維義與仁은 維帝之則이니 欽斯承斯라도 猶懼弗克이어늘 孰昏且狂하야 苟賤汙卑오
淫視傾聽
하며 惰其四支
하야 褻天之明
하고 嫚
하야 하니 라
原注
○ 朱子自序云
以道問學名齋
어늘 予謂當以尊德性易之
라한대 允夫請銘
일새 因爲作此
하니라
原注
[按] 朱子平日敎人에 以尊德性道問學二者를 不可有偏重之失이라하시니 其見于言者可考也라
原注
若於道理上에 看未精이어든 便須於尊德性上에 用功이요 若德性上에 有不足이어든 便須於講學上著力이니 二者竝行이면 庶互相發明하야 可到廣大輝光之地리라
原注
能窮理則居敬工夫日益進이요 能居敬則窮理工夫日益密이니라
原注
程夫子涵養을 必以敬이요 而進學則在致知라하시니 此兩言者는 如車兩輪하고 如鳥兩翼하야 未有廢其一而可行可飛者也라
原注
今日之弊는 務講學者는 多闕於踐履하고 專踐履者는 又遂以講學爲無益이라하니 殊不知因踐履之實하야 致講學之功하야 使所知益明이면 則所守日固하야 與彼區區口耳之間者로 固不可同日語矣니라
原注
① 朱子曰 痛理會一番
을 如
相似然後
에 涵養將去
라하시고 因自云 某如今
에 雖便靜坐
라도 하니 若未能識得
이면 涵養箇甚
이리오
原注
[按] 朱子中歲에 恐學者交修之功不逮하야 而或至於不振하고 且擇善之未精하야 而或流於異學之空虛也라
原注
萬事在窮理
하니 , 理不明
이면 看如何地持守
나 也只是空
이니라
原注
③ 問 致知涵養先後한대 曰 須先致知하고 後涵養이니라
問 伊川이 言未有致知而不在敬이라하시니 如何잇고 曰 此是大綱說이니라
原注
嘗聞學之雜者
는 似博
하고 라하니 惟先博而後約然後
에 能不流於雜而不揜於陋也
라
故로 中庸에 明善이 居誠身之前하고 大學에 誠意 在格物之後하니 此聖賢之言의 可考者然也니라
原注
[按] 學은 欲博이요 不欲雜이며 欲約이요 不欲陋는 乃五峯胡氏之言이니라
原注
古人之學은 以致知爲先하니 致知之方은 在乎格物이라
格物云者는 河南夫子所謂或讀書하야 講明義理하고 尙論古人하야 別其是非하고 或應接事物하야 而處其當否 皆格物之事也라
原注
天下事物之理와 方冊聖賢之言을 皆須子細反復究竟이니 至於持守하야는 却無許多事라
若覺得未穩이어든 只有默默加功하야 著力向前耳어늘 今聞廢書不講하고 而反以持守之事로 爲講說之資라하니 是乃兩失其宜라
原注
尹和靖門人이 贊其師云 丕哉라 聖謨六經之編을 耳順心得하야 如誦己言이라하니 要當至此地位라야 始是讀書人耳니라
原注
學者 息却
하고 除却許多閑雜說話
하야 著實讀書
니 初時
에 儘且
이어니와 久之
면 自有見處
리라
最怕人
라하야 不務
하고 不專口耳
하면 下梢
에 說得
하야 都無收拾
이니
原注
趁此光陰未至晩暮之時
하야 做些著實
하야 積累將去
호되 只將排比章句, 玩索文理底工夫
하야 換了許多杜撰計較
하야 別尋路脉底心力
이라야 須是實有用力處
니 久之
면 自然心地平夷
하고 見理明徹
하야 庶幾此學有傳
하야 不至虛負平生也
리라
原注
伊川이 只說一箇主一之謂敬이요 無適之謂一이라하시니 只是如此요 別更無事라
某向來
에 自說得尊德性一邊
을 輕了
러니 今覺得未是
호니 上面
이 便是一箇
라
原注
[按]
에 以學者專講說而廢涵養
하야 將流於言語文字之陋而不自覺
이라
故又於尊德性에 爲重하야 旣爲程允夫作銘하시고 且屢有懲于從遊者하시니 蓋定論也라
故心經
에 以是終焉
하니 後之學者 誠力於斯而知所
이면 則德可修, 道可凝
하야 而作聖之功
을 可幾矣
리라
原注
不尊德性이면 則懈怠弛慢矣니 學이 何從而進이리오
原注
今雖盡與公說하고 公盡曉得이라도 不於自家心地上做工夫면 亦不濟事니라
只在身己上固有底仁義禮智를 皆廣而充之하야 若火之始然, 泉之始達이 這箇是源頭라
見得這箇了
라야 方可以講學
이니 恰如人
이 知得合當行
이요 只
聖賢言語
하야 作
一般
이니라
原注
某患學者
하야 姑欲令先通曉文義
하야 就文求意
러니 에 往往又只守定冊子上言語
하니 却看得不切己
라
須是將切己看하야 玩味入心하야 力去行之라야 方有所益이니라
原注
問 平日讀書時
에 似亦有所見
이라가 旣釋書則
이니 不知病根安在
로소이다 曰
故必先求之於身而後에 求之於書면 則讀書方有味니라
○ 問向蒙見敎
에 讀書
를 須要涵養
이요 須要浹洽
이라하시니이다 孟子千言萬語 只是論心
이니 七篇之書
를 이 是涵養工夫否
잇가 曰
某爲見人讀書
라 所以說讀書
를 須當涵養
하야 令胸中有所得耳
러니
如吾友所說
은 又
一件意思
하야 硬要
하니 看書
를 豈是如此
리오
又一士友曰 先生涵泳之說
은 乃杜元凱
之意
로소이다 曰
大率與人說話 便是難
하니 某只說一箇涵泳
이어늘 一人
은 差排
하고 一人
은 硬來解說
하니 此是隨語生解
하야 支離延蔓
이라
少間展轉
하면 只是添得多
요 說得遠
이니 如此讀書
면 全不是自做工夫
요 全無
리니 可知是使人說學
이 是空談
이로다
原注
④ 葉賀孫이 問 往前承誨에 只就窮理說較多러니 此來엔 如尊德性, 致廣大, 極高明上一截을 數數蒙提警하오니 此意是如何잇고 曰
已前
에도 也說了
어니와 이러니 但覺得近日諸公
이 去理會窮理工夫多
하니 又自漸漸
일새니라
原注
今有學者在某門者 其於考理
에 非不精當
이라 說得來
에 나 然所爲却顚倒錯繆
하야 全然與所知者相反
하니
然所爲背馳者
는 只是不曾在源頭上用力
하고 일새니라
原注
⑤
이 問 今只論涵養
하고 却不講究
하면 雖能閑邪存誠, 懲忿窒慾
이나 至處事差失則奈何
잇고 曰
如此類
를 不難知
로되 人却放肆不恭敬
하나니 如一箇大公至正之路 甚分明
이로되 不肯行
하고 却尋得
하야 與自家私意合
이어든 便稱是道理
라하나니 今人
이 每每如此
하니라
原注
大抵子思以來敎人之法이 惟以尊德性道問學兩事로 爲用力之要어시늘 今子靜所說은 專是尊德性事요 而熹平日所論은 却是道問學上多了라
所以爲彼學者
는 多持守可觀
이나 而看得義理 全不子細
하고 又別說一種杜撰道理
하야 하야 不肯放下
하고
而熹
는 自覺雖於義理上
에 不敢亂說
이나 却於緊要
上
에 多不得力
하니
今當反身用力하야 去短集長이면 庶幾不墮一邊耳니라
原注
所以大學之道 只從格物做起러니 今人은 從前無此工夫하고 但見大學以格物爲先하야 便欲只以思慮知識求之하고 更不於操存處用力하나니 縱使窺測得十分이라도 亦無實地可據라
大抵敬字는 是徹上徹下之意요 格物致知는 乃其間節次進步處니라
原注
日前爲學이 緩於反己하니 追思凡百컨대 多可悔者라
所論著文字
도 亦坐此病
하야 多無
實處
하니 回首茫然
하야 計非歲月功夫
의 所能救治
라
前時엔 猶得敬夫, 伯恭이 時惠規益이라 得以警省이러니 二友云亡하니 耳中에 絶不聞此等이라
今乃深有望於吾子
하노니 自此惠書
에 痛加
乃君子愛人之意也
니라
原注
近覺向來爲學이 實有向外浮泛之弊하니 不惟自誤요 而誤人亦不少라
方別尋得一頭緖
호니 似差簡約端的
하니 始知文字言語之外
에 라
原注
若使道를 可以多聞博觀而得인댄 則世之知道者爲不少矣리라
某近日因事
하야 方有少省發處
하니 를 今乃曉然無疑
로라
日用之間에 觀此流行之體 初無間斷處하고 有下功夫處하니 乃知日前自誑誑人之罪를 蓋不可勝贖也라
此與守書冊, 泥言語로 全無交涉하니 幸於日用間察之하라
原注
某緣日前無深探力行之志하야 凡所論說이 皆出入口耳之餘라
以故로 全不得力하니 今方覺悟하야 欲勇革舊習이나 而血氣已衰하고 心志亦不復彊하니 不知終能有所濟否也로라
原注
大槩此事 以涵養本原爲先이요 講論經旨는 特以輔此而已어늘 向來에 泛濫出入하야 無所適從하니 名爲學問이나 而實何有리오
原注
爲學은 直是先要立本이니 文義는 却可且與說出正意하야 令其寬心玩味요 未可便令考校同異, 硏究纖密이니 恐其意思促迫하야 難得長進이라
此是向來
어늘 今幸見得
하니 却須勇革
이요 不可
하야 却誤人也
니라
原注
老先生平日敎人에 最喫緊處는 尊德性, 道問學二件工夫를 固不偏廢로되 而所大段著力處는 却多在道問學上이어늘
江西一派는 却只是厭煩就簡하야 偏在尊德性上去하니 先生이 蓋深病之하시니라 [按]
朱子晩年答項平父及林擇之劉子澄何叔京程允夫黃直卿書에 其言如此어시늘 朱子沒後에 陳氏之言이 如彼하니 則考亭之學이 固不俟一再傳而未免失眞者矣라
宜臨川吳氏 於北溪에 有不能滿焉이니 殆此類也夫인저
原注
러니 夫子恐其識見易差
하사 於是
에 以博文約禮對言
하시니 博文先而約禮後
요 博文易而約禮難
이어늘
後來學者는 專務其所易而常憚其所難하니 此道之所以無傳이라
須是如中庸之旨하야 戒懼謹獨으로 爲終身事業하야 不可須臾廢요 而講學窮理는 所以求其明且正耳니 若但務學이요 而於身心에 不加意하면 恐全不成學問也로라
詞氣容止之間과 應事接物之際에 察其中理不中理면 十得其七八矣리니 以此律之면 庶不至流而爲口耳之學也리라
嘗觀明道先生이 語謝上蔡云 諸公來此하야 只是學某說話라하야시늘 上蔡請益한대 明道云 且靜坐하라하시니
程門如上蔡는 可謂務實爲己者也로되 明道尙以此箴之하시니 使視今之學者면 則豈不大爲之太息乎아
原注
每念先師以一生辛苦著書
하야 惠後學
하시니 光明
이어늘 而諸生
이 莫有能達其旨趣者
하고 又復數年
에 傳習益訛
하니 先師之目
이 將不瞑於地下矣
시리라
原注
洙泗以還에 博文約禮 兩極其至者는 先生一人而已라
先生敎人이 規模廣大而科級甚嚴하야 循循有序하야 不容躐等이요 至於切己務實, 辨別義利, 毋自欺, 謹其獨之戒하야는 未嘗不丁寧懇到하야 提耳而極言之러시니
에 必三歎焉
하시며 晩見諸生
이 繞於文義之間
하시고 深慮斯道之無傳
하야 始頗指示本體
하야 使深思而自得之
하시니 其望於學者 益切矣
로다
原注
古者敎人爲學
이 以躬行爲本
이요 躬行
은 以孝弟爲先
하고 文則行有餘力而後學之
하니 所謂文者
는 又禮樂射御書數之謂
요 非言語文字之末
이러니 今之學者
는 乃或反是
하니 豈因講造化性命之高遠
하야 反忘
之切近乎
아
二程先生
이 推明周子之說
하야 以達於孔孟
하시고 由性命而歸之躬行
하사 其說
이 未嘗不
하시니 後有學者 宜已不待他求
어늘 不幸二程旣歿
에 門人弟子 多
而不自知
하고 雖晦翁先生
이사도 初年
에 이러시니
後始一切反而歸之平實하사 平生用功이 多於論語하시며 平生說論語에 多主孝弟忠信하시고 至其言太極性命等說은 乃因一時行輩儒先의 相與講論而發하시니라
文公旣歿에 其學이 雖盛行이나 學者乃不于其切實而獨于其高遠하야 講學에 捨論語不言而必先大易하고 說論語에 捨孝弟忠信不言而獨講一貫하야 凡皆文公平日之所深戒를 學者乃自偏徇而莫知返하야 入耳出口하야 無關躬行이라
竊嘗譬之
컨대 酌水者
는 必
其源
하나니 浚其源
은 爲酌水計也
어늘 反
其水而不酌
은 何義也
며 食實者
는 必漑其根
하나니 漑其根
은 爲食實地也
어늘 反棄其實而不食
은 何見也
며 正躬行者
는 必精性理
하나니 精性理
는 爲正躬行設也
어늘 反置躬行於不問
은 何爲邪
오
漢唐老師宿儒는 泥於訓詁하야 多不精義理러니 近世엔 三尺童子 承襲緖餘하야 皆能言義理나 然能言而不能行하야 反出漢唐諸儒下하니 是不痛省而速反之하면 流弊當何如邪아
竊意儒先講貫已精之餘는 正學者敬信服行之日이니 由儒先之發明하야 以反求乎孔子之大旨하고 知性命之從來하야 以歸宿於孝弟之實行이니 又可更求多於言語間哉아
原注
理有自然이라 本不待言이언마는 夫子有不得已而見於答問者는 亦皆正爲學者躬行而發이러시니
文公先生이 於是에 力主知行之說하야 必使先明義理하야 別白是非然後에 見之躬行이라야 可免陷入異端之弊라하시니
此其捄世之心이 甚切하고 析理之說이 甚精하니 學者因其言之已明하야 正其身之所行이면 爲聖爲賢이 何所不可리오
顧乃掇拾緖餘
하고 增衍浮說
하야 徒有終身之議論
하고 竟無一日之躬行
하야 甚至借以
하고 轉以欺世
하야 風俗大壞
하야 甚不忍言
하니 文公所以講明之初意 夫豈若是
리오
原注
然自聖傳不嗣
로 士學靡宗
하야 漢唐千餘年間
에 로되 而原本
은 竟昧昧也
라
逮夫周程張邵興
하야 始能上通孟氏而爲一
이러니 하여는 文義之精密
이 又孟氏以來所未有者
어늘
其學徒 往往滯於此而溺其心
하나니 夫旣以世儒記誦詞章
으로 爲俗學矣
어늘 而其爲學
이 亦未離乎言語文字之末
하니 此則
以後朱門末學之
而未有能救之者也
라
夫所貴乎聖人之學은 以能全天之所以與我者爾니 天之與我는 德性이 是也라
며 是爲形質血氣之主宰
니 舍此而他求
면 所學
이 何學哉
아
況止於訓詁之精, 講說之密이 如北溪之陳과 雙峯之饒면 則與彼記誦詞章之俗學으로 相去何能以寸哉아
聖學이 大明於宋代로되 而踵其後者如此하니 可嘆已라
澄也
於文義
하야 毫分縷析
하야 每猶以陳爲未精
하고 饒爲未密也
라하야 墮此
中
이 하니
自今以往
으로 一日之內
에 子而亥
며 一月之內
에 朔而晦
며 一歲之內
에 春而冬
하야 如天之運轉
하고 如日月之往來
하야 不使有須臾之間斷
이면 則於尊之之道
에 殆庶幾乎
인저
於此에 有未能이면 則問於人하고 學於己하야 而必欲其至니 若其用力之方은 非言之可喩라
原注
[按] 學者之弊 非馳心簡捷하야 蕩而爲異學之空虛면 則極意鑽硏하야 流而爲俗學之卑陋하나니 在先哲之時에 已然이온 而況後此三百年之久哉아
勉齋黃氏, 果齋李氏
는 親受業考亭而得其傳者
로되 其隱憂如此
하고 慈溪黃氏, 臨川吳氏
는 皆私淑考亭而與聞斯道者
로되 其
이 又如此
하니 則其知之眞, 見之的
이 誠若有天相其間
하야 而不使斯道之終晦于天下也
라
學者於此에 痛心刻骨하야 以朱子爲師하고 以敬爲入道之要하야 求放心, 尊德性而輔之以學問호되 先之以力行하고 堅之以持守하야 俾空虛者反就乎平實하고 卑近者上達于高明이면 則聖門全體大用之學이 或庶幾焉이요 而此經所摭도 亦不爲空言矣리니 有志之士는 願相與勉之어다
주자朱子의 〈존덕성재명尊德性齋銘〉에 말씀하였다.
“훌륭하신 상제上帝가 이 하민下民을 내리시니, 무엇을 주었는가?
의義와 인仁은 상제上帝의 법칙法則이니, 이것을 공경하고 이것을 받들더라도 오히려 잘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어찌 어둡고 또 미친 짓을 하여 구차하게 천하고 또 낮게 하는가.
흘겨보고 귀를 기울여 들으며 사지四肢를 게을리하여 하늘의 명명明命을 더럽히고 사람의 윤기倫紀를 함부로 하여 이 하류下流로 돌아가는 것을 달게 여기니, 여러 악惡이 모여든다.
나는 이것을 거울로 삼아서 이 마음을 공경하고 조심하여 그윽한 방에서도 혁연赫然히 임한 듯이 하노라.
옥玉을 잡은 듯이, 가득한 물을 받들 듯이 조심하여 수유須臾와 전패顚沛에도 그대로 지켜야 한다.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머니, 감히 혹시라도 태만히 할 수 있겠는가.”
原注
주자朱子의 자서自序에 “내제內弟인 정윤부程允夫가 도문학道問學으로 서재書齋의 이름을 지었기에 나는 ‘마땅히 존덕성尊德性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였더니, 윤부允夫가 명銘을 지어줄 것을 청하므로 인하여 이것을 지었다.”하였다.
原注
[按]윤부允夫의 이름은 순洵이니 무원婺源 사람이다.
주자朱子를 따라 배웠으니, 저서로는 《존덕성재집尊德性齋集》이 있다.
原注
“덕성德性을 높이면서 문학問學으로 말미암으며 나를 글로써 넓히고 나를 예禮로써 요약要約하여 두 가지로 공부를 해서 모두 편벽되지 않게 하여야 한다.”
原注
[按]주자朱子가 평소 사람을 가르칠 적에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 두 가지를 어느 한 가지도 편중偏重되게 하는 잘못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으니, 말씀에 나타난 것을 상고할 수 있다.
다 기록할 수 없으므로 이제 모두 여섯 조목을 뽑아 붙인다.
原注
“만약 도리상道理上에 봄이 정밀하지 못하거든 모름지기 존덕성상尊德性上에 공부를 해야 할 것이요, 만약 덕성상德性上에 부족함이 있거든 모름지기 강학상講學上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니, 두 가지가 병행되면 거의 서로 발명되어서 광대하고 빛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原注
“배우는 자의 공부는 오직 거경居敬(尊德性)과 궁리窮理(道問學) 두 가지 일에 달려 있으니, 이 두 가지 일은 상호相互 발명發明된다.
궁리窮理를 하면 거경居敬공부가 날로 더욱 진전되고 거경居敬을 하면 궁리窮理공부가 날로 더욱 치밀해진다.”
原注
④ 풍작숙馮作肅(馮允中)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거경居敬과 궁리窮理 두 가지를 어느 한 가지도 버려서는 안 되니, 어느 한 가지를 버리면 덕德이 외로워져서 이로운 바가 없다.”
原注
⑤ 손경보孫敬甫(孫自修)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정부자程夫子의 ‘함양涵養은 반드시 경敬으로 하고 학문에 나아감은 치지致知에 있다’는 이 두 말씀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새의 양 날개와 같아서, 그 하나를 버리고서는 갈 수 있고 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다.
세상이 쇠하고 도道가 쇠미해져서 이단異端이 봉기蜂起하여, 이 사이에 완전히 이단異端에서 나왔으나 오히려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잃지 않는 자가 있고 그 나머지는 모두 사사로움을 꾸미고 도리道理를 위반하니, 학문學問이라고 이를 수 없다.”
原注
⑥ 왕자충王子充(王不著)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오늘날의 병폐는 강학講學을 힘쓰는 자는 대부분 천리踐履에 부족하고 천리踐履만을 오로지 하는 자는 또 마침내 강학講學을 무익하다고 하니, 자못 천리踐履의 실제로 인하여 강학講學의 공부를 지극히 해서 아는 바가 더욱 밝아지면 지키는 바가 더욱 견고해져 저 입과 귀의 사이에 구구하게 하는 자와는 진실로 같은 등급으로 말할 수 없음을 알지 못한다.”
原注
① 주자朱子가 말씀하기를 “이치를 통렬히 한 번 살펴 알기를 혈전血戰을 하듯이 한 뒤에야 함양涵養하여 갈 수 있는 것이다.”하시고는 인하여 스스로 말씀하기를 “내 지금에는 비록 정좌靜坐를 하더라도 도리道理가 저절로 보이니, 만약 도리道理를 알지 못한다면 무엇을 함양涵養하겠는가.”하였다.
原注
[按]주자朱子는 중년中年에 배우는 자들이 지知‧행行을 서로 닦는 공부가 미치지 못하여 혹 떨치지 못함에 이를까 두려워하고, 또 택선擇善을 정精하게 하지 못하여 혹 이단異端의 공허空虛함에 흐를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도문학道問學에 치중하셨으니, 이제 모두 열 조목을 뽑아 붙인다.
原注
“만사萬事가 궁리窮理에 달려 있으니, 경도經道(常道)가 바르지 못하고 이치가 밝지 못하면 아무리 잡아 지키는 것을 보려 하나 단지 공허空虛할 뿐이다.”
原注
③ 치지致知와 함양涵養의 선후先後를 묻자, 대답하기를 “모름지기 먼저 치지致知를 하고 뒤에 함양涵養을 하여야 한다.”하였다.
“이천伊川은 ‘치지致知를 하면서 경敬에 있지 않은 자는 있지 않다’고 말씀하였으니, 어떻습니까?”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이것은 대강大綱을 말씀한 것이다.”하였다.
原注
“나는 감히 스스로 혼매昏昧할 수 없으니, 실로 한 푼 한 푼 쌓고 한 치 한 치 쌓아서 얻었노라.”
原注
⑤ 왕태초汪太初(汪楚材)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배움이 잡박한 자는 해박該博한 듯하고 요약要約한 자는 고루한 듯하다’ 하였으니, 먼저 박학博學을 한 뒤에 요약要約하여야 잡박함에 흐르지 않고 고루함에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에 명선明善이 성신誠身의 앞에 있고 《대학大學》에 성의誠意가 격물格物의 뒤에 있는 것이니, 이는 성현聖賢의 말씀 중에 상고할 만한 것이 이러하다.”
原注
[按] ‘학문學問은 해박하고자 할 것이요 잡되고자 하지 않으며, 요약要約하고자 할 것이요 고루固陋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오봉호씨五峯胡氏(胡宏)의 말씀이다.
原注
⑥ 조민표趙民表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옛사람의 학문은 치지致知를 우선으로 하였으니, 치지致知하는 방법은 격물格物에 달려 있다.
격물格物이란 하남부자河南夫子(程子)의 이른바 ‘혹 책을 읽어 의리義理를 강명講明하고 위로 고인古人을 논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혹 사물을 응접하여 마땅한지 마땅하지 않은지를 처리한다’는 것이 모두 격물格物의 일이다.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이 지극해지면 행함에 힘쓰지 않음이 없어서 일을 만남에 성립하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 없다.”
原注
⑦ 유공도劉公度(劉孟容)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천하 사물의 이치와 방책方冊에 있는 성현聖賢의 말씀을 모두 모름지기 자세히 반복하여 연구하여야 하니, 잡아지킴에 이르러서는 허다한 일이 없다.
일에 만약 온당하지 못함을 깨달았거든 다만 묵묵히 공부를 더하여 힘을 써서 앞을 향해 나아갈 뿐인데, 이제 들으니 책을 폐하여 익히지 않고 도리어 잡아지키는 일을 강설講說하는 자료資料로 삼는다 하니, 이는 바로 두 가지 모두 마땅함을 잃는 것이다.
결국에는 희롱하여 거둠이 없어서 단지 두찬杜撰(억지 논리)과 날합捏合(주워 맞춤)을 이룰 뿐이다.”
原注
⑧ 범문숙范文叔(范仲黼)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윤화정尹和靖의 문인門人들이 그 스승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위대한 성인聖人의 가르침과 육경六經의 책을 귀로 들으면 순하고 마음에 터득하여 자신의 말을 외우듯이 하였다’ 하였으니, 요컨대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독서讀書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原注
⑨ 유정부劉定夫(劉孟容)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요컨대 배우는 자들은 수많은 광망狂妄한 심신心身을 쉬게 하고 허다한 쓸데없고 잡된 말을 제거하여 착실히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니, 처음에는 진실로 책의 행간行間이나 찾고 글자나 세겠지만 오래되면 자연 보는 곳이 있게 될 것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사람들이 ‘학문은 책에 있지 않다’고 말하여 책보는 것을 힘쓰지 않고, 입으로 외며 귀로 듣는 것을 전일하게 하지 않으면 결국(종말)에는 장황하게 말만 하여 전혀 수습함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단지 한바탕 크게 공허할 뿐이니, 참으로 미워할 만하다.”
原注
⑩ 유계장劉季章(劉黼)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광음光陰(年歲)이 아직 노년 시절에 이르지 않은 이때에 착실着實한 기지基址를 만들어 쌓아 나가되 다만 장구章句를 배열하고 문리文理를 완색玩索하는 공부를 가지고 허다한 두찬杜撰과 계교計較하는 마음을 써서 별도의 노맥路脈을 찾는 심력心力과 바꾸어야 모름지기 실제로 힘을 쓸 곳이 있을 것이니, 오래하면 자연 심지心地가 평탄해지고 이치를 봄이 명철해져서 거의 이 학문이 전해짐이 있어 헛되이 평생을 저버리는 데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原注
“이천伊川은 다만 ‘하나를 주장함을 경敬이라 이르고 딴 데로 감이 없는 것을 일一이라 이른다’고 말씀하셨으니, 다만 이와 같이 할 뿐이요 별도로 다시 딴 일이 없다.
나는 그 동안 스스로 말할 적에 존덕성尊德性 한 쪽을 가볍게 여겼는데, 이제 옳지 못함을 깨달았으니, 상면上面의 일절一截(尊德性을 가리킴)이 바로 하나의 배자坏子(본질)이다.
이 배자坏子가 있어야 학문學問의 공부가 비로소 둘 곳이 있게 된다.”
原注
[按]주자朱子는 말년에 배우는 자들이 오로지 강설講說만 힘쓰고 함양涵養을 폐하여 장차 언어言語와 문자文字의 고루함으로 흘러가는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하였다.
이 때문에 또 존덕성尊德性에 치중하여 이미 정윤부程允夫를 위해 명銘을 지으시고 또 여러 번 종유從遊하는 자들에게 징계하셨으니, 이는 정론定論이다.
그러므로 《심경心經》을 이것으로 끝마쳤으니, 후세의 배우는 자들이 진실로 여기에 힘써서 귀수歸宿할 바를 안다면 덕德이 닦아지고 도道가 응집되어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를 거의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原注
“덕성德性을 높이지 않으면 마음이 해이해지고 태만해지니, 학문이 어디로부터 진전되겠는가.”
原注
혹자가 여러 경서經書의 의심스러운 부분을 묻자, 선생은 이미 답하시고 다시 말씀하였다.
“지금 비록 공公에게 다 말해 주고 공이 다 깨닫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심지상心地上에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또한 일을 이루지 못한다.”
“지금 도리道理를 이해하되 만약 이 원두源頭를 알지 못하면 모두 쓸데없는 말이다.
다만 자기 신상身上에 고유固有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다 넓혀 채워서 불이 처음 타오르듯이 하고 샘물이 처음 나오듯이 하는 것이 바로 이 원두源頭이다.
이것을 보아야 비로소 강학講學할 수가 있으니, 마치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알고 다만 성현聖賢의 언어言語를 빌어서 길잡이로 삼는 것과 같다.”
原注
“나는 배우는 자들이 공허함을 말하고 기묘함을 말하는 것을 걱정하여 우선 먼저 글뜻을 통달하고서 글에 나아가 뜻을 찾게 하고자 하였는데, 결국에는 왕왕 또 다만 책자상冊子上의 언어言語만을 지키고 있으니, 도리어 봄이 자신에게 절실하지 않다.
반드시 자신에게 절실한 것을 보아서 완미玩味하여 마음속에 넣어서 힘써 행하여야 비로소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原注
“평소 독서할 때에는 또한 보이는 것이 있는 듯하다가도 이미 책을 놓고 나면 책과 별도가 되어 마찬가지이니, 병통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이는 바로 자기 몸에서 찾지 않고 오로지 책에서만 찾기 때문에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인仁을 함은 자신에게 말미암으니 남에게서 말미암겠는가’ 하였다.
무릇 내 몸이 일상생활 하는 사이가 모두 도道이니, 책은 이 마음을 붙여 모이게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먼저 자기 몸에서 찾은 뒤에 책에서 찾아야 하니, 이렇게 하면 책을 읽음에 비로소 맛이 있을 것이다.”
○ “지난번 가르침을 받을 적에 ‘독서는 모름지기 함양涵養하여야 하고 모름지기 무젖고자 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하고는 인하여 말하기를 “맹자孟子의 천 마디 만 마디 말씀이 다만 이 마음을 논한 것이니, 《맹자孟子》 7편篇을 이와 같이 마음을 논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함양하는 공부입니까?”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내가 사람들이 독서함에 거칠고 소홀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독서는 모름지기 함양涵養하여 흉중胸中에 얻는 바가 있게 하여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또 한 가지 생각을 갖다 붙여서 억지로 차배差排(지시)하고자 하는 것이니, 책을 보는 것을 어찌 이와 같이 하겠는가.”
또 한 사우士友가 말하기를 “선생의 함영涵泳에 대한 말씀은 바로 두원개杜元凱(杜預)의 우유優柔한다는 뜻이겠습니다.”하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또한 이와 같이 해설(설명)한 것이 아니니, 이른바 함영涵泳이란 것은 자세히 독서함을 일컫는 딴 명칭인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어려우니, 나는 다만 한 개의 함영涵泳을 말했을 뿐인데, 한 사람은 억지로 차배差排하고 한 사람은 억지로 해설하니, 이는 말에 따라 해석을 만들어내어서 지리하고 산만해지는 것이다.
조금만 전전展轉하면 다만 보탠 것이 많아지고 말이 고원해지니 이와 같이 독서한다면 전혀 스스로 하는 공부가 아니요, 유래한 곳이 없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학문學問을 말하게 하는 것이 공허한 담론임을 알겠다.”
原注
④ 섭하손葉賀孫이 “전에 가르침을 받들 적에는 다만 궁리상窮理上에 나아가 말씀한 것이 많았는데, 근래에는 존덕성尊德性과 치광대致廣大, 극고명極高明 상上의 일절一截을 자주 제기하고 깨우치심을 받사오니, 이 뜻이 어떠합니까?”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다만 두 가지를 뒤섞어(겸하여) 말했었는데, 단지 근래에는 제공諸公들이 궁리窮理공부를 이해함이 많으니, 또 스스로 점점 자기 몸에 절실하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原注
“지금 나의 문하門下에서 배우는 자가 이치를 상고함에 정밀하고 마땅하지 않음이 없어서 말을 함에는 물샐 틈이 없지만 행하는 바가 전도顚倒되고 착란錯亂하여 전혀 아는 것과 상반相反된다.
사람들은 다만 내가 문인門人들을 올바르게 인도하지 않아서 지금에 그들로 인해 누累를 입는다고 말하니,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해서이다. ‘문인門人들이 실제로 알고 있으니, 내 어찌 그들에게 말해 주지 않겠는가’
그러나 행하는 바가 아는 바와 배치되는 것은 다만 일찍이 원두상源頭上에 힘을 쓰지 않고 다만 헛되기 때문이다.”
原注
⑤ 요덕명廖德明이 “지금 다만 마음을 함양涵養하는 것만 논하고 학문學問을 강구講究하지 않는다면 비록 간사함을 막고 성誠을 보존하며 성냄을 징계하고 욕심을 막을 수는 있으나 일을 처리함에 이르러 차질이 생기면 어찌합니까?”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우선 이른바 ‘거처함에 공손히 하고 일을 집행함에 공경히 한다’는 것에 만약 공손하고 공경하지 않는다면 곧 방사함을 이룬다.
이와 같은 유類를 알기가 어렵지 않은데도 사람들은 방사하여 공손하고 공경하지 않으니, 마치 하나의 대공지정大公至正한 길이 매우 분명한데도 그 길로 가려 하지 않고 도리어 작은 한 길을 찾는 것과 같아 자신의 사사로운 뜻과 부합하면 곧 이것을 도리道理라고 일컬으니, 지금 사람들은 언제나 이와 같다.”
原注
⑥ 항평보項平父(項安世)에게 답한 편지에 말씀하였다.
“말씀해 준 곡절曲折과 육국정陸國正(陸九淵)에 대한 말씀을 세 번 반복하여 읽으니, 마음이 두려워져 어둡고 태만함을 경계함이 많았다.
대저 자사子思 이래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은 오직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 두 가지 일로 공부하는 요점을 삼았는데, 지금 육자정陸子靜이 말하는 것은 오로지 존덕성尊德性의 일이고 내가 평소에 논한 것은 도문학상道問學上에 말한 것이 많다.
그러므로 저(陸九淵)의 배우는 자들은 잡아 지키는 것은 볼 만한 것이 많으나 의리義理를 보는 것은 전혀 자세하지 못하고, 또 별도로 일종一種의 도리道理를 꿰어 맞추어 말해서 자신의 행위를 가리고 덮어 놓아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나는 스스로 생각해 보니, 비록 의리義理 상上에 있어서는 감히 어지럽게 말하지 않으나 자신을 위하고 남을 위하는 긴요한 공부에 있어서는 득력得力하지 못한 것이 많다.
지금 마땅히 자신에게 돌이켜 공부하여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모은다면 거의 한 쪽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原注
⑦ 임택지林擇之(林用中)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함양涵養에 관한 한 절節은 의심컨대 옛사람들은 곧바로 《소학小學》 가운데에서 함양涵養하여 성취成就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大學》의 도道는 다만 격물格物로부터 시작하였는데, 지금 사람들은 종전에 이러한 함양공부가 없으면서 다만 《대학大學》에 격물格物로써 우선을 삼은 것을 보고는 다만 사려思慮와 지식知識으로 구하려 하고 다시는 조존操存하는 곳에 힘을 쓰지 않으니, 비록 십분十分 살펴보고 헤아린다 하더라도 근거할 만한 실제가 없다.
대저 경자敬字는 상하上下를 통하는 뜻이요, 격물格物‧치지致知는 그 사이에 차례로 진보하는 곳이다.”
原注
⑧ 유자징劉子澄(劉淸之)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일전日前에는 학문을 한 것이 자신에 돌이킴에 느슨하였으니, 모든 것을 추후에 생각해 보건대 후회할 만한 것이 많다.
논저論著한 문자文字도 이런 병통에 걸려 착실着實하지 못한 부분이 많으니, 돌이켜 봄에 아득하여, 생각해 보건대 일 년이나 몇 달의 공부로 능히 구제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전에는 그래도 경부敬夫(張栻)와 백공伯恭(呂祖謙)이 때때로 바로잡아주어서 경계하고 살필 수 있었는데 두 벗이 죽고 나니, 귀에 전혀 이러한 말을 듣지 못한다.
지금 그대에게 깊이 기대하나니, 이로부터 보내 주는 편지에 통렬히 꾸짖어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군자君子가 사람을 사랑하는 뜻이다.”
原注
“근래에 생각해 보니, 향래向來(그 동안)에 학문한 것이 실로 밖을 향하여 절실하지 않은 폐단이 있었으니, 다만 자신을 그르칠 뿐만 아니라 남을 그르침이 또한 적지 않다.
이제 막 별도로 한 가지 단서를 찾았는데, 조금 간략하면서 분명한 듯하니, 비로소 문자文字와 언어言語 이외에 참으로 따로 마음을 쓸 곳이 있음을 알았다.
原注
⑩ 하숙경何叔京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만약 도道를 많이 듣고 널리 보아서 얻을 수 있다면 세상에 도道를 아는 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근래에 일로 인하여 바야흐로 조금 살펴 발명發明한 것이 있으니, 예컨대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논다’는 것을 명도明道가 ‘반드시 일삼는 바가 있으면서도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말라’는 뜻과 같다고 하신 것을 지금에야 비로소 환히 깨달아 의심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상생활하는 사이에 이 유행流行하는 본체本體가 애당초 간단間斷하는 곳이 없으며 공부에 하수下手(착수)할 수 있는 곳이 있음을 보았으니, 마침내 일전에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인 죄를 이루 다 속죄贖罪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서책書冊을 지키고 언어言語에 집착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 부디 일상생활 하는 사이에 이것을 살피기 바란다.
原注
“내가 일전日前에는 깊이 탐구하고 힘써 행하는 뜻이 없어 무릇 논설論說한 것이 모두 입에서 나오고 귀로 들어가는 여습餘習일 뿐이었다.
이 때문에 전혀 득력得力하지 못하였는데, 이제야 비로소 깨달아 용감하게 옛 습관을 고치려 하나 혈기血氣가 이미 쇠하고 심지心志 또한 다시 강하지 못하니, 마침내 이루는 바가 있을지 모르겠다.”
原注
⑪ 정윤부程允夫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대개 이 일은 본원本原을 함양涵養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경전經傳의 뜻을 강론함은 다만 이것을 돕는 것일 뿐인데, 그 동안 지나치게 출입出入해서 주장하여 따르는 바가 없었으니, 명색은 학문을 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는 무엇이 있겠는가.
原注
⑫ 황직경黃直卿(黃榦)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학문을 함은 곧바로 먼저 근본을 세워야 하니 글뜻은 우선 올바른 뜻을 말해 주어서 마음을 너그럽게 하여 완미玩味하게 할 것이요, 동이同異를 상고하고 섬밀纖密한 것을 연구하게 해서는 안 되니 이렇게 하면 의사意思가 촉박하여 큰 진전을 얻기 어려울까 두렵다.
장래(미래)에 큰 뜻을 보거든 대략 한두 절목節目을 들어 점차 이해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그 동안의 잘못인데 지금 다행히 발견하였으니, 모름지기 용감하게 고쳐야 할 것이요, 남의 비난과 비웃음을 구차히 피하려 하여 사람을 그르쳐서는 안 될 것이다.”
原注
“노선생老先生(朱子)이 평소 사람을 가르칠 적에 가장 긴요하게 여긴 곳은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 두 가지 공부를 진실로 어느 한쪽도 폐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대단하게 힘을 쓰신 곳은 대부분 도문학상道問學上에 있으셨다.
그런데 강서江西(陸九淵)의 한 학파學派는 다만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간략함에 나아가려 하여 유독 존덕성尊德性 상上에만 공부해 가니, 선생이 이것을 깊이 병통으로 여기셨다.”
[按]주자朱子가 말년에 항평보項平父, 임택지林擇之, 유자징劉子澄, 하숙경何叔京, 정윤부程允夫, 황직경黃直卿에게 답한 편지에 그 말씀이 이와 같으셨는데, 주자朱子가 별세한 뒤에 진씨陳氏의 말이 저와 같으니, 그렇다면 고정考亭의 학통學統이 진실로 한두 번 전해지기도 전에 진면목眞面目을 잃음을 면치 못한 것이다.
임천오씨臨川吳氏가 북계진씨北溪陳氏에 대하여 불만족스럽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니, 아마도 이러한 따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原注
면재황씨勉齋黃氏가 이경자李敬子(李燔)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성현聖賢들이 학문學問을 말씀한 것은 모두 신심상身心上에 나아가 공부하여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경이직내敬以直內와 의이방외義以方外를 모두 강학講學에 가까운 부분으로 설명하지 않았는데, 주부자朱夫子가 〈사람들의〉 식견이 잘못되기 쉬울까 두려워하시어 이에 박문博文과 약례約禮로 상대하여 말씀하였으니, 박문博文이 먼저이고 약례約禮가 뒤이며, 박문博文이 쉽고 약례約禮가 어렵다.
후세의 학자들은 쉬운 것만 오로지 힘쓰고 항상 어려운 것을 꺼리니, 이 때문에 도道가 전해지지 못한 것이다.
모름지기 《중용中庸》의 내용과 같이 하여 계구戒懼와 신독愼獨으로 평생의 사업事業을 삼아서 잠시도 버리지 말 것이요, 강학講學과 궁리窮理는 분명하고 또 바른 것을 구하는 것일 뿐이니, 만약 단지 강학講學만 힘쓰고 신심身心에 유념하지 않는다면 전혀 학문을 이루지 못할까 두렵다.
사람들이 마음을 감추고 있어서 측량할 수 없으니, 한 가지로써 다하고자 한다면 예禮를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는가.
말소리와 행동거지의 사이와 사물을 응접하는 사이에 도리道理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살핀다면 열 가지 중에 일곱 여덟은 얻을 것이니, 이러한 방식으로 다스리면 흘러가서 구이口耳의 학문學問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명도선생明道先生이 사상채謝上蔡에게 말씀한 것을 보니, ‘제공諸公들이 이곳에 와서 단지 나의 말만 배운다’ 하시므로 상채上蔡가 더 말씀해 줄 것을 청하자 명도明道께서는 ‘우선 정좌靜坐하라’ 하셨으니,
정자程子의 문하에 상채上蔡와 같은 이는 실제를 힘쓰고 자신을 위하는 공부를 한 자라고 이를 만한데도 명도明道께서 오히려 이로써 경계하셨으니, 만일 지금의 배우는 자들을 보신다면 어찌 크게 탄식하지 않으시겠는가.
나는 이미 늙어서 달리 세상에 바랄 것이 없고 오직 선사先師(朱子)의 학통學統이 전해짐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때문에 스스로 참람함을 알지 못하고 이와 같이 말함에 이르게 되었다.”
原注
“언제나 선사先師(朱子)께서 일생동안 신고辛苦하여 책을 지어서 후학後學들을 가르쳐 주신 것을 생각해 보니, 광명光明하고 빛나는데도 제생諸生들은 그 지취旨趣를 통달한 자가 없고 또 다시 몇 년이 지남에 전습傳習함이 더욱 잘못되니, 선사先師의 눈이 장차 지하에서 감기지 못하실 것이다.”
原注
“수사洙泗(孔孟) 이후로 박문博文과 약례約禮 두 가지를 모두 지극하게 한 자는 선생(朱子) 한 분뿐이다.
선생은 사람을 가르칠 적에 규모規模가 광대廣大하고 과급科級(등급)이 매우 엄격하여 차근차근 순서가 있어서 등급을 건너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몸에 간절히 하고 실제를 힘쓰며 의義‧이利를 변별하고 스스로 속이지 말며 홀로를 삼가라는 경계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정녕丁寧하고 간곡히 하여 귀에 대고 극진히 말씀하지 않음이 없으셨다.
언제나 남헌장공南軒張公의 ‘위한 바가 없이 한다’는 말씀을 욀 때에는 반드시 세 번 감탄하셨으며, 말년에 제생諸生들이 글뜻의 사이에 얽매이는 것을 보시고는 이 도道가 전해지지 않을 것을 깊이 우려하시어 비로소 본체本體를 가리켜 보여주어서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터득하게 하였으니, 배우는 자들에게 바람이 더욱 간절하다.”
原注
“옛날에 사람을 가르치고 학문을 함은 궁행躬行을 근본으로 삼았고 궁행躬行은 효제孝悌를 우선으로 삼았으며, 문文은 실행하고 여력餘力(여가)이 있은 뒤에 배웠으니, 이른바 문文이라는 것은 또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말한 것이요, 언어言語와 문자文字의 지엽적이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의 배우는 자들은 마침내 혹 이와 반대로 하니, 어찌 조화造化와 성명性命의 고원高遠한 진리眞理를 강론함으로 인하여 도리어 효제孝悌와 근신謹信의 절근切近한 도리道理를 잊는단 말인가.
이정선생二程先生이 주자周子의 말씀을 미루어 밝혀서 공맹孔孟에 도달하시고 성명性命으로 말미암아 궁행躬行에 돌려서 그 말씀이 일찍이 지知‧행行을 겸하여 들지 않은 적이 없으셨으니, 후세에 배우는 자들은 마땅히 이미 달리 구할 필요가 없는데, 불행히 이정二程이 별세하시자 문인門人 제자弟子들이 대부분 선학禪學으로 은근히 옮겨 가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였고, 비록 회옹선생晦翁先生께서도 초년初年에는 또한 거의 선학禪學에 빠질 뻔하였다.
그러다가 뒤에 비로소 일체 돌이켜서 평실平實한 데로 돌아와 평소 공부하신 것이 《논어論語》에 많았으며, 평소 《논어論語》를 설명할 적에 대부분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주장하시고 태극太極과 성명性命 등의 말을 설명함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한 때의 행배行輩(동년배)나 선유先儒들과 서로 더불어 강론함으로 인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문공文公(朱子)이 별세하시자 이 학문이 비록 성행하고 있으나 배우는 자들이 마침내 절실한 것을 하지 않고 오직 고원高遠한 것만을 하여서 강학講學할 적에 《논어論語》를 버리고 말하지 않고는 반드시 《대역大易》 (周易)을 먼저하고 《논어論語》를 말할 때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버리고 말하지 않고는 오직 일이관지一以貫之만을 논하여, 무릇 문공文公이 평소 깊이 경계하신 것을 배우는 자들이 마침내 스스로 편벽되이 따르고 돌아올 줄을 몰라서 단지 귀에 들어가고 입으로 나와 궁행躬行과 상관이 없게 한다.
삼가 일찍이 비유하건대 물을 떠서 마시려는 자는 반드시 근원根源을 깊이 파니, 근원根源을 깊이 파는 것은 물을 떠서 마시기 위한 계책인데 도리어 그 물을 버리고 떠서 마시지 않음은 무슨 의義(뜻)이며, 열매를 따서 먹으려는 자는 반드시 뿌리에 물을 주니, 뿌리에 물을 주는 것은 열매를 따 먹기 위한 것인데 도리어 그 열매를 버리고 먹지 않음은 무슨 소견이며, 궁행躬行을 바르게 하려는 자는 반드시 성리性理를 정밀하게 연구하니, 성리性理를 정밀하게 연구하는 것은 궁행躬行을 바로 하기 위한 것인데 도리어 궁행躬行을 불문不問에 내버려 둠은 어째서인가?
한漢‧당唐의 노사숙유老師宿儒들은 훈고訓詁에 빠져서 대부분 의리義理에 정밀하지 못하였는데, 근세에는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실마리(전통)를 이어 받아 모두 의리義理를 잘 말하나 말만 잘하고 행실을 잘하지 못하여 도리어 한漢‧당唐의 여러 유자儒者들보다 못하니, 이것을 통렬히 반성하고 속히 되돌리지 않는다면 말류末流의 폐단弊端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삼가 생각하건대 선유先儒들이 강론하여 꿰뚫기를 이미 정밀하게 한 나머지는 바로 배우는 자가 공경히 믿고 깊이 생각하여 행하여야 할 때이니, 선유先儒의 발명發明으로 말미암아 공자孔子의 대지大旨를 되찾고 성명性命의 소종래所從來를 알아 효제孝悌의 실제 행실로 귀수歸宿하여야 할 것이니, 또 어찌 다시 언어言語 사이에 많음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原注
“이치는 저절로 그러함이 있어 본래 말할 필요가 없지만 부자夫子(孔子)께서 부득이하여 문답에 나타낸 것이 있으니, 이 또한 모두 바로 배우는 자들의 궁행躬行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주자周子와 정자程子가 별세하자 배우는 자들이 공허한 것을 말하여 거짓으로 진실을 바꾸어서 시비是非가 어지러워졌는데,
문공선생文公先生이 이에 지知‧행行의 말씀을 강력히 주장하여 ‘반드시 먼저 의리義理를 밝혀서 옳고 그름을 분별한 뒤에 궁행躬行에 나타내야 이단異端에 빠져 들어 가는 병폐를 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세상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고 이치를 분석하는 말씀이 매우 정밀하니, 배우는 자가 그 말씀의 분명함으로 인하여 자기 몸의 행하는 바를 바르게 한다면 성인聖人이 되고 현인賢人이 됨이 어찌 불가하겠는가.
그런데 도리어 마침내 실마리를 주워 모으고 부황浮荒한 말을 더 보태어서 한갓 종신終身토록 의논함만 있고 마침내 단 하루도 궁행躬行함이 없어서 심지어는 〈학문學問을〉 빌어 간사함을 문식文飾하고 전전하여 세상을 속여서 풍속이 크게 파괴되어 차마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문공文公이 강명講明하신 바의 처음 뜻이 어찌 이와 같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들이 거듭 경계하고 살핌을 가하지 않고 말만 많이 하는 것을 능사로 삼을 수 있겠는가.”
原注
“하늘이 사람을 낸 소이所以와 사람이 사람이 된 소이所以는 이 덕성德性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聖人의 전함이 이어지지 않음으로부터 사자士子들의 학문學問이 종주宗主가 없어서 한漢‧당唐 천여 년 사이에 동자董子(董仲舒)와 한자韓子(韓愈) 두 분의 의희依稀(흐릿함)한 몇 마디 말씀이 도道에 가까웠으나 본원本原은 끝내 어두웠다.
그러다가 주자周子와 정자程子, 장자張子와 소자邵子가 나와서 비로소 위로 맹씨孟氏를 통하여 하나가 되었는데, 정씨程氏가 네 번 전수하여 주자朱子에 이르러서는 글뜻의 정밀함이 또 맹씨孟氏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학도學徒들이 왕왕 이에 집착하여 마음을 빠뜨리니, 〈주자朱子는〉 이미 세유世儒(俗儒)들의 기송사장記誦詞章을 속학俗學이라 하였는데 그들이 학문함 역시 지엽적인 언어와 문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이는 가정嘉定 이후 주문朱門 말학末學의 병폐로 이것을 바로잡은 자가 있지 못하다.
성인聖人의 학문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하늘이 나에게 주신 것을 온전히 하기 위해서일 뿐이니, ‘하늘이 나에게 주었다’는 것은 덕성德性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근본이 되며 이것이 형질혈기形質血氣의 주재가 되니, 이것을 버리고 달리 구한다면 배우는 것이 무슨 배움이겠는가.
가령 행실이 사마문정공司馬文正公(司馬光)과 같고 재주가 제갈충무후諸葛忠武侯(諸葛亮)와 같더라도 익히면서 밝게 알지 못하고 행하면서 살피지 못함이 됨을 면치 못한다.
또한 자품資稟과 기국器局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남에 불과하니, 성학聖學에 얻음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물며 훈고訓詁의 정밀함과 강설講說의 치밀함에 그쳐, 북계진씨北溪陳氏와 쌍봉요씨雙峯饒氏와 같다면 저 기송사장記誦詞章의 속학俗學과의 거리가 어찌 한 치나 되겠는가.
성학聖學이 송대宋代에 크게 밝아졌는데도 그 뒤를 이은 자가 이와 같으니, 한탄스러울 뿐이다.
나는 글뜻을 깊이 연구하여 세밀하게 나누고 자세하게 분석하면서 매양 진씨陳氏도 정밀하지 못하다 여기고 요씨饒氏도 치밀하지 못하다 여겨 이 과구科臼(구덩이) 속에 떨어진 지 4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잘못됨을 깨달았다.
지금 이후로는 하루의 안에 자시子時부터 해시亥時까지, 한 달의 안에 초하루부터 그믐까지, 일년의 안에 봄부터 겨울까지 항상 나의 덕성德性이 밝고 밝아 하늘이 운전運轉(운행)함과 같고 해와 달이 왕래往來함과 같음을 보아서 잠시라도 간단間斷함이 없게 하려 하니, 이렇게 한다면 이 덕성德性을 공경히 받드는 도리에 거의 가까울 것이다.
이에 능하지 못함이 있으면 남에게 묻고 자신에게 배워서 반드시 이르고자 해야 할 것이니, 힘쓰는 방법으로 말하면 말로 다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용中庸》의 수장首章과 정완訂頑의 마지막 편을 음미하여 스스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原注
[按] 배우는 자들의 병폐는 간략하고 빠른 데에 마음을 치달려서 흘러가 공허空虛한 이학異學을 하지 않으면, 뜻을 다하여 〈성명性命을〉 연구해서 흘러가 비루한 속학俗學을 하고 마니, 선철先哲의 시대에도 이미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3백 년이 지난 지금에 있어서이겠는가.
면재황씨勉齋黃氏와 과재이씨果齋李氏는 친히 고정考亭(朱子)에게 수업하여 전수傳授를 얻은 자인데도 속으로 걱정함이 이와 같았고, 자계황씨慈溪黃氏와 임천오씨臨川吳氏는 모두 고정考亭에게 사숙私淑하여 이 도道를 들은 자인데도 공공연히 말씀함이 이와 같았으니, 그렇다면 그 지식의 참됨과 소견의 분명함이 진실로 하늘이 그 사이에 도와 주어서 이 도道로 하여금 끝내 천하天下에 어두워지지 않게 한 듯하다.
배우는 자가 이에 대하여 마음을 아파하고 뼈에 새겨서 주자朱子를 스승으로 삼고 경敬을 도道에 들어가는 요점으로 삼아 방심放心을 찾고 덕성德性을 공경히 받들며 학문學問으로써 보조하되 먼저 역행力行을 하고 굳게 잡아 지켜서 공허한 것으로 하여금 돌아와 평실平實함에 나아가고 비근卑近한 것으로 하여금 위로 고명高明함에 통달하게 한다면 성문聖門의 전체全體 대용大用의 학문學問이 혹 거의 가까울 것이요, 이 《심경心經》에 뽑은 것도 빈말이 되지 않을 것이니, 뜻이 있는 선비들은 부디 서로 더불어 힘쓸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