 인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상제上帝는 하늘이고 의봉蟻封은 땅이니, 마음을 세움은 고명高明해야 하므로 하늘을 가지고 말하였고, 다리를 세움은 성실해야 하므로 땅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상제上帝와 의봉蟻封은 보는 것을 가지고 말하면 진실로 하늘과 땅으로 나누어 소속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상제上帝를 말한 것은 그 주재主宰함을 취한 것인데 이제 마침내 고명高明으로 말씀하였고, 땅에 개밋둑을 말한 것은 그 협소함을 말한 것인데 이제 마침내 평실平實로 말씀하였으니, 하나는 조금 편벽된 듯하고 하나는 조금 느슨한 듯한 바, 굳이 이와 같이 유類를 취하여 말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이 두 장章은 표면表面(外面)이 바름을 말하였는데, 윗장은 정靜에 어김이 없는 것이고 이 장章은 동動에 어김이 없는 것이다.
문을 나갈 때에는 큰손님을 뵈온 듯이 하고 일을 받들 때에는 제사를 모시듯이 하여 두려워하고 삼가서 감히 혹시라도 함부로 하지 말라.
‘출문여빈出門如賓, 승사여제承事如祭’는 구계臼季가 극결郤缺을 천거할 때에 진晉 문공文公에게 아뢴 말이다.
‘전전戰戰’은 두려워함이요, ‘긍긍兢兢’은 경계하고 삼감이다.
‘출문여빈出門如賓’은 아직 사물을 접하지 않았을 때의 경敬이고, ‘승사여제承事如祭’는 이미 사물을 접했을 때의 경敬이다.
그러나 ‘출문여빈出門如賓’은 이미 사물을 접했을 때와 아직 사물을 접하지 않았을 때를 통하여 말한 것이요, ‘승사여제承事如祭’는 단지 이미 사물을 접했을 때를 가지고 말한 것이니, 이 뜻을 또한 함께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입을 지키기를 병甁과 같이 하고 뜻을 막기를 성城과 같이 하여 동동洞洞(성실)하고 속속屬屬(전일)하여 감히 혹시라도 가벼이 하지 말라.
‘수구여병守口如甁, 방의여성防意如城’은 송宋나라의 부정공富鄭公(富弼)이 80세 되던 해에 자리의 병풍에 쓴 말이다.
‘동동洞洞’은 삼가는 모양이고 ‘속속屬屬’은 전일專一한 모양이다.
‘망罔’은 주선생朱先生의 수필본手筆本에는 ‘무無’로 되어 있다.
‘수구여병守口如甁’은 말을 함부로 내지 않는 것이고, ‘방의여성防意如城’은 마음을 함부로 동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함부로 동하지 않음은 방의여성防意如城과 말뜻이 같지 않습니다.
주선생朱先生은 일찍이 말씀하기를 “수구여병守口如甁은 말을 함부로 내지 않는 것이요, 방의여성防意如城은 간사함이 들어옴을 막는 것이다.” 하였으니, 주선생朱先生의 이 말씀을 마땅히 인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 두 장章은 내면內面의 바름을 말하였는데, 윗장은 동動에 어김이 없는 것이고 이 장章은 정靜에 어김이 없는 것이다.
표리表裏의 동動과 정靜을 이렇게 나누어 소속시키셨으니, 왕로재王魯齋(王柏)의 그림(敬齋箴圖)보다 나을 듯합니다.
이상의 네 장章은 지경持敬의 조목條目을 논하였다.
주선생朱先生은 일찍이 말씀하기를 “이 편篇은 바로 경敬의 조목이니, 해설에 허다한 지두地頭(갈래, 방향)로 나간 점이 있다” 하였습니다.
청컨대 이 부분에 지자持字를 삭제하고 목자目字 아래에 ‘주선생朱先生의 이른바 허다한 지두地頭라는 것이 이것이다.[先生所謂許多地頭是也]’라는 열 글자를 이어 넣는다면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동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가려 하지 말고 남쪽으로 가다가 북쪽으로 가려 하지 말아서 일을 당하면 마음을 보존하여 딴 곳으로 가지 말라.
정자程子가 말씀하기를 “동쪽으로 가지 않고 또 서쪽으로 가지 않으며, 이쪽으로 가지 않고 또 저쪽으로 가지 않는다.” 하였으니, 위의 두 구句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以는 여與[및]이니, 《시경詩經》 대아大雅 〈황의皇矣〉에 “소리와 및 색을 크게 여기지 않는다.[不大聲以色]”는 이자以字와 같다.
혹자는 말하기를 “불이不以 두 글자는 호문互文이니, ‘불이동不以東 불이서不以西[동쪽으로 가지 않고 서쪽으로 가지 않는다]’를 이른다.” 하였다.
《어류語類》에 “한 마음으로 동쪽으로 가다가 또 서쪽으로 가려 하며, 남쪽으로 가다가 또 북쪽으로 가려 하는 것은 모두 주일主一이 아니다.” 하였다.
정자程子가 말씀하기를 “마음이 다른 데로 가지 않는 것을 일一이라 한다.” 하였으니, 여기서 다른 데로 가지 않는다는 것은 반드시 존양存養의 공부가 있은 뒤에야 마음이 편벽된 바가 없어서 항상 한 몸의 주재主宰가 되어 경敬의 체體가 비로소 간단間斷함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마음을 두어 다른 데로 가지 않게 하는 것은 진실로 존양存養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일에 나아가 말한 것이니, 《대학大學》의 “편안한 뒤에 능히 생각할 수 있다.[安而后能慮]”는 안자安字와 같은 뜻입니다.
만약 단지 존양存養의 일로 여겨서 편벽되이 경敬의 체體에만 소속시킨다면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이 한 장章은 동動 위에 정靜을 구하고 표면表面으로 말미암아 이면裏面에 미침을 말하였다.
다만 이 장章의 본의本意는 주主가 동動과 표면表面에 있는데, 이제 이 말씀의 뜻은 주主가 정靜과 이면裏面에 있으니, 존양存養과 격치格致를 나누어 소속시킴으로 인하여 지나치게 연결하여 추이推移한 듯합니다.
이二로써 더하지 말고 삼三으로써 더하지 말아서 정精하게 살피고 전일專一하게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펴보라.
《서경書經》 〈함유일덕咸有一德〉에 “덕德(마음)을 둘로 하고 셋으로 하면 동動함에 흉하지 않음이 없다.” 하였고, 《시경詩經》 위풍衛風 〈맹氓〉에 “선비가 극極이 없어 그 덕德을 둘로 하고 셋으로 한다.” 하였으니, 위의 두 구句는 여기에서 근본한 것이다.
《서경書經》과 《시경詩經》을 인용한 것은 본의本意와 거리가 먼 듯합니다.
정자程子가 말씀하기를 “우선 주일主一의 뜻을 함양하고자 하여야 하니, 하나로 하지 않으면 둘로 하고 셋으로 한다.” 하였으니, 마땅히 이 말씀을 인용해야 할 것입니다.
‘정精’은 《심경心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全》에는 심心으로 되어 있으나 주선생朱先生의 수필본手筆本에 또한 정精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제 이것을 따른다.
‘유정유일惟精惟一’은 대순大舜이 우왕禹王에게 고해준 심법心法이니, 정精은 알기를 분명히 하여 의혹하는 바가 없는 것이고 일一은 마음이 바루어서 잡된 바가 없는 것이다.
정精과 일一을 만약 본래의 훈석訓釋을 따른다면 마땅히 ‘정精은 살피기를 밝게 하여 섞이는 바가 없는 것이요, 일一은 지키기를 떳떳이 하여 떠남이 있지 않은 것이다’ 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류語類》에 “원래는 한 가지 일이 있었는데, 또 한 가지를 더하면 이는 바로 와서 저것을 더하여 두 개를 이루는 것이요, 원래 한 가지 일이 있었는데, 또 두 가지 일을 더하면 이는 바로 와서 저것을 더하여 셋을 이루는 것이다.” 하였다.
정자程子는 말씀하기를 “주일主一을 경敬이라 한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논한 주일主一은 마음에 격치格致의 공부가 있은 뒤에야 마음이 바름을 얻어서 만사萬事의 변화를 살펴 경敬의 용用이 비로소 어그러지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유정惟精 두 글자는 진실로 격치格致의 뜻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윗장을 이어서 말한 것이고 전적專的으로 이 장章만을 가지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유정惟精을 전적으로 이 장章의 주일공부主一功夫에 소속시킨다면 이른바 유일惟一이란 것은 도리어 윗장의 무적無適의 공부에 소속됩니까?
아니면 정精과 일一이 모두 격치格致에 속하고 존양存養은 홀로 정일精一의 밖에 있는 것입니까?
○ 삼가 살펴보건대 정자程子가 말씀하기를 “주일主一을 경敬이라 하고 무적無適을 일一이라 한다.” 하였는데,
주선생朱先生이 일찍이 이것을 해석하기를 “무적無適은 바로 주일主一이고 주일主一은 바로 경敬이니,
전전展轉하여 서로 풀이한 것이요 무적無適의 밖에 별도로 주일主一이 있고 주일主一의 밖에 또 별도로 경敬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근거해 보면 이제 이 두 장章에 주일무적主一無適을 논한 것은 다만 접속되어 이어지는 한 가지 일에 불과하니, 애당초 어찌 피차彼此의 드러난 구분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네 불자不字의 대대對待(상대)한 말과 두 유자惟字의 이어서 결론 지은 뜻을 세세히 살펴보면 접속되어 이어진 한 가지 일 가운데에 진실로 찬란한 지두地頭가 있습니다.
윗장은 정精하게 살펴서 내 마음으로 하여금 동쪽과 서쪽으로 달려가서 물욕物欲의 사사로움에 흐르지 않게 한 것이니 경敬의 용用이 어그러지지 않는 것이요, 아랫장은 한결같이 지켜서 내 마음으로 하여금 둘로 하고 셋으로 하여 변역變易해서 천리天理의 바름을 떠나지 않게 한 것이니 경敬의 체體가 간단間斷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당하여 마음을 보존하면 용用이 행해지는 것인데 체體가 일찍이 이 가운데에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으며, 마음을 한 가지로 하여 살펴보면 체體가 서는 것인데 용用이 일찍이 이 가운데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아니니, 이는 또 서로 뿌리하고 서로 도와주는 묘리妙理입니다.
이 한 장章은 정靜한 가운데에 동動을 포함하였음을 말하였으니, 이면裏面으로부터 표면表面에 나오는 것이다.
이 또한 본문本文에서 주장한 것과는 다른 듯합니다.
여기에 종사함을 지경持敬이라 하니, 동動하고 정靜함에 어기지 말고 겉과 속을 서로 바르게 하라.
‘종사어사從事於斯’는 본래 증자曾子의 말씀이다.
사斯는 정기의관正其衣冠으로부터 만변시감萬變是監까지의 내용을 가리킨다.
밖으로부터 안을 편안히 하고 안으로부터 밖을 제재하므로 서로 바룬다고 하였고, 동動할 때에도 이와 같이 하고 정靜할 때에도 이와 같이 하므로 어김이 없다고 한 것이니, 이 뜻을 모름지기 해석함이 있어야 비로소 분명하고 구비될 것입니다.
이 한 장章은 윗글을 총괄하여 결론한 것이다.
잠시라도 간단間斷함이 있으면 사욕私慾이 만단萬端으로 일어나서 불이 없어도 뜨거워지고 얼음이 없어도 차가워질 것이다.
《장자莊子》의 〈재유在宥〉篇에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마음이 노하거나 조급하여〉 뜨거울 때에는 불이 타오르는 듯하고 〈마음이 전율을 느껴〉 차가울 때에는 얼음이 엉기는 듯함은 오직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했다.” 라고 하였다.
이는 존양存養이 익숙하지 못해서 혹 한 순간이라도 간단間斷함이 있으면 치달리고 날아가서 사사로운 인욕人欲에 빠짐을 말한 것이다.
만약 저의 해설을 따른다면 위의 존양불숙存養不熟은 마땅히 ‘지키기를 한결같이 하지 못했다[守之不一]’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털끝만치라도 착오가 있으면 하늘과 땅이 뒤바뀌어 삼강三綱이 이미 없어지고 구법九法이 또한 무너지리라.
‘삼강三綱’은 군주는 신하의 벼리가 되고, 부모는 자식의 벼리가 되고,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되는 것이요, ‘구법九法’은 홍범구주洪範九疇이다.
‘삼강三綱이 매몰되고 구법九法이 무너졌다’는 것은 《당서唐書》에 보인다.
이는 격치格致가 정미精微하지 못해서 혹 한 가지 일이라도 잘못됨이 있으면 전도顚倒되고 착란錯亂하여 천리天理의 올바름을 잃게 됨을 말한 것이다.
만약 저의 해설을 따른다면 위의 격치부정格致不精은 마땅히 ‘살피기를 정하게 하지 못했다.[察之不精]’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지경持敬의 공부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는 바가 있으면 잠시 동안에 이미 수만 가지의 욕심이 싹트고, 털끝 만한 작은 것에서 갑자기 하늘과 땅이 전도됨을 이룰 것이니, 하물며 오랜 시간과 큰 일에 있어서이겠는가.
그 기틀이 이와 같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바로 배우는 자가 깊이 착안하여 뜻을 다해야 할 부분이다.
이상 두 장章은 불경不敬의 잘못을 논하였으니, 또한 동動과 정靜을 포함하고 표表와 이裏를 겸하여 말한 것이다.
묵경墨卿(먹)으로 경계하는 글을 맡아 쓰게 해서 감히 영대靈臺(마음)에게 고하노라.
묵경墨卿은 양웅揚雄의 〈장양부長楊賦〉에 “자묵子墨이 객경客卿이 되어 풍자한 것이다.” 하였다.
영대靈臺는 《장자莊子》의 주註에 “마음이다.” 하였다.
이 한 장章은 전편全篇을 총괄하여 결론한 것이다.
이 편篇은 송宋나라 효종孝宗 순희淳熙 계사년癸巳年(1173) 정월에 지으셨으니, 실로 주선생朱先生이 34세 되던 해이다.
이전二典(堯典‧순전舜典)에 흠欽과 공恭을 첫 번째에 놓은 이래로 천고千古의 심결心訣이 한 경자敬字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사洙泗의 목소리가 끊겼는데, 이락二洛(明道와 이천伊川)이 굴기崛起하여 특별히 이 글자를 집어내어 종지宗旨로 삼으시니, 전후前後에 똑같은 법法이다.
선생先生은 은밀한 전수傳授를 사숙私淑하여 이리저리 늘어놓은 천 마디 말씀과 만 마디 말씀이 모두 이 일인데, 이중에 체體와 용用, 본本과 말末이 모두 포괄되어 빠뜨림이 없는 것을 찾아보면 또 이 편篇과 같은 것이 있지 않다.
이제 선생先生이 평소 말씀한 것을 가지고 참고해 보면 ‘지경持敬은 의관衣冠을 바루고 용모容貌를 가지런히 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였으므로 1장章이 첫 번째가 되고 2장章이 그 다음이 되었으며,
또 ‘일이 없으면 경敬이 이면裏面에 있고 일이 있으면 경敬이 일 위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또 3장章이 그 다음이 되었으며,
또 ‘밖으로 망령되이 동動하지 않고 안으로 망령되이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하였으므로 4장章이 그 다음이 되었으니,
이는 모두 밖을 제재하여 안을 편안히 하고 거친 것을 말미암아 정精함에 미치는 순서로 경敬의 조목條目이 구비된다.
〈편篇 머리의 네 장章은 상대相對하여 말하는 가운데에 서로 도와주는 뜻이 있으니, 표면表面을 제재함은 이면裏面을 바로잡는 것이요, 이면裏面에 주장함이 있으면 표면表面이 절로 바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만 이와 같이 말씀한다면 서로 바로잡는 뜻을 볼 수 없으며, 또 표면表面과 이면裏面에 각각 동정動靜을 갖추고 있는데, 이제 이 동정動靜 두 글자를 언급하지 않았으니, 또한 소략한 듯합니다.〉
조목條目이 비록 구비되더라도 지경持敬의 절도節度와 범위範圍를 말하지 않으면 또 그 방법을 알아 따를 수가 없으므로 5장章과 6장章이 그 다음이 되었는 바, 경敬이 실로 지행知行의 사이를 관통貫通한다.
그러므로 5장章은 존심存心을 말하였고 〈만약 저의 해설을 따른다면 이는 성찰省察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6장章은 치지致知를 말한 것이다.
〈만약 저의 해설을 따른다면 이는 지수持守라 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 방법을 알더라도 불경不敬의 폐해와 잘못을 말하지 않는다면 또 그 병통을 알아 제거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8장章과 9장章이 그 다음이 되었는 바, 8장章은 마음이 보존되지 않은 잘못을 말하였고 〈만약 저의 해설을 따른다면 이는 마땅히 지수持守하지 못한 병통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9장章은 지식이 지극하지 못한 병통을 말하여 〈만약 저의 해설을 따른다면 이는 마땅히 성찰省察하지 못한 병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5장章과 6장章의 뜻에 응하였다.
그리고 또 한 편篇 가운데에 마음으로 기두起頭(시작)를 하고 마음으로 결미結尾(끝을 맺음)하여 경敬의 체體‧용用과 본本‧말末이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나타내었으니, 그 정녕丁寧하고 반복反覆한 뜻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