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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易正義(3)

주역정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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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정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艮其背
[注]目无患也
[疏]正義曰:目者, 能見之物, 施止於面, 則抑割所見, 强隔其欲, 是目見之所患. 今施止於背, 則目无患也.
不獲其身하고
[注]所止在後故 不得其身也
行其庭이라도 不見其人하여
[注]相背故也
无咎리라
[注]凡物 對面而不相通이면 否之道也 艮者 止而不相交通之卦也
各止而不相與하니 何得无咎리오 唯不相見이라야 乃可也 施止於背하면 不隔物欲하여 得其所止也
背者 无見之物也 无見則自然靜止 靜止而无見이면 則不獲其身矣
相背者 雖近而不相見이라 行其庭이라도 不見其人也
夫施止 不於无見하여 令物自然而止하여 而强止之하면 則姦邪並興이요 近而不相得則凶이라
其得无咎 艮其背하여 不獲其身하고 行其庭이라도 不見其人故也
[疏]‘艮其背不獲其身’至‘无咎’
○正義曰:‘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者, 艮, 止也, 靜止之義.
施之於人, 則是止物之情, 防其動欲, 故謂之止.
艮其背者, 此明施止之所也. 施止得所, 則其道易成, 施止不得其所, 則其功難成, 故老子曰
背者, 无見之物也, 夫无見則自然靜止. 夫欲防止之法, 宜防其未兆,
旣兆而止, 則傷物情, 故施止於无見之所, 則不隔物欲, 得其所止也.
若施止於面, 則對面而不相通, 强止其情, 則姦邪並興, 而有凶咎.
止而无見, 則所止在後, 不與而相對. 言有物對面而來, 則情欲有私於己, 旣止在後, 則是施止无見,
相背者, 雖近而不相見, 故行其庭, 不見其人. 如此乃得无咎, 故曰“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也.
又若能止於未兆, 則是治之於未萌, 若對面不相交通, 則是否之道也, 但止其背, 可得无咎也.
彖曰 艮 止也 時止則止하고 時行則行하여 動靜 不失其時하니 其道光明이라
[注] 不可常用이요 必施於不可以行이니 適於其時하면 道乃光明也
[疏]‘彖曰艮止也’至‘其道光明’
○正義曰:‘艮 止也’者, 訓其名也.
‘時止則止 時行則行 動靜不失其時 其道光明’者, 將釋施止有所光明, 施止有時.
凡物之動息, 自各有時運, 用止之法, 不可爲常, 必須應時行止, 然後其道乃得光明也.
艮其止 止其所也
[注]易背曰止 以明背卽止也 施止 不可於面이요 施背라야 乃可也
施止於止하고 不施止於行이면 得其所矣 曰 艮其止 止其所也라하니라
[疏]正義曰:此釋施止之所也.
易背曰止, 以明背者, 无見之物, 卽是可止之所也.
旣時止卽宜止, 時行則行, 所以施止須是所. 艮旣訓止, 今言艮其止, 是止其所止也, 故曰“艮其止, 止其所也.”
上下敵應하여 不相與也 是以 不獲其身하며 行其庭이라도 不見其人하여 无咎也
[疏]正義曰:‘上下敵應 不相與也’者, 此就六爻皆不相應, 釋艮卦之名, 又釋不獲其身以下之義.
凡應者, 一陰一陽, 二體不敵, 今上下之位, 雖復相當, 而爻皆峙敵, 不相交與, 故曰“上下敵應, 不相與也.”
, 皆六爻不應, 何獨於此言之者,
謂此卦旣止而不, 又峙而不應, 與止義相協, 故兼此以明之也.
‘是以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也’者, 此擧經文以結之, 明相與而止之, 則无咎也.
象曰 兼山이니 君子以思不出其位하나니라
[注]各止其所하여 不侵官也
[疏]正義曰:‘兼山 艮’者, 兩山義重, 謂之兼山也. 直置一山, 已能鎭止, 今兩山重疊, 止義彌大, 故曰“兼山, 艮”也.
‘君子以思不出其位’者, 止之爲義, 各止其所, 故君子於此之時, 思慮所及, 不出其己位也.
初六 艮其趾라야 无咎하니 利永貞하니라
[注]處止之初하여 行无所之 止其趾라야 乃得无咎 至靜而定이라 利永貞이라
[疏]正義曰:‘艮其趾 无咎’者, 趾, 足也, 初處體下, 故謂之足.
居止之初, 行无所適, 止其足而不行, 乃得无咎, 故曰“艮其趾, 无咎”也.
‘利永貞’者, 靜止之初, 不可以躁動, 故利在永貞也.
象曰 艮其趾 未失正也
[疏]正義曰:‘未失正也’者, 行則有咎, 止則不失其正, 釋所以永貞.
六二 艮其腓하여 不拯其隨 其心不快로다
[注]隨 謂趾也 止其腓故 其趾不拯也 腓體躁而處止하여 而不得拯其隨하고 又不能退聽安靜이라 其心不快也
[疏]正義曰:‘艮其腓 不拯其隨’者, , 在足之上. 腓體或屈或伸, 躁動之物, 腓動則足隨之, 故謂足爲隨.
‘其心不快’者, 腓是躁動之物, 而强之, 貪進而不得動, 則情與質乖也,
此爻明施止不得其所也.
象曰 不拯其隨 未退聽也일새라
九三 艮其限이라 其夤이니 厲薰心이로다
[注]限 身之中也 三當兩象之中이라 曰 艮其限이라하니라
當中脊之肉也 止加其身하여 中體而分이라 列其夤而憂危薰心也
艮之爲義 各止於其所하니 上下不相與하여 至中則列矣 列加其夤이면 危莫甚焉하니 危亡之憂 乃薰灼其心也
施止體中하면 其體分焉하니 體分兩主 大器喪矣
[疏]‘九三艮其限’至‘厲薰心’
○正義曰:限, 身之中, 人帶之處, 言三當兩象之中, 故謂之限, 施止於限, 故曰“艮其限”也.
夤, 當中脊之肉也. 薰, 燒灼也. 旣止加其身之中, 則上下不通之義也, 是分列其夤.
夤旣分列, 身將喪亡, 故憂危之切, 薰灼其心矣. 然則君臣共治, 大體若身,
大體不通, 則君臣不接, 君臣不接, 則上下離心, 列夤則身亡, 離心則國喪, 故曰“列其夤, 厲薰心.”
[疏]○注‘體分兩主大器喪矣’
○正義曰:‘體分兩主 大器喪矣’者, 大器, 謂國與身也, 此爻亦明施止不得其所也.
象曰 艮其限이라 危薰心也
六四 艮其身하여 无咎니라
[注]中上稱身하고 履得其位하여 止求諸身하여 得其所處 不陷於咎也
[疏]‘六四艮其身无咎’
○正義曰:‘艮其身 无咎’者, 中上稱身. 六四居止之時, 已入上體, 履得其位,
止求諸身, 不陷於咎, 故曰“艮其身, 无咎”也.
象曰 艮其身 止諸躬也
[注]自止其躬하여 不分全體
[疏]‘象曰’至‘止諸躬也’
○正義曰:‘止諸躬也’者, 躬, 猶身也, 明能靜止其身, 不爲躁動也.
[疏]○注‘自止其躬不分全體’
○正義曰:艮卦總其兩體, 以爲二身, 兩體不分, 乃謂之全, 全乃謂之身.
以九三居兩體之際, 在於身中, 未入上體, 則是止於下體, 不與上交, 所以體分夤列.
六四已入上體, 則非上下不接, 故能總止其身, 不分全體. 然則身是總名, 而言中上稱身者, 何也.
蓋至中則體分而身喪, 入上體則不分而身全. 九三施止於分體, 故謂之限,
六四施止於全體, 故謂之身, 非中上獨是其身, 而中下非身也.
六五 艮其輔 言有序하니 悔亡하리라
[注]施止於輔하여 以處於中이라 口无擇言하여 能亡其悔也
[疏]正義曰:輔, 頰車也, 能止於輔頰也. 以處其中, 故口无擇言也, 言有倫序, 能亡其悔, 故曰“艮其輔, 言有序, 悔亡.”
象曰 艮其輔 以中正也일새라
[注]能用中正故 言有序也
上九 敦艮이니하니라
[注]居止之極하여 極止者也 敦重在上하여 不陷非妄하니 宜其吉也
[疏]正義曰:敦, 厚也. 上九居艮之極, 極止者也, 在上能用敦厚以自止, 不陷非妄, 宜其吉也, 故曰“敦艮, 吉”也.
象曰 敦艮之吉 以厚終也일새라
[疏]正義曰:‘以厚終’者, 言上九能以敦厚自終, 所以獲吉也.


그 등에 그치면
눈에 근심이 없는 것이다.
正義曰:눈은 볼 수 있는 물건이니, 얼굴에 그침을 베풀면 보는 바를 억제하여 그 하고자 함을 강제로 막는 것이니, 이는 눈에 보임의 근심이다. 그런데 지금 그침을 등에 베풀면 눈에 근심이 없는 것이다.
그 몸을 얻지 못하고
그치는 바가 뒤에 있으므로 그 몸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 뜰을 가더라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여
서로 등져 있기 때문이다.
허물이 없으리라.
모든 물건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도 서로 통하지 못하면 否塞한 道이다. 艮卦는 그쳐서 서로 통하지 못하는 卦이다.
각각 그쳐 서로 더불지(친하지) 못하니, 어찌 허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오직 서로 보지 않아야 可한 것이다. 그침을 등에 베풀면 物欲을 막지 않아서 그 그칠 곳을 얻는다.
‘등’은 봄이 없는 물건이니, 봄이 없으면 자연히 고요하여 그치고, 고요하여 그쳐서 봄이 없으면 그 몸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서로 등져 있는 것은 비록 가깝더라도 서로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뜰을 가더라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침을 베풀기를 봄이 없는 곳에 해서 물건으로 하여금 자연히 그치게 하지 못하여 억지로 그치게 하면 간사함과 사악함이 함께 일어나고,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 보지 못하면 凶하다.
허물이 없음을 얻은 것은 그 등에 그쳐서 그 몸을 얻지 못하고 그 뜰을 가더라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經의 [艮其背不獲其身]에서 [无咎]까지
○正義曰:[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 ‘艮’은 그침이니, 고요하여 그치는 뜻이다.
이는 山을 형상한 卦이니, 그리하여 ‘艮’으로 이름한 것이다. 이것을 사람에게 베풀면 물건의 情을 그치게 하여 그 動하는 욕심을 막는다. 그러므로 ‘그친다’라고 한 것이다.
‘艮其背’는, 이는 그침을 베푸는 장소를 밝힌 것이다. 그침을 베풂이 제자리를 얻으면 그 道가 이루어지기가 쉽고, 그침을 베풂이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功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러므로 老子는 “욕심낼 만한 것을 보여주지 아니하여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게 한다.”라고 한 것이다.
‘背’는 봄이 없는 물건이니, 봄이 없으면 자연히 고요하여 그친다. 防止하는 법을 만들고자 할진댄 마땅히 그 조짐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 막아야 하니,
이미 조짐이 나타난 뒤에 그치면 물건의 情이 상한다. 그러므로 봄이 없는 곳에 그침을 베풀면 物欲을 막지 않아서 그 그칠 곳을 얻는 것이다.
만약 얼굴에 그침을 베풀면 얼굴을 마주 대하고도 서로 통하지 못하고, 그 情을 강제로 그치게 하면 간사함과 사악함이 함께 일어나서 흉함과 허물이 있게 된다.
그치면서 봄이 없게 하면 그치는 바가 뒤에 있어서 더불어 상대하지 않는다. 어떤 물건이 대면하고서 오면 情과 하고자 함에 자기의 사사로움이 있지만, 이미 그침이 뒤에 있으면 이는 봄이 없는 곳에 그침을 베푼 것이니,
그치는 곳이 봄이 없는 곳이면 어찌 그 몸을 보겠는가. 그러므로 그 몸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 이미 그 몸을 얻지 못하면 서로 등지는 것이다.
서로 등지는 자는 비록 가까이 있더라도 서로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뜰을 가더라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비로소 허물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등에 그치면 그 몸을 얻지 못하고 그 뜰을 가더라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여 허물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또 만약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그치면 이것은 싹트기 전에 다스리는 것이요, 만약 얼굴을 마주 대하고도 서로 통하지 못하면 이는 否塞한 道이니, 다만 그 등에 그치면 허물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彖傳〉에 말하였다. “‘艮’은 그침이니, 때가 그쳐야 하면 그치고 때가 행하여야 하면 행해서 動하고 靜함을 그 때를 잃지 않으니, 그 道가 光明하다.
그치는 道를 항상 사용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행할 수 없는 데에 베풀어야 하니, 그 때에 적당하면 道가 비로소 光明해지는 것이다.
經의 [彖曰艮止也]에서 [其道光明]까지
○正義曰:[艮 止也] 卦의 이름을 訓한 것이다.
[時止則止 時行則行 動靜不失其時 其道光明] ‘그침을 베풂에 光明한 바가 있으려면 그침을 베풂에 때가 있어야 함’을 해석한 것이다.
모든 물건의 動하고 靜함은 본래 각기 時運이 있으니, 그침을 사용하는 법을 常法으로 삼아서는 안 되고 반드시 때에 응하여 행하고 그쳐야 하니, 그런 뒤에야 그 道가 비로소 光明하게 되는 것이다.
‘艮其止’는 제자리에 그치는 것이다.
‘背’를 바꾸어 ‘止’라 한 것은 背가 바로 止임을 밝힌 것이다. 그침을 베풀기를 얼굴에 해서는 안 되고, 등에 베풀어야 비로소 可하다.
그쳐야 할 곳에 그침을 베풀고 행해야 할 곳에 그침을 베풀지 않으면 제자리를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艮其止’는 제자리에 그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正義曰:이는 그침을 베푸는 장소를 해석한 것이다.
[艮其止] 經文의 ‘艮其背’를 중첩한 것이다. ‘背’를 바꾸어 ‘止’라 한 것은, ‘등’은 봄이 없는 물건이니 바로 그칠 수 있는 장소임을 밝힌 것이다.
이미 때가 그쳐야 하면 마땅히 그치고 때가 행해야 하면 행하니, 이 때문에 그침을 베풂이 이 처소에 맞는 것이다. ‘艮’을 이미 ‘止’로 訓하였는데, 이제 ‘艮其止’라고 한 것은 그 그칠 바에 그친 것이다. 그러므로 “‘艮其止’는 제자리에 그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上下가 대적해 應하여 서로 더불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몸을 얻지 못하며 그 뜰을 가더라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여 허물이 없는 것이다.”
正義曰:[上下敵應 不相與也] 이는 六爻가 모두 서로 應하지 않음을 가지고 艮卦의 이름을 해석하고, 또 ‘不獲其身’ 이하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무릇 應이란 한 陰과 한 陽이 〈만나〉 두 體가 대적하지 않아야 하니, 지금 위아래의 자리가 비록 다시 같은 艮끼리 서로 당하였으나(만났으나) 爻가 모두 對峙(대치)해서 서로 더불지 않는다. 그러므로 “上下가 대적해 應하여 서로 더불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8개의 純卦가 모두 六爻가 應하지 않는데 어찌하여 유독 이 艮卦에서만 말하였는가?
이는 이 卦가 이미 그쳐서 爻가 서로 사귀지 못하고 또 대치하여 應하지 않아서 그치는 뜻과 서로 맞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겸하여 밝힌 것이다.
[是以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也] 이는 經文을 들어 맺어서 ‘서로 더불되 그치면 허물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兼한 山이 艮卦이니, 君子가 보고서 생각함이 자기 지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각각 제자리에 그쳐서 남의 관직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正義曰:[兼山 艮] 두 山의 뜻이 중첩되었으므로 ‘兼한 山’이라 한 것이다. 단지 하나의 山만 두더라도 이미 눌러 그치게 할 수 있는데 지금 두 山이 중첩되었으니, 그치는 뜻이 더욱 크다. 그러므로 “兼한 山이 艮卦이다.”라고 한 것이다.
[君子以思不出其位] 止의 뜻이 각각 제자리에 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君子가 이때에 思慮의 미치는 바가 그 자신의 지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初六은 발을 그쳐야 허물이 없으니, 영원하고 貞固함이 이롭다.
止의 처음에 처하여 감에 갈 곳이 없으므로 그 발을 그쳐야 비로소 허물이 없을 수 있는 것이요, 지극히 고요하여 定해지기 때문에 영원하고 貞固함이 이로운 것이다.
正義曰:[艮其趾 无咎] ‘趾’는 발이니, 初六이 卦體의 아래에 처했으므로 ‘足’이라 이른 것이다.
止의 처음에 거하여 감에 갈 곳이 없어서 그 발을 그쳐 가지 않아야 비로소 허물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발을 그쳐야 허물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利永貞] 고요히 그치는 처음에는 조급히 動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로움이 영원하고 貞固함에 있는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발을 그침’은 바름을 잃지 않은 것이다.”
正義曰:[未失正也] 가면 허물이 있고 그치면 바름을 잃지 않으니, 永貞함이 이로운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六二는 장딴지를 그쳐서 그 따르는 바(발)를 들어 올리지 못하는지라 마음이 불쾌하다.
‘隨’는 ‘발’을 이르니, 장딴지를 그쳤으므로 발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장딴지의 體는 조급한데 그침에 처하여 그 따르는 바를 들어 올리지 못하고 또 물러가서 ‘安靜하라’는 말을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불쾌한 것이다.
正義曰:[艮其腓 不拯其隨] ‘腓’는 장딴지이니, 발의 위에 있다. 장딴지의 體는 혹 굽히고 혹 펴서 조급히 動하는 물건이니, 장딴지가 움직이면 발이 따라 움직인다. 그러므로 ‘발’을 일러 ‘隨’라 한 것이다.
‘拯’은 들어 올림이니, 이제 이미 장딴지에 그침을 베풀어서 장딴지가 움직일 수 없으면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 그러므로 “장딴지를 그쳐서 그 따르는 바를 들어 올리지 못한다.”라고 한 것이다.
[其心不快] 장딴지는 조급히 움직이는 물건인데 강제로 그치게 하니, 나아감을 탐하면서 움직이지 못하면 감정이 性質과 괴리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불쾌하다.”라고 한 것이다. 이 爻는 그침을 베풂이 제자리를 얻지 못함을 밝힌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그 따르는 바를 들어 올리지 못함’은 물러가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正義曰:[未退聽也] ‘聽’은 따름이니, 이미 발을 들어 올려 움직이지 못하고 또 고요히 물러가 그치라는 명령을 따르지 못하니, 이 때문에 그 마음이 불쾌한 것이다.
九三은 허리 부분[限]에 그친다. 그 등줄기가 분열되니, 위태로워 마음을 태우도다.
‘限’은 몸의 중앙이니, 九三이 두 象의 중앙에 당하였다. 그러므로 “限에 그친다.”라고 한 것이다.
‘夤’은 가운데 등마루[中脊]의 살에 당한 곳이니, 그침을 몸에 가하여 몸 가운데에서 나뉘었다. 그러므로 그 등줄기를 분열하여 근심과 위태로움이 마음을 태우는 것이다.
艮卦의 뜻은 각기 제자리에 그치는 것이니, 上下가 서로 더불지 못하여 가운데에 이르면 분열된다. 분열을 그 등줄기에 가하면 위태로움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으니, 위태롭고 멸망할 근심이 마침내 그 마음을 태우는 것이다.
그침을 몸 가운데에 베풀면 몸이 나누어지니, 몸이 두 주장으로 나뉘면 大器가 상실된다.
經의 [九三艮其限]에서 [厲薰心]까지
○正義曰:‘限’은 몸의 중앙이니, 사람이 띠를 매는 곳인바, 九三이 두 象의 중앙에 당함을 말하였으므로 ‘限’이라 이른 것이니, 그침을 限에 베풀기 때문에 “限에 그친다.”라고 한 것이다.
‘夤’은 가운데 등마루의 살에 당한 곳이다. ‘薰’은 태우는 것이다. 이미 그침을 몸의 가운데에 가하면 이는 상하가 통하지 못하는 뜻이니, 바로 그 등줄기가 분열되는 것이다.
등줄기가 이미 분열되면 몸이 장차 죽는다. 그러므로 근심하고 위태로움이 간절하여 그 마음을 태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주와 신하가 함께 다스릴 적에 大體가 몸과 같으니,
大體가 통하지 못하면 군주와 신하가 접하지(사귀지) 못하고, 군주와 신하가 접하지 못하면 상하가 마음이 괴리되니, 등줄기가 분열되면 몸이 망하고, 마음이 떠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등줄기가 분열되니 위태로워 마음을 태운다.”라고 한 것이다.
○注의 [體分兩主大器喪矣]
○正義曰:[體分兩主 大器喪矣] ‘大器’는 나라와 몸을 이르니, 이 爻 또한 그침을 베풂에 제자리를 얻지 못함을 밝힌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허리 부분에 그치기 때문에 위태로워 마음을 태우는 것이다.”
六四는 몸에 그쳐서 허물이 없다.
中과 上이 몸에 걸맞고 밟은 것이 正位를 얻어서 그침을 자기 몸에 요구하여 거처할 바를 얻었다. 그러므로 허물에 빠지지 않은 것이다.
經의 [六四艮其身无咎]
○正義曰:[艮其身 无咎] 中과 上이 몸에 걸맞은 것이다. 六四가 止의 때에 거하여 이미 上體로 들어가고 밟은 것이 正位를 얻어서
그침을 자기 몸에 요구하여 허물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몸에 그쳐서 허물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求’는 구함[責]이다. ‘諸’는 之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몸에 그침’은 자기 몸에 그치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 몸에 그쳐서 全體(온전한 體)를 나누지 않은 것이다.
經의 [象曰]에서 [止諸躬也]까지
○正義曰:[止諸躬也] ‘躬’은 ‘身’과 같으니, 자기 몸을 고요히 그쳐서 조급히 동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注의 [自止其躬不分全體]
○正義曰:艮卦는 두 體를 총괄하여 두 몸으로 삼았으니, 두 體가 나뉘지 않으면 비로소 ‘온전하다’라고 이르고, 온전하면 비로소 ‘몸’이라 이를 수 있는 것이다.
九三은 두 體의 사이에 거하여 몸 가운데에 있고 아직 上體로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는 下體에 그쳐서 위와 더불어 사귀지 못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몸이 나뉘고 등줄기가 분열된 것이다.
六四는 이미 上體로 들어갔으니, 이는 위아래가 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몸을 총괄하여 그치게 해서 온전한 體를 나누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몸은 바로 〈위와 아래를〉 총괄한 이름인데, “中과 上이 몸에 걸맞는다.”라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중앙에 이르면 몸이 나뉘어 몸이 죽고, 上體로 들어가면 몸이 나뉘지 않아 온전하다. 九三은 나누어진 體에 그침을 베풀기 때문에 ‘限’이라 이른 것이고,
六四는 온전한 體에 그침을 베풀기 때문에 ‘몸’이라 이른 것이니, 中上만 몸이고 中下는 몸이 아닌 것은 아니다.
六五는 볼에 그친다. 말에 질서가 있으니, 뉘우침이 없어지리라.
그침을 볼에 베풀어 中에 처하였다. 그러므로 입에 가릴(나쁜) 말이 없어서 뉘우침을 없앨 수 있는 것이다.
正義曰:‘輔’는 頰車(아래턱뼈와 볼)이니, 능히 輔頰에 그친 것이다. 中에 처하였기 때문에 입에 가릴 말이 없는 것이요, 말에 조리와 질서가 있으면 뉘우침을 없앨 수 있다. 그러므로 “볼에 그친다. 말에 질서가 있으니, 뉘우침이 없어지리라.”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볼에 그침’은 中을 사용하여 바르기 때문이다.”
능히 中을 사용하여 바르기 때문에 말에 질서가 있는 것이다.
正義曰:[以中正] 자리가 비록 바르지 않으나 거함이 中을 얻었으므로 그 바름을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에 질서가 있는 것이다.
上九는 도타이 그침이니, 吉하다.
止의 極에 거하였으니 지극히 그치는 자요, 도탑고 重厚하게 위에 있어서 그름과 망령됨에 빠지지 않으니, 그 吉함이 마땅하다.
正義曰:‘敦’은 厚함(후덕함)이다. 上九가 艮의 極에 거하니 지극히 그치는 자요, 위에 있으면서 능히 敦厚함을 사용하여 스스로 그쳐서 그름과 망령됨에 빠지지 않으니, 그 吉함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도타이 그침이니, 吉하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도타이 그침이 吉함은 敦厚함으로 끝마쳤기 때문이다.”
正義曰:[以厚終] 上九가 능히 敦厚함으로 스스로 끝마치니, 이 때문에 吉함을 얻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
역주1 艮其背……其以艮爲名 : 艮의 뜻이 止인데 止라고 하지 않고 艮이라고 한 이유에 대하여 程伊川은 “艮은 山의 象이니, 安重하고 堅實한 뜻이 있어 止의 뜻으로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艮 山之象 有安重堅實之意 非止義可盡也]”라고 하였다. 또 艮卦의 止의 의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乾ㆍ坤의 사귐이 세 번 찾아 艮을 이루어 한 陽이 두 陰의 위에 있다. 陽은 動하여 위로 나아가는 물건이니 이미 위에 이르면 그치며, 陰은 靜이니 위는 그치고 아래는 靜하다. 그러므로 艮이라 한 것이다. 그렇다면 畜止의 뜻과 무엇이 다른가? 畜止는 억제하고 저지하는 뜻이니 힘으로 제지함이요, 艮止는 그침을 편안히 여기는 뜻이니 제자리에 그치는 것이다.[乾坤之交 三索而成艮 一陽居二陰之上 陽動而上進之物 旣至於上 則止矣 陰者 靜也 上止而下靜 故爲艮也 然則與畜止之義何異 曰 畜止者 制畜之義 力止之也 艮止者 安止之義 止其所也]” ‘畜止’란 大畜卦와 小畜卦의 畜에 止의 뜻이 있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역주2 不見可欲 使心不亂也 : ≪老子道德經≫에 “재능을 숭상하지 아니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하며, 얻기 어려운 寶貨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지 않게 하며, 욕심낼 만한 것을 보여주지 아니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게 한다.[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라고 보이는바, 本에 따라 ‘民’자가 없기도 하다.
역주3 言有物對面而來……則相背矣 : ‘不獲其身’을 王弼과 孔穎達은 분명하게 해석하지 않았으나, ≪正義≫에 “어떻게 그 몸을 보겠는가.[何見其身]”라고 한 것으로 보아 자기 몸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한 듯하다.
程伊川은 “‘不獲其身’은 자기 몸을 보지 못함이니, 자아를 잊음을 이른다. 자아가 없으면 그칠 수 있으나 자아가 없지 못하면 그칠 수 있는 道가 없다.[不獲其身 不見其身也 謂忘我也 无我則止矣 不能无我 无可止之道]”라고 하였으며, 朱子는 “이 점괘는 반드시 등에 그쳐 자기 몸을 소유하지 않고 그 뜰을 가더라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여야 비로소 허물이 없는 것이다. 몸은 움직이는 물건인데 오직 등은 그침이 되니, 그 등에 그치면 마땅히 그쳐야 할 곳에 그치는 것이다. 마땅히 그쳐야 할 곳에 그치면 몸을 따라 동하지 않으니, 이것이 자기 몸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其占則必能止于背而不有其身 行其庭而不見其人 乃无咎也 蓋身 動物也 唯背爲止 艮其背 則止於所當止也 止於所當止 則不隨身而動矣 是不有其身也]”라고 하였다.
역주4 (正道)[止道] : 저본에는 ‘正道’로 되어 있으나, 疏의 ‘用止之法 不可爲常’과 글 뜻에 의거하여 ‘止道’로 바로잡았다.
역주5 艮其止者 疊經文艮其背也 : 王弼과 孔穎達은 ‘艮其止’를 ‘艮其背’와 같은 의미의 말로 보았는바, ‘艮其止’를 ‘그쳐야 할 곳[止]에 그침’으로 해석한 것이니, 朱子도 이와 같으나 다만 ‘艮其止’를 ‘艮其背’의 誤記로 보았다.
반면 程伊川은 “‘艮其止’는 멈추어야 할 때에 멈춤을 이르니, 멈춰야 할 때에 능히 멈추는 것은 멈춤이 제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멈춤에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멈출 수 있는 이치가 없다. 夫子(孔子)가 말씀하기를 ‘멈춤에 멈출 곳을 안다.’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멈추어야 할 곳을 이른다.[艮其止 謂止之而止也 止之而能止者 由止得其所也 止而不得其所 則无可止之理 夫子曰 於止 知其所止 謂當止之所也]”라고 하여 ‘艮其止’를 ‘그쳐서 그침’으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官本諺解에는 ≪程傳≫과 ≪本義≫를 구분하지 않고 “그 止예 艮욤은 그 所애 止라”라고 되어 있는바, 退溪(李滉)는 ≪經書釋義≫에서 “‘艮其止’를 ≪程傳≫과 ≪本義≫를 나누어 해석하지 않았으나 만약 ≪程傳≫을 따른다면 마땅히 ‘艮야 그 止호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艮其止 不分釋 若從程傳釋 則當云艮야 그 止호믄]”라고 하였다.
역주6 八純之卦 : 여덟 개의 純卦로, 純卦는 위‧아래의 卦가 같음을 이르는바, 乾(䷀), 兌(䷹), 離(䷝), 震(䷲), 巽(䷸), 坎(䷜), 艮(䷳), 坤(䷁)이다.
역주7 (加交)[交爻] : 저본에는 ‘加交’로 되어 있으나, 毛本에 의거하여 ‘交爻’로 바로잡았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8 (在)[利] : 저본에는 ‘在’로 되어 있으나, 毛本에 의거하여 ‘利’로 바로잡았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9 腓 腸也 : ‘腸’자 앞에 ‘腓’자가 한 번 더 들어가야 할 듯하다. 咸卦 六二의 疏에는 “腓 足之腓腸也”라고 하였다. ‘腓腸’은 ‘장딴지’의 뜻이다.
역주10 拯擧也……不拯其隨也 : 王弼과 孔穎達은 ‘拯’을 ‘들어올림[擧]’으로 訓하여 ‘不拯其隨’를 ‘장딴지가 따르는 바인 발(初六)을 들어 올리지 못함’으로 해석하였다.
반면 程伊川과 朱子는 ‘拯’을 ‘구원[拯救]’으로 訓하고 六二가 따르는 대상도 九三으로 보았다. ≪程傳≫은 다음과 같다. “六二는 中에 거하고 正을 얻어 멈춤의 道를 얻은 자인데 위에 應援이 없으니, 군주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九三은 下體의 위에 거하여 멈춤의 주체가 되었으니, 멈춤을 주장하는 자이나 剛으로서 中을 잃어 멈춤의 마땅함을 얻지 못하였고, 剛이 위에 멈추어서 몸을 낮추어 아래로 구하는 자가 아니니, 六二가 비록 中正한 德이 있으나 九三을 따르지 못한다. 六二의 가고 멈춤은 주장하는 바에 매어 있어 자유롭게 할 수 없으므로 장딴지의 象이 된 것이다. 다리가 움직이면 장딴지는 따르기 마련이니, 동하고 멈춤이 다리에 달려 있고 장딴지에 달려 있지 않다. 六二가 이미 中正한 道로 九三의 中하지 못함을 구원하지 못하면 반드시 억지로 九三을 따를 것이니, 구원하지 못하고 오직 따른다면 비록 허물이 자신에게 있지 않으나 어찌 마음속에 원하는 바이겠는가.[六二居中得正 得止之道者也 上无應援 不獲其君矣 三居下之上 成止之主 主乎止者也 乃剛而失中 不得止之宜 剛止於上 非能降而下求 二雖有中正之德 不能從也 二之行止 係乎所主 非得自由 故爲腓之象 股動則腓隨 動止在股而不在腓也 二旣不得以中正之道拯救三之不中 則必勉而隨之 不能拯而唯隨也 雖咎不在己 然豈其所欲哉]”
역주11 (心)[止] : 저본에는 ‘心’으로 되어 있으나, 글 뜻에 의거하여 ‘止’로 바로잡았다. 北京大 整理本에는 특별한 교감기 없이 ‘止’로 되어 있다.
역주12 其心不快者……故曰其心不快 : ‘其心不快’의 이유를 王弼과 孔穎達은 ‘六二가 조급히 움직이는 물건인데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반면 程伊川과 朱子는 그 이유를 ‘六二가 九三을 구원하지 못하고 억지로 따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역주13 未退聽也者……所以其心不快矣 : ‘未退聽也’를 孔穎達은 ‘六二가 고요히 물러나 그치라는 명령을 따르지 못함’으로 해석하였는데, 程伊川과 朱子는 ‘九三이 六二를 따르지 않음’으로 해석하였다.
역주14 : 裂(분열되다)의 뜻이다.
역주15 〈繫〉 : 저본에는 빈칸으로 되어 있고, 北京大 整理本에는 ‘是’로 되어 있고, 四庫全書本에는 ‘繫’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본에 의거하여 ‘繫’를 보충하였다.
역주16 求責也 諸之也 : 이는 王弼 注의 “止求諸身”에 대한 訓釋이다.
역주17 以中正者……故言有序也 : 六五는 陰爻가 陽位에 있으므로 正이 아닌데 正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 설명한 말이다. 孔穎達은 六五가 中에 거하기 때문에 바름을 잃지 않았으므로 ‘正’을 말했다고 보았는바, 이는 程伊川도 같다.
반면 朱子는 “‘正’字는 衍文이니, 韻을 맞추어 보면 알 수 있다.[正字 羨文 叶韻可見]”라고 하였는바, 〈象傳〉은 원래 韻을 맞춘 글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六四爻 〈象傳〉의 ‘止諸躬也’의 躬과 上九爻 〈象傳〉의 ‘以厚終也’의 終은 모두 平聲의 東字韻이다. 六五爻 〈象傳〉의 ‘以中正也’에서 正을 빼어 ‘以中也’로 고치면, 中 역시 東字韻이어서 韻이 모두 맞게 된다.

주역정의(3) 책은 2019.10.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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