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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經附註

심경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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所謂修身 在正其心者 身{心}有所忿하며 有所恐懼 則不得其正하며 有所好 則不得其正하며 이면 則不得其正이니라
이면 視而不見하며 聽而不聞하며 食而不知其味니라
此謂修身 在正其心이니라
原注
[原註]
○ 朱子曰
四者 皆心之用而 而不能察이면 則欲動情勝하야 而其用之所行 或不能不失其正矣리라
原注
○ 又曰
心有不存이면 則無以檢其身이라
是以君子必察乎此하야하니 然後此心常存而身無不修也니라
原注
[附註]
○ 程子曰
中有主則實이니 實則外患不能入하야 自然無事니라
又曰
原注
朱子曰
今一念之間 中無私主 便謂之虛 事皆不妄이면 便謂之實이니 不是兩件事니라
○ 又曰
敬則內欲不萌하고 外誘不入이니 自其內欲不萌而言이면 則曰虛 自其外誘不入而言이라 故曰實이니 只是一時事
不可作兩截看也니라
一時主一銘하야 以告學者曰 有主則虛 神守其郛 無主則實이라 이니라
○ [按] 此下所摭程張論心之說 雖非正釋傳意하고 者 皆不可不致謹乎此也니라
原注
○ 又曰
原注
明道先生하야 修橋할새 하야 曾博求之民間이러시니 後因出入하야 見林木之佳者하면 必起計之心이어늘
因以此語 戒學者하시니라
○ 問凡事 須思而後이니 安可謂心不可有一事잇가 朱子曰
如何不思리오
但事過則不留於心 可也니라
○ 東萊呂氏曰
所謂無事者 非棄事也 但視之 如早起晏寢, 飢食渴飮하야 終日爲之而未嘗爲也
大抵胸次 常令安平和豫 則事至應之 自皆中節하야 心廣體胖하고 百疾俱除하리니 蓋養生養心 同一法也
荀子言喜事至則和而理하고 라하니 理者 有條理而不亂之謂니라
原注
○ 又曰
蓋方其閱時 心必喜 旣喜則如種下種子니라
又曰
疑病者 未有事至時 先有疑端在心이요 先有周事之端 在心이니 皆病也니라
原注
朱子曰
不可有一物이라
外面 酬酢萬變 都只是隨其分限應去 纔繫於物이면 心便爲其所動하나니라
其所以繫於物者 有三하니 하며 正應事之時 意有偏重이니 這都是爲物所繫縛이라
旣爲所繫縛이면 便有這箇物事 及別事來到面前 應之便差了하나니
這如何會得其正이리오
聖人之心 瑩然虛明하야 無纖毫形迹하야 事物之來 若小若大 四方八面으로 莫不隨物隨應하니 此心 元不曾有這箇物事니라
○ 東萊呂氏曰
喜事 則方寸不凝定이라
故擇義不精하고 衛生不謹이니라
原注
○ 張子曰
正心之始 當以己心爲嚴師하야 如此一二年間 守得牢固 則自然心正矣리라
又曰
定然後有光明이니 若常移易不定이면 何由光明이리오
大抵하니라야 乃光明이라
故大學 하니 心多 則無由光明이니라
西山眞氏曰
多者 思慮紛雜之謂니라
原注
○ 問大學誠意 如何便可以平天下잇가 龜山楊氏曰
後世 自是無人正心이니 正得心이면 其效自然如此니라
心一念之間 毫髮有差 便是不正이니라
原注
○ 朱子曰
古人言이라하니 須心有이라야 始得이니라
原注
○ 又曰
人只有箇心하니 若不降伏得이면 更做麽人이리오
原注
○ 又曰
世俗之學 所以與聖賢不同者 亦不難見이라
聖賢 直是眞箇去做하시니 說正心 直要心正하고 說誠意 直要意誠하고 修身齊家 皆非空言이러니 今之學者 說正心 但將正心하야 吟詠하고 說誠意 又將誠意하야 吟詠一餉하고 說修身 又將聖賢許多說修身處하야 諷誦而已 或掇拾言語하고 綴緝時文하나니 如此爲學이면 却於自家身上 有何交涉이리오
須用著意理會니라
今之朋友 固有樂聞聖賢之學이나 而終不能去世俗之陋者 無他하니 只是志不立耳
學者 大要立志 是也니라
原注
○ 一日 因論讀大學하야 諸生 答以每爲念慮攪擾한대
只是不敬이니 是常惺惺法이라
以敬爲主 則百事皆從此做去니라
今人
自不知心所在하고 都要理會他事하며 又要齊家治國平天下하나니 心者 身之主也
不理會心이면 是不用篙, 不使匙之謂也
只是敬이니 이면 看做甚麽事
原注
○ 問忿懥章한대
這心之正 하니 未有物時 秤無不平이라가 纔把一物在上面이면 便不平了하고
鏡中 先有一人在裏面이면 別一箇來 便照不得하나니라
這心 未有物之時 先有箇主張하야 이라
且如今人 說我做官이면이라하야 에도 也去抑他 這便是不正이니라
又問公私之別한대
譬如一件事 若係公衆이면 便心下 不大管하고 若係私己 便只管橫在胸中하야 念念不忘하나니 只此便是公私之辨이니라
原注
○ 問憂患恐懼四字 似一般이로소이다
不同하니 恐懼 是目下逼來得緊底 使人恐懼失措 憂患 是思慮預防將來有大禍福利害니라
又問 忿懥好 在我之事 可以勉强不做어니와 如憂患恐懼 是外面來底 不由自家로소이다
都不得이라
라도 須是自家有箇道理하야 處置得下하면 恐懼憂患 이니라
孔子畏匡人하시고 文王囚 死生在前了로되 聖人 處之恬然하시니
要見得道理分明이면 自然無此患이리라
原注
忿懥恐懼好樂憂患四者 喜怒哀樂之發이니 乃心之用而人所不能無者어늘 則何惡於是而便以爲不得其正哉
蓋當怒則怒 怒而不遷이요 當懼則懼 懼而非懾이요 可好則好 好而非欲이요 可憂則憂 憂而非傷이라야 是爲得此心體用之正이니 而非可以有無言之也
今以傳文觀之컨대 一則曰有所라하고 二則曰有所라하니 則是心之所主者 在此하니 其失也固矣로다
라하고 懼而曰恐懼라하고 好而曰好樂라하고 憂而曰憂患이라하니 卽其컨댄 則是情之所勝者 至此하니 其滯也深矣로다
夫以心主於此而失之固하고 情勝至此而滯之深이면 則此心 能得其正乎
夫無所喜怒憂懼而歸於寂滅 固非心之正體 有所喜怒憂懼而失之滯固 亦非心之正用이니 惟事至而隨應하고 物去而不留 其斯以爲正乎인저
非聖賢이면 其孰能若此리오
原注
① 張思叔 僕夫어늘 伊川先生曰 何不고하신대 思叔 慙謝하니라
原注
[按] 記伊川先生正心之學하니라
原注
② 伊川先生曰
呂與叔有詩云 이요
獨立孔門無一事하니 라하니
古之學者 惟務養性이요 其他則不學이러니 今爲文者 專務章句하야 悅人耳目하나니 旣務悅人이면 非俳優而何
原注
이어나 或行闇中 多有驚懼 何也
只是燭理不明이니 若能燭理 則知所懼者妄이니 何懼焉이리오
有人雖知此 然不免有懼心者 只是氣不充이라
須是涵養이니 久則氣充하야 自然物動不得이리라
然有懼心 亦是敬不足이니라
原注
④ 伊川陵之行할새 波濤洶湧하니 舟中之人 皆驚愕失措로되 獨伊川 凝然不動이러시니
岸上 有樵者厲聲問曰 舍去如斯
達去如斯아하니 이러라
原注
⑤ 又曰
古人 有捐軀隕命者하니 若不實見得이면 則烏能如此리오
須是實見得生不重於義, 生不安於死也
故殺身成仁하나니 只是成就一箇是而已니라
原注
⑥ 伊川 歸自涪州 氣貌容色 皆勝平昔이어시늘
門人 問何以得此닛고
學之力也로라
大凡學者 學處患難貧賤이니 若富貴榮達 卽不須學이니라
原注
太常
伊川先生之學 專以敬爲主하야 充養旣至하시니 固宜粹然一出於正也
夫一之微 若未過也로되 則戒其動心忍性하시니 蓋有所忿懥則不得其正일새요 懼于暗室之頃 未爲失也로되 則斥其燭理不明하시니 蓋有所恐懼則不得其正일새요
以至溺文章則惡其玩物하시고 遇患難則憫其不能舍生하시니 蓋有所好樂憂患이면 則俱不得其正일새라
夫人而能盡去其累 奚患不盡復其全乎
○ [按] 臧氏所論敬 이나 然深有警于學者니라
原注
① 朱子曰
某之氣質有病 多在忿懥로라
原注
[按] 記朱子正心之學이니 當與伊川先生事參觀이니라
原注
先生 一日 說及受贓者라가 怒形於言曰 호리라
徐又曰 今說公吏不合取錢이라호되 爲知縣者 自要錢矣라하시고 節節言之하사 爲之吁嘆하시니라
原注
③ 朱子曰
我只有一箇하니 如何兼得許多리오하고 自此 逐時去了로라
大凡人 知箇用心處 自無緣及得外事니라
原注
④ 問每有喜好適意底事 便覺有自私之心하니 若欲見理인댄 便與克下否잇가
此等事 見得道理分明이면 自然消磨了 似此迫切이면 却生病痛이니라
原注
⑤ 又曰
風俗尙鬼하니等處 朝夕如在鬼窟이라
鄕里 有所謂五通廟하니 最靈怪
煎迫令去호되 不往이러니
是夜 會族人하야 往官司할새 有灰하야 乍飮 遂動終夜하고 次日 又偶有一蛇在階旁하니 衆人하야 以爲不謁廟之故라하야늘
某告以臟腑 是食物不著이니 리오
中有某人하니 是向學之人이로되 亦來勸往하고 云亦是從衆이라하야늘
從衆何爲
不意公亦有此語라호라
原注
⑥ 問人患多懼하야 雖明知其不當懼 然不能克하니 莫若且强制此心하야 使不動否잇가
强制 也無了期 只是理明了 自是不懼니라
原注
或勸先生散學徒하고 閉戶省事하야 以避禍者어늘
先生曰
禍福之來 命也
이라하니 只是不去 便是默이니 不成屋下合說底話 亦不敢說이니라
原注
⑧ 有一朋友微諷云 先生 로소이다 先生曰
某又不曾上書自辨하고 又不曾하고 只是與朋友 講習古書하야 說這道理하노니 更不敎做 却做何事리오
論語首章 言人不知而不慍이면 不亦君子乎아하고 斷章 言 不知命이면 無以爲君子라하니
今人開口 이라호되 及遇小小利害하야는 便生趨避計較之心하나니라
古人 라도 視之如無物者 蓋緣只見得這道理 都不見那刀鋸鼎鑊일새라
如今朋友 하니 覺見此道日孤
令人意思不佳로라
原注
勉齋黃氏撰
先生爲學 窮理以致其知하고 反躬以踐其實하시니 其存之也虛而靜하고 其發之也果而確하며 其用之也應事接物而不窮하고 其守之也歷變履險而不易이라
至其養深積厚하야는 矜持者純熟하고 嚴厲者和平하야 心不待操而存하고 義不待索而精이로되 猶以爲義理無窮하고 歲月有限이라하야 常慊然有不足之意하시니라
從遊之士 誦習質疑 務學篤則喜見於言하고 進道難則憂形于色하시되
, 辨別義利, 毋自欺, 謹其獨之戒 未嘗不三致意焉하시니라
○ [按] 黃氏所記朱子心學 甚精하니 最宜體玩이니라


15. 정심장正心章
이른바 ‘몸을 닦는 것이 그 마음을 바루는 데에 있다’는 것은 마음에 분노하는 바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며,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며,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이것을 일러 ‘몸을 닦는 것이 그 마음을 바루는 데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原注
[原註]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네 가지는 모두 마음의 이니, 사람이 없을 수 없는 것이나 한 번(조금)이라도 이것을 두고(가지고 있고) 살피지 못한다면 욕심이 동하고 이 치우쳐서 의 행하는 바가 혹 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原注
또 말씀하였다.
“마음이 보존되지 않음이 있으면 몸을 검속檢束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군자君子는 반드시 이를 살펴서 하여 마음을 곧게 하는 것이니, 그런 뒤에야 이 마음이 항상 보존되어 몸이 닦아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原注
[附註]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마음속에 주재主宰가 있으면 (진실)해지니, 하면 밖의 근심이 들어오지 못하여 자연 일이 없게 된다.”
또 말씀하였다.
“주재가 있으면 해지니 가 들어오지 못함을 이르고, 주재가 없으면 해지니 외물外物(物慾)이 와서 빼앗음을 이른다.”
原注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이제 한 번 생각하는 사이에 마음속에 사사로운 주장이 없으면 곧 이것을 라 이르며, 일이 모두 망령되지 않으면 곧 이것을 이라 이르니, 두 가지 일이 아니다.”
○ 또 말씀하였다.
“공경하면 안의 욕심이 싹트지 않고 외물外物의 유혹이 들어오지 않으니, 안에 욕심이 싹트지 않는 것을 가지고 말하면 라 하며, 외물外物의 유혹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가지고 말하였으므로 이라 한 것이니, 다만 한 때의 일이다.
이것을 두 가지로 잘라 보아서는 안 된다.
언젠가 (한번은) 임용중林用中(林擇之)의 주일명主一銘을 들어서 배우는 자들에게 말씀하기를 ‘주재가 있으면 하여 이 그 성곽城郭(집)을 지키고 주재가 없으면 하여 귀신이 그 방안을 엿본다’ 하였다.”
○ [按] 이 아래에 뽑은 정자程子장자張子의 마음을 논한 말씀은 비록 전문傳文의 뜻을 바로 해석한 것이 아니나, 마음이 있어서(留滯되어) 편벽된 바가 있고 마음이 없어서 아는 바가 없는 자들은 다 여기에 삼감을 지극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原注
또 말씀하였다.
“마음에는 한 가지 일(사물)도 머물러 두어서는 안 된다.”
原注
명도선생明道先生전주澶州에 부임해 있으면서 다리를 보수할 적에 긴 들보감 한 개가 부족하여 일찍이 민간民間에 널리 구하였는데, 뒤에 출입함으로 인하여 산림山林의 나무 중에 아름다운 것을 보면 반드시 헤아려보는 마음이 일어나곤 하였다.
인하여 이 말씀을 가지고 배우는 자들을 경계한 것이다.
○ “모든 일을 반드시 생각한 뒤에야 통하니, 어찌 마음에는 한 가지 일도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일을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일이 지나가면 마음에 머물러 두지 않음이 옳은 것이다.”
동래여씨東萊呂氏가 말하였다.
“이른바 ‘일이 없다’는 것은 일을 버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보기를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자며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듯이 하여 종일토록 하여도 일찍이 의식적으로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대저 가슴속을 항상 평안하고 즐겁게 하면 일이 이르러 응함에 자연히 모두 절도節度에 맞아서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펴지며 온갖 병이 모두 제거될 것이니, 양생養生양심養心이 똑같은 방법이다.
순자荀子가 말하기를 ‘기쁜 일이 이르면 화하게 다스리고 근심스러운 일이 이르면 고요히 다스린다’ 하였으니, 란 조리가 있어서 어지럽지 않음을 이른다.”
原注
또 말씀하였다.
기사機事를 보기를 오랫동안 하면 기심機心이 반드시 생겨나게 된다.
그리하여 기사機事를 볼 때에 마음이 반드시 기뻐질 것이니, 이미 기뻐하면 나쁜 종자種子를 심어 놓는 것과 같다.”
또 말씀하였다.
“의심스러운 병이 있는 자는 일이 이르지 않았을 때에 먼저 의심하는 단서가 마음속에 있고, 일을 주라周羅(두루 망라함)하는 자는 먼저 일을 망라하려는 단서가 마음속에 있으니, 모두 병통이다.”
原注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마음에는 한 가지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외면外面에 만 가지 변화를 수작酬酌함을 모두 다만 그 분한分限(分數)에 따라 응할 뿐이니, 조금이라도 사물에 얽매이면 마음이 곧 동요되고 만다.
사물에 얽매이는 것은 세 가지가 있으니, 혹은 일이 오기 전에 자신이 먼저 기대하는 마음이 있으며, 혹은 일에 이미 응한 뒤에 또 항상 가슴속에 두고 있어서 잊지 못하며, 바로 일에 응할 때에 뜻에 편중偏重함이 있는 것이니, 모두 사물에 매이고 속박당하는 것이다.
이미 매이고 속박 당하면 곧 이러한 사물이 있게 되니, 딴 일이 면전에 왔을 때에 응하면 곧 잘못된다.
어떻게 그 바름을 얻을 수 있겠는가.
성인聖人의 마음은 환하게 비고 밝아서 털끝 만한 형적形迹도 없어 사물이 올 적에 작은 것과 큰 것을 사방四方팔면八面으로 사물에 따라 응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마음에 원래 이러한 사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동래여씨東萊呂氏가 말하였다.
“일을 좋아하면 방촌方寸(마음)이 응정凝定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를 택함에 정밀하지 못하고 을 보전함에 삼가지 못하는 것이다.”
原注
장자張子가 말씀하였다.
“마음을 바루는 초기에는 자신의 마음을 엄한 스승으로 삼아서 무릇 동작함이 있을 적에 두려워(공경)할 줄을 알아야 하니, 1, 2년 동안 이와 같이 하는 사이에 지킴이 견고해지면 자연 마음이 바루어질 것이다.”
또 말씀하였다.
“마음이 안정된 뒤에야 광명光明함이 있으니, 만약 항상 옮기고 바뀌어 안정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광명할 수 있겠는가.
주역周易》에 대저 간괘艮卦를 그침(머물러 안정함)으로 삼았으니, 그쳐야 비로소 광명해진다.
그러므로 《대학大學》에 하여 생각함에 이르렀으니, 사람이 마음이 많으면 광명할 수가 없다.”
서산진씨西山眞氏가 말하였다.
“마음이 많다는 것은 사려思慮가 분분하고 번잡함을 이른다.”
原注
“《대학大學》에 뜻을 성실히 함에 어떻게 곧 천하를 평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구산양씨龜山楊氏가 말씀하였다.
“후세에는 진실로 마음을 바룬 사람이 없으니, 마음을 바루면 그 효험이 자연 이와 같은 것이다.
마음은 한 번 생각하는 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차실差失이 있으면 곧 바르지 못한 것이다.”
原注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고인古人이 ‘뜻은 장수이고 마음은 군주’라고 말하였으니, 모름지기 마음에 주장함이 있어야 비로소 되는 것이다.”
原注
또 말씀하였다.
“사람이 다만 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만약 항복시키지 못한다면 다시 어떠한 사람이 되겠는가.”
原注
또 말씀하였다.
“세속의 학문이 성현聖賢과 다른 까닭은 또한 알기가 어렵지 않다.
성현聖賢은 곧바로 진실하게 하시니, 정심正心을 말할 때에는 곧 마음이 바르고 성의誠意를 말할 때에는 곧 뜻이 성실하고 수신修身제가齊家도 모두 빈말이 아니었는데,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정심正心을 말할 때에는 다만 정심正心을 가지고 잠시 읊을 뿐이요, 성의誠意를 말할 때에도 성의誠意를 가지고 잠시 읊을 뿐이요, 수신修身을 말할 때에도 성현聖賢이 허다하게 수신修身을 말씀한 부분을 가지고 입으로만 욀 뿐이며 혹은 언어言語를 주워 모으고 시문時文(科文)을 엮어 지으니, 이와 같이 학문을 하면 자기 신상身上에 무슨 교섭交涉(상관)이 있겠는가.
여기에 반드시 뜻을 써서 이회理會하여야 한다.
지금의 붕우朋友 중에 진실로 성현聖賢의 학문을 듣기 좋아하는 자가 있으나 끝내 세속의 누추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딴 이유가 없으니, 다만 뜻이 서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배우는 자는 대저 뜻을 세워야 하니, 잠시라도 배우면 곧 성인聖人이 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原注
하루는 《대학大學》을 읽는 방법을 논하다가 제생諸生들이 언제나 생각이 요란하다고 대답하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이는 다만 공경하지 않기 때문이니, 은 항상 마음을 깨우는 법이다.
으로써 주장을 삼으면 모든 일이 다 이로부터 해나가게 된다.
지금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이회理會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자신의 마음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고 모두 딴 일을 이회理會하려고 하며 또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하려고 하니, 마음은 몸의 주장이다.
배를 부리려면 모름지기 상앗대를 사용하여야 하고 밥을 먹으려면 모름지기 수저를 사용하여야 하니, 마음을 이회理會하지 못한다면 이는 배를 부림에 상앗대를 사용하지 않고 밥을 먹음에 수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을 잡는 것은 단지 이니, 조금(잠시)만 하면 무슨 일을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산에 오르는 것도 다만 이 마음이요 물에 들어가는 것도 다만 이 마음인 것이다.”
原注
대학大學》의 분치장忿懥章을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이 마음의 바름은 저울과 똑같으니, 〈저울 위에〉 물건이 놓여 있지 않았을 때에는 저울이 평평하지 않음이 없다가 조금이라도 한 물건을 그 위에 놓으면 곧 평평하지 못하게 된다.
거울 속에 먼저 한 사람의 모습이 그 속에 있으면 딴 것이 올 적에 제대로 비출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마음이 사물이 있지 않을 때에 먼저 하나의 주장이 있어서 내가 어떻게 일을 처리하려 한다고 말하면 곧 바르지 못하게 된다.
우선 예를 들면 지금 사람들이 내가 벼슬살이를 하면 강한 자를 억제하고 약한 자를 붙들어주겠다고 말하여, 〈아랫사람이〉 마땅히 강하게 해야 할 일을 〈강하게 함을〉 만났을 경우에도 저를 〈강한 사람이라 하여〉 억제한다면 이는 곧 바르지 못한 것이다.”
공사公私의 구별을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비유하건대 한 가지 일이 만약 공중公衆에 관계되면 마음에 크게 상관하지 않고, 만약 자신에게 관계되면 이것만은 가슴속에 걸려 있어서 생각하고 생각하여 잊지 못하니, 다만 이것이 곧 의 구별이다.”
原注
우환憂患공구恐懼 네 글자는 똑같은 뜻인 듯합니다.”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똑같지 않으니, 공구恐懼목하目下(당장)에 핍박함이 긴급한 것이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공구恐懼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게 하는 것이요, 우환憂患은 장래에 큰 화복禍福이해利害가 있음을 사려思慮하여 미리 방비하는 것이다.”
또 “분치忿懥호악好樂는 나에게 있는 일이니, 억지로 힘써서 하지 않을 수 있으나 우환憂患공구恐懼같은 것은 외면에서 오는 것이니, 자신에게 말미암지 않습니다.”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모두 그렇지 않다.
곧 (비록) 외면에서 오는 것이라도 모름지기 자신에게 알맞는 도리道理가 있어서 제대로 처치處置하면 공구恐懼우환憂患도 단지 공연空然한 것일 뿐이다.
공자孔子땅 사람들을 경계하시고 문왕文王유리羑里에 갇혀 있었는데, 죽고 사는 것이 눈앞에 있었으나 성인聖人이 태연히 대처하셨다.
다만 이것을 보면 곧 그러하니, 요컨대 도리道理를 봄이 분명하면 자연 이러한 근심이 없을 것이다.”
原注
인산김씨仁山金氏(金履祥)가 말하였다.
분치忿懥공구恐懼호악好樂우환憂患 네 가지는 이 발한 것이니, 바로 마음의 이어서 사람이 없을 수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것을 미워하여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고 말하였는가.
마땅히 노해야 하면 노하되 노하면서도 옮기지 않으며, 마땅히 두려워해야 하면 두려워하되 두려워하면서도 공포에 떨지 않으며, 좋아할 만하면 좋아하되 좋아하면서도 욕심 내지 않으며, 근심할 만하면 근심하되 근심하면서도 상심하지 않아야 이 마음의 이 바름을 얻은 것이 되니, 있고 없음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전문傳文을 가지고 관찰하면 첫 번째도 유소有所라고 말했고 두 번째도 유소有所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마음의 주장하는 바가 여기에 있는 것이니, 그 잘못됨이 확고하다.
분함을 분치忿懥라 하고 두려움을 공구恐懼라 하고 좋아함을 호악好樂라 하고 근심함을 우환憂患이라 하였으니, 중첩한 말을 가지고 보건대 의 이김이 이에 이른 것이니, 집체執滯함이 깊다.
마음이 이것을 주장하여 잘못됨이 확고하고 의 이김이 이에 이르러 집체執滯함이 깊으면 이 마음이 바름을 얻을 수 있겠는가.
기뻐하고 노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어서 적멸寂滅로 돌아가는 것도 진실로 마음의 올바른 가 아니요, 기뻐하고 노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서 집체執滯하고 고집固執함에 잘못되는 것도 또한 마음의 올바른 이 아니니, 오직 사물이 이르면 따라서 응하고 사물이 가면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 이것이 바름이 될 것이다.
성현聖賢이 아니면 그 누가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原注
장사숙張思叔(張繹)이 복부僕夫(마부)를 심하게 꾸짖자, 이천선생伊川先生이 말씀하기를 “어찌하여 마음을 (분발)하고 성질을 참지 않는가?” 하시니, 장사숙張思叔은 부끄러워하여 사죄하였다.
原注
[按] 이 아래에 뽑은 여섯 조목은 이천선생伊川先生의 마음을 바루는 학문을 기록한 것이다.
原注
이천선생伊川先生이 말씀하였다.
여여숙呂與叔에 ‘배움은 원개元凱(杜預)와 같으면 비로소 을 이루고 문장은 사마상여司馬相如와 같으면 자못 배우와 같네.
오직 공문孔門에는 한 가지 일도 없으니, 다만 안씨顔氏의 마음을 공경함만 못하다네’ 하였다.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을 기름을 힘썼고 그 나머지는 배우지 않았는데, 지금에 문장을 짓는 자들은 오로지 장구章句에 힘써서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기쁘게 하니, 이미 남을 기쁘게 하기를 힘쓴다면 배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原注
③ “홀로 한 방안에 거처하거나 혹은 어둠 속을 다닐 때에 놀람과 두려움이 많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다만 이치를 밝힘이 분명하지 못해서이니, 만약 이치를 밝게 안다면 두려움이 망령된 것임을 알 것이니,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사람들이 비록 이것을 아나 두려운 마음이 있음을 면치 못하는 것은 다만 충만充滿하지 못해서이다.
모름지기 함양涵養을 하여야 하니, 오래되면 가 충만해져서 자연 물건이 동요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은 또한 공경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原注
이천伊川부릉涪陵으로 유배갈 적에 염여퇴灎澦堆(염여퇴)를 지나가는데 파도가 사납게 일자, 배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어찌할 줄 몰랐으나 홀로 이천伊川응연凝然히(태연히) 동요하지 않았다.
강안江岸에서 나무하던 자가 큰 소리로 묻기를 “목숨을 버릴 작정을 하여 이러한 것인가?
도리道理를 통달하여 이러한 것인가?” 하였는데, 이에 답하고자 하였으나 배가 이미 떠나가서 대답하지 못하였다.
原注
⑤ 또 말씀하였다.
“옛사람들은 몸을 버리고 목숨을 버린 자가 있었으니, 만약 실제로 보지 못하였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사는 것이 보다 중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죽음보다 편안하지 못함을 실제로 보았다.
그러므로 몸을 죽여 을 이룬 것이니, 다만 하나의 옳음을 성취할 뿐이다.”
原注
이천伊川부주涪州에서 돌아옴에 기모氣貌용색容色과 수염이 모두 평소보다 나아졌다.
문인門人이 어떻게 하여 이렇게 되셨느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학문學問의 힘이다.
대체로 배우는 자는 환난患難빈천貧賤에 대처함을 배워야 하니, 부귀富貴영달榮達로 말하면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
原注
태상太常 장격臧格시의諡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천선생伊川先生의 학문은 오로지 을 주장하여 충양充養함이 이미 지극하니, 진실로 순수하게 한결같이 바름에서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한 번 성내고 꾸짖는 하찮은 것은 허물이 되지 않을 듯하나 마음을 동하고 성질을 참으라고 경계하였으니, 마음에 분치忿懥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요, 어두운 방에 있을 때에 한 번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이 잘못이 되지 않지만 이치를 밝힘이 분명하지 못함을 배척하였으니, 이는 공구恐懼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장文章에 빠짐에는 물건을 좋아하여 뜻을 잃음을 미워하고 환난患難을 만남에는 생명生命을 버리지 못함을 민망히 여겼으니, 좋아하고 걱정하는 바가 있으면 모두 그 바름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음의 (사물에 얽매임)를 모두 제거한다면 그 온전함을 다 회복하지 못함을 어찌 걱정하겠는가.”
○ [按]장씨臧氏가 논한 은 《장구章句》와 부합하지 않으나 배우는 자들에게 깊이 경계됨이 있다.
原注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나의 기질氣質의 병통은 대부분 분치忿懥에 있노라.”
原注
[按] 이 아래에 뽑은 여덟 조목은 주자朱子의 마음을 바루는 학문學問을 기록하였으니, 마땅히 이천선생伊川先生의 일과 참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原注
왕유관王幼觀(王過)이 말하였다.
선생先生(朱子)이 하루는 장물贓物을 받는 자를 언급하시다가 노기怒氣가 말씀에 나타나 이르기를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다만 얼굴에 큰 글자로 묵형墨刑을 가하여 유배 보내리라’ 하였다.”
천천히 또 말씀하기를 “지금 공리公吏들은 돈을 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나 지현知縣(縣令)이 된 자가 스스로 돈을 요구한다.”고 하시고는 구구절절句句節節 이를 말씀하면서 한탄하였다.
原注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나는 옛날에 또한 배우지 않는 것이 없고자 하여, 선도禪道문장文章, 초사楚詞, 병법兵法을 일마다 모두 배우고자 해서 출입할 때에 무수한 문자文字를 일마다 기록하려고 두 책을 장만해 두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생각하기를 ‘우선 긴요치 않다.
나는 다만 하나의 혼신渾身(온전한 몸)이 있을 뿐이니, 어떻게 허다한 것을 겸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이로부터 그때마다 제거하였다.
대체로 사람이 마음을 써야 할 곳을 알면 자연 밖의 일에는 미칠 수가 없게 된다.”
原注
④ “언제나 기쁘고 좋아서 뜻에 맞는 일이 있으면 곧 스스로 사사로이 하려는 마음이 있음을 깨달으니, 만약 이치를 보고자 한다면 이것을 곧 이겨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이러한 일은 도리道理를 봄이 분명하면 자연 사라지게 되니, 이와 같이 절박하게 하면 도리어 병통이 생겨난다.”
原注
⑤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풍속이 귀신鬼神을 숭상하니, 신안新安지방과 같은 곳은 아침저녁으로 귀신의 굴속에 있는 듯하다.
향리鄕里에 이른바 오통묘五通廟라는 것이 있는데, 가장 영험하고 괴이하다고 소문이 났다.
내가 처음 고향으로 돌아오자 종인宗人(일가친족)들이 핍박하여 이곳에 가게 하였으나 나는 가지 않았다.
이날 밤에 집안 사람들이 모여 관사官司에 가서 술을 받아다가 마셨는데, 술에 (재)가 들어 있어 조금 마시자 마침내 오장육부五臟六腑가 뒤틀려 밤새도록 배앓이를 하였으며, 다음 날 또 우연히 뱀 한 마리가 나와 계단 옆에 있으니, 사람들은 시끄럽게 떠들며 오통묘五通廟를 배알하지 않은 탓이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말하기를 ‘오장육부五臟六腑가 뒤틀린 것은 음식이 맞지 않아서이니, 저것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오통묘五通廟를 억지로 끌어다 대지 말라’ 하였다.
이 가운데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학문學問을 지향하는 사람이었으나 또한 와서 나더러 가라고 권하고, 또한 ‘사람들을 따르라’고 권하였다.
이에 나는 말하기를 ‘어찌하여 사람들을 따른단 말인가?
마저도 이러한 말을 할 줄은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였다.”
原注
⑥ “사람이 두려움이 많음을 걱정하여 비록 두려워해서는 안 됨을 분명히 아나 이겨내지 못하니, 우선 이 마음을 억지로 제재하여 동하지 않게 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다만 억지로 제재하면 끝날 때가 없으니, 다만 이치가 밝아지면 자연히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原注
위학당僞學黨이 일어나자, 혹자가 선생先生에게 학도學徒들을 해산하고 문을 닫고 일을 줄여서 를 피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선생先生이 말씀하였다.
화복禍福이 오는 것은 천명天命이다.
‘침묵함이 몸을 용납할 수 있다’ 하였으니, 다만 가서 신문고申聞鼓를 두드려 억울함을 하소연하지 않는 것이 바로 침묵이니, 집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말도 또한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原注
⑧ 한 붕우朋友가 은미하게 풍간諷諫하기를 “선생先生은 하늘이 나에게 을 내려 주었다는 의사意思만 있으시고 미복微服으로 나라를 지나가는 뜻이 없으십니다.” 하고 말하자, 선생先生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내가 일찍이 글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지도 않았고, 또 일찍이 를 지어 비방하지도 않았으며, 다만 붕우朋友들과 옛책을 강습講習하여 이 도리道理를 말할 뿐이니, 다시 이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무슨 일을 하겠는가.
논어論語》의 수장首章에 ‘사람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으면 군자君子가 아니겠는가’ 하였고, 마지막 에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君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 사람들은 입만 열면 또한 한 번 마시고 한 번 먹는 것에도 자연 정해진 분수分數가 있다고 말할 줄을 알지만 소소小小이해利害를 당하게 되면 곧 이익을 따르고 해를 피하여 계교計較하는 마음을 낸다.
옛사람이 칼과 톱이 앞에 있고 솥과 가마솥이 뒤에 있어도 이러한 물건을 보기를 없는 것처럼 여긴 것은 다만 이 도리道理만을 보고 저 칼과 톱과 솥과 가마솥 따위는 전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붕우朋友들은 모두 이것(聖人의 말씀)을 믿지 않으니, 이 가 날로 외로워짐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이 좋지 못하게 한다.”
原注
면재황씨勉齋黃氏한 〈주자朱子의〉 행장行狀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생先生은 학문을 할 적에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지극히 하고 자기 몸에 돌이켜 실제를 행하시니, 마음에 보존함은 하고 고요하며, 외면에 발함은 과단하고 확고하며, 씀은 사물을 응접하여 다하지 않고, 지킴은 변고와 험한 일을 당해도 변치 않았다.
존양存養함이 깊고 쌓임이 두터움에 이르러서는 억지로 긍지矜持하던 것이 순수해지고 익숙해지며 엄하던 것이 화평해져서 마음을 굳이 잡으려고 하지 않아도 보존되고 를 굳이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해졌으나 오히려 생각하기를 ‘의리義理는 무궁하고 세월歲月은 유한하다’ 하여 항상 겸연慊然히 부족하게 여기는 뜻이 있으셨다.
종유從遊하는 선비들이 강습講習하고 질문할 적에 학문을 힘쓰는 것이 독실하면 기뻐하는 기색이 말씀에 나타났고, 에 나아가는 것이 어려우면 걱정하는 기색이 얼굴빛에 나타나셨다.
그러나 자신을 위하고 실제를 힘쓰며 를 분별하고 스스로 속이지 않으며 홀로를 삼가는 경계에 있어서는 일찍이 세 번 뜻을 다하지 않음이 없으셨다.”
○ [按]황씨黃氏가 기록한 주자朱子심학心學이 매우 정밀하니, 가장 잘 체험하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역주
역주1 正心章 : 《大學章句》 傳7章에 보인다.
역주2 : 치
역주3 [釋疑]不得其正 : 朱克履는 말하기를 “經文에 말한 正心은 體用을 겸하여 말하였고, 傳文에 말한 正心은 오로지 用만 가지고 말했다.” 하였다. 胡雲峯(胡炳文)은 말하기를 “正其心의 正字는 마음을 바루는 공부를 말하였고, 不得其正의 正字는 마음의 體를 말했다.” 하였다. 羅整庵(羅欽順)은 말하기를 “이른바 不得其正이란 마음의 體를 가리켜 말한 듯하다.” 하였다. ○ 徽菴程氏는 《章句》와 《或問》에 근거하여 朱克履, 胡雲峯, 羅整庵 세 사람의 說을 비판하기를 “《章句》에는 ‘用의 행하는 바가 혹 그 바름을 잃는다’고 하였고, 《或問》에도 ‘이 마음의 用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고 하여, 일찍이 體의 바르고 바르지 않음을 말하지 않았다.” 하였다.
역주4 : 요
역주5 [釋疑]身{心}有所忿懥 …… 有所憂患 : 忿懥, 恐懼, 好樂, 憂患 네 가지는 七情에서 세 가지를 뽑은 것인데, 七情 중에 오직 憂患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또한 七情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補註]七情은 喜‧怒‧哀‧樂‧愛‧惡‧欲, 또는 喜‧怒‧哀‧樂‧愛‧惡‧懼인 바, 忿懥는 怒이고, 恐懼는 懼, 好樂는 樂이므로 七情에서 세 가지를 뽑았다고 한 것이다.
역주6 [刊補]心不在焉 : 或者는 마음이 ‘軀殼(몸) 안에 있다’ 하고, 或者는 ‘視聽上에 있다’ 하는데, 이 두 가지 說을 합하여 보아야 한다. 이는 마음이 軀殼에 있어야 비로소 視聽上에 있을 수 있으니, 곧 內에 主하여 外에 應하는 것이요 양쪽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마음이 軀殼에 있지 않다면 視聽上에 있을 수 있는 이치가 없으니, 마음이 이미 外物을 쫓아 가버려 主宰할 수 없기 때문이다. 本文인 ‘心不在焉’의 의미와 《章句》의 ‘心有不存’의 說을 자세히 玩味해 보건대 ‘만약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면[若不能存心]’으로 해석한다면 온당치 못하고, ‘마음이 만약 있지 아니하면[心若不在]’이라고 해석해야 옳다. 옛날에도 이러한 해석이 있었는데, 이는 마음이 主宰를 상실했을 때를 곧바로 가리켜 그 병통을 말한 것일 뿐이요, 애당초 사람이 마음을 잡지 못하면 이러한 병통이 생김을 경계한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章句》에서는 단지 ‘마음이 보존되지 않음이 있으면 그 몸을 檢束할 수가 없다[心有不存則無以檢其身]’라는 말로 곧장 바른 뜻을 해석하였고, 뒤이어 “이 때문에 君子는 반드시 이를 살펴서 敬하여 마음을 곧게 한다. …… ”고 하여, 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本文에 쓰여져 있지 않은 뜻을 미루어 말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省察하고 操存하는 功夫를 加하여 마음이 主宰를 상실하는 병통을 구제하게 하였으니, 《章句》의 정밀하고 자세함이 이와 같다. [補註] ‘이러한 해석’이란 마음이 ‘軀殼 안에 있다’ 하고, 또는 ‘視聽上에 있다’는 혹자의 해석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역주7 [釋疑]人所不能無者 : 없을 수 없는 것은 天理의 바름이니, 조금이라도 有所에 해당하면 이미 人欲의 私로 흐른 것이다. [補註]有所는 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大學》 原文의 有所忿懥, 有所恐懼 등 네 가지를 가리킨 것이다.
역주8 [釋疑]然一有之 : 一有는 조금 있는 것이다. 마음의 體가 虛明하여 밝은 거울과 잔잔한 물과 같으니, 기쁨[喜]과 노여움[怒], 근심[憂]과 두려움[懼]이 올 적에 뜬구름이 지나가는 것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두어서는 안 된다. 一有란 말은 다른 책에도 자주 보인다. 《中庸》의 12章 註에 “조금이라도 不誠이 있으면 人欲이 틈탄다.[一有不誠 則人欲間之]” 하였고, 또 이르기를 “조금이라도 不誠이 있으면 이 아홉 가지가 모두 虛文이 된다.[一有不誠 則是九者爲虛文]”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조금 있다는 뜻이다.
역주9 [釋疑]敬以直之 : 本章에서는 敬을 말하지 않았는데, 《章句》에서 말하였으니, 마음을 바루는 중요한 法을 열어 보여서 後學들을 경계하고 채찍질한 뜻이 지극하다.
역주10 [釋疑]中有主則實 …… 無主則實 : 위의 ‘有主則實’의 實字는 성실함이고 아래 ‘無主則實’의 實字는 꽉찬 것이니, 有主의 實은 이치가 진실한 것이고 無主의 實은 욕심이 꽉찬 것이다.
역주11 [釋疑]林用中 : 字는 擇之이니 朱子의 門人이다.
역주12 [釋疑]鬼闞其室 : 揚子(揚雄)가 말하기를 “高明한 집에 귀신이 그 방을 엿본다.” 하였다.
역주13 [刊補]心存而有所偏勝 : 〈正心章〉 제1절에 해당된다.
역주14 [刊補]心亡而無所知識 : 〈正心章〉 제2절에 해당된다.
역주15 [刊補]心不可有一事 : 退溪가 金惇敍에게 답하기를 “衆理를 갖추어 萬事에 응하는 것이 마음이다. 그런데 지금 ‘한 가지 일도 마음속에 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겠다. 또 선한 일도 마음속에 항상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의심스러우니, 이것을 알기는 더욱 쉽지 않다. 일 자체는 마음의 병통이 되지 않으나 이것을 마음속에 머물러 두면 병통이 된다. 이러한 까닭에 善事와 惡事, 大事와 小事를 불문하고 한 가지도 마음속에 머물러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였다.
역주16 [釋疑]澶州 : 明道가 일찍이 이 고을의 幕官(막료)이 되었었다.
역주17 [釋疑]少一長梁 : 少는 無와 같다.
역주18 : 탁
역주19 [釋疑]憂事至則靜而理 : 만약 부모의 걱정스러운 일을 당한다면 비록 범연한 憂患과는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겠으나, 또한 事理의 分限을 따라 각각 그 道理를 다해서 동요하거나 혼란함이 없다면 또한 고요히 다스린다고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역주20 [釋疑]閱機事之久 機心必生 : 機事는 일에 機巧한 것이고, 機心은 利害에 관계되는 일에 꾀를 쓰고 재주를 써서 대응함을 이른다.
역주21 [刊補]周羅事 : 두루두루 망라한다는 뜻과 같다.
역주22 [刊補]或事未來而自家先有期待底心 …… 不能忘却 : 退溪가 金惇敍에게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이 두 가지는 ‘한 가지 일도 마음속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동일한 心法이다. 晦菴先生이 일찍이 이것을 延平先生에게 질문하였는데, 답하기를 “上蔡가 ‘저는 일찍이 잊는 법을 익혀서 養生을 합니다’ 하자, 明道는 ‘이것을 養生이나 養氣에 적용하면 무방하지만 道에 적용하면 폐해가 있다. 孟子의 「반드시 여기에 일삼되(從事하되) 미리 효과를 기대하지 말라.[必有事焉而勿正]」는 것은 무엇을 이르는가? 또 出入하고 起居하는데 차라리 일삼음이 없는 것이 낫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에 미리 효과를 기대하여 기다린다면 일에 앞서 맞이하는 것이며, 잊으면 생각을 버림에 해당하고 助長하면 마음을 둠에 가깝다. 그러므로 聖人의 마음은 거울과 같으니, 이것이 釋氏의 마음과 다른 이유이다’ 하였다. 평소 고요한 곳에서는 體認하여 공부를 하고 시끄러운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게 하니, 일찍이 이와 같이 힘을 쓰지 않은 것이다. 자네는 오직 일상생활 하는 곳에서 공부를 하여야 거의 점점 합하여 자신의 일이 될 것이다.” 하였다. 사람들은 한갓 마음이 事物에 의해 물드는 弊害만을 보고는 마침내 ‘事物은 마음의 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일을 싫어하고 잊으려고 하며 動을 싫어하고 靜에 빠져드니, 上蔡와 같은 賢人으로서도 오히려 이를 면치 못하였다. 明道는 養氣說을 인용하여 存心法으로 삼았는데, 만약 여기에 從事하여 얻는 바가 있으면 마음이 事物에 대하여, 오기 전에는 미리 맞이하지 않을 것이요, 오면 제대로 살필 것이며, 응한 뒤에는 마음에 머물러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本體가 明鏡止水와 같이 담담하여 비록 날마다 萬事를 접하더라도 마음속에는 한 가지 사물도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니, 어찌 마음의 해로움이 될 것이 있겠는가.
역주23 [釋疑]凡有動作 則知所懼 : 이는 마음의 발함과 발하지 않음, 일의 응함과 응하지 않음을 막론하고 엄숙하여 上帝가 강림한 듯이 공경하는 것이다.
역주24 [釋疑]以艮爲止 : 그침은 艮의 德이니, 한 陽이 두 陰의 위에 멈춰 있다. 그러므로 그치는 것이다.
역주25 [譯註]定而至於能慮 : 《大學》 經文 1章의 “그칠 데를 안 뒤에 定함이 있으니, 定한 뒤에 능히 고요하고, 고요한 뒤에 능히 편안하고, 편안한 뒤에 능히 생각하고, 생각한 뒤에 능히 얻는다.[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한 것을 가리킨다.
역주26 [釋疑]志帥(수)心君 : 孟子가 말씀하기를 “뜻은 기운의 장수이다.” 하였고, 荀子가 말하기를 “마음은 형체의 군주이다.” 하였다.
역주27 [刊補]主張 : 主宰하여 편다는 말과 같다.
역주28 : 삼
역주29 [釋疑]一餉 : 한 번 밥을 먹는 짧은 시간을 이른다.
역주30 [釋疑]這裏 : 上文의 聖賢부터 空言까지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역주31 [釋疑]纔學 便做聖人 : 孟子가 曹交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堯임금의 의복을 입고 堯임금의 행실을 행한다면 이는 堯임금일 뿐이다.” 하였고, 顔淵은 말하기를 “훌륭한 일을 하는 자는 또한 이 舜임금과 같게 된다.” 하였으니, 모두 이 뜻이다. [補註]顔淵은 일찍이 “舜임금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훌륭한 일을 하는 자는 누구나 이 순임금과 같게 된다.” 하였는데, 이 말씀을 축약하여 쓴 것으로 《孟子》 〈滕文公 上〉에 보이며, 孟子가 曹交에게 한 말씀은 〈告子 下〉에 보인다.
역주32 [刊補]都不理會我底 : 윗 글에 ‘敬을 爲主로 한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볼 때에 敬의 說로 보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지 ‘사람들은 모두 자신에게 있는 일을 힘쓰지 않고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한결같이 남을 다스리는 일만을 힘쓴다’고 말한 것일 뿐이요, 敬에 대해 말한 것은 볼 수가 없다. 敬으로 말하면 이는 자신을 理會할 때에 마음을 보존하는 방법일 뿐이다.
역주33 [釋疑]撑(탱)船에 須用篙(호)요 喫飯에 須使匙 : 이 조목의 뜻은 사람을 다스리고자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지 않는 것은 마치 상앗대 없이 배를 운행하는 것과 같고 수저 없이 밥을 먹는 것과 같으니, 아래의 이른바 敬字는 마음을 理會하는 方道이다.
역주34 [釋疑]攝心 : 攝은 檢攝(檢察하고 조심)함이다.
역주35 : 攙
역주36 [釋疑]才(纔)敬 …… 入水亦只這箇心 : 마음을 잡아 지키는 것은 다만 敬이니, 조금이라도 敬하면 마음이 보존되고 마음이 보존되면 다만 하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보아서 모두 이 마음으로 해 나가니, 산에 오르고 물에 들어가는 것도 모두 이 마음을 위주로 한다.
역주37 [釋疑]却如秤一般 : 秤(칭)은 稱과 같으니, 저울의 총칭이다. [刊補]一般은 서로 같다라는 말과 같다. 또 一種이라는 뜻도 된다.
역주38 [釋疑]說道我要如何處事 便是不正 : 이는 먼저 기대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바르지 않은 것이다.
역주39 [刊補]抑强扶弱 : 强은 지금의 豪强이란 말과 같다.
역주40 [釋疑]及遇著當强底事 : 사람이 관원이 되기 전에 먼저 豪强을 억제하려는 마음을 두고 있으면 관원이 되었을 때에 관청의 하급관리들이 마땅히 강하게 대처해야 할 일을 만나 강하게 하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이것을 豪强이라고 여겨서 억제하니, 이것을 일러 바르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역주41 : 요
역주42 [刊補]便是外面來底 : 退溪가 趙士敬에게 답하기를 “비록 外面에서 오는 것이라도 응당 자기에게 道理가 있어서 이를 處置하여야 옳다는 말이니, 단지 喜怒는 나에게 있는 것이어서 힘써 억제해야 하고 憂懼는 나로부터 말미암지 않는 것이어서 힘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 便是는 ‘雖是’의 語勢로 풀이해야 된다.
역주43 [釋疑]只是徒然 : 徒然은 한갓, 또는 헛되다는 뜻이니, 恐懼와 憂患은 나에게 害가 되지 못하고 다만 헛된 것일 뿐임을 말한 것이다.
역주44 : 유
역주45 [刊補]只看此便是 : 단지 聖人의 이러한 일을 보면 恐懼憂患도 空然한 것임을 말한 것일 뿐이다.
역주46 [釋疑]仁山金氏 : 이름은 履祥이고 자는 吉父이니, 南宋 말기의 학자로 宋나라가 망하자, 節義를 지켜 元나라에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강학하였다.
역주47 [釋疑]忿而曰忿懥 : 《章句》와 다르다. 이 章의 병통은 네 가지에 있지 않고 有所에 있다. 그러므로 《章句》에 “忿懥는 노여움이다.” 하였으니, 忿과 懥가 모두 병통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분노를 만일 노여워하는 뜻으로 보지 않는다면 바로 忿이라는 한 글자가 이미 병통이 되니, 어찌 懥字를 거듭 놓기를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아래의 세 가지도 이와 같다.
역주48 [刊補]重疊之辭 : 살펴보건대 忿懥‧恐懼‧好樂‧憂患 이 네 가지는 본래는 병통이 없으나 ‘有所’ 두 글자에 병통이 있다는 金氏의 말은 따로 한 가지 뜻이 된다.
역주49 詬詈 : 구매
역주50 [釋疑]動心忍性 : 《孟子》 〈告子 下〉에 나오니, 여기의 性은 氣質之性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역주51 [譯註]此下所摭六條 : 六條는 위의 ‘張思叔詬詈僕夫’條부터 그 아래 ‘伊川先生曰’條, ‘問獨處一室’條, ‘伊川涪陵之行’條, ‘又曰古人’條, ‘伊川歸自涪州’條까지의 여섯 조목을 가리키는 바, 구별하기 쉽도록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 표시하였다.
역주52 [釋疑]學如元凱方成癖 : 元凱는 杜預의 字이니, 晉나라 사람으로 《左傳》을 좋아하는 癖이 있어 註解를 지었다.
역주53 [釋疑]文似相如殆類俳 : 相如는 성은 司馬이고 字는 長卿이니, 漢代의 文章家이다.
역주54 [釋疑]只輸顔氏得心齋 : 輸는 致[바치다], 爲[하다]와 같다. 혹자는 “輸는 지는 것이니, 勝負를 贏輸라 한다.” 라고 말한다. 心齋는 《莊子》에 보이니, 大意는 뜻을 한결같이 하고 마음을 비움을 이른다. ○ 이 詩는 배우는 자가 오직 章句와 文詞에만 얽매이니, 顔子가 마음을 공경하여 일이 없는 것만 못함을 말한 것이다.
역주55 [刊補]問獨處一室條 : 살펴보건대 程子의 이 문단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理致를 밝힘이 분명하지 못하다는 것이 첫 번째이고, 氣가 몸에 充滿하지 못하다는 것이 두 번째이고, 恭敬心이 부족하다는 것이 세 번째이다.
역주56 : 부
역주57 [刊補]灎澦 : 蜀지방은 지대가 높기 때문에 물 흐름이 매우 빠르다. 下流로 내려오면서 三峽을 경유하는데, 瞿塘峽의 灎澦(염여)는 바로 매우 험준한 곳이어서 배를 전복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伊川이 涪陵으로 유배갈 때에 배가 이곳을 지나가면서 거의 위험한 고비를 만났으나 伊川은 동요하지 않고 태연히 있었다.
역주58 [釋疑]伊川涪陵之行 …… 欲答之而舟已行 : 이 일은 《二程全書》에 세 번 보인다. 하나는 邵氏의 기록에 보이니 배를 함께 타고 가던 老人이 “마음에 誠敬을 보존하는 것이 無心한 것만 못하다.”는 등의 말을 한 것이고, 하나는 震澤의 기록에 보이니 바로 이 주석이며, 하나는 汪端明의 기록에 보이니 震澤의 기록과 같은데 다만 두 去字를 모두 後字로 썼다. ○ 살펴보건대 《朱子語類》에는 震澤의 기록을 옳지 않다고 하여, 말하기를 “風波가 사나울 때에 나무섶을 지고 가는 자가 程伊川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볼 수 있겠으며, 말하는 것을 또 어떻게 자세히 들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達과 舍는 한 가지 일이니, 어찌 분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邵氏의 기록을 의심하여 말하기를 “隱者가 빨리 걸어가서 피했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면 이는 마치 귀신과 같이 여긴 것이니,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邵氏의 기록에는 다만 ‘老父가 빨리 갔다’고만 말하였는데, ‘이제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고 말하였으니, 《語類》에 기록한 것은 혹 자세히 살피지 못한 듯하다.” 하였다. ○ 《鶴林玉露》에는 達을 ‘朝聞道[아침에 道를 들음]’라 하고, 舍를 ‘夕死[저녁에 죽음]’라 하였다. [刊補] 《鶴林玉露》에 “達은 智이고 舍는 勇이니, 道를 얻어들은 것은 達이 되고 죽어도 괜찮은 것은 舍이다.” 하였다. 이의 본뜻은 “그대가 이와 같이 위험한 처지를 당하여 죽음을 보기를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니, 이는 반드시 평소에 道를 얻어들어 天命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라는 것이다. 朱子의 뜻도 이와 같음에 지나지 않는다. [補註] 《論語》 〈里仁〉에 “아침에 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朝聞道 夕死可矣]”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위와 같이 해석할 경우 ‘舍去如斯는 達去如斯리라’로 懸吐하여, ‘이와 같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이 이치를 통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역주59 [刊補]髭髮 : 입 위의 수염이 髭(자)이고, 아래에 있는 것이 鬚(수)이고 뺨에 있는 것이 髥(염:구렛나루)이다.
역주60 [刊補]臧格 : 未詳이다.
역주61 [譯註]諡議 : 諡號를 내리기 위하여 그 사람의 學行을 기록한 글로, 諡狀이란 말과 같다.
역주62 恚詈 : 에리
역주63 [釋疑]一警 : 警字는 馬邊을 따른 글자여야 한다. [補註] 곧 驚字를 가리킨 것이다.
역주64 [釋疑]與章句不合 : 《章句》에서는 敬을 가지고 三不의 부분에 대해서 말했는데, 臧氏는 敬을 가지고 四有의 부분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므로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補註]三不은 《大學》 本文의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를 이르며, 四有는 有所忿懥, 有所恐懼, 有所好樂, 有所憂患을 이르는 바, 三不은 마음(本心인 體)이 보존되지 않아서 생기는 병통이고, 四有는 마음(感情인 用)이 있어서 생기는 병통이다.
역주65 [譯註]此下所摭九{八}條 : 九條는 ‘八條’의 잘못인 듯하다. ‘朱子曰某之氣質有病’條부터 그 아래 ‘王幼觀曰’條, ‘朱子曰某舊時’條, ‘問每有喜好適意底事’條, ‘又曰風俗尙鬼’條, ‘問人患多懼’條, ‘僞學黨作’條, ‘有一朋友微諷云’條까지의 여덟 조목을 가리키는 바, 구별하기 쉽도록 순서에 따라 번호를 붙였다.
역주66 [釋疑]王幼觀 : 이름은 過이니, 朱子의 門人이다.
역주67 [釋疑]某見此等人 …… 配去 : 大字面은 옛날에 부정 축재한 죄를 지으면 贓字를 얼굴에 刺字하는 것이다. 配는 유배이다.
역주68 [釋疑]某舊時 …… 事事有兩冊 : 서책이 많아서 다 가지고 갈 수 없으므로 일마다 요약하여 뽑아서 두 책으로 만든 것이다. ○ 事事는 禪道와 兵法 등과 같은 일이다.
역주69 [釋疑]且慢 : 慢은 긴요하지 않은 것이다.
역주70 [釋疑]渾身 : 온몸을 들어 말한 것이다. ○ 朱子가 자신의 學問이 장차 범람하고 잡박한 데로 흘러감을 깨닫고는 용감하게 끊어버린 것이니, 이는 바로 사람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바이다.
역주71 [刊補]莫當 : 莫은 莫是라는 말과 같다.
역주72 [釋疑]新安 : 곧 婺源을 가리킨다. 婺源은 徽州에 속하는데, 徽州의 別號가 新安이므로 말한 것이다.
역주73 [釋疑]某初還 : 朱子는 閩中에 거주하였는데, 婺源이 바로 고향이므로 돌아왔다고 말한 것이다.
역주74 [釋疑]宗人 : 宗族이다.
역주75 [釋疑]打酒 : 打는 술을 받아오는 것이니, 당시 관청에 榷場(專賣酒店)을 설치하고 술을 팔았다.
역주76 [釋疑]臟腑 : 臟은 五臟으로 肝‧心‧脾‧肺‧腎이고, 腑는 六腑로 膽‧胃‧小腸‧大腸‧膀胱‧三焦이다.
역주77 : 홍
역주78 [釋疑]關他甚事 : 他는 五通廟를 가리킨다.
역주79 [釋疑]莫枉了五通 : 枉은 억지로 끌어다 대는 것이니, 억지로 五通廟를 끌어다 대어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역주80 [釋疑]某以 : 以는 바로 以爲의 뜻이다. [補註]以爲는 以謂로도 쓰는 바, ‘말하다’ ‘생각하다’의 뜻이다.
역주81 [刊補]只管 : 一向, 一切라는 말과 같다.
역주82 [譯註]僞學黨 : 거짓 학문을 하는 무리란 뜻으로,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韓侂胄(한탁주)가 丞相인 趙汝愚를 모함하여 축출하고 朱子와 그 門生들을 僞學이라 하여 배척하였다. 僞學이란 곧 탐욕을 부리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사람의 진정이요 청렴결백하고 행실을 닦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는 것으로, 朱子는 이 때문에 큰 곤경을 겪었다.
역주83 [譯註]其默足以容 : 《中庸》에 “國有道 其言足以興 國無道 其默足以容” 이라고 보인다.
역주84 [釋疑]擊鼓訟寃 : 宋나라 때에 登聞鼓를 설치하여 억울한 자가 있으면 이 북을 쳐서 하소연하게 하였다.
역주85 [譯註]有天生德於予底意思 却無微服過宋之意 : 天生德於予는 하늘이 자신에게 큰 德을 내려주어 간직하게 했다는 뜻으로, 《論語》 〈述而〉에 “하늘이 나에게 큰 덕을 내려 주었으니 桓魋(환퇴)가 나에게 어쩌겠는가.[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 라고 보이며, 微服은 화를 피하기 위하여 미천한 사람의 복장으로 변장하는 것으로 《孟子》 〈萬章 上〉에 “孔子는 …… 宋나라 司馬인 桓魋가 장차 죽이려 함을 만나 미복으로 宋나라를 지나갔다.[孔子 …… 遭宋桓司馬將要而殺之 微服而過宋]” 라고 보인다. 이는 곧 孔子가 자신을 살해하려는 桓魋에 대하여 ‘하늘이 나에게 德을 내려 주시어 내가 큰 덕을 간직하고 있으니, 환퇴가 어떻게 하늘의 뜻을 어기고 나를 살해하겠는가’ 라고 말씀하여 환퇴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또한 미천한 사람의 복장으로 변장하여 화를 피했음을 들어, 朱子는 이렇게 하지 않고 너무 禍를 두려워하지 않음을 비판한 것이다.
역주86 [刊補]作詩謗訕 : 東坡의 사례와 같은 類이다. [補註]東坡는 蘇軾의 號로 烏臺詩案을 이른다. 烏臺는 御史臺를 이르며 詩案은 詩 때문에 생긴 罪案이다. 東坡는 王安石의 新法을 반대하다가 뒤에 通判杭州로 좌천되고 湖州知事로 옮겼는데, 풍자하는 詩를 지었다가 言官들로부터 朝廷을 비방한 詩라 하여 탄핵을 받고 御史臺로 잡혀간 일이 있었으니, 이 사건을 가리킨다.
역주87 [釋疑]亦解說一飮一啄 自有定分 : 解는 아는 것이다. 飮啄은 禽獸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補註]解는 能의 뜻으로 보아도 되며, 飮啄은 원래 새가 물을 마시고 먹이를 쪼아먹는 것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사람이 한 번 마시고 한 번 먹는 것을 의미한다.
역주88 [釋疑]刀鋸在前 鼎鑊在後 : 鑊은 가마솥이니, 삶는 도구로 옛날 刑具의 하나이다. [補註]刀鋸와 鼎鑊은 모두 죄인을 처형하는 도구로, 이러한 것이 전후 좌우에 널려 있음을 의미한다.
역주89 [釋疑]都信不及 : 聖人의 말씀을 잘 믿고 돈독히 지키는 것을 信得及이라 하고, 이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信不及이라 한다.
역주90 [釋疑]行狀 : ‘踐其實’ 아래에 ‘居敬’ 一段이 있는 바, 실로 知行을 겸하여 말했는데 篁墩이 삭제하였으니, 그 의도가 자세하지 않다.
역주91 [釋疑]然爲己務實 : ‘然爲己’ 이하는 原文을 근거해 보면 마땅히 ‘從遊之士’의 앞에 있어야 한다. 然字 앞에서 먼저 사람에게 독서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을 논하여 비록 지극함을 다하였으나 자신을 위하고 실제를 힘쓰는[爲己務實] 경계에 있어 일찍이 뜻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然字가 붙을 곳이 있었는데, 이제 이것을 ‘憂形于色[근심이 얼굴에 나타남]’의 아래로 옮겨 놓았으니, 다만 차례가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然字 또한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補註]行狀의 原文을 살펴보면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독서할 적에 또 반드시 音과 訓을 구분하고 章句를 바로잡으며 그 문장을 살펴보고 그 뜻을 찾게 하였다.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여 알기 어려운 것을 궁구하고, 마음과 기운을 화평하게 하여 스스로 터득하도록 내버려두셨다. 그러나 자신을 위하고 실제를 힘쓰며 義‧利를 분별하고 스스로 속이지 않으며 홀로를 삼가는 경계에 있어서는 일찍이 세 번 뜻을 다하지 않음이 없으셨으니, 이는 또한 배우는 자들이 이치를 연구하고 몸에 돌이켜 敬으로써 지키게 하고자 해서였다. 從遊하는 선비들이 차례로 익힌 것을 외고 의심스러운 것을 질문할 적에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간곡히 일러주어 일찍이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질문에 간절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반복하여 경계하고 일찍이 숨기신 적이 없었다. 학문을 힘쓰는 것이 독실하면 기뻐하는 기색이 말씀에 나타났고 道에 나아가는 것이 어려우면 걱정하는 기색이 얼굴빛에 나타나셨다.[其於讀書也 又必使之辨其音釋 正其章句 玩其辭 求其義 硏精覃思 以究其所難知 平心易氣 以聽其所自得 然爲己務實 辨別義利 毋自欺 謹其獨之戒 未嘗不三致意焉 盖亦欲學者窮理反身而持之以敬也 從遊之士 迭誦所習 以質其疑 意有未諭則委曲告之而未嘗倦 問有未切則反覆戒之而未嘗隱 務學篤則喜見於色 進道難則憂形於色]”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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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부주 책은 2019.05.1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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