損은 有孚면 元吉하고 无咎可貞하여 利有攸往하니라 曷之用이리오 二簋可用享이니라
疏
損之爲義, 損下益上, 損剛益柔, 損下益上, 非補不足者也,
若不以誠信, 則涉諂諛而有過咎, 故必有孚, 然後大吉, 无咎可正, 而利有攸往矣,
故曰“損, 有孚, 元吉, 无咎可貞, 利有攸往”也.
疏
[疏]先儒皆以无咎可貞, 各自爲義, 言“旣吉而无咎, 則可以爲正.”
準下王注彖辭
“
而不爲邪, 益上而不爲諂, 則何咎而可正”, 然則王意, 以无咎可貞, 共成一義.
故莊氏云“若行損有咎, 則須補過以正其失, 今行損用信,
‘曷之用, 二簋可用享’者, 明行損之禮, 貴夫誠信, 不在於豐. 旣行損以信, 何用豐爲.
二簋至約, 可用享祭矣, 故曰“曷之用, 二簋可用享”也.
注
[注]艮爲陽이요 兌爲陰이니 凡陰은 順於陽者也라 陽止於上하고 陰說而順하여 損下益上은 上行之義也라
疏
[疏]正義曰:此就二體, 釋卦名之義. 艮, 陽卦, 爲止, 兌, 陰卦, 爲說.
損而有孚면 元吉하고 无咎可貞하여 利有攸往하니라
注
[注]損之爲道는 損下益上하고 損剛益柔也니 損下益上은 非補不足也요 損剛益柔는 非長君子之道也라
爲損而可以獲吉은 其唯有孚乎인저 損而有孚면 則元吉이요 无咎而可正하여 利有攸往矣라
損剛益柔호되 不以消剛하고 損柔益上호되 不以盈上하여 損剛而不爲邪하고 益上而不爲諂이면 則何咎而可正이리오
疏
[疏]正義曰:卦有元吉已下等事, 由於有孚, 故
, 則其義可見矣.
注
[注]二簋는 質薄之器也니 行損以信이면 雖二簋나 而可用享이라
疏
[疏]正義曰:‘曷之用 二簋可用享’者, 擧經明之, 皆爲損而有孚, 故得如此.
疏
[疏]正義曰:申明二簋之禮, 不可爲常. 二簋至約,
非時, 不可也.
注
[注]下不敢剛하여 貴於上行은 損剛益柔之謂也니 剛爲德長하니 損之不可以爲常也라
疏
[疏]正義曰:明損下益上之道, 亦不可爲常. 損之所以能損下益上者, 以下不敢剛亢, 貴於奉上, 則是損於剛亢而益柔順也.
‘益柔’者, 謂益艮之陰爻也. 人之爲德, 須備剛柔, 就剛柔之中, 剛爲德長. 旣爲德長, 不可恒減, 故損之有時.
注
[注]自然之質이 各定其分하여 短者不爲不足이요 長者不爲有餘니 損益을 將何加焉이리오 非道之常이라 故로 必與時偕行也라
疏
[疏]正義曰:‘盈虛’者,
此又云與時偕行者, 上旣言損剛益柔, 不可常用,
此又汎明損益之事, 體非恒理, 自然之質, 各定其分. 鳧足非短, 鶴脛非長, 何須損我以益人, 虛此以盈彼.
但有時宜用, 故應時而行, 故曰“損益盈虛, 與時偕行”也.
疏
[疏]正義曰:澤在山下, 澤卑山高, 似澤之自損, 以崇山之象也.
疏
[疏]正義曰:君子以法此損道, 以懲止忿怒, 窒塞情慾. 夫人之情也, 感物而動, 境有順逆, 故情有忿欲.
注
[注]損之爲道는 損下益上하니 損剛益柔하여 以應其時者也라 居於下極하여 損剛奉柔하면 則不可以逸이요
處損之始면 則不可以盈이니 事已則往하여 不敢宴安이라야 乃獲无咎也라
剛以奉柔하여 雖免乎咎나 猶未親也라 故로 旣獲无咎하고 復自酌損이라야 乃得合志也라 遄은 速也라
疏
[疏]正義曰:‘已事遄往 无咎’者, 已, 竟也, 遄, 速也. 損之爲道, 損下益上, 如人臣欲自損己奉上.
‘酌損之’者, 剛勝則柔危, 以剛奉柔, 初未見親也. 故須酌而減損之, 乃得合志, 故曰“酌損之.”
疏
[疏]正義曰:‘尙合志’者,
所以竟事速往, 庶幾與上合志也.
注
[注]柔
可
全益
이요 剛不可〈以〉全削
이요 下不可以无正
이라 初九已損剛以順柔
하고
進之於柔하면 則凶矣라 故로 曰 征凶也라하니라 故로 九二不損而務益하여 以中爲志也라
疏
[疏]正義曰:柔不可以全益, 剛不可以全削, 下不可以无正.
故九二利以居而守正, 進之於柔則凶, 故曰“利貞, 征凶”也.
疏
[疏]正義曰:‘中以爲志’者, 言九二所以能居而守貞, 不損, 益之, 良由居中, 以中爲志, 故損益得其節適也.
注
[注]損之爲道는 損下益上하여 其道上行이라 三人은 謂自六三已上三陰也니
三陰竝行하여 以承於上이면 則上失其友하고 內无其主하니 名之曰益이나 其實乃損이라
故로 六三獨行이면 乃得其友하고 二陰俱行이면 則必疑矣라
疏
○正義曰:六三處損之時, 居於下體, 損之爲義, 其道上行. 三人, 謂自六三已上三陰.
上一人, 謂上九也, 下一人, 謂六三也. 夫陰陽相應, 萬物化醇, 男女匹配, 故能生育,
六三應於上九, 上有二陰, 六四‧六五也. 損道上行, 有相從之義.
若與二陰并己俱行, 雖欲益上九一人, 更使上九懷疑, 疑則失其適匹之義也.
名之曰益, 卽不是減損, 其實損之也, 故曰“三人行則損一人.”
疏
[疏]正義曰:‘三則疑’者, 言一人則可, 三人,
加疑惑也.
注
[注]履得其位하고 以柔納剛하여 能損其疾也니 疾何可久리오 故로 速乃有喜라
損疾以離其咎하여 有喜乃免이라 故로 使速乃有喜하니 有喜는 乃无咎也라
疏
陰陽相會, 同志斯來, 無復企
之疾, 故曰“損其疾.”
疾何可久, 速乃有喜, 有喜, 乃无咎, 故曰“使遄, 有喜, 无咎.”
疏
○正義曰:‘速乃有喜 有喜乃无咎’者, 相感而久不相會, 則有勤望之憂, 故速乃有喜.
初九自損以益四, 四不速納, 則有失益之咎也, 故曰“有喜, 乃无咎也.”
六五는 或益之하여 十朋之龜를 弗克違니 元吉하니라
注
[注]以柔居尊而爲損道하니 江海處下에 百谷歸之하나니 履尊以損이면 則或益之矣라
朋은 黨也요 龜者는 決疑之物也라 陰非先唱이요 柔非自任이니 尊以自居로되 損以守之라 故로 人用其力하고 事順其功이라
智者慮能
하고 明者慮策
하여 弗能違也
면 則衆才之用
이 矣
니 獲益而得十朋之龜
하여 足以盡天人之助也
라
疏
○正義曰:六五居尊, 以柔而在乎損, 而能自抑損者也. 居尊而能自抑損, 則天下莫不歸而益之, 故曰“或益之”也.
‘或’者, 言有也, 言其不自益之, 有人來益之也.
‘龜’者, 決疑之物也. 陰不先唱, 柔不自任, 尊以自居, 損以守之, 則人用其力, 事竭其功, 智者慮能, 明者慮策, 而不能違也.
朋至不違, 則群才之用, 盡矣, 故曰“十朋之龜, 弗克違”也. 群才畢用, 自尊委人, 天人竝助, 故曰“元吉.”
疏
○正義曰:‘朋 黨也’者, 馬‧鄭皆 “案爾雅云‘十朋之龜者, 一曰神龜, 二曰靈龜, 三曰攝龜,
疏
[疏]正義曰:‘自上祐’
, 上謂天也, 故與
義同也.
上九는 弗損하고 益之면 无咎하고 貞吉하니 利有攸往이요 得臣이니 无家라
注
[注]處損之終하여 上无所奉하니 損終反益이니 剛德不損하고 乃反益之하여 而不憂於咎라
用正而吉하여 不制於柔면 剛德遂長이라 故로 曰 弗損하고 益之면 无咎하고 貞吉하니 利有攸往也라하니라
居上乘柔하고 處損之極하여 尙夫剛德이면 爲物所歸라 故로 曰 得臣이요 得臣則天下爲一이라 故로 无家也라
疏
○正義曰:‘弗損 益之 无咎 貞吉’者, 損之爲義, 損下益上, 上九處損之極, 上无所奉, 損終反益, 故曰“弗損, 益之”也.
‘利有攸往’者,
於柔, 不使三陰俱進, 不疑其志, 剛德遂長, 故曰“利有攸往”也.
又能自守剛陽, 不爲柔之所制, 豈惟无咎貞吉而已. 所往亦无不利, 故曰“利有攸往”, 義兩存也.
‘得臣 无家’者, 居上乘柔, 處損之極, 尊夫剛德, 爲物所歸, 故曰“得臣.”
得臣則以天下爲一, 故曰“无家”, 无家者, 光宅天下, 无適一家也.
疏
[疏]正義曰:‘大得志’者, 剛德不損, 爲物所歸, 故大得志也.
損은 孚信(誠信)이 있으면 크게 吉하고 바로잡을 만한 허물이 없어,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 어디에 쓰겠는가. 두 簋만 가지고도 祭享할 수 있다.
疏
○正義曰:[損] 減損하는 이름이니, 이 卦는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탬을 밝혔다. 그러므로 卦 이름을 ‘損’이라 한 것이다.
損卦의 뜻은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태고 剛을 덜어 柔에 보태니,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탬은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요, 剛을 덜어 柔에 보탬은 君子의 道를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誠信으로써 하지 않으면 아첨에 해당되어 허물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孚信이 있은 뒤에야 크게 吉하고 바로잡을 말한 허물이 없어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운 것이다.
이 때문에 “損은 孚信이 있으면 크게 吉하고 바로잡을 만한 허물이 없어,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라고 한 것이다.
疏
先儒는 모두 无咎와 可貞을 각각의 뜻으로 삼아서 “이미 吉하고 허물이 없으면 바름이 될 수 있다.”고 말하였으나,
아래 王輔嗣(王弼)가 彖辭(〈彖傳〉의 글)에 注하기를 “剛을 덜어도 간사함이 되지 않고 위에 보태어도 아첨함이 되지 않으니, 무슨 허물이 있어서 바로잡을 것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에 준거하면, 王輔嗣의 뜻은 ‘无咎可貞’을 함께 한 뜻으로 이룬 것이다.
그러므로 莊氏가 이르기를 “만약 덞을 행하여 허물이 있으면 모름지기 허물을 補塡하여 그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지만, 지금 덞을 행함에 誠信을 사용하니,
이는 바로잡을 만한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잡을 만한 허물이 없다.’라 한 것이다.”라 하였으니, 나는 莊氏의 말이 王輔嗣의 뜻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曷之用 二簋可用享] 損을 행하는 禮는 誠信을 귀하게 여기고 풍부함에 있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이미 덞을 행하기를 誠信으로써 하였으면 어찌 풍부할 필요가 있겠는가.
두 簋가 지극히 간략하지만 이를 사용하여 祭享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디에 쓰겠는가. 두 簋만 가지고도 祭享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彖傳〉에 말하였다. “損은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태어 그 道가 위로 행하니,
注
艮은 陽이 되고 兌는 陰이 되니, 무릇 陰은 陽에게 순한 자이다. 陽은 위에 그쳐 있고 陰은 기뻐하며 순종하여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탬은 위로 행하는 뜻이다.
疏
正義曰:이는 두 體를 가지고 卦名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艮은 陽卦이고 그침이 되며, 兌는 陰卦이고 기쁨이 된다.
陽은 위에 그쳐 있고 陰은 기뻐하며 순종하니, 이는 아래가 스스로 減損하여 윗사람을 받드는 것이니, ‘위로 행함’을 이른다.
덞에 孚信이 있으면 크게 吉하고 바로잡을 만한 허물이 없어서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
注
損卦의 道는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태고 剛을 덜어 柔에 보태니,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탬은 부족함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요, 剛을 덜어 柔에 보탬은 君子의 道를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다.
덜어서 吉함을 얻을 수 있음은 오직 孚信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덞에 孚信이 있으면 크게 吉하고 바로잡을 만한 허물이 없어서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운 것이다.
剛을 덜어 柔에 보태되 剛이 사라지게 하지 않고, 柔를 덜어 위에 보태되 위가 너무 가득 차지 않게 해서 剛을 덜어도 간사함이 되지 않고 위에 보태어도 아첨함이 되지 않으면 무슨 허물이 있어서 바로잡을 것이 있겠는가.
비록 큰 어려움을 구제하지는 못하나 이러한 방식으로 가면 물건이 막을 것이 없는 것이다.
疏
正義曰:卦에 ‘元吉’ 이하 등의 일이 있는 것은 孚信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而’자를 加하였으니, 그 뜻을 볼 수 있다.
注
曷은 어조사이니, ‘曷之用’은 ‘어찌 풍부함을 쓸 것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注
두 簋는 質朴하고 薄한(진귀하지 않은) 그릇이니, 덞을 행하기를 誠信으로써 하면 비록 두 簋라도 사용하여 祭享할 수 있는 것이다.
疏
正義曰:[曷之用 二簋可用享] 經文을 들어 밝혔으니, 모두 덞에 孚信이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음을 얻은 것이다.
두 簋를 〈올리는 것은〉 응함이 때가 있으며,
注
지극히 儉約한 道는 常道로 삼아서는 안 된다.
疏
正義曰:두 簋의 禮를 常道로 삼아서는 안 됨을 거듭 밝힌 것이다. 두 簋는 지극히 儉約하니, 오직 損의 때에 있으면서 때에 應하여 행해야 하는바, 때가 아니면 불가하다.
注
아래가 감히 剛하지 못하여 위로 감을 귀하게 여김은 剛을 덜어 柔에 보탬을 이르니, 剛은 德이 뛰어남이 되는바, 더는 것을 常道로 삼아서는 안 된다.
疏
正義曰:아래를 덜어 위에 보태는 道를 또한 常道로 삼아서는 안 됨을 밝힌 것이다. 損卦가 능히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탤 수 있는 이유는 아래가 감히 강하고 높을 수가 없어서 위를 받드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니, 이렇게 하면 剛亢을 덜어서 柔順함에 보태게 된다.
[益柔] 艮의 陰爻에 보탬을 이른다. 사람의 德은 모름지기 剛과 柔를 구비해야 하니, 剛‧柔의 中道에 나아가서 剛이 德의 으뜸이 된다. 이미 德의 으뜸이 되었으면 항상 줄여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더는 것이 때가 있는 것이다.
덜고 더함과 가득 채우고 비움을 때와 더불어 함께 행해야 한다.”
注
自然의 質이 각각 그 분수가 정해져 있어서 짧은 것이 부족함이 되지 않고 긴 것이 有餘함이 되지 않으니, 덜고 더함을 어찌 加할 것이 있겠는가. 常道가 아니므로 반드시 때와 더불어 함께 행해야 하는 것이다.
疏
正義曰:[盈虛] 오리발은 짧지만 본성대로 맡겨두고, 학의 다리는 길지만 자연스러운 것이다. 여기에 또 “때와 더불어 함께 행한다.”라고 말한 것은, 위에 이미 剛을 덜어 柔에 보태는 것을 항상 써서는 안 됨을 말하였고,
여기에서는 또 덜고 더하는 일은 體가 항상하는 이치가 아니어서 自然의 質이 각각 그 분수가 정해져 있음을 널리 밝힌 것이다. 오리발이 짧은 것이 아니요 학의 다리가 긴 것이 아니니, 어찌 굳이 나를 덜어 남에게 보태며 이것을 비워 저것을 채울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마땅히 써야 할 때가 있기 때문에 때에 응하여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덜고 더함과 가득 채우고 비움을 때와 더불어 함께 행한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산 아래에 못이 있는 것이 損卦이니,
疏
正義曰:못이 산 아래에 있으니, 못은 낮고 산은 높은바, 못이 스스로 덜어 산을 높이는 象과 같은 것이다.
君子가 이것을 보고서 분함을 징계하고 욕심을 막는다.”
注
덜 만한 것의 좋음은 분노와 욕심보다 더한 것이 없다.
疏
正義曰:君子가 이 損卦의 道를 본받아서 분노를 징계하여 그치고 情慾을 막는다. 사람의 情은 물건에 감응하여 動함에 환경에 순하고 거슬림이 있다. 그러므로 情에 분노와 욕망이 있는 것이다.
[懲] 이미 지나간 것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窒] 앞으로 오는 것을 막는 것이다. 忿과 欲이 모두 가고 옴이 있는데 징계와 막음〈이라고 한 번만 쓴 것〉은 互文으로 써서 서로 충족한 것이다.
初九는 일이 끝났으면 빨리 가야 허물이 없으리니, 斟酌하여 덜어야 한다.
注
損卦의 道는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태고 剛을 덜어 柔에 보태어서 때에 應하는 자이다. 下體의 極에 거하여 剛을 덜어 柔를 받들면 편안할 수가 없고,
損의 시초에 처했으면 가득 차서는 안 되니, 일이 끝나면 곧 가서 감히 편안하지 않아야 비로소 허물이 없을 수 있다.
剛으로서 柔를 받들어 비록 허물을 면하나 아직 친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이미 허물이 없음을 얻고 다시 스스로 斟酌하여 덜어야 비로소 뜻이 합할 수 있는 것이다. ‘遄’은 속히 함이다.
疏
正義曰:[已事遄往 无咎] ‘已’는 끝남이요, ‘遄’은 속히 함이다. 損卦의 道는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태니 마치 人臣이 스스로 자신을 덜어 위를 받들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각기 맡은 바가 있는데, 만약 일을 폐하고 가면 허물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고, 만약 일이 끝났는데도 가지 않으면 오만함이 되니, 일이 끝났으면 속히 가야 비로소 허물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일이 끝났으면 빨리 가야 허물이 없으리라.”라고 한 것이다.
[酌損之] 剛이 우세하면 柔가 위태로워지니, 剛으로서 柔를 받들어 초기에는 아직 친함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斟酌하여 덜어야 비로소 뜻이 합한다. 이 때문에 “斟酌하여 덜어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일이 끝났으면 빨리 감’은 행여 뜻이 합하고자 해서이다.”
注
행여 뜻이 합하고자 하여 빨리 가려는 것이다.
疏
正義曰:[尙合志] 尙은 庶幾이니, 일이 끝나면 속히 가는 이유는 행여 위와 뜻이 합하고자 해서이다.
九二는 貞함이 이롭고 가면 凶하니, 덜지 않고 보탠다.
注
柔는 완전히 더해서는 안 되고, 剛은 완전히 깎아서는 안 되고, 아래는 正이 없어서는 안 된다. 初九가 이미 剛을 덜어 柔에 순종하였고,
九二가 中을 밟고 있는데 다시 자기를 덜어 柔에 보태면 剝卦의 道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빨리 가서는 안 되고 貞함이 이로우며,
柔로 나아가면 흉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면 흉하다.”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九二가 덜지 않고 보태는 데 힘써서 中을 뜻으로 삼는 것이다.
疏
正義曰:柔는 완전히 더해서는 안 되고, 剛은 완전히 깎아서는 안 되고, 아래는 正이 없어서는 안 된다.
初九가 이미 剛을 덜어 柔에 보태어서 六四에게 순응하여 初六이 되었는데, 九二가 다시 자기를 덜어 六五에게 보태어서 六二가 되면 剝卦의 道가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九二는 居하면서 바름을 지키는 것이 이롭고, 柔로 나아가면 흉한 것이다. 그러므로 “貞함이 이롭고 가면 凶하다.”라고 한 것이다. 이미 감이 흉하기 때문에 九二가 자기를 덜지 않고 보태는 데 힘쓴다. 그러므로 “덜지 않고 보탠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九二의 貞함이 이로움’은 中을 뜻으로 삼는 것이다.”
疏
正義曰:[中以爲志] 九二가 능히 居하면서 貞을 지켜서 덜지 않고 보태는 이유는 진실로 中에 거하여 中을 뜻으로 삼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덜고 보탬이 그 節度에 알맞음을 얻는 것이다.
六三은 세 사람이 가면 한 사람을 덜고, 한 사람이 가면 그 벗을 얻는다.
注
損卦의 道는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태어서 그 道가 위로 간다. 三人은 六三부터 이상의 세 陰을 이르니,
三陰이 함께 가서 上九를 받들면 上九가 벗을 잃고 안에 주장이 없으니, 이름을 益이라 하나 그 실제는 바로 損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이 서로 응하여야 비로소 化醇할 수 있고 남자와 여자가 짝이 되어야 비로소 化生할 수 있으니, 陰과 陽이 상대하지 못하면(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낳는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六三이 홀로 가면 마침내 벗을 얻고, 두 陰과 함께 가면 반드시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疏
○正義曰:六三이 損의 때에 처하여 下體에 거하였으니, 損의 뜻은 그 道가 위로 행한다. 三人은 六三부터 이상의 세 陰을 이른다.
위의 ‘一人’은 上九를 이르고, 아래의 ‘一人’은 六三을 이른다. 陰과 陽이 서로 응하여야 萬物이 化醇하고 男女가 짝을 이루기 때문에 능히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니,
六三이 上九에 응하고 위에 두 陰이 있는바, 六四와 六五이다. 損卦의 道는 위로 행하여 서로 따르는 뜻이 있다.
만약 두 陰과 더불어 자신이 함께 가면 비록 上九 한 사람을 보태고자 하나 다시 上九로 하여금 의심하는 마음을 품게 하니, 의심하면 배필을 따라가는 뜻을 잃는다.
이름을 益이라 하여 減損이 아니나 그 실제는 損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 사람이 가면 한 사람을 던다.”라고 한 것이다.
만약 六三 한 사람만 홀로 가면 上九가 자기를 받아들여 의심함이 없으니, 이렇게 하면 벗을 얻는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가면 벗을 얻는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한 사람이 감’은 셋이면 의심하는 것이다.”
疏
正義曰:[三則疑] 한 사람이면 可하고 세 사람이면 더욱더 의혹함을 말한 것이다.
六四는 그 병을 덜되 빨리 하게 하면 기쁜 일이 있게 되니, 허물이 없으리라.
注
밟음이 正位를 얻고 柔로서 剛을 받아들여 능히 자신의 병을 더는 것이니, 병을 어찌 오래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빨리 〈병을 덜게〉 하면 마침내 기쁨이 있는 것이다.
병을 덜어 허물을 떠나서 기쁜 일이 있어 마침내 면한다. 그러므로 빨리 〈병을 덜게〉 하면 마침내 기쁨이 있는 것이니, 기쁨이 있음은 바로 허물이 없는 것이다.
疏
○正義曰:[疾] 서로 그리워하는 병(相思病)이다. 初九가 스스로 자기를 덜어 빨리 가면 자기(六四)가 正道로써 빨리 받아들여야 하니,
陰와 陽이 서로 만나고 同志가 이에 와서 다시 바라보는 병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 병을 던다.”라고 한 것이다.
병을 어찌 오래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 빨리 〈병을 덜게〉 하면 마침내 기쁨이 있으니, 기쁨이 있음은 바로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빨리 하게 하면 기쁜 일이 있게 되니, 허물이 없으리라.”라고 한 것이다.
疏
○正義曰:[速乃有喜 有喜乃无咎] 서로 감동하나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하면 애타게 바라보는 근심이 있다. 그러므로 속히 하면 마침내 기쁨이 있는 것이다.
初九가 자신을 덜어 六四에 보태니, 六四가 속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益을 잃는 허물이 있다. 그러므로 “기쁨이 있음은 바로 허물이 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그 병을 덞’은 또한 기쁠 만한 것이다.”
疏
正義曰:[亦可喜] ≪詩經≫에 “또한 이미 만나면 내 마음 가라앉는다.”라고 하였으니, 기쁜 일이 있지 않겠는가.
六五는 혹 보태주어서 열 무리(종류)의 거북껍질을 어기지 못하니, 크게 吉하다.
注
柔로서 尊位에 거하여 損의 道를 행한다. 강과 바다가 아래에 처함에 온갖 골짜기의 물이 돌아오니, 높은 지위를 밟고서 덜면(자신을 겸손히 하면) 혹 보태주는 것이다.
‘朋’은 무리요, ‘거북껍질’은 의심을 결단하는 물건이다. 陰은 先唱하는 물건이 아니고 柔는 스스로 맡는 자가 아니니, 높음을 자처하나 덜어 지킨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쓰고 일이 그 功을 순히 이루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자가 재능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현명한 자가 계책을 생각하여 능히 어기지 못하면 여러 인재의 등용됨이 극진한 것이니, 유익함을 얻어 열 종류의 거북껍질을 얻어서 하늘과 사람의 도움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疏
○正義曰:六五가 尊位에 거하였으나 柔로서 損의 때에 있어서 능히 스스로 억제하고 더는 자이다. 높은 지위에 거하여 능히 스스로 억제하고 덜면 天下가 돌아와 보태주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므로 “혹 보태주다.”라 한 것이다.
[或] 있음을 말한 것이니, 스스로 보태지 않고 어떤 사람이 와서 보태줌을 말한 것이다.
[龜] 의심을 결단하는 물건이다. 陰이 先唱하지 않고 柔가 自任하지 아니하여 높음을 자처하나 덜어 지키면,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쓰고 일이 그 功을 다해서, 지혜로운 자가 재능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현명한 자가 계책을 생각하여 능히 어기지 못한다.
벗이 이르러 의심하지 않으면 여러 인재의 등용됨이 극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열 종류의 거북껍질을 어기지 못한다.”라고 한 것이다. 여러 인재가 모두 등용되어서 자신이 높으면서 남에게 맡기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도와준다. 그러므로 “크게 길하다.”라고 한 것이다.
疏
○正義曰:[朋 黨也] 馬融과 鄭玄이 모두 “살펴보건대, ≪爾雅≫에 ‘「十朋之龜」는 첫 번째는 神龜, 두 번째는 靈龜, 세 번째는 攝龜,
네 번째는 寶龜, 다섯 번째는 文龜, 여섯 번째는 筮龜, 일곱 번째는 山龜, 여덟 번째는 澤龜, 아홉 번째는 水龜, 열 번째는 火龜이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象傳〉에 말하였다. “六五가 크게 길함은 위에서 도와주기 때문이다.”
疏
正義曰:[自上祐] ‘上’은 하늘을 이른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도와주어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것과 뜻이 같은 것이다.
上九는 덜지 않고 보태면 허물이 없고 貞하여 吉하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롭고 신하를 얻으니 정해진 집이 없다.
注
損의 終에 처하여 위에 받드는 바가 없으니 損이 끝나 도리어 益(보탬, 유익함)이 되니, 剛의 德을 덜지 않고 마침내 도리어 보태어서 허물을 근심하지 않는다.
바름을 사용하여 吉해서 柔에게 제재받지 않으면 剛의 德이 마침내 자라난다. 그러므로 “덜지 않고 보태면 허물이 없고 貞하여 吉하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라고 한 것이다.
위에 거하고 柔를 타고 있으며 損의 極에 처하여 剛한 德을 숭상하면 물건(사람들)이 귀의하는 바가 된다. 그러므로 “신하를 얻는다.”라고 하였고, 신하를 얻으면 천하가 하나가 되므로 정해진 집이 없는 것이다.
疏
○正義曰:[弗損 益之 无咎 貞吉] 損卦의 뜻은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태는 것이니, 上九가 損卦의 極에 처하여 위에 받드는 바가 없어서 損이 끝나 도리어 益이 된다. 그러므로 “덜지 않고 보탠다.”라고 한 것이다.
이미 剛의 德을 덜지 않고 마침내 도리어 보태면 허물을 근심하지 않고 바름을 사용하여 길하다. 그러므로 “허물이 없고 貞하여 吉하다.”라고 한 것이다.
[利有攸往] 柔에게 제재받지 않아서 세 陰으로 하여금 함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여 그 뜻을 의심하지 않으면 강한 德이 마침내 자라난다. 그러므로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라고 한 것이다.
또 능히 스스로 剛陽을 지켜서 柔에게 제재받지 않으면 어찌 다만 ‘허물이 없고 貞하여 吉함’일 뿐이겠는가. 가는 곳마다 또한 이롭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라고 하였으니, 뜻이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得臣 无家] 위에 거하고 柔를 타고 있어서 損卦의 極에 처하여 강한 德을 높이니, 물건이 귀의하는 바가 된다. 그러므로 “신하를 얻었다.”라고 한 것이다.
신하를 얻으면 천하가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정해진 집이 없다.”라 하였으니, 정해진 집이 없다는 것은 德이 天下에 충만하여 다만 하나의 집일 뿐만이 아닌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덜지 않고 보탬’은 크게 뜻을 얻는 것이다.”
疏
正義曰:[大得志] 剛한 德이 손상되지 않아서 물건이 귀의하는 바가 되었다. 그러므로 크게 뜻을 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