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一者는 無欲이라하니 今試看無欲之時에 心豈不一이리오
原注
周先生
이 說一者
는 無欲也
라하시니 然這
高
하야 卒急難湊泊
이니 尋常人
이 如何便得無欲
이리오
故伊川
이 只說箇敬字
하야 敎人
하시니 只就這敬字上
하야 면 庶幾執捉得定
하야 有箇下手處
라
이니 要之
컨대 皆只要人於此心上
에 見得分明
하야 自然有得耳
라
然今之言敬者 乃皆
外事
하고 不知直截於心上求功
이라
遂覺
不快活
하나니 不若
於求放心處有功
이면 則尤省力
이니라
原注
○ 石子重
이 問 心
은 하고 備體用
이라 故能寂而感
하고 感而寂
하나니 其寂然不動者
는 誠也
며 體也
요 感而遂通者
는 神也
며 用也
니
原注
如此說
이면 便是自棄
니 雖與不能居仁由義者
로 差等不同
이나 其自小
는 一也
라
原注
[按] 以下所摭四條는 皆論學者當以聖人爲師而以聞道爲要요 不可恬於小成而羣於自畫이니 蓋所謂心學者如此而已라
雖所言이 不盡同於周子나 然開示後覺之意는 則無有不同者焉이니라
原注
故凡學者 以聖人爲可至라하면 則必以爲狂而竊笑之하나니
夫聖人은 固未易至어니와 若舍聖人而學이면 是將何所取則乎아
的立於彼然後에 射者可視之而求中이니 其中不中은 則在人而已어니와 不立之的이면 以何爲準이리오
原注
今之學者 只爲不知爲學之方하고 又不知學成要何用하나니
欲爲聖賢之所爲
인댄 須是聞聖賢所得之道
니 하야 不爲非義之士而已
면 則古來如此等人
이 不少
어니와 然以爲聞道則不可
라
且如東漢之衰
에 處士逸人與夫名節之士 有聞當世者多矣
어니와 觀其作處
하야 責以古聖賢之道
하면 則略無毫髮
相似
는 何也
오
今時學者平居則曰 吾當爲古人之所爲
라호되 有一事到手
면 便措置不得
하나니
蓋其所學이 以博古通今하야 爲文章하고 或志於忠信愿慤하야 不爲非義而已라
原注
凡人이 須以聖賢爲己任이어늘 世人이 多以聖賢爲高而自視爲卑라
故不肯進하나니 抑不知稟性이 與常人一同이니 安得不以聖賢爲己任이리오
自開闢以來
로 生多少人
이로되 求其盡己者
하면 千萬人中
에 無一二
하고 只是
枉過一世
라
詩曰 天生烝民
에 이라하니 今世學者 往往有物而不能有其則
하나니
人性本善
이로되 只爲嗜慾所迷, 利害所逐
하야 니라
大抵爲己之學은 於他人에 無一毫干預하니 聖賢千言萬語 只是使人反其固有而復其性耳니라
原注
니 其反躬也
에 必以無欲爲敬
하고 以無息爲誠
하고 하고 하고 以天下後世不傳此道爲己憂
하면 而此心此道之全體妙用
이 皆在其中矣
라
龜山所謂以聖人爲師는 猶學射而立的者 此也며 所謂學聖賢之所爲인댄 必欲聞聖賢所得之道者 此也라
程子曰 言學인댄 便以道爲志요 言人인댄 便以聖爲志라하시니 自非體之以身하야 從容默會而有深功하고 驗之以心하야 超然自得而有餘味者면 能之乎아
“ ‘성인聖人을 배워서 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가능하다’고 대답하였다.
‘요점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 이유를 묻습니다’ 하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일一이 요점이 되니, 일一이란 욕심이 없는 것이다.
욕심이 없으면 고요할 때에는 마음이 비워지고 동할 때에는 마음이 곧아진다.
고요할 때에 마음이 비워지면 밝고 밝으면 통하며, 동할 때에 마음이 곧아지면 공정公正하고 공정하면 넓어지니, 밝고 통하며 공정公正하고 넓으면 거의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 ”
原注
“일一이란 욕심이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제 시험해 보건대 욕심이 없을 때에 마음이 어찌 한결같지 않겠는가.
사람이 다만 욕심이 있기 때문에 이 마음이 곧 천 갈래 만 갈래가 되는 것이다.”
原注
“주선생周先生이 ‘일一이란 욕심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였는데, 이것은 화두話頭가 높아서 갑자기 도달하기가 어려우니, 심상尋常(보통)한 사람들이 어떻게 곧 욕심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천伊川이 다만 경자敬字를 말씀하여 사람들을 가르치셨으니, 다만 이 경자상敬字上에 나아가 떠밀고 나가면 거의 잡아 안정되어서 착수着手할 곳이 있을 것이다.
비록 얻지 못하더라도 잃음에 이르지 않을 것이니, 요컨대 모두 다만 사람이 심상心上에 보기를 분명히 하여 자연 얻음이 있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에 경敬을 말하는 자들은 모두 다 바깥일을 꾸미고 곧바로 심상心上에서 공부할 줄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안하여 쾌활하지 못함을 깨달으니, 목전目前의 방심放心을 구하는 곳에 공부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보다 힘이 덜들 것이다.”
原注
석자중石子重이 “마음은 성誠‧신神을 겸하고 체體‧용用을 구비하였으므로 고요하면서도 감동하고 감동하면서도 고요한 것이니, 고요하여 동하지 않음은 성誠이고 체體이며 감동하여 마침내 통함은 신神이고 용用입니다.
체體와 용用이 근원根源이 하나이고 현顯(드러난 상象)과 미微(은미한 이理)가 간격이 없다는 것은 바로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인 듯합니다.”하고 묻자, 주자朱子는 “이 말이 매우 좋다.”하고 대답하였다.
原注
[按] 여기에 말한 성誠이 체體이고 신神이 용用이라는 말은 바로 주자周子의 고요할 때에는 마음이 비워지고 동할 때에는 마음이 곧아진다는 뜻이다.
原注
“일등을 가져다가 딴 사람에게 양보하여 주고 우선 이등을 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조금이라도 이와 같이 말하면 곧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니, 비록 인仁에 거하고 의義를 행하지 못하는 자와는 차등差等(등급)이 똑같지 않으나 스스로 작게 여기는 것은 똑같다.
학문을 말할진댄 곧 도道로써 뜻을 삼아야 하고, 사람을 말할진댄 곧 성인聖人으로써 뜻을 삼아야 한다.”
原注
[按] 이 아래에 뽑은 네 조목은 모두 배우는 자가 성인聖人을 스승으로 삼고 도道를 듣는 것을 요점으로 삼아야 하며 소성小成을 편안히 여겨 스스로 한계 짓는 무리와 어울려서는 안 됨을 논한 것이니, 이른바 심학心學이라는 것은 이와 같을 뿐이다.
비록 말한 바가 주자周子와 모두 같지는 않으나 후각後覺(後學)들을 열어 보여주신 뜻은 같지 않음이 없다.
原注
“옛날의 배우는 자들은 성인聖人을 스승으로 삼았는데도 그 배움이 지극하지 못함이 있었다.
이 때문에 모든 배우는 자들이 ‘성인聖人의 경지를 배워서 이를 수 있다’고 말하면 반드시 미쳤다고 여기며 속으로 비웃는다.
성인聖人은 진실로 쉽게 이를 수 없으나 만약 성인聖人을 버리고 배운다면 장차 무엇을 법칙으로 삼겠는가.
성인聖人을 스승으로 삼음은 활쏘기를 배울 때에 과녁[的]을 세우는 것과 같다.
과녁을 저기에다 세운 뒤에야 활쏘는 자가 이것을 보고서 적중的中하기를 구할 수 있으니, 과녁에 적중하고 적중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을 뿐이지만 과녁을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을 표준으로 삼겠는가.”
原注
또 나공羅公 중소仲素(羅從彦)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오늘날 배우는 자들은 학문하는 방법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 학문이 이루어지면 어디에 써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 문제는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하니, 모름지기 일찍이 힘을 써 보아야만 비로소 쉽지 않음을 알게 된다.
배움이란 성현聖賢이 행하신 바를 배우는 것이다.
성현聖賢이 행하신 바를 배우고자 할진댄 모름지기 성현聖賢이 얻은 바의 도道를 들어야 하니, 만약 단지 고금古今의 일을 널리 통달하여 문장文章을 짓고 충신忠信과 원각愿慤(삼가고 후덕함)을 하여 비의非義의 선비가 되지 않으려고 할 뿐이라면 예로부터 이와 같은 사람이 적지 않았으나 도道를 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
또 동한東漢이 쇠퇴했을 때에 처사處士와 일인逸人, 명망名望과 지절志節이 있는 선비로 당대에 알려진 자가 많았으나 그 행동한 곳을 관찰하여 옛 성현聖賢의 도道로써 책한다면 털끝만큼도 방불彷彿하여 서로 같은 자가 조금도 없음은 어째서인가?
이들이 도道에 대해 애당초 들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배우는 자들은 평소에는 ‘내 마땅히 옛사람이 하신 것을 하겠다’고 말하나 겨우 한 가지 일이 손에 이르면 곧 조치措置하지 못하니,
이는 그 배운 바가 고금古今의 일을 널리 통달하여 문장文章을 짓고 혹은 충신忠信과 원각愿慤에 뜻을 두어 비의非義를 하지 않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배우면서 도道를 듣지 못하면 배우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原注
“모든 사람들이 모름지기 성현聖賢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성현聖賢을 높다고 여기고 자신을 보기를 낮게 여긴다.
그러므로 성현聖賢에 나아가려고 하지 않으니, ‘성현聖賢의 품성稟性이 상인常人과 똑같으니, 어찌 성현聖賢을 자신의 임무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천지天地가 개벽開闢한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났지만 자신의 도리道理를 다한 자를 찾아보면 천만 명 가운데에 한두 명밖에 없고 다만 뒤섞여서 한 세상을 헛되이 보냈을 뿐이다.
《시경詩經》에 ‘하늘이 만백성을 낼 적에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 하였는데, 지금 세상에 배우는 자들은 왕왕 사물만 있고 법칙은 있지 못하다.
《중용中庸》의 ‘덕성德性을 높이면서도 문학問學을 말미암아야 한다’는 몇 구句는 바로 철두철미徹頭徹尾한 내용이다.
사람의 성性은 본래 선善하지만 다만 기욕嗜慾에 혼미해지고 이해利害에 쫓겨서 일제히 어두워지는 것이다.”
혹자가 “성性을 밝힘은 모름지기 경敬을 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진실로 옳거니와 다만 경敬 또한 뒤섞어 말해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매사에 점검하여야 하니, 그 대요大要를 논한다면 다만 방과放過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대체로 자신을 위하는 학문은 타인에게는 일호一毫도 간여함이 없으니, 성현聖賢의 천 마디 만 마디 말씀은 단지 사람으로 하여금 고유固有한 것을 되찾아서 본성本性을 회복하게 하였을 뿐이다.”
原注
“성현聖賢이 아신 바의 도道를 배우는 것은 딴 방법이 없다.
경敬을 주장하여 근본根本을 세우고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知識을 지극히 하고 자기 몸에 돌이켜 실제實際를 행하는 것일 뿐이니, 자기 몸에 돌이킬 적에 반드시 욕심이 없는 것을 경敬으로 삼고 쉼이 없는 것을 성誠으로 삼고 날로 새로워짐을 덕德으로 삼고 풍부하게 소유함을 사업事業으로 삼고, 한 사람과 한 물건이라도 은택을 입지 못함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고 천하와 후세에 이 도道가 전해지지 못함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는다면 이 마음과 이 도道의 전체全體와 묘용妙用이 모두 이 안에 들어 있을 것이다.
귀산龜山의 이른바 ‘성인聖人을 스승으로 삼음은 활쏘기를 배울 때에 과녁을 세우는 것과 같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며, 이른바 ‘성현聖賢이 행하신 바를 배우고자 할진댄 모름지기 성현聖賢이 얻은 바의 도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정자程子가 말씀하기를 ‘학문을 말할진댄 곧 도道로써 뜻을 삼아야 하고, 사람을 말할진댄 곧 성인聖人으로써 뜻을 삼아야 한다’ 하셨으니, 만일 몸으로 체행體行하여 종용從容(조용하고 여유 있음)하고 묵묵히 알아 깊은 공부가 있으며 마음으로 체험하여 초연超然히 자득自得하여 충분한 맛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이에 능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