莫
乎隱
이며 莫顯乎微
니 故
로 君子
는 愼其獨也
니라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요 發而皆中節을 謂之和니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요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니라
原注
子思首明
하시니 蓋欲學者於此
에 反求諸身而自得之
하여 以去夫外誘之私而充其本然之善
이니라
原注
君子之心
이 하여 雖不見聞
이라도 亦不敢忽
하니 所以存天理之本然
하여 而不使離於須臾之頃也
니라
原注
隱은 暗處也요 微는 細事也요 獨者는 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라
言幽暗之中, 細微之事
는 하고 하니 則是天下之事 無有著見明顯而過於此者
라
是以君子旣常戒懼하고 而於此에 尤加謹焉하니 所以遏人欲於將萌하여 而不使其潛滋暗長於隱微之中하여 以至離道之遠也니라
原注
人이 只以耳目所見聞者로 爲顯見하고 所不見聞者로 爲隱微나
且如
이라하니 殺在心
이어늘 人聞其琴而知之
하니 豈非顯乎
아
人有不善에 自謂人不知之나 然天地之理甚著하여 不可欺也니라
原注
問程子彈琴殺心事
는 是就見{人}知處言
하고 所說
은 이어늘 이 合而論之
하시니 是否
잇가
兩事只一理니 幾纔動則己必知之요 己旣知則人必知라
原注
愼獨
이 最爲入道之要
니 所謂獨者
는 非獨閒居靜處而已
라 萌於心之謂獨
이니 能於此著力
이면 無由有
라
原注
○ 蘇昞이 問於喜怒哀樂之前에 求中이 可否잇가 程子曰
旣思
면 卽是已發
이니 發
이면 謂之和
요 不可謂之中也
니라
問
言當求中於喜怒哀樂未發之前
이라하니 信斯言也
인댄 恐無
로소니 如之何而可
닛고 曰
言
則可
커니와 若言求中於喜怒哀樂未發之前則不可
하니라
原注
程子才思卽是已發一句는 能發明子思言外之意하시니 蓋言不待喜怒哀樂之發이요 但有所思면 卽是已發이니
原注
但平日莊敬涵養之功
이 至
하여 而無人欲之私以亂之
면 則其未發也
에 鏡明水止
하여 而其發也
에 無不中節矣
리니 此是日用
라
至於隨事省察, 卽物推明에도 亦必以是爲本하여 而於已發之際에 觀之면 則其具於未發之前者를 固可嘿識이라
故程子之答蘇季明에 反覆論辨이로되 而卒之엔 不過以敬爲言하시니 蓋爲此也라
向來講論思索
에 하여 而日用工夫
를 亦止以察識
로 爲最初下手處
라
以故로 闕却平日涵養一段工夫하여 使人胸中擾擾하여 無深潛純一之味하고 而發之言語事爲之間도 亦常急迫浮露하여 無復雍容深厚之風하니
原注
看事如何
니 若是大事如祭祀
에 前旒蔽明
하고 充耳
면 凡物之過者
를 不見不聞也
어니와 若無事時
엔 이니라
原注
所以說得愈多
에 愈見支離紛冗
하여 都無交涉
하니 此乃程門
요 而後人
이 亦不善讀也
라
若必以未有見聞
으로 爲未發處
인댄 則只是一種神識昏昧底人
이 睡未足時
에 被人驚覺
하여 頃刻之間
에 에 有此氣象
이라
聖賢之心은 湛然淵靜하여 聰明洞徹하니 決不如此니라
若必如此
인댄 則
에 當云 貌曰僵
이요 言曰啞
요 視曰盲
이요 聽曰聾
이요 思曰塞
이라야 乃爲得其性
이요 而致知居敬
하여 費盡工夫 却只養得成
矣
리라
原注
只平日涵養이 便是니 涵養久면 則喜怒哀樂이 發而中節이니라
原注
若只管如此
면 恐
太過
요 若不如此
면 又恐都忘了
로소이다 朱子曰
原注
問涵養於未發之初하여 令不善之端旋消면 則易爲力이어니와 若發以後則難制로소이다 朱子曰
聖賢이 正要就發處制어늘 惟子思說喜怒哀樂未發謂之中이라하시니 孔孟敎人에 多從發處說이라
原注
某曩時에 從羅先生學問할새 終日相對靜坐어시늘 某時未有知라 退入室中하여 亦只靜坐而已러니
先生이 令靜中에 看喜怒哀樂未發之謂中의 未發을 作何氣象고하시니 此意不惟於進學에 有力이라 兼亦是養心之要니라
元晦
하야 不可思索
하니 更於此句內
에 求之
하여 靜坐看如何
면 往往
에 不能無補也
리라
原注
李先生敎人
에 大抵令於靜中
에 大本未發時氣象
을 分明
하면 卽處事應物
에 自然中節
이라하시니 乃龜山門下相傳旨訣
이라
然當時
之時
에 貪聽講論
하고 又方竊好章句訓詁之習
하여 不得盡心於此
라
至今
에 若存若亡
하여 無一的實見處
하여 負敎育之意
하니 每一念此
에 未嘗不愧汗沾衣也
로라
朱子於呂氏求中之說과 楊氏體所謂中之說에 皆深非之로되
及爲延平行狀
하여는 謂其危坐終日
하여 驗未發時氣象而
이라하시니 則亦呂氏之說也
라
先生敎人에 於靜中에 體認大本未發時氣象이라하시고 其後與學者書에
又謂大本達道
를 이 蓋屢言之而龜山所謂未發之際
에 能體所謂中
하고 已發之際
에 能得所謂和
라하니 此語爲近之
라하사
蓋嘗思之컨대 未發之前에 但當敬以存養而不可有心求나
然思慮未形而知覺不昧하여 性之體段이 自有不可揜者하니 程子所謂靜中有物者라
蓋謂凡學者深味而實驗之하면 自當有見이니 未可專以言語求也니라
○ [按] 宋儒
이 嘗類聚程朱所論已發未發者
하여 爲中和說集編六卷
하니 學者宜詳考之
라
原注
如小可沒緊要處
에 去
면 便是不謹
이니 謹獨
은 是已接物了
라
戒謹不睹, 恐懼不聞은 是未有事在니 相在爾室컨대 尙不愧于屋漏之時요 謹獨은 便已有形迹了니 潛雖伏矣나 亦孔之昭라
詩人言語
는 只是大綱說
이어늘 하시니 又較緊密
이니라
原注
孟子曰 操則存
이라하시니 亦不是著力把持
요 只是
면 便在這裏
니
所不睹, 所不聞은 不是閉耳合眼時요 只是萬事 皆未萌芽에 自家便先恁地戒愼恐懼라
不睹不聞之時
는 便是喜怒哀樂未發處
니 常要提起此心在這裏
하여 防於未然
이니 所謂
也
니라
原注
問喜怒哀樂未發之初
에 不知戒懼心
을 이닛고 潛室陳氏曰
原注
謹獨은 是就中에 有一念萌動處하여 雖至隱微하여 人所不知나 而己所獨知에 尤當致謹이니 如一片止水 中間에 有一點動處라
原注
自昔諸儒之釋中庸에 皆以戒謹恐懼與謹獨云者로 通爲一事러니 至朱子하여 乃析而二之하시니 蓋以爲不睹不聞者는 我之所不睹不聞也요 獨者는 人之所不睹不聞也니 其義不容不二라
又以見平常之時와 要切之處에 無所不用其謹이면 則天理存而人欲泯이니 是乃所謂致中和之功也니라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하늘이 이理를 명命해 준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이르고 도道를 품절品節해 놓은 것을 교敎라 이른다.
도道는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으면 도道가 아니다.
이러므로 군자君子는 보지 않는 것(않을 때)에도 계신戒愼하며 듣지 않는 것(않을 때)에도 공구恐懼하는 것이다.
은隱(어두운 곳)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微(세미한 일)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그 홀로를 삼가는 것이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이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이르니, 중中은 천하의 대본大本(큰 근본根本)이고 화和는 천하의 달도達道(공통된 도道)이다.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萬物이 잘 생육될 것이다.” 하였다.
原注
“자사子思가 첫 번째는 도道의 본원이 하늘에서 나와 바뀔 수 없음과 그 실체가 자기 몸에 갖추어져 있어 떠날 수 없음을 밝혔고, 다음에는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의 요점을 말씀하였고, 끝에는 성신聖神의 공화功化의 극極을 말씀하였으니, 배우는 자로 하여금 여기에서 자기 몸에 돌이켜 스스로 깨달아서 외유外誘의 사私를 제거하여 본연本然의 선善을 채우게 하고자 한 것이다.”
原注
“군자君子의 마음은 항상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보존하여 비록 보고 듣지 않더라도 또한 감히 소홀히 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천리天理의 본연本然을 보존하여 잠시라도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原注
“은隱은 어두운 곳이요 미微는 세미한 일이요 독獨은 남은 알지 못하고 자신만이 홀로 아는 곳이다.
유암幽暗의 가운데와 세미細微한 일은 자취가 비록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기미는 이미 동하였고 남은 비록 알지 못하나 자신은 홀로 알고 있으니, 그렇다면 천하의 일 중에 저견著見하고 명현明顯함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 때문에 군자君子가 이미 항상 계신공구戒愼恐懼하고 이에 더욱더 삼가는 것이니, 인욕人欲을 싹트려 할 때에 막아서 은미隱微한 가운데에 남몰래 불어나고 속으로 자라나 도道를 떠나기를 멀리함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다.”
原注
“은隱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고 미微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사람들은 다만 이목耳目으로 보고 듣는 것을 현견顯見으로 여기고, 보고 듣지 않은 것을 은미隱微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이치가 매우 잘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우선 예를 들면 옛사람이 거문고를 탈 적에 당랑螳螂(사마귀)이 매미를 잡는 것을 보았는데 거문고 소리를 들은 자가 소리에 살기殺氣가 있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 죽이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데 다른 사람이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알았으니, 어찌 드러난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불선不善이 있을 적에 남들이 알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나 천지天地의 이치는 매우 잘 드러나서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양진楊震의 사지四知와 같은 것입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그러나 만약 남과 나로 말한다면 진실로 나눌 수가 있지만 만약 하늘과 땅으로 말한다면 다만 동일同一한 앎일 뿐이다.”
原注
“정자程子가 말씀한 거문고를 탈 적에 죽이려는 마음이 나타난 일은 남이 아는 곳을 가지고 말하였고, 소씨蘇氏(游氏)와 양씨楊氏가 말한 것은 자기가 아는 곳을 가지고 말하였는데, 선생先生(朱子)께서는 이것을 합하여 논하시니, 옳습니까?” 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두 가지 일이 다만 한 이치이니, 기미가 조금이라도 동하면 자기가 반드시 알고 자기가 이미 알았으면 남이 반드시 안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가 양진楊震의 사지四知를 논하기를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것은 다만 동일同一한 앎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原注
“신독愼獨이 도道에 들어가는 가장 긴요한 요점이 되니, 이른바 독獨이라는 것은 한가하고 고요하게 거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마음에 싹트는 것을 독獨이라 이르니, 이때에 힘을 쓰면 잘못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에 이 말을 책의 머리로 삼은 것이다.”
原注
“추씨鄒氏가 말한 신독愼獨이 가장 깊은 의미가 있다.”
原注
소병蘇昞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전前에 중中을 구하는 것이 가可합니까?” 하고 묻자,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이미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하기 이전에 생각하여 구한다면 이 또한 생각함이다.
이미 생각하면 곧 이발已發이니, 조금이라도 발하면 화和라 이르고 중中이라 이를 수 없다.”
“여씨呂氏(呂大臨)가 ‘마땅히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하기 전에 중中을 구해야 한다’하였으니, 진실로 이 말 대로라면 손을 대어 잡을 곳이 없을 듯하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하지 않았을 때에 존양存養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可하지만 만약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하지 않았을 때에 중中을 구한다고 말한다면 불가하다.”
原注
“정자程子의 ‘조금이라도 생각하면 곧 이발已發’이라는 한 구句는 자사子思의 말씀 밖의 뜻을 발명發明하였으니,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함을 기다리지 않고 다만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곧 이발已發임을 말씀한 것이다.
이 뜻이 정미精微하여 미발未發의 계지界至(경계)에 이름이 십분 끝을 다하였으니, 이보다 더함이 있을 수 없다.”
原注
혹자或者가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전前에는 동자動字를 놓아야 합니까?
정자靜字를 놓아야 합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정靜이라고 이르는 것은 가하나 정靜한 가운데에 모름지기 물物(마음속에 지키는 일)이 있어야 비로소 되니, 이것이 곧 어려운 곳이다.
배우는 자가 우선 먼저 경敬을 이해함만 못하니, 경敬하면 자연 이것을 알게 될 것이다.”
原注
“미발未發의 전에 찾아서도 안 되고 이발已發의 뒤에 안배安排해서도 안 된다.
다만 평소 장경莊敬하고 함양涵養하는 공부가 지극해서 인욕人欲의 사私로써 어지럽힘이 없으면 미발未發의 때에 거울처럼 밝고 물처럼 잔잔하여, 발할 적에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일상생활에 있어 본령本領의 공부이다.
일을 따라 성찰省察하고 사물에 나아가 미루어 밝힘에 이르러서도 또한 반드시 이것을 근본으로 삼아서 이발已發의 즈음에 이것을 살펴본다면 미발未發의 전에 갖추어져 있음을 진실로 묵묵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가 소계명蘇季明에게 답한 글에 반복하여 논변하였으나 끝내는 경敬으로써 말씀함에 불과하셨으니, 이 때문이다.
그 동안 강론하고 사색함에 다만 마음을 이발已發이라고 여겨서 일상생활의 공부를 또한 다만 단예端倪를 살피고 아는 것으로 가장 먼저 하수下手해야 할 곳이라고 여겼었다.
이 때문에 평소에 함양涵養하는 한 단락의 공부를 빠뜨려서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속이 분요紛擾하여 심잠深潛하고 순일純一한 맛이 없고, 언어言語와 사위事爲의 사이에 발할 적에도 또한 항상 급박急迫하고 부로浮露하여 다시 옹용雍容(여유로움)하고 심후深厚한 기풍이 없게 하였다.
소견이 한 번 잘못됨에 그 폐해가 이에 이르니,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된다.”
原注
혹자或者가 말하기를 “정좌靜坐할 때에 앞에 지나가는 사물을 보아야 합니까?
보지 말아야 합니까?” 하고 묻자, 〈정자程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어떠한 일인가를 살펴보아야 하니, 만약 제사祭祀와 같은 대사大事에 면류관의 앞술이 눈을 가리고 귀막이 솜이 귀를 막고 있을 때라면 지나가는 모든 사물을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아야 하지만 만약 일이 없을 때에는 눈은 마땅히 보아야 하고 귀는 마땅히 들어야 한다.”
原注
여자약呂子約(呂祖儉)이 “들음이 있지 않고 봄이 있지 않은 것이 미발未發이다.” 라고 하자, 주자朱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자사子思는 단지 희로애락喜怒哀樂만을 말씀하셨는데 이제 다시 보고 듣는 것으로 향하여 간다.
이 때문에 말이 많을수록 더욱 지리하고 분분해져서 모두 교섭交涉(관여)함이 없음을 보게 되니, 이는 바로 정문程門에 묻고 기록한 자의 책임이요 후인後人들이 또한 잘 읽지 못한 부분이다.
만약 반드시 보고 들음이 있지 않은 것을 미발未發한 곳이라고 한다면 단지 일종의 정신精神과 지식知識이 혼미한 사람이 잠이 부족할 때에 남에게 놀라 깨서 잠깐 동안 사도四到(四方)를 모르는 때에 이러한 기상이 있다.
성현聖賢의 마음은 담연히 깊고 고요하여 총명하고 통철하니, 결코 이와 같지 않다.
만약 이와 같을진댄 홍범洪範의 오사五事에 마땅히 모습은 뻣뻣하고 말은 벙어리가 되고 보는 것은 소경이 되고 듣는 것은 귀머거리가 되고 생각은 막아야 한다고 말하여야 비로소 그 성性을 얻음이 될 것이요, 지식知識을 지극히 하고 경敬에 거하여 많은 공부를 허비하는 것이 단지 한 어리석은 망량罔兩의 사람을 양성하게 될 것이다.”
原注
다만 평소 함양涵養하는 것이 곧 이것이니, 함양하기를 오래하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할 적에 절도에 맞게 된다.”
原注
“일이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계근공구戒謹恐懼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단지 이와 같이 조관照管(管攝)하면 잡음이 너무 지나칠까 두렵고,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또 모두 잊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다만 이 마음을 어둡게 하지 않을 뿐이니, 이것이 곧 계구戒懼이다.”
原注
“잘 관찰하는 자는 이발已發의 즈음에서 관찰한다.”
原注
“미발未發의 초기에 함양하여 불선不善한 단서(마음)를 곧 사라지게 하면 힘을 쓰기가 쉬우나 만약 발한 뒤에는 제재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성현聖賢은 바로 발하는 곳에 나아가 제재하려 하였는데, 오직 자사子思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고 이른다’고 말씀하였으니,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는 사람을 가르칠 적에 대부분 발한 곳으로부터 말씀하였다.
미발未發의 때에도 진실로 함양涵養을 해야 하지만 발한 뒤에 곧 모두 조관照管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될 수 없다.”
原注
연평이씨延平李氏(李侗)가 주자朱子에게 준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내가 지난날 나선생羅先生(羅從彦)을 따라 배울 적에 종일토록 마주 대하고 정좌靜坐하였는데, 나는 이때 앎이 없어서 물러가 방안에 들어가 또한 다만 정좌할 뿐이었다.
그런데 선생先生이 나로 하여금 ‘고요한 가운데에 희로애락미발지위중喜怒哀樂未發之謂中의 미발未發을 어떠한 기상으로 지어 보아야 하는가?’하셨으니, 이 뜻은 단지 학문을 진전함에 효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을 수양하는 요점을 겸한 것이다.
원회元晦(朱子의 자字)는 우연히 마음의 병이 있어 사색할 수가 없으니, 다시 이 구句 안에서 찾아 정좌靜坐하며 어떠한가를 본다면 왕왕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原注
주자朱子가 하숙경何叔京(何鎬)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연평延平 이선생李先生이 사람을 가르칠 적에 ‘대체로 고요한 가운데에 대본大本인 미발未發일 때의 기상을 체인體認하기를 분명하게 하면 일을 처리하고 사물에 응함에 자연 절도에 맞는다’하셨으니, 이는 바로 귀산龜山(楊時)의 문하門下에서 서로 전해 온 지결旨訣(중요한 말씀)이다.
그러나 당시 친자親炙(직접 수학함)할 때에 강론講論을 듣기를 탐하고 또 장구章句와 훈고訓詁를 익히기를 좋아하여 여기에 마음을 다하지 못하였다.
지금에는 있는 듯 없는 듯하여 한 가지도 적실的實히 본 곳이 없어서 스승의 교육하신 뜻을 저버리니, 언제나 이것을 한 번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워 땀이 흘러서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노라.”
“주자朱子는 여씨呂氏의 ‘중中을 구한다’는 말씀과 양씨楊氏(楊時)의 ‘이른바 중中을 체인한다’는 말씀을 모두 깊이 비판하였으나
연평延平의 행장行狀을 지을 때에는 ‘무릎 꿇고 앉아 하루를 마쳐서 미발未發할 때의 기상을 징험하여, 이른바 중中이란 것을 구하였다’하셨으니, 그렇다면 이 또한 여씨呂氏의 말인 것이다.”
“선생이 사람을 가르칠 적에 고요한 가운데에 대본大本인 미발未發의 기상을 체인體認하라 하셨고, 그 뒤에 배우는 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또 ‘대본大本과 달도達道를 두 선생이 여러 번 말씀하였다. 귀산龜山(楊時)이 말씀한 「未發의 즈음에 이른바 중中이란 것을 체인體認하고 이발已發의 즈음에 이른바 화和란 것을 터득하여야 한다」는 것이니, 이 말씀이 근리近理하다’하시어
그 말씀이 또 똑같지 않으니, 장차 무엇을 주장하여 따라야 하는가?
일찍이 생각해 보건대 미발未發의 전前에는 다만 공경하여 존양存養할 뿐이요 마음을 두어 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려思慮가 나타나기 전에 지각知覺이 어둡지 않아서 성性의 체단體段이 자연 가릴 수 없으니, 정자程子의 이른바 ‘고요한 가운데에 사물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배우는 자들이 깊이 음미하여 실제로 체험하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니, 오로지 언어로써 찾아서는 안됨을 이른 것이다.”
○ [按]송유宋儒인 악평樂平 정시등程時登이 일찍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이발已發‧미발未發을 논한 것을 종류별로 모아서 《중화설집편中和說集編》 6권을 만들었으니, 배우는 자들은 마땅히 자세히 상고해야 할 것이다.
原注
“근독謹獨은 생각이 처음 싹트는 곳 〈을 삼가는 것〉입니까?” 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이것이 통설通說이나 생각이 처음 싹틀 뿐만 아니라 다만 혼자 알고 있는 곳도 독獨이다.
만일 조금 긴요함이 없는 곳이라도 어지럽게 하면 곧 삼가지 않는 것이니, 근독謹獨은 이미 사물을 접한 것이다.
보지 않을 때에 계근戒謹하고 듣지 않을 때에 공구恐懼한다는 것, 이것은 아직 일이 있지 않을 때이니, 《시경詩經》에 ‘네가 방에 있는 것을 살펴보건대 혹시라도 옥루屋漏에 부끄럽지 않게 한다’는 때이며, 근독謹獨은 이미 형적形迹이 있는 것이니 《시경詩經》에 ‘물 속에 잠겨 비록 엎드려 있으나 또한 심히 밝다’는 것이다.
시인詩人의 언어言語는 단지 대강만 말하였는데, 자사子思가 이면裏面에 나아가서 이 말씀을 뽑아 내어 사람을 가르치셨으니, 또 더욱 긴요하고 치밀하다.”
原注
“계신戒愼과 공구恐懼를 굳이 너무 중하게 말할 것이 없다.
맹자孟子가 말씀하기를 ‘잡으면 보존된다’하였으니, 또한 힘을 써서 잡는 것이 아니요 다만 그저 한 번 잡을 뿐이니, 〈한 번 잡으면〉 곧 이 속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이 숨을 쉬는 것이 불면 곧 나가고 들이마시면 곧 들어오는 것과 같다.
보지 않고 듣지 않는 바라는 것은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있는 때가 아니요, 다만 만사萬事가 모두 싹트지 않았을 때에 자신이 곧 먼저 이처럼 계신戒愼하고 공구恐懼하는 것이다.
보지 않고 듣지 않는 때는 곧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미발未發할 때이니, 항상 이 마음을 제기提起(깨워 일으킴)하여 이 속에 있게 해서 미연未然에 방지하는 것이니, 이른바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 도모한다는 것이다.”
原注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미발未發한 초기에는 계구戒懼하는 마음을 어느 곳에 붙여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묻자, 잠실진씨潛室陳氏가 말하였다.
“이 물음이 가장 정精하니, 선배들은 이 경계(경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가장 어려워하였다.
이미 미발未發이라서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면 곧 발한 것이 된다.
비록 미발未發의 초기이나 체體는 이미 만 가지 용用을 포함하여 갖추고서 여기에 있으니, 선가禪家의 적여寂如‧공여空如와는 같지 않다.
이 때문에 성성惺惺한 주인主人(마음)이 항상 어둡고 아득한 가운데에 있어 조관照管하여 모두 일찍이 놓아버리지 않는 것이니, 비록 잡아 지키는 체단體段(상태)이나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다.”
原注
“근독謹獨은 이 가운데에 한 생각이 싹터 움직이는 곳이 있어서 비록 지극히 은미隱微하여 남들은 알지 못하고 자신만 홀로 아는 바에 더욱 삼감을 지극히 하는 것이니, 예컨대 한 쪽의 잔잔한 물이 중간에 한 점의 움직이는 곳이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이 가장 긴요하게 공부하여야 할 부분이다.”
原注
호계수胡季隨(胡大時)가 말하기를 “계구戒懼라는 것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하기 전에 함양하는 것이요,
원주元注에 이르기를 “이때를 당하여 마음이 고요하여 동하지 않는다.
다만 함양涵養공부를 할 뿐이니, 함양은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것이다.” 하였다.
신독愼獨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이미 발한 뒤에 성찰省察하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원주元注에 이르기를 “이런 때를 당하여 털끝만치라도 놓아 버리면 욕심으로 흘러간다.
의義와 이利를 판별하는 것이 전적으로 이 때에 달려 있으니, 성찰함은 인욕人欲을 막는 것이다.” 하였다.
주자朱子가 말씀하기를 “이 말이 매우 좋다.” 하였다.
原注
“예로부터 여러 유자儒者들이 《중용中庸》을 해석할 때에 모두 계근공구戒謹恐懼와 근독謹獨을 통하여 한 가지로 여겼는데, 주자朱子에 이르러 마침내 나누어 둘로 만들었으니,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은 내 자신이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이요, 독獨이라는 것은 남이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이니, 그 뜻이 두 가지가 아닐 수 없다.
또 평상시(靜을 가리킴)와 중요하고 간절한 곳(動을 가리킴)에 그 삼감을 쓰지 않는 바가 없으면 천리天理가 보존되고 인욕人欲이 없어짐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중화中和를 지극히 하는 공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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