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지난번에 이모李某가 처음 한 글을 올려 도학道學이 이처럼 나쁘다고 극구 말하였으니, 이 때에 아무개가 요로要路에 있었으므로 이 말로 비위를 맞춰서 상주上州로 높이 승진되었다.
그러다가 지난날 내가 막 소명召命에 달려가 행재소行在所에 이르자, 갑자기 또 한 글을 올려 도학道學의 아름다움을 극구 칭찬하였으니, 저는 내가 어떤 세력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것으로 비위를 맞추고자 한 것이니, 지극히 우습다.
原注
“배우는 자는 공맹孔孟에 잠심潛心하여 반드시 그 문을 찾아 들어가야 하는데, 어리석은 나는 생각하건대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밝히는 것보다 더 먼저 할 것이 없다고 여긴다.
성현聖賢은 위한(목적하는) 바가 없이 그러하니, 위한 바가 없이 그러한 것은 천명天命이 그치지 않고 성性이 편벽되지 않고 가르침이 다함이 없는 것이며, 무릇 위한 바가 있어 그러한 것은 모두 인욕人欲의 사私이고 천리天理가 보존된 것이 아니니, 이것이 의義와 이利의 구분이다.
성찰할 줄 모르는 자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하루를 마치는 사이에 이利를 위하지 않는 경우가 드무니, 다만 명예와 지위와 재화財貨인 뒤에야 이利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향하는 바가 조금이라도 위한 바가 있음에 해당되면 비록 얕고 깊음의 차이가 있으나 자기를 따라 스스로 사사롭게 함에 있어서는 똑같을 뿐이다.
이 마음이 날로 불어나면 선善한 마음이 막히게 되니, 성현聖賢의 문장門墻을 가까이하여 자득自得하기를 바란다면 어찌 뒷걸음을 치면서 앞사람에게 미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배우는 자는 마땅히 뜻을 세우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경敬을 잡아 지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서 동정動靜의 사이에 정밀하게 살펴 털끝 만한 차이에서 천양天壤의 구분이 됨을 안다면 자신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있을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옛날의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하였는데, 지금의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한다’고 하셨으니, 남을 위하는 자는 가는 곳마다 이利 아님이 없고 자신을 위하는 자는 가는 곳마다 의義 아님이 없다.
이로우면 비록 자신에게 있는 일이라도 모두 남을 위하는 것이요, 의로우면 비록 남에게 베푸는 일이라도 모두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의義와 이利의 구분이 크니, 어찌 다만 배우는 자가 자신을 다스리는 데에만 먼저 하여야 할 바이겠는가.
原注
“군자君子는 의義를 깨닫고 소인小人은 이利를 깨닫는다 하였으니, 이 장章은 의義와 이利로써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판별하였는 바, 만일 자기 몸에 절실하게 보고 살피지 않으면 또한 유익함이 없을 듯하다.
사람이 깨닫는 바는 익힌 바에 연유하고 익히는 바는 뜻한 바에 연유한다.
의義에 뜻하면 익힌 바가 반드시 의義에 있을 것이니 익힌 바가 의義에 있으면 의義를 깨달을 것이요, 이利에 뜻하면 익히는 바가 이利에 있을 것이니 익힌 바가 이利에 있으면 이利를 깨달을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의 뜻을 분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선비가 된 자들은 진실로 장옥場屋(科擧)의 득실得失을 면치 못하나 다만 그 기예技藝가 유사有司의 좋아하고 싫어함과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이니,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세속에서는 이것을 서로 숭상하여 여기에 골몰해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니, 그렇다면 종일토록 종사하는 것이 비록 성현聖賢의 책이라 하더라도 그 뜻이 향하는 바를 찾아보면 성현聖賢과 배치背馳됨이 있는 것이다.
미루어 올라가면 또 관자官資의 높고 낮음과 녹봉祿俸의 많고 적음만을 계산하니, 어찌 국가의 일과 백성의 고통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맡기고 부린 자(君上)를 저버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 사이에 종사하여 경력更歷(經歷)함이 많고 강습講習함이 익숙하면 어찌 깨닫는 바가 없겠는가마는 다만 의義에 있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다.
진실로 이 몸을 소인小人으로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여, 이욕利慾의 익힘에 대하여 서글프게 마음을 아파하고 머리를 아파해서 오로지 의義를 주장하여 날로 힘써서,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구분하여 독실히 행하여야 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장옥場屋에 나아가면 그 문장文章이 반드시 평소의 학문學問과 흉중胸中에 쌓인 것을 다 말하여, 성인聖人의 도道와 어긋나지 않을 것이요, 이로 말미암아 벼슬하면 반드시 모두 직책을 수행하고 일을 부지런히 하며 나라에 마음을 두고 백성에게 마음을 두어서 자신을 위한 계교를 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군자君子라 이르지 않겠는가.”
原注
진지陳芝가 “지금 마땅히 무슨 책을 읽어야 합니까?”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성현聖賢이 사람을 가르친 것은 모두 자신에게 간절한 말씀이요, 사람으로 하여금 밖을 향하여 다만 책 위에 나아가 읽고 곧 끝나게 한 것이 아니니, 자신이 지금 우선 하나의 의義와 이利를 판별하여, 자신이 지금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는가, 아니면 스스로 자신을 위하는가를 한 번 살펴보아야 하니, 이것이 바로 죽고 사는 노두路頭(갈림길)이다.
일찍이 육자정陸子靜(陸九淵)의 의리義利의 말을 보았는가?”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하고 대답하니,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이것(義利의 말)은 그가 남강南康에 왔으므로 내가 그에게 글을 해설해 줄 것을 요청하였더니, 그는 도리어 이 의義‧이利를 분명히 해야 함을 말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좋다.
예컨대 ‘지금 사람들은 단지 책을 읽음에 이利를 위하여, 해解(鄕試에 합격함)를 취한 뒤에는 또 벼슬을 얻고자 하고 벼슬을 얻으면 또 벼슬이 승진되기를 구하여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利를 위하지 않음이 없다’ 하여 말함이 통쾌하였으니, 이 말을 듣고 심지어는 눈물을 흘린 자도 있었다.
지금 사람들은 처음 출생하여 다소 지식이 있으면 이 마음이 곧 이와 같이 부지런히 가서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좇아 점점 달려가고 그치지 않으니, 성현聖賢과의 거리가 날로 더욱 멀어진다.
原注
“선善과 이利에 대한 생각은 그 사이에 머리털 하나도 용납하지 않는다.(間髮의 차이밖에 되지 않는다.) 한 털끝 만한 차이에서 순舜임금과 도척盜蹠이 나누어지니, 배우는 자가 경계하고 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利는 반드시 재화財貨의 이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릇 이롭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모두 이利이다.
그러므로 내가 맹자孟子의 뜻을 발명하여 순척도舜蹠圖를 만드나니, 선善과 이利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처음에는 매우 미미하나 득실得失의 상거相去는 구천九泉의 아래와 중천重天의 꼭대기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또 생각하기를 ‘비록 순舜임금이라도 한 번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狂人이 되고 비록 도척盜蹠이라도 한 번 잘 생각하면 성인聖人이 된다’고 여기나니, 사람이 위危(人心)‧미微(道心)의 사이에서 이것을 안다면 또한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므로 또 극념克念과 망념罔念의 말을 순舜임금과 도척盜蹠의 아래에 붙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