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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易正義(3)

주역정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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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정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하니 王假有廟하며 利涉大川하고 利貞하니라
[疏]正義曰:‘渙 亨’者, 渙, 卦名也. 然則渙者, 散釋之名.
雜卦曰“渙, 離也.” 此又渙是離散之號也. 蓋渙之爲義, 小人遭難, 離散奔迸而逃避也,
大德之人, 能於此時建功立德, 散難釋險. 故謂之爲渙, 能釋險難, 所以爲亨, 故曰“渙, 亨.”
‘利涉大川’者, 德洽神人, 可濟大難, 故曰“利涉大川.”
‘利貞’者, 大難旣散, 宜以正道而柔集之, 故曰“利貞.”
彖曰 渙亨 剛來而不窮하고 柔得位乎外而上同일새라
[注]二以剛來居內하여 而不窮於險하고 四以柔得位乎外하여 而與上同이라
內剛而无險困之難하고 外順而无違逆之乖 是以하니 利涉大川하고 利貞也
[疏]‘彖曰渙亨’至‘上同’
○正義曰:‘渙 亨’者, 疊經文, 略擧名德也.
‘剛來而不窮 柔得位乎外而上同’者, 此就九二剛德居險, 六四得位從上, 釋所以能散釋險難而致亨通, 乃至利涉大川ㆍ利貞等也.
二以剛德來居險中, 而不窮於險, 四以柔順得位於外, 而上與五同. 內剛无險困之難, 外柔无違逆之乖,
所以得散釋險難而通亨, 建立宗廟而祭亨, 利涉大川而克濟, 利以正道而鳩民也.
[疏]○注‘凡剛得暢’至‘利貞也’
○正義曰:‘凡剛得暢而无忌回之累’者, 此還言九二居險不窮, 是剛得暢遂, 剛旣得暢, 无復畏忌回邪之累也.
‘柔履正而同志乎剛’者, 此還言六四得位履正, 同志乎五也. 剛德不暢, 柔不同剛, 何由得亨通而濟難, 利貞而不邪乎.
故言“則皆亨, 利涉大川, 利貞也.” 注於此言皆者, 凡有二意.
, 卽以剛來而不窮柔得位乎外而上同釋之,
下別言“王假有廟, 王乃在中, 利涉大川, 乘木有功”, 恐剛來之言, 惟釋亨德, 不通在下.
二則先儒有以剛來不窮釋亨德, 柔得位乎外釋利貞, 故言皆以通之. 明剛柔皆釋亨以下至于利貞也.
王假有廟 王乃在中也일새요
[注]王乃在乎渙然之中이라 至有廟也
[疏]正義曰:此重明渙時可以有廟之義. 險難未夷, 方勞,
利涉大川 乘木有功也
[注]乘木 卽涉難也 木者 專所以涉川也 涉難而常用渙道 必有功也
[疏]‘利涉’至‘有功也’
○正義曰:重明用渙可以濟難之事. 乘木涉川, 必不沈溺, 以渙濟難, 必有成功, 故曰“乘木有功”也.
象曰 風行水上이니 先王以享于帝하고 立廟하니라
[疏]正義曰:‘風行水上 渙’者, 風行水上, 激動波濤, 散釋之象, 故曰“風行水上, 渙.”
‘先王以享于帝 立廟’者, 先王以渙然无難之時, 享于上帝, 以告太平, 建立宗廟, 以祭祖考, 故曰“先王以享于帝, 立廟”也.
初六 用拯馬壯하면하리라
[注]渙 散也 處散之初하여 乖散未甚이라 可以遊行하여 得其志而違於難也
不在危劇而後 乃逃竄이라 曰 用拯馬壯하면이라하니라
象曰 初六之吉 順也일새라
[注]觀難而行하여 不與險爭이라 曰 順也
九二 渙奔 其机 悔亡하리라
[注]机 承物者也 謂初也 二俱无應하여 與初相得이어늘 而初得散道하니 離散而奔 得其所安이라 悔亡也
[疏]正義曰:‘渙奔其机’者, 机, 承物者也, 初承於二, 謂初爲机.
‘悔亡’者, 初得散道而二往歸之, 得其所安, 故悔亡也.
机(几)机(几)
象曰 渙奔其机 得願也
[疏]正義曰:‘得願’者, 違難奔散, 願得所安, 奔初獲安, 是得其願也.
六三 渙其躬이니 无悔리라
[注]渙之爲義 內險而外安者也 散躬志外하여 不固所守하고 與剛合志 得无悔也
[疏]正義曰:‘渙其躬 无悔’者, 渙之爲義, 內險外安, 六三內不比二, 而外應上九,
象曰 渙其躬 志在外也일새라
[疏]正義曰:‘志在外’者, 釋六三所以能渙其躬者, 正爲身在於內, 而應在上九, 是志意在外也.
六四 渙其群이라 元吉이나 有丘匪夷하여 所思로다
[注]踰乎險難하고 得位體巽하여 與五合志하여 內掌機密하고 外宣化命者也 能散群之險하여 以光其道
이나 處於卑順하여 不可自專이요 而爲散之任하여 猶有丘虛匪夷之慮하니 雖得元吉이나 所思 不可忘也
[疏]正義曰:‘渙其群’者, 六四出在坎上, 已踰於險, 得位體巽,
‘元吉 渙 有丘匪夷 所思’者, 能散群險, 則有大功, 故曰“元吉.” 然處上體之下, 不可自專, 而得位承尊, 憂責復重,
象曰 渙其群元吉 光大也
[疏]正義曰:‘光大也’者, 能散群險而獲元吉, 是其道光大也.
九五 渙汗其大號 王居라야 无咎리라
[注]處尊履正하고 居巽之中하여 散汗大號하여 以盪險阨者也 爲渙之主하니 唯王居之라야 乃得无咎也
象曰 王居无咎 正位也일새라
[注]正位 不可以假人이라
[疏]正義曰:‘正位’者, 釋王居无咎之義, 以九五是王之正位, 若非王居之, 則有咎矣.
上九 渙其血하여 去逖出이니 无咎니라
[注]逖 遠也 最遠於害하여 不近侵害하니 散其憂傷하여 遠出者也 散患於遠害之地 誰將咎之哉리오
[疏]正義曰:‘渙其血 去逖出’者, 血, 傷也. 逖, 遠也. 上九處於卦上, 最遠於險, 不近侵害,
象曰 渙其血 遠害也일새라
[疏]正義曰:‘遠害’者, 釋渙其血也, 是居遠害之地故也.


渙은 형통하니, 왕이 사당을 둠에 이르며 大川을 건넘이 이롭고 貞함이 이롭다.
正義曰:[渙 亨] ‘渙’은 卦의 이름이다. 〈序卦傳〉에 “기뻐한 뒤에 흩어진다. 그러므로 ‘渙’으로써 받았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渙’은 해산하고 풀어짐[散釋]의 이름이요,
〈雜卦傳〉에 “渙은 떠남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또 渙은 離散의 이름인 것이다. 渙卦의 뜻은, 小人이 難을 만나면 離散하여 달아나 도피하는 것이요,
큰 德이 있는 사람은 능히 이러한 때에 功을 세우고 德을 세워서 어려움을 해산하고 險함을 푸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일러 ‘渙’이라 하니, 능히 험난함을 풀어냄은 형통함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渙은 형통하다.”라고 한 것이다.
[王假有廟] 왕이 능히 難을 풀어내어 형통하면 宗廟를 건립함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왕이 사당을 둠에 이른다.”라고 한 것이다.
[利涉大川] 德이 神과 사람에게 흡족하면 큰 難을 구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大川을 건넘이 이롭다.”라고 한 것이다.
[利貞] 큰 어려움이 이미 흩어지면 마땅히 正道로써 부드럽게 하여 모아야 한다. 그러므로 “貞함이 이롭다.”라고 한 것이다.
〈彖傳〉에 말하였다. “‘渙亨’은 剛이 와서 곤궁하지 않고 柔가 밖에서 지위를 얻어 위(九五)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九二가 剛으로서 와서 안에 거하여 험함에 곤궁하지 않고, 六四가 柔로서 밖에서 지위를 얻어 위(九五)와 함께한다.
안이 剛하나 험함에 곤궁한 어려움이 없고, 밖이 순하여 어기고 거스르는 괴리가 없다. 이 때문에 형통하니, 大川을 건넘이 이롭고 貞함이 이로운 것이다.
무릇 剛이 通暢함을 얻어 두려워하고 간사한 累가 없고 柔가 바름을 밟아 剛과 뜻을 함께하면 모두 형통하니, 大川을 건넘이 이롭고 貞함이 이로운 것이다.
經의 [彖曰渙亨]에서 [上同]까지
○正義曰:[渙 亨] 經文을 거듭하여 卦의 이름과 德을 간략히 거론한 것이다.
[剛來而不窮 柔得位乎外而上同] 이는 九二가 剛德으로 험함에 거하고 六四가 지위를 얻고 위를 따름을 가지고 ‘능히 험난함을 해산하고 풀어 형통함을 이루어서 마침내 大川을 건넘이 이로움과 貞함이 이로움 등에 이름’을 해석한 것이다.
九二가 剛德으로 와서 험한 가운데 거하였으나 험함에 곤궁하지 않고, 六四가 柔順함으로 밖에서 지위를 얻어 위로 九五와 함께한다. 안은 강하여 험함에 곤궁한 어려움이 없고 밖은 유순하여 어기고 거스르는 괴리가 없다.
이 때문에 ‘험난함을 해산하고 풀어서 형통하니, 宗廟를 건립하여 祭亨(祭享)을 하고, 大川을 건너 능히 구제함이 이로우며, 正道를 가지고 백성을 모음이 이로움’을 얻는 것이다.
○注의 [凡剛得暢]에서 [利貞也]까지
○正義曰:[凡剛得暢而无忌回之累] 이는 또한 ‘九二가 險에 거하였으나 곤궁하지 않음은 剛이 通暢하게 이룸을 얻음’을 말한 것이니, 剛이 이미 通暢함을 얻으면 다시 두려워하고 간사한 累가 없는 것이다.
[柔履正而同志乎剛] 이는 또한 ‘六四가 지위를 얻고 바름을 밟고 있어서 九五와 뜻이 같음’을 말한 것이다. 剛한 德이 通暢하지 못하고 柔가 剛과 함께하지 않으면 어떻게 亨通하여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으며 貞함이 이로워 간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注에〉 “모두[皆] 형통하니, 大川을 건넘이 이롭고 貞함이 이롭다.”라고 말한 것이다. 注에 여기에서 ‘皆’를 말한 것은 무릇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彖傳〉에 ‘渙’과 ‘亨’ 두 글자를 거듭 말하였으니, 이는 ‘剛來而不窮 柔得位乎外而上同’을 가지고 이를 해석한 것이요,
아래에 별도로 “王이 사당을 둠에 이름은 왕이 中에 있기 때문이요, 大川을 건넘이 이로움은 나무를 타서 功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니, ‘剛來’란 말이 오직 ‘亨’의 德만을 해석한 것이어서 아래에 있는 말에는 통하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다.
두 번째는, 先儒 중에 ‘剛來不窮’으로 ‘亨’의 德을 해석하고 ‘柔得位乎外’로 ‘利貞’을 해석한 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皆’라고 말하여 둘을 통하게 한 것이다. ‘剛來不窮’과 ‘柔得位乎外’가 ‘亨’에서 ‘利貞’까지를 모두 해석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왕이 사당을 둠에 이름’은 왕이 中에 있기 때문이요,
왕이 마침내 渙散하는 가운데에 있다. 그러므로 사당을 둠에 이른 것이다.
正義曰:이는 渙의 때에 사당을 둘 수 있는 義를 거듭 밝힌 것이다. 험난함이 아직 평정되지 못했으면 막 經略하는 수고로움이 있는데, 지금 渙散하는 가운데에 있으므로 사당을 둠에 이르는 것이다.
‘大川을 건넘이 이로움’은 나무를 타서 功이 있는 것이다.”
‘나무를 탐’은 바로 어려움을 건너는 것이다. 나무는 오로지 냇물을 건너는 것이니, 어려움을 건널 때에 항상 渙散하는 道를 사용하면 반드시 功이 있는 것이다.
經의 [利涉]에서 [有功也]까지
○正義曰:渙散을 사용하여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는 일을 거듭 밝힌 것이다. 나무를 타고 냇물을 건너면 반드시 침몰하지 않고, 渙散으로 어려움을 구제하면 반드시 성공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나무를 타서 功이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注의 [乘木]에서 [有功也]까지
○正義曰:先儒들은 모두 이 卦가 坎卦(水)가 아래에 있고 巽卦(木)가 위에 있다 하여 “물 위에서 나무를 타고 냇물을 건너는 象이기 때문에 ‘나무를 타서 功이 있는 것이다.’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王輔嗣(王弼)는 象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비유하는 뜻을 취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을 말하여 서술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바람이 물 위로 다님이 渙卦이니, 先王이 보고서 上帝에게 제향하고 사당을 세운다.”
正義曰:[風行水上 渙] 바람이 물 위로 다님은 파도를 激動하여 물이 흩어지는 象이다. 그러므로 “바람이 물 위로 다님이 渙卦이다.”라고 한 것이다.
[先王以享于帝 立廟] 先王이 渙散하여 어려움이 없는 때에 上帝에게 제향하여 太平을 고하고, 宗廟를 건립하여 祖考에게 제향한다. 그러므로 “先王이 보고서 上帝에게 제향하고 사당을 세운다.”라고 한 것이다.
初六은 구원하는 말을 사용하되 건장하면 吉하리라.
‘渙’은 해산함이다. 해산하는 처음에 처해서 괴리하여 해산함이 심하지 않다. 그러므로 멀리 떠나가서 그 뜻을 얻어 험난함을 피할 수 있는 것이요,
위험이 지극해진 뒤에 비로소 도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구원하는 말을 사용하되 건장하면 吉하리라.”라고 한 것이다.
正義曰:初六이 해산하는 처음에 처해서 괴리하여 해산함이 심하지 않으니, 말을 사용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건장한 말을 얻으면 吉하다. 그러므로 “구원하는 말을 사용하되 건장하면 길하리라.”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初六의 吉함은 순하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보고 떠나가서 험함과 다투지 않는다. 그러므로 “순하다.”라고 한 것이다.
正義曰:어려움을 보고 떠나가서 험함과 다투지 않는다. 그러므로 “순하다.”라고 한 것이다.
九二는 흩어져 달아남에 그 机(几)를 얻으니, 뉘우침이 없어지리라.
‘机’는 물건을 받드는 것이니, 初六을 이른다. 〈初六과 九二〉 두 爻가 모두 應이 없어서 〈九二가〉 初六과 뜻이 서로 맞는데 初六이 흩어지는 道를 얻으니, 離散하여 달아남에 그 편안한 바를 얻었다. 그러므로 뉘우침이 없어진 것이다.
正義曰:[渙奔其机] ‘机’는 물건을 받드는 것이니, 初六이 九二를 받들므로 初六을 일러 ‘机’라 한 것이다.
〈初六과 九二〉 두 爻가 모두 應이 없어서 〈九二가〉 初六과 뜻이 서로 맞는데 初六이 難을 멀리하는 道를 얻으니, 지금 九二가 흩어져 달아나 初六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흩어져 달아남에 그 机을 얻는다.”라고 한 것이다.
[悔亡] 初六이 흩어지는 道를 얻었는데 九二가 初六에게 돌아가면 그 편안한 바를 얻는다. 그러므로 뉘우침이 없어진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흩어져 달아남에 그 机를 얻음’은 所願을 얻은 것이다.”
正義曰:[得願] 難을 피하여 달아나 흩어져서 편안한 곳을 얻기를 원하니, 初六으로 달아나 편안함을 얻으면 이는 소원을 얻은 것이다.
六三은 몸을 흩으니, 뉘우침이 없으리라.
渙의 뜻은 안이 險하고 밖이 편안한 것이다. 몸을 흩고 뜻이 밖에 있어서 지키는 바를 견고히 하지 않고 剛(上九)과 뜻이 합한다. 그러므로 뉘우침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正義曰:[渙其躬 无悔] 渙의 뜻은 안이 험하고 밖이 편안한 것이다. 六三이 안으로 九二와 친하지 않고 밖으로 上九에 應하니,
이는 지키는 바를 견고히 하지 아니하여 능히 자기 몸을 흩는 것이다. 그러므로 뉘우침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몸을 흩으니, 뉘우침이 없으리라.”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몸을 흩음’은 뜻이 밖에 있기 때문이다.”
正義曰:[志在外] ‘六三이 능히 그 몸을 흩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몸이 안에 있으나 應이 上九에게 있기 때문임’을 해석한 것이니, 이는 뜻이 밖에 있는 것이다.
六四는 여러 사람의 험난함을 해산한다. 크게 吉하나, 渙에 언덕이 평탄하지 못한 우려가 있어서 생각(우려)하는 바로다.
險難함을 넘었고 正位를 얻고 體가 공손하여 九五와 뜻이 합해서 안으로 機密을 관장하고 밖으로 교화의 명령을 베푸는 자이다. 그러므로 능히 여러 사람의 험함을 해산하여 그 道를 빛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낮고 순한 자리에 처하여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고 해산하는 임무를 맡아서 오히려 언덕이 평탄하지 못한 우려가 있으니, 비록 크게 吉함을 얻으나 〈우려하는〉 생각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正義曰:[渙其群] 六四가 나가 坎의 위에 있어서 이미 험난함을 넘었고, 正位를 얻고 體가 공손하다.
그리하여 九五와 뜻이 합해서 안으로 機密을 관장하고 밖으로 교화의 명령을 베푸는 자이다. 능히 여러 사람을 위하여 그 험함과 해로움을 해산한다. 그러므로 “여러 험난함을 해산한다.”라고 한 것이다.
[元吉 渙 有丘匪夷 所思] 능히 여러 험함을 해산하면 큰 功이 있다. 그러므로 “크게 吉하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上體의 아래에 처하여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正位를 얻고 높은 사람을 받들어서 근심과 책임이 다시 중하니,
비록 크게 吉함을 얻었으나 오히려 어려움을 해산하는 가운데에 언덕이 평탄하지 못한 우려가 있어서 그 생각하는 바가 됨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渙에 언덕이 평탄하지 못한 우려가 있어서 생각하는 바로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여러 사람의 험난함을 해산하여 크게 吉함’은 光大한 것이다.”
正義曰:[光大也] 능히 여러 사람의 험난함을 해산하여 크게 吉함을 얻으니, 이는 그 道가 光大한 것이다.
九五는 어려움을 해산함에 크게 호령함이니, 渙에 王이 거하여야 허물이 없으리라.
尊位에 처하고 正位을 밟으며 巽의 가운데에 있어서 어려움을 해산함에 크게 호령하여 험난함을 소탕하는 자이다. 渙의 주체가 되었으니, 오직 王이 이 자리에 있어야 비로소 허물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正義曰:[渙汗其大號] 사람이 험난함을 만나서 놀라 수고로우면 땀이 몸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땀으로 험난함을 비유하였고,
九五가 尊位에 처하고 正位를 밟으며 호령하는 가운데에 있으니, 능히 호령을 행하여 험난함을 해산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해산함에 크게 호령한다.”라고 한 것이다.
[渙 王居 无咎] 渙의 주체가 되었으니 명칭과 지위를 남에게 빌려주어서는 안 되고 오직 王이 이 자리에 있어야 비로소 허물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渙에 王이 거하여야 허물이 없으리라.”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王이 거하여야 허물이 없음’은 바른 자리이기 때문이다.”
바른 자리는 남에게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
正義曰:[正位] ‘王이 거하여야 허물이 없음’의 뜻을 해석하였으니, 九五는 바로 王의 바른 자리이니, 만약 왕이 아닌 자가 이 자리에 있으면 허물이 있을 것이다.
上九는 피를 해산하여 떠나가 멀리 나가니, 허물하는 이가 없다.
‘逖’은 멂이니, 해로움과 가장 멀어서 侵害를 가까이하지 않으니, 그 근심과 서글픔을 해산하여 멀리 나가는 자이다. 害를 멀리한 자리에서 환란을 해산하면 누가 장차 허물하겠는가.
正義曰:[渙其血 去逖出] ‘血’은 상함이다. ‘逖’은 멂이다. 上九가 卦의 위에 처하여 험함과 가장 멀어서 侵害를 가까이하지 않으니,
이는 능히 그 근심과 서글픔을 해산하여 떠나가서 멀리 나가는 자이다. 그러므로 “피를 해산하여 떠나가 멀리 나간다.”라고 한 것이다.
[无咎] 害를 멀리한 자리에서 환란을 해산하면 누가 장차 허물하겠는가. 그러므로 “허물하는 이가 없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피를 해산함’은 해로움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正義曰:[遠害] ‘피를 해산함’을 해석한 것이니, 이는 해로움을 멀리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역주
역주1 序卦曰……故受之以渙 : 〈序卦傳〉에 “兌는 기뻐함이니 기뻐한 뒤에 흩어지므로 渙으로써 받았고, 渙은 떠남이니 물건은 끝내 떠날 수 없으므로 節로써 받았다.[兌者 說也 說而後散之 故受之以渙 渙者 離也 物不可以終離 故受之以節]”라고 하였다.
역주2 王假有廟者……故曰王假有廟也 : 萃卦 卦辭에도 보이는바, 王弼과 孔穎達, 程伊川은 모두 ‘宗廟를 세워 사당을 소유함에 이름’으로 해석하였으나, 朱子는 ‘宗廟의 가운데에 이름’으로 해석하였다.
역주3 凡剛得暢而无忌回之累……利貞也 : 아래 孔穎達의 疏에 의하면 王弼의 이 말은, ‘剛來而不窮’과 ‘柔得位乎外而上同’이 다만 ‘渙亨’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卦辭 전체에 대한 해석이라는 의미이며, 또 ‘剛來而不窮’과 ‘柔得位乎外而上同’이 특정 卦辭에 각각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이 卦辭 전체에 모두 해당한다는 의미이다.
역주4 一則彖雖疊渙亨二字 : ‘雖’는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바, 誤字가 있는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 않으므로 우선 雖자를 해석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역주5 經略 : ≪春秋左氏傳≫ 昭公 7년조에 “天子는 經略한다.”라고 하였는데, 杜預의 注에 “천하를 경영하고 四海를 略有하기 때문에 經略이라고 한 것이다.[經營天下 略有四海 故曰經略]”라고 하였으며, 孔穎達의 疏에 “莊公 21년의 注에 ‘略은 界이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의 略 역시 ‘界’의 뜻이다. 천하를 경영하여 四海를 경계로 삼으니, 경계 안이 모두 자신의 소유이다. 그래서 ‘四海를 경계로 삼아 소유한다.’라고 말한 것이니, 四海의 안을 소유함을 이른다.[莊二十一年注云略界也 則此略亦爲界也 經營天下 以四海爲界 界内皆爲己有 故言略有四海 謂有四海之内也]”라고 하였다.
역주6 今在渙然之中 故至於有廟也 : ‘中’을 王弼과 孔穎達은 ‘渙散하는 가운데’의 뜻으로 보았는바, 經文을 ‘왕이 환산하는 가운데에 있어 환난을 환산할 수 있으므로 사당을 둠에 이르게 됨’의 의미로 본 것이다.
반면 程伊川은 ‘中’을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는바, ≪程傳≫은 다음과 같다. “天下가 離散하는 때에 王者가 人心을 收合하여 사당을 둠에 이르면 이는 바로 中에 있는 것이다. 中에 있다는 것은 中을 구하여 얻음을 이르니, 그 마음을 잡음을 이른다. 中은 마음의 象이다. 剛이 옴에 궁극하지 않고 柔가 지위를 얻어 위와 함께하니, 卦才의 뜻이 모두 中을 위주로 한 것이다. 王者가 渙散을 구원하는 道는 中을 얻음에 있을 뿐이니, ≪孟子≫ 〈離婁 上〉에 ‘백성을 얻는 것이 방법이 있으니, 마음을 얻으면 백성을 얻는다.’라고 하였다. 上帝에게 祭享하고 사당을 세움은 民心이 돌아오고 따르는 바이니, 人心을 돌아오게 하는 방도가 이보다 큼이 없다. 그러므로 ‘사당을 둠에 이른다.’ 하였으니, 渙散을 구원하는 道가 여기에 지극한 것이다.[天下離散之時 王者收合人心 至於有廟 乃是在其中也 在中 謂求得其中 攝其心之謂也 中者 心之象 剛來而不窮 柔得位而上同 卦才之義 皆主於中也 王者拯渙之道 在得其中而已 孟子曰 得其民有道 得其心 斯得民矣 享帝立廟 民心所歸從也 歸人心之道 无大於此 故云至于有廟 拯渙之道 極於此也]”
한편 朱子는 ‘王假有廟’를 ‘왕이 사당에 이름’으로 해석하여, ‘中’을 “사당의 가운데를 이른다.[謂廟中]”라고 하였다.
역주7 〈至〉 : 저본에는 ‘至’가 없으나, 毛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8 先儒皆以此卦坎下巽上……故言此以序之也 : 程伊川 역시 先儒와 마찬가지로 “위의 巽은 나무이고 아래의 坎은 물이며 大川이니, 험한 것을 건너 渙散을 구제함이 이로운 것이다. 나무가 물 위에 있음은 나무를 타는 象이니, 나무를 탐은 냇물을 건너는 것이다.[上巽 木也 下坎 水 大川也 利涉險以濟渙也 木在水上 乘木之象 乘木 所以涉川也]”라고 하였다.
역주9 初六處散之初……故曰用拯馬壯吉 : 程伊川과 朱子는 經文을 “구원하되 말이 건장하니, 길하다.”로 해석하였는바, ≪程傳≫은 다음과 같다. “六이 卦의 初에 거하였으니, 渙散의 초기이다. 처음 흩어질 때에 구원하고 또 말이 건장함을 얻었으니, 이 때문에 吉한 것이다. 여섯 爻 중에 오직 初爻에만 渙을 말하지 않은 것은, 離散하는 형세를 분변하기를 마땅히 일찍 하여야 하니, 막 시작할 때에 구원하면 渙散함에 이르지 않는바, 가르침이 깊은 것이다. 말은 사람이 의탁하는 것이니, 건장한 말에 의탁하기 때문에 渙散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말은 九二를 이른다. 九二는 剛中의 재질이 있고 初陰은 유순하며 九二와 初六이 모두 應이 없으니, 應이 없으면 친하고 가까워 서로 求한다. 初가 유순한데 剛中의 재질에게 의탁하여 渙散을 구원하니, 이는 마치 건장한 말을 얻어 먼 길을 가는 것과 같아 반드시 구제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吉한 것이다.[六居卦之初 渙之始也 始渙而拯之 又得馬壯 所以吉也 六爻獨初不云渙者 離散之勢 辨之宜早 方始而拯之 則不至於渙也 爲敎深矣 馬 人之所託也 託於壯馬 故能拯渙 馬 謂二也 二有剛中之才 初陰柔順 兩皆无應 无應則親比相求 初之柔順而託於剛中之才 以拯其渙 如得壯馬以致遠 必有濟矣 故吉也]”
역주10 觀難而行……故曰順也 : 程伊川은 ‘順’을 두 가지 의미로 보았는바, ≪程傳≫은 다음과 같다. “初六이 길한 까닭은 剛中의 재질(九二)에게 순종하기 때문이다. 처음 渙散할 때에 구원하니, 이는 때를 순히 하는 것이다.[初之所以吉者 以其能順從剛中之才也 始渙而用拯 能順乎時也]”
역주11 渙奔其机者……故曰渙奔其机也 : 王弼과 孔穎達은 ‘渙奔其机’를 ‘九二가 渙散의 道를 얻은 初六에게 나아가 편안한 바를 얻음’의 의미로 보았는데, 이를 ‘九二가 初六에게 나아감’으로 본 것은 程伊川도 같다.
다만 程伊川은 ‘悔亡’을 얻는 이유를 ‘初六이 험함(坎卦)의 中에 있지 않고, 渙散의 때에는 힘을 합하는 것을 우세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程傳≫은 다음과 같다. “九二와 初六이 비록 正應이 아니나 渙離의 때를 당하여 둘이 모두 應與가 없어 陰과 陽이 친하고 가까워 서로 구하니, 서로 의뢰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九二는 初六을 지목하여 机라 하고, 初六은 九二를 일러 馬라 한 것이다. 九二가 급히 初六에게 나아가 편안하게 여기면 뉘우침을 없앨 수 있으니, 初六이 비록 坎의 體이나 험한 가운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初六의 柔弱함을 어찌 의뢰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의심하는데, 渙散의 때에는 힘을 합하는 것을 우세함으로 여긴다. 先儒는 모두 九五를 机라 하였는데, 잘못이다. 渙離의 때를 당하여 〈九二와 九五〉 두 陽이 어찌 함께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함께한다면 渙散을 구제하는 功을 이룸이 마땅히 클 것이니, 어찌 다만 뉘우침이 없어질 뿐이겠는가. 机는 구부려 나아감을 말한 것이다.[二與初雖非正應 而當渙離之時 兩皆无與 以陰陽親比相求 則相賴者也 故二目初爲机 初謂二爲馬 二急就於初以爲安 則能亡其悔矣 初雖坎體 而不在險中也 或疑初之柔微 何足賴 蓋渙之時 合力爲勝 先儒皆以五爲机 非也 方渙離之時 二陽豈能同也 若能同 則成濟渙之功當大 豈止悔亡而已 机 謂俯就也]”
한편 朱子는 ‘渙奔其机’를 ‘九로서 오되 二位로 옴’의 의미로 해석하였는바, ≪本義≫는 다음과 같다. “九로서 二에 거하였으니, 마땅히 뉘우침이 있을 것이나 渙散의 때를 당하여 옴에 궁극하지 않으니, 그 뉘우침을 없앨 수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 象과 占이 이와 같으니, 九는 달려감이고 二는 机인 것이다.[九而居二 宜有悔也 然當渙之時 來而不窮 能亡其悔者也 故其象占如此 蓋九奔而二机也]” 朱子는 渙卦를 漸卦(䷴)로부터 온 것이라고 보았는바, 즉 九가 二로 오고 六이 三으로 가서 渙卦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
역주12 渙其躬无悔者……无悔 : 王弼과 孔穎達은 經文을 ‘六三이 지키는 바를 견고히 하지 않고서 上九에 응하여 뉘우침이 없음’의 의미로 보았는바, 內卦는 험하고 外卦는 편안한데 六三이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內卦에 뜻을 두지 않고 上九가 속해 있는 外卦에 뜻을 두고 있으므로 无悔를 얻는다고 풀이한 것이다.
반면 程伊川은 經文을 ‘渙散의 때에 그 몸만 뉘우침이 없음’으로 해석하였는바, ≪程傳≫은 다음과 같다. “六三은 渙의 때에 있어 홀로 應與가 있으니, 渙散하는 뉘우침이 없을 것이나 陰柔의 자질과 中正하지 못한 재질로서 위로 지위가 없는 자리에 거하였으니, 어찌 세상의 渙散을 구원하여 남에게 미치겠는가. 그 몸이 뉘우침이 없음에 그칠 뿐이다. 위에 ‘渙’자를 더한 것은 渙散하는 때에 있어 몸에 渙散하는 뉘우침이 없는 것이다.[三在渙時 獨有應與 无渙散之悔也 然以陰柔之質 不中正之才 上居无位之地 豈能拯時之渙而及人也 止於其身可以无悔而已 上加渙字 在渙之時 躬无渙之悔也]”
한편 朱子는 經文을 ‘몸의 사사로움을 渙散함이니, 뉘우침이 없음’으로 해석하였는바, ≪本義≫는 다음과 같다. “陰柔로서 中正하지 못하니, 자기에게 사사로움이 있는 象이나 거함이 陽位를 얻어 뜻이 때를 구제함에 있으니, 사사로움을 흩어 뉘우침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대체로 이 위의 네 爻는 渙散함으로 인하여 환산을 구원하는 자이다.[陰柔而不中正 有私於己之象也 然居得陽位 志在濟時 能散其私 以得无悔 故其占如此 大率此上四爻 皆因渙以濟渙者也]”
역주13 渙其群者……故曰渙其群也 : ‘渙其群’을 王弼과 孔穎達은 ‘六四가 여러 사람의 험난함을 해산함’의 의미로 보았는데, 程伊川은 ‘六四가 渙散함에 柔를 써서 사람들을 떼 지어 모이게 함’으로 보았고, 朱子는 ‘六四가 應이 없어서 朋黨을 해산함’으로 보았다.
역주14 然處上體之下……所思也 : ‘有丘匪夷 所思’를 王弼과 孔穎達은 ‘六四가 專斷할 수가 없는 자리에 있으면서 渙散의 임무를 맡았으므로 언덕이 평탄하지 못한 우려가 있어 그 우려를 잊을 수 없음’의 의미로 해석하였다.
반면 程伊川과 朱子는 ‘有丘 匪夷所思’로 句를 떼었는바, ≪程傳≫은 다음과 같다. “渙卦의 六四와 九五 두 爻는 뜻이 서로 필요로 하기 때문에 통틀어 말하였으니, 〈彖傳〉에 이 때문에 위와 함께한다고 말한 것이다. 六四는 巽順으로 바르면서 大臣의 지위에 있고 九五는 剛中으로 바르면서 君位에 거하였으니, 君臣이 힘을 합치고 剛柔가 서로 구제하여 天下의 渙散을 구원하는 자이다. 渙散의 때를 당하여 剛을 쓰면 상대방을 품어 따르게 할 수 없고 柔를 쓰면 상대방을 依歸하게 할 수 없는데, 六四는 巽順한 正道로 剛中正의 君主를 보필하여 君臣이 功을 함께하니, 이 때문에 渙散을 구제하는 것이다. 天下가 渙散하는데 떼 지어 모이게 한다면 大善의 吉함이라고 이를 만하다. ‘渙有丘匪夷所思’는 贊美한 말이다. 언덕은 모임이 큰 것이니, 渙散할 때를 당하여 큰 모임을 이룬다면 그 功이 매우 크고 그 일이 매우 어렵고 그 쓰임이 지극히 신묘하다. 夷는 보통이니, 보통 사람의 소견으로는 생각하여 미칠 바가 아닌 것이다. 크게 어질고 지혜로운 자가 아니면 누가 이와 같이 하겠는가.[渙四五二爻義相須 故通言之 彖故曰上同也 四 巽順而正 居大臣之位 五 剛中而正 居君位 君臣合力 剛柔相濟 以拯天下之渙者也 方渙散之時 用剛則不能使之懷附 用柔則不足爲之依歸 四以巽順之正道 輔剛中正之君 君臣同功 所以能濟渙也 天下渙散而能使之群聚 可謂大善之吉也 渙有丘匪夷所思 贊美之辭也 丘 聚之大也 方渙散而能致其大聚 其功甚大 其事甚難 其用至妙 夷 平常也 非平常之見所能思及也 非大賢智 孰能如是]” 이 해석을 따르면 經文은 “渙散할 때에 언덕처럼 많이 모임은 보통 사람이 생각할 바가 아니다.”로 번역된다.
한편 朱子의 ≪本義≫는 다음과 같다. “〈六四는〉 陰에 거하여 正位를 얻고 위로 九五를 받드니 渙散을 구제할 임무를 담당한 자이며, 아래에 應與가 없으니 朋黨을 해산하는 象이 된다. 점치는 자가 이와 같이 하면 大善하여 吉하다. 또 작은 무리를 흩어서 큰 무리를 이루어 흩어진 자들로 하여금 언덕처럼 많이 모이게 한다면 보통 사람들의 思慮로는 미칠 바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居陰得正 上承九五 當濟渙之任者也 下无應與 爲能散其朋黨之象 占者如是 則大善而吉 又言能散其小群 以成大群 使所散者聚而若丘 則非常人思慮之所及也]”
역주15 渙汗其大號者……故曰渙汗其大號也 : 孔穎達은 ‘汗’을 ‘험난함을 비유한 말’로 보았으나, 程伊川은 이를 ‘民心에 무젖게 함’을 상징하는 말로 보았는바, ≪程傳≫은 다음과 같다. “九五와 六四는 君臣이 德을 합하여 剛中正과 巽順의 道로 渙散을 다스리니, 그 道를 얻은 것이다. 오직 人心에 浹洽하게 함에 달려 있으니, 〈人心에 浹洽하면〉 순종한다. 마땅히 호령을 民心에 무젖게 하여 사람 몸의 땀이 四體에 젖어들듯이 하면 믿고 복종하여 따를 것이다.[五與四君臣合德 以剛中正巽順之道治渙 得其道矣 唯在浹洽於人心 則順從也 當使號令洽於民心 如人身之汗浹於四體 則信服而從矣]”
한편 朱子는 “汗은 땀이 나오듯 하여 되돌아가지 않음을 이른다.[汗 謂如汗之出而不反也]”라고 하였는바, ‘호령을 내되 번복하지 않음’의 의미로 經文을 해석한 것이다.
역주16 渙王居无咎者……无咎 : ‘渙 王居’를 程伊川은 ‘渙散에 대처함에 이와 같이 하면 천하의 渙散을 구제할 수 있으므로 王位에 거함이 걸맞음’의 의미로 보았다. 반면 朱子는 ‘居’를 居積(재화)으로 訓하여 經文을 ‘왕의 재화를 흩어 나누어줌’의 의미로 해석하였다.
역주17 渙其血去逖出者……去逖出也 : 程伊川과 朱子는 모두 ‘逖’을 ‘惕’으로 보아 經文을 ‘其血去, 逖出’로 句를 떼었는바, ≪本義≫는 다음과 같다. “上九가 陽으로서 渙散의 極에 거하여 渙散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 象과 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血은 傷害를 이른다. 逖은 마땅히 惕이 되어야 하니, 小畜卦의 六四爻와 같으니, 피를 흩으면 피가 제거되고 두려움을 흩으면 두려움에서 벗어남을 말한 것이다.[上九以陽居渙極 能出乎渙 故其象占如此 血 謂傷害 逖當作惕 與小畜六四同 言渙其血則去 渙其惕則出也]” 小畜卦의 六四 爻辭는 “六四 有孚 血去 惕出 无咎”이다.
역주18 无咎者……故曰无咎 : 王弼과 孔穎達은 ‘无咎’를 ‘허물하는 사람이 없음’으로 해석하였으나, 程伊川과 朱子는 ‘허물이 없음’으로 풀이하였는바, ≪程傳≫은 다음과 같다. “渙卦의 여러 爻가 모두 係應이 없으니, 또한 渙離의 象이다. 오직 上九는 六三과 應하나 六三이 험함의 極에 거하였으니, 上九가 만약 아래로 六三을 따르면 渙散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險은 傷害와 畏懼의 象이 있으므로 血惕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上九가 陽剛으로 渙의 밖에 처하여 渙을 벗어날 象이 있고, 또 巽의 極에 거하여 사리에 巽順함이 된다. 그러므로 만약 그 피가 제거되게 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면 허물이 없다고 한 것이니, ‘其’는 〈上九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渙之諸爻 皆无係應 亦渙離之象 唯上應於三 三居險陷之極 上若下從於彼 則不能出於渙也 險有傷害畏懼之象 故云血惕 然九以陽剛處渙之外 有出渙之象 又居巽之極 爲能巽順於事理 故云若能使其血去 其惕出 則无咎也 其者 所有也]”

주역정의(3) 책은 2019.10.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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