提綱挈維하야 昭示來世하시니 戒懼謹獨이요 閑邪存誠이며 曰忿曰慾을 必窒必懲이라
右는 心經이니 西山先生이 摭聖賢格言하야 自爲之贊者也라
先生之心學
이 考亭而遡濂洛洙泗之源
하야 存養之功
이 至矣
라
故其行己也
에 上帝臨女
하야 可以對越而無愧
요 其臨民也
에 若保赤子
하야 痒痾疾痛
이 其立朝也
에 憂國如飢渴
하야 所言
이 皆至誠惻怛之所形而非以衒直也
라
其將勸講
에 若齋戒以交神明
하야 而冀其感悟也
러시니 迨退而築室
之下
하야 雖宴息之地
라도 常如君父之臨其前
이라
其著書皆本於中庸大學
하야 雖
이라도 一出於正也
시니라
然猶夜氣有箴하고 勿齋有箴하고 敬義齋有銘하며 晩再守泉에 復輯成是書하야 晨興에 必焚香危坐하야 誦十數過하시니 蓋無一日不學이요 亦無一事非學이라 其內外交相養如此러라
然尙竊有志焉일새 手抄此經하야 晝誦而夜思之하니 庶幾其萬一이라
순舜임금과 우禹임금이 주고받은 것이 열 여섯 글자이니, 만세萬世의 심학心學에 이것이 연원淵源이네.
형기形氣에서 생기니, 호악好樂가 있고 분치忿懥가 있다오.
욕欲(욕망)은 흐르기 쉬우니, 이것을 위危라 이르는 바, 잠시라도 혹 방심放心하면 여러 악惡이 따른다네.
성명性命에서 근원하니, 의義와 인仁이요 중中과 정正이라오.
이理는 형체形體가 없으니, 이것을 미微라 이르는 바, 털끝만큼이라도 혹 잃으면 보존됨이 거의 드물다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두 가지의 사이는 일찍이 틈을 용납하지 않으니, 반드시 정精하게 살펴서 흑백黑白을 분별하듯이 하오.
지智(知)가 미치고 인仁(行)으로 지키는 것이 서로 시始와 종終이 되니, 정精하기 때문에 한결같을 수 있고 한결같기 때문에 중도中道에 맞을 수 있네.
성현聖賢이 번갈아 나와서 요姚(舜임금)를 본받고 사姒(禹임금)를 법받았네.
강유綱維를 들어서 내세來世에 밝게 보여주셨으니, 계구戒懼와 신독愼獨이요 한사閑邪(간사함을 막음)와 존성存誠(성실함을 보존함)이며 분함과 욕심을 반드시 막고 반드시 징계하는 것이라오.
상제上帝가 실로 굽어보시니 어찌 감히 혹시라도 딴 마음을 품겠는가.
방의 귀퉁이가 비록 은밀하지만 어찌 마음에 부끄러움이 있게 하겠는가.
사비四非를 모두 이기되 적敵을 공격하듯이 하고, 사단四端이 이미 나오면 모두 넓혀 채워야 한다네.
사사로운 마음[意]과 기필하는 마음[必]이 싹틀 때에는 구름이 걷히고 자리가 걷히듯이 깨끗이 제거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성실한 마음이 나올 때에는 봄 기운에 만물이 자라듯이 길러주오.
닭과 개를 잃어버리면 이것을 찾을 줄 알 듯이 양심良心을 찾아야 하고, 소와 양이 나무를 뜯어먹어 민둥산이 되듯이 양심良心을 해칠까 걱정해야 하네.
한 손가락과 어깨와 등 중에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천한가.
한 그릇 밥과 만종萬鍾에 대해서도 사양하고 받음을 반드시 분별해야 하네.
극치克治(이겨 다스림)와 존양存養은 서로 공부를 지극히 해야 하니, 순舜임금은 어떤 사람인가.
이 도심道心은 만선萬善의 주체主體이니 하늘이 나에게 주신 것 중에 이것이 가장 크다네.
방촌方寸(마음)에 거두면 태극太極이 내 몸에 있고 만사萬事에 흩으면 그 쓰임이 무궁하다오.
신령스러운 거북 껍질을 보물로 여기듯이 하고 큰 구슬을 받들 듯이 하오.
이것을 생각하여 마음이 늘 여기에 있어야 하니,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날 선민先民들을 살펴보건대 경敬으로써 서로 전수하였으니, 잡은 것은 간략하나 베풂은 넓은 것이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내가 와서 고을을 맡음에 모색茅塞함을 두려워하여 이에 격언格言을 모아서 폐부肺腑를 씻는다오.
밝은 창문과 비자나무 책상, 맑은 한낮에 향로에서는 향연기 피어오르는데, 책을 펴놓고 숙연肅然히 가다듬어 나의 천군天君(心)을 섬기노라.
이상은 〈심경찬心經贊〉이니, 서산선생西山先生이 성현聖賢의 격언格言을 뽑아서 스스로 찬贊을 지으신 것이다.
선생先生의 심학心學은 고정考亭(朱子)에서 시작하여 염濂(周子)‧낙洛(程子)과 수洙(孔子)‧사泗(孟子)의 근원根源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존양存養의 공부가 지극하였다.
그러므로 몸가짐에 있어서는 상제上帝가 자기 앞에 강림한 듯이 하여 상제上帝를 대함에 부끄러움이 없고, 백성들을 대할 적에는 어린아이를 보호하듯이 하여 옴으로 가렵고 병으로 아픈 것이 참으로 자신의 몸에 간절한 듯이 하였으며, 조정에서 벼슬할 적에는 나라를 걱정하기를 자신이 굶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하여, 말씀한 내용이 모두 지성至誠과 측달惻怛(간곡함)에서 나타난 것이었고 정직함을 자랑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군주에게 강학講學을 권할 적에는 재계齋戒하고서 신명神明을 사귀듯이 해서 감동하여 깨닫기를 바랐으며, 물러나 월산粵山의 아래에 서실書室을 짓고는 비록 한가로이 쉴 때에도 항상 군부君父가 앞에 계신 듯이 여겼다.
지은 책이 모두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근본하여 비록 한묵翰墨을 유희하더라도 한결같이 정도正道에서 나왔다.
그러나 오히려 〈야기잠夜氣箴〉을 짓고 〈물재잠勿齋箴〉을 짓고 〈경의재명敬義齋銘〉을 지었으며, 만년에 다시 천주泉州를 맡게 되자 다시 이 책을 집성輯成하여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분향焚香하고 무릎꿇고 앉아서 십수 번을 외웠으니, 단 하루도 학문을 하지 않은 적이 없고 또한 한 가지 일도 학문學問 아닌 것이 없어, 내외內外를 서로 기름이 이와 같았다.
나(顔若愚)는 연로하여 학문이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적이 뜻이 있으므로 손수 이 《심경心經》을 초抄하여 낮에는 외고 밤에는 생각하노니, 행여 만의 하나라도 학문이 진전되기를 바란다.
이에 다시 군학郡學에서 판각板刻하여 동지同志들과 함께 힘쓰는 바이다.
단평端平 개원改元(1234) 10월 기망旣望에 후학後學 안약우顔若愚는 공경히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