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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易正義(3)

주역정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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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정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揚于王庭하여 孚號有厲하니 告自邑이요 不利卽戎이나 利有攸往하니라
[注]夬 與剝反者也 以柔變剛하여 至於剛幾盡하고 以剛決柔하여 如剝之消剛이라
剛隕則君子道消하고 柔消則小人道隕하니 君子道消 則剛正之德 不可得直道而用이요
刑罰之威 不可得坦然而行이어니와 揚于王庭 其道公也
[疏]‘夬揚于王庭’至‘利有攸往’
○正義曰:夬, 決也, 此陰消陽息之卦也. 陽長至五, 五陽共決一陰, 故名爲夬也.
‘揚于王庭’者, 明行決斷之法, 夬以剛決柔, 施之於人, 則是君子決小人也.
王庭, 是百官所在之處, 以君子決小人, , 示公正而无私隱也, 故曰“揚于王庭也.”
‘孚號有厲’者, 號, 號令也. 行決之法, 先須號令. 夬以剛決柔, 則是用明信之法, 而宣其號令,
若用剛卽戎, 尙力取勝, 爲物所疾, 以此用師, 必有不利, 故曰“告自邑, 不利卽戎.”
雖不利卽戎, 然剛德不長, 則柔邪不消. 故陽爻宜有所往, 夬道乃成, 故曰“利有攸往”也.
彖曰 夬 決也 剛決柔也 健而說하면 決而和
[注]健而說이면 則決而和矣
[疏]‘彖曰’至‘決而和’
○正義曰:‘夬 決也 剛柔’者, 此就爻釋卦名也.
‘健而說 決而和’者, 此就二體之義, 明決而能和. 乾健而兌說, 健則能決, 說則能和, 故曰“決而和”也.
揚于王庭 柔乘五剛也일새요
[注]剛德齊長하고 一柔爲逆이면 衆所同誅하여 而无忌者也 可揚于王庭이라
[疏]正義曰:此因一陰而居五陽之上, 釋行決之法. 以剛德齊長, 一柔爲逆, 衆所同誅, 誅而无忌也,
故曰“揚于王庭.” 言所以得顯然揚于王庭者, 只謂柔乘五剛也.
孚號有厲 其危乃光也
[注]剛正明信以宣其令이면 則柔邪者危 曰 其危乃光也라하니라
告自邑이요 不利卽戎 所尙乃窮也
[注]以剛斷制 告令 可也 告自邑 謂行令於邑也 用剛卽戎 尙力取勝也 尙力取勝 物所同疾也
[疏]正義曰:剛克之道, 不可常行, 若專用威猛, 以此卽戎, 則便爲尙力取勝,
卽是決而不和, 其道窮矣. 行決所以惟告自邑, 不利卽戎者, 只謂所尙乃窮故也.
利有攸往 剛長乃終也
[注]剛德愈長하고 柔邪愈消 利有攸往하여 道乃成也
[疏]正義曰:
, 成也, 剛長柔消, 夬道乃成也.
象曰 澤上於天 君子以施祿及下하며 居德則忌하나니라
[注]澤上於天 夬之象也 澤上於天이면 必來下潤이니 施祿及下之義也
夬者 明法而決斷之象也 止也 法明斷嚴이니 不可以慢이라 居德以明禁也
施而能嚴하고 嚴而能施하며 健而能說하고 決而能和 美之道也
[疏]‘象曰’至‘居德則忌’
○正義曰:‘澤上於天 夬’者, 澤性潤下, 雖復澤上於天, 決來下潤, 此事必然, 故是夬之象也.
‘君子以施祿及下 居德則忌’者, 忌, 禁也. 決有二義, 象則澤來潤下, 彖則明法決斷,
所以君子法此夬義, 威惠兼施, 雖復施祿及下, 其在身居德, 復須明其禁令,
初九 壯于前趾하여 往不勝이니 爲咎니라
[注]居健之初하고 爲決之始하니 宜審其策하여 以行其事 壯其前趾하여 往而不勝이니 宜其咎也
[疏]正義曰:初九居夬之初, 當須審其籌策, 然後乃往, 而體健處下, 徒欲果決壯健, 前進其趾,
以此而往, 必不克勝, 非決之謀, 所以爲咎, 故曰“初九, 壯于前趾, 往不勝, 爲咎”也.
象曰 不勝而往 咎也
[注]不勝之理 在往前也
[疏]正義曰:經稱“往不勝, 爲咎”, 象云“不勝而往, 咎”, 翻其文者, 蓋 謬於用壯, 必無勝理.
孰知不勝, 果決而往, 所以致於咎過. 故注云“不勝之理, 在往前也.”
九二 惕號하여 莫夜有戎이라도 勿恤이니라
[注]居健履中하니 以斯決事하면 能審己度而不疑者也 雖有惕懼號呼하여 莫夜有戎이라도 不憂不惑이라 勿恤也
[疏]正義曰:九二體健居中, 能決其事, 而无疑惑者也.
象曰 有戎勿恤 得中道也일새라
[疏]正義曰:‘得中道’者, 決事而得中道, 故不以有戎爲憂, 故云“得中道也.”
九三 壯于頄 有凶이라 君子夬夬 獨行이면 遇雨若濡하여 有慍이나 无咎리라
[注] 謂上六也 最處體上故 曰 權也 剝之六三 以應陽爲善이라
夫剛長則君子道興하고 陰盛則小人道長하니 然則處陰長而助陽則善이요 處剛長而助柔則凶矣
夬爲剛長이어늘 而三獨應上六하여 助於小人이라 是以凶也 君子處之 必能棄夫情累하여 決之不疑 曰 夬夬也
若不與衆陽爲群하고 而獨行殊志하여 應於小人이면 則受其困焉이니 遇雨若濡하여 有恨而无所咎也
[疏]‘九三壯于頄’至‘无咎’
○正義曰:‘壯于頄 有凶’者, 頄, 面權也, 謂上六也. 言九三處夬之時, 獨應上六, 助於小人, 是以凶也.
‘君子夬夬’者, 君子之人, 於此時, 能棄其情累, 不受於應, 在於決斷而无滯, 是夬夬也.
‘獨行 遇雨若濡 有慍 无咎’者, 若不能決斷, 殊於衆陽, 應於小人,
象曰 君子夬夬 終无咎也
[疏]正義曰:衆陽決陰, 獨與上六相應, 是有咎也.
若能夬夬, 決之不疑, 則終无咎矣. 然則象云无咎, 自釋君子夬夬, 非經之无咎也.
九四 臀无膚하여 其行次且 牽羊悔亡이로되 聞言不信이로다
[注]不剛而進하고 非己所據하여 必見侵傷하여 失其所安이라 臀无膚하여 其行次且也
羊者 抵狠難移之物이니 謂五也 五爲夬主하여 非下所侵이니
若牽於五 則可得悔亡이나 而己剛亢하여 不能納言하고 自任所處하여 聞言不信하니 以斯而行이면 凶可知矣
[疏]‘九四臀无膚’至‘聞言不信’
○正義曰:‘臀无膚 其行次且’者, 九四據下三陽, 位又不正, 剛而進, 必見侵傷,
侵傷則居不得安, 若臀无膚矣. 次且, 行不前進也. 臀之无膚, 居旣失安, 行亦不進, 故曰“臀无膚, 其行次且”也.
‘牽羊悔亡 聞言不信’者, 羊者, 抵狠難移之物, 謂五也.
然四亦是剛陽, 各亢所處, 雖復聞牽羊之言, 不肯信服事於五, 故曰“聞言不信”也.
象曰 其行次且 位不當也일새요 聞言不信 聰不明也일새라
[注]同於噬嗑滅耳之凶이라
[疏]‘聰不明也’
○正義曰:‘聰不明’者, 聰, 聽也, 良由聽之不明, 故聞言不信也.
[疏]○注‘同於噬嗑滅耳之凶’
○正義曰:四旣聞言不信, 不肯牽係於五, 則必被侵克致凶.
九五 莧陸夬夬 中行无咎니라
[注]莧陸 草之柔脆者也 決之至易 曰 夬夬也 夬之爲義 以剛決柔하니 以君子除小人者也
而五處尊位하여 最比小人하여 躬自決者也 以至尊而敵至賤이면 雖其克勝이나 未足多也 處中而行하여 足以免咎而已 未足光也
[疏]○注‘莧陸草之柔脆者’
○正義曰:‘莧陸 草之柔脆者’, 子夏傳云“莧陸, 木根, 草莖, 剛下柔上也”,
馬融ㆍ鄭玄ㆍ王肅皆云“莧陸, 一名商陸”, 皆以莧陸爲一.
案注直云草之柔脆者, 亦以爲一, 同於子夏等也.
象曰 中行无咎 中未光也
上六 无號 終有凶하리라
[注]處夬之極하여 小人在上하니 君子道長하여 衆所共棄 非號咷所能延也
[疏]正義曰:上六, 居夬之極, 以小人而居群陽之上, 衆共棄也.
君子道長, 小人必凶, 非號咷所免, 故禁其號咷, 曰“无號, 終有凶”也.
象曰 无號之凶 終不可長也
[疏]正義曰:‘終不可長’者, 長, 延也, 凶危若此, 非號咷所能延, 故曰“終不可長也.”


國子祭酒上護軍曲阜縣開國子 臣 孔穎達 奉勅撰正義
王弼 注
夬는 王庭에서 드날려 明信한 법으로 호령하여 〈간사한 자들이〉 위태로우니, 자기 고을에만 고해야 하고 전쟁에 나아가는 것은 이롭지 않으나,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
夬卦는 剝卦(䷖)와 반대이다. 剝卦는 柔로 剛을 변화하여 剛이 거의 다 없어짐에 이르렀고, 夬卦는 剛으로 柔를 결단하여 剝卦가 剛을 소멸시킨 것과 같다.
剛이 무너지면 君子의 道가 사라지고 柔가 사라지면 小人의 道가 무너지니, 君子의 道가 사라지면 剛正한 德을 곧은 道로 사용할 수가 없고
형벌의 위엄을 평탄하게 행할 수가 없지만, 王庭에서 드날림은 그 道가 공정한 것이다.
經의 [夬揚于王庭]에서 [利有攸往]까지
○正義曰:‘夬’는 결단함이니, 이는 陰이 사라지고 陽이 불어나는 卦이다. 陽이 자라 九五에 이르러서 다섯 陽이 함께 한 陰을 결단한다. 그러므로 이름을 ‘夬’라 한 것이다.
[揚于王庭] 결단하는 법을 분명히 행하는 것이다. 夬卦는 剛으로 柔를 결단하니, 이것을 사람에게 베풀면 이는 君子가 小人을 결단하는 것이다.
‘王庭’은 바로 百官들이 있는 곳이니, 君子로서 小人을 결단하므로 결단하는 일을 王者의 뜰에서 드러나게 드날려서 공정함을 보이고 사사로이 숨김이 없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王庭에서 드날린다.”라고 한 것이다.
[孚號有厲] ‘號’는 호령함이니, 결단하는 법을 시행할 적에 먼저 모름지기 호령해야 하는 것이다. 夬卦는 剛으로써 柔를 결단하니, 그렇다면 이는 명확하고 信實한 법을 사용하여 그 호령을 베푸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유약하고 간사한 자들이 위태롭다. 그러므로 “明信한 법으로 호령하여 〈간사한 자들이〉 위태롭다.”라고 한 것이다. 剛으로 制斷하여 자기 고을에 명령을 행하는 것은 可하지만,
만약 剛을 사용하여 전쟁에 나아가서 무력을 숭상하여 이기기를 취하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으니, 이런 방식으로 군대를 사용하면 불리함이 반드시 있다. 그러므로 “자기 고을에만 고해야 하고 전쟁에 나아가는 것은 이롭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
비록 전쟁에 나아가는 것은 이롭지 않으나 剛德이 자라지 않으면 유약한 자와 간사한 자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陽爻가 마땅히 가는 바가 있어야 夬卦의 道가 마침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라고 한 것이다.
〈彖傳〉에 말하였다. “‘夬’는 결단함이다. 剛이 柔를 결단하는 것이니, 굳세면서 기뻐하면 결단하여 和하다.
굳세면서 기뻐하면 결단하여 和하다.
經의 [彖曰]에서 [決而和]까지
○正義曰:[夬 決也 剛決柔] 이는 爻를 가지고 卦의 이름을 해석한 것이다.
[健而說 決而和] 이는 두 體의 뜻을 가지고 ‘결단하여 능히 和함’을 밝힌 것이다. 乾은 굳세고 兌는 기뻐하니, 굳세면 능히 결단하고 기뻐하면 능히 和하다. 그러므로 “결단하여 和하다.”라고 한 것이다.
‘王庭에서 드날림’은 柔가 다섯 剛을 타고 있기 때문이요
剛의 德이 일제히 자라나고 한 柔가 逆을 하면 〈한 柔는〉 여럿이 함께 誅罰하는 대상이어서 〈이를 誅罰함에〉 꺼릴 것이 없다. 그러므로 王庭에서 드날릴 수 있는 것이다.
正義曰:이는 한 陰이 다섯 陽의 위에 있음으로 인하여 결단하는 법을 행함을 해석한 것이다. 剛의 德이 일제히 자라나고 한 柔가 逆을 하면 〈한 柔는〉 여럿이 함께 誅罰하는 대상이어서 誅罰함에 꺼릴 것이 없다.
그러므로 “王庭에서 드날린다.”라고 한 것이다. ‘드러나게 王庭에서 드날릴 수 있는 까닭은 다만 柔가 다섯 剛을 탔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明信한 법으로 호령하여 〈간사한 자들이〉 위태로움’은 그 위태로움이 마침내 분명한 것이요,
剛正과 明信으로 그 호령을 베풀면 유약하고 간사한 자들이 위태롭다. 그러므로 “그 위태로움이 마침내 분명하다.”라고 한 것이다.
正義曰:明信으로 호령을 베풀면 유약하고 간사한 자들이 위태로우니, 위태로운 이치를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위태로움이 마침내 분명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자기 고을에만 고해야 하고 전쟁에 나아가는 것은 이롭지 않음’은 숭상하는 바가 마침내 궁하기 때문이요,
剛으로 制斷함에 호령을 告하는 것은 可하니, ‘告自邑’은 자기 고을에만 호령을 행함을 이른다. 剛을 사용하여 전쟁에 나아감은 무력을 숭상하여 이기기를 취하는 것이니, 무력을 숭상하여 이기기를 취함은 사람들이 똑같이 미워하는 바이다.
正義曰:剛으로 이기는 道는 항상 행해서는 안 된다. 만약 위엄과 사나움을 오로지 사용하여 이런 방식으로 전쟁에 나아가면 곧 무력을 숭상하여 이기기를 취함이 되니,
바로 결단하여 和하지 못한 것이어서 그 道가 窮하다. 결단을 행함에 있어 오직 자기 고을에만 고해야 하고, 전쟁에 나아가는 것은 이롭지 않은 까닭은 다만 숭상하는 바가 마침내 窮하기 때문이다.
‘가는 바를 둠이 이로움’은 剛의 자람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이다.”
剛의 德이 더욱 자라고 柔의 邪가 더욱 사라진다. 그러므로 가는 바를 둠이 이로워서 道가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이다.
正義曰:‘終’은 이루어짐이니, 剛이 자라고 柔가 사라져서 夬卦의 道가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못이 하늘로 올라감이 夬卦이니, 君子가 보고서 祿을 베풀어 아래에 미치며 德에 거하여 禁令을 밝힌다.”
‘못이 하늘로 올라감’은 夬卦의 象이니, 못이 하늘로 올라가면 반드시 〈비가 되어〉 내려와서 아래로 적셔주니, 祿을 베풀어 아래에 미치는 뜻이다.
‘夬’는 법을 밝혀 결단하는 象이다. ‘忌’는 금지함이다. 법이 분명하고 결단이 엄해야 하니, 느슨히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德에 거하여 禁令을 밝히는 것이다.
베풀면서 능히 嚴하고 嚴하면서 능히 베풀며 굳세면서도 능히 기뻐하고 결단하면서도 능히 和함은 아름다운 道이다.
經의 [象曰]에서 [居德則忌]까지
○正義曰:[澤上於天 夬] 못의 성질이 윤택하고 내려가니, 비록 다시 못이 하늘로 올라가나 물이 터져 내려와서 아래로 적셔주니, 이 일이 필연적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夬卦의 象인 것이다.
[君子以施祿及下 居德則忌] ‘忌’는 금지함이다. 決은 두 가지 뜻이 있으니, 〈象傳〉은 못이 내려와서 아래를 윤택하게 하는 것이고, 〈彖傳〉은 법을 밝혀 결단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君子가 이 夬卦의 뜻을 본받아 위엄과 은혜를 함께 베풀어서, 비록 다시 祿을 베풀어 아래에 미치나 자신이 德에 居함에 있어서는 다시 모름지기 禁令을 밝혀서
‘굳세면서도 능히 기뻐하고 결단하면서도 능히 화합함’에 부합하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君子가 보고서 祿을 베풀어 아래에 미치며 德에 거하여 禁令을 밝힌다.”라고 한 것이다.
初九는 발을 前進함을 健壯하게 하여 가서 이기지 못하니 허물이 된다.
굳셈의 초기에 거하고 결단의 시초가 되었으니, 마땅히 계책을 자세히 살펴서 일을 행해야 한다. 그런데 발을 전진함을 건장하게 하여 가서 이기지 못하니 허물이 있는 것이 마땅하다.
正義曰:初九가 夬의 처음에 거하였으니, 마땅히 계책을 살핀 뒤에 가야 하는데, 體가 굳세고 아래에 처해서 한갓 壯健함을 果決하여 그 발을 전진하고자 하니,
이런 방식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이기지 못하는바, 이는 결단하는 계책이 아니니, 이 때문에 허물이 된다. 그러므로 “初九는 발을 전진함을 건장하게 하여 가서 이기지 못하니 허물이 된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이기지 못하면서 가는 것이 허물이다.”
이기지 못하는 이치는 앞으로 감에 있는 것이다.
正義曰:經文에는 “가서 이기지 못하니 허물이 된다.”라고 말하였는데, 〈象傳〉에서는 “이기지 못하면서 가는 것이 허물이다.”라고 하여 그 글을 뒤집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이다.〉 맨손으로 범을 잡으려 하고 맨몸으로 황하를 건너려 함은 孔子가 꺼리신 바이니, 건장함을 잘못 사용하면 이기는 이치가 반드시 없다.
이기지 못함은, 果決하게 가서 이 때문에 허물을 이루게 되는 것임을 누가 알겠는가. 그러므로 注에 “이기지 못하는 이치는 앞으로 감에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九二는 두려워하여 부르짖으며 늦은 밤에 敵兵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근심하지 않는다.
健에 居하고 中을 밟고 있으니, 이로써 일을 결단하면 능히 자기 법도를 살펴 의심하지 않는 자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여 부르짖으며 늦은 밤에 적병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근심하지 않고 의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
正義曰:九二가 體가 굳세고 中에 거하였으니, 능히 그 일을 결단하여 의혹함이 없는 자이다.
비록 다시 어떤 사람이 두려워하여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늦은 밤에 반드시 적병이 와서 자기를 해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더라도 능히 자기의 법도를 살펴서 의혹하고 근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敵兵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근심하지 않음’은 中道를 얻었기 때문이다.”
正義曰:[得中道] 일을 결단함에 中道를 얻었기 때문에 적병의 침공이 있는 것을 근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中道를 얻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九三은 광대뼈에 健壯하니 흉함이 있다. 君子는 夬하게 決斷하니, 혼자 가면 비를 만나 옷이 젖은 듯하여 〈자신에 대한〉 怨望과 恨이 있으나 허물할 곳이 없으리라.
‘頄’는 얼굴의 광대뼈이니, 上六을 이르는바, 卦體의 가장 위에 거했기 때문에 “광대뼈”라고 한 것이다. 剝卦(䷖)의 六三은 陽에 應하는 것이 善이 된다.
剛이 자라면 君子의 道가 일어나고 陰이 盛하면 小人의 道가 자라나니, 그렇다면 陰이 자라날 때에 처하여 陽을 도우면 善하고, 剛이 자라날 때에 처하여 柔를 도우면 흉한 것이다.
夬卦는 剛이 자라나는 것인데, 九三이 홀로 上六에 應하여 소인을 도와준다. 이 때문에 흉한 것이다. 군자가 이때에 처하면 반드시 情에 얽매임을 버려서 결단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夬하게 決斷한다.”라고 한 것이다.
만약 여러 陽과 무리가 되지 않고 홀로 가서 뜻을 달리하여 소인에게 應하면 그 困厄을 받으니, 비를 만나 옷이 젖은 듯하여 怨望과 恨이 있으나 허물할 곳이 없는 것이다.
經의 [九三壯于頄]에서 [无咎]까지
○正義曰:[壯于頄 有凶] ‘頄’는 얼굴의 광대뼈이니, 上六을 이른다. ‘九三이 夬의 때에 처해서 홀로 上六에 應하여 小人을 도와주니, 이 때문에 凶함’을 말한 것이다.
剝卦의 六三으로 말하면 陰이 자랄 때에 처하여 上九에 應하니 이는 陽을 도와 善이 되지만, 지금 九三은 剛이 자랄 때에 처하여 홀로 陰을 도와 흉함이 되는 것이다.
[君子夬夬] 君子인 사람이 이러한 때에 거하면서도 능히 情에 얽매임을 버려서 應을 받지 아니하여 決斷함에 막힘이 없으니, 이것이 ‘夬하게 결단함’인 것이다.
[獨行 遇雨若濡 有慍 无咎] 만약 능히 결단하지 못하고 여러 陽과 달리해서 소인에게 應하면
젖음을 받아 옷을 적셔서 스스로 怨望하고 恨하지만 남을 허물하고 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원망과 한이 있으나 허물할 곳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君子가 夬하게 決斷함’은 끝내 허물이 없는 것이다.”
正義曰:여러 陽이 陰을 결단하는데 〈九三이〉 홀로 上六과 서로 應하니, 이는 허물이 있는 것이다.
만약 능히 夬하게 決斷하고 결단하여 의심하지 않으면 끝내 허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象傳〉에서 말한 ‘无咎(허물이 없음)’는 ‘君子夬夬’를 따로 해석한 것이요, 經文의 ‘无咎(허물할 곳이 없음)’가 아니다.
九四는 볼기짝에 살이 없어서 그 나아감이 주저하니, 羊에게 끌려가면 후회가 없을 것이나 말을 듣고도 믿지 않는다.
剛하게 나아가지 않고 자기가 점거할 곳이 아니어서 반드시 침해와 상해를 받아 그 편안한 곳을 잃는다. 그러므로 볼기짝에 살이 없어서 나아감이 주저하는 것이다.
羊은 들이받고 사나워 옮기기 어려운 물건이니, 九五를 이른다. 九五가 夬卦의 주체가 되어서 아래가 침해할 바가 아니니,
만약 九五에 끌려가면 후회가 없을 수 있으나 자기가 剛하고 높아서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처하는 바를 마음대로 하여 남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으니, 이러한 방식으로 행하면 흉함을 알 수 있다.
經의 [九四臀无膚]에서 [聞言不信]까지
○正義曰:[臀无膚 其行次且] 九四가 아래 세 陽을 점거하고 자리가 또 바르지 못하며 剛하게 나아가지 않아서 반드시 침해와 상해를 받을 것이니,
침해와 상해를 받으면 거처가 편안함을 얻지 못하여 볼기짝에 살이 없는 것과 같다. ‘次且’는 감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볼기짝에 살이 없어서 거처가 이미 편안함을 잃고 가는 것 또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볼기짝에 살이 없어서 그 나아감이 주저한다.”라고 한 것이다.
[牽羊悔亡 聞言不信] ‘羊’은 들이받고 사나워 옮기기 어려운 물건이니, 九五를 이른다.
〈九五는〉 높은 자리에 거하고 자리에 합당하여 夬卦의 주체가 되어서 아래가 감히 침범하지 못하니, 〈九四가〉 만약 九五에 끌려가면 후회가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羊에게 끌려가면 후회가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九四 또한 剛陽이라서 각각 처한 바를 높여서 비록 다시 “羊에게 끌려가야 한다.”는 말을 들으나 九五를 믿고 복종하여 섬기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을 듣고도 믿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그 나아감이 주저함’은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음’은 귀가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噬嗑卦의 귀가 없어짐의 흉함과 같은 것이다.
經의 [聰不明也]
○正義曰:[聰不明] ‘聰’은 들음이니, 진실로 들음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들어도 믿지 않는 것이다.
○注의 [同於噬嗑滅耳之凶]
商陸(莧陸)商陸(莧陸)
○正義曰:九四가 이미 말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여 九五에게 끌려가려 하지 않으면 반드시 침해와 이김을 당하여 흉함을 부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經文에 흉하다는 글이 없으므로 〈象傳〉에서 “聰不明”이라 한 것이니, 이는 噬嗑卦의 上九 爻辭와 같으니, 저 噬嗑卦에서 ‘밝지 못함’으로 흉함을 해석하였는바, 여기서도 흉함이 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九五는 莧陸을 夬하게 決斷하니 中道를 행하여 허물이 없다.
‘莧陸’은 풀 중에 부드러운 것이니, 決斷하기가 지극히 쉽다. 그러므로 “쾌하게 결단한다.”라 한 것이다. 夬卦의 뜻은 剛으로 柔를 결단하는 것이니, 君子로서 小人을 제거하는 것이다.
九五가 높은 자리에 처하여 소인과 가장 가까이 있어서 몸소 직접 결단하는 자이다. 지극히 높은 자로서 지극히 낮은 자를 상대하면 비록 이기더라도 훌륭하게 여길 것이 못 되고, 中에 처하여 행해서 허물을 면할 뿐이니, 光大한 것이 못 된다.
經의 [九五]에서 [无咎]까지
○正義曰:‘莧陸’은 풀 중에 부드러운 것이다. 夬卦의 뜻은 剛으로 柔를 결단하는 것이니, 君子로서 小人을 제거하는 것이다.
九五가 높은 자리에 처하여 夬卦의 주체가 되어서 친히 上六을 決斷하니, 이는 결단함이 지극히 쉬운 것이니, 莧草를 결단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莧陸을 夬하게 決斷한다.”라고 한 것이다.
다만 지극히 높은 자로서 지극히 천한 자를 상대하니, 비록 이기더라도 귀하게 여길 것이 못 되고 다만 中道를 행하기 때문에 겨우 허물이 없음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中道를 행하여 허물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注의 [莧陸草之柔脆者]
○正義曰:[莧陸 草之柔脆] ≪子夏易傳≫에 “莧陸은 나무의 뿌리에 풀의 줄기이니, 아래는 剛하고 위는 부드럽다.”라 하였고,
馬融ㆍ鄭玄ㆍ王肅은 모두 “莧陸은 일명 ‘商陸’이라 한다.”라고 하여 모두 ‘莧陸’을 하나로 여겼다.
그러나 董遇는 “莧은 人莧이고, 陸은 商陸이다.”라고 하여 ‘莧陸’을 두 가지로 여겼다. 살펴보건대, 注에 다만 “풀 중에 부드러운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하나로 여긴 것인바, 子夏 등(馬融‧鄭玄‧王肅)과 같다.
〈象傳〉에 말하였다. “‘中道를 행하여 허물이 없음’은 中이 光大하지 못한 것이다.”
正義曰:[中未光] 비록 다시 中에 거하여 행하나 직접 上六을 결단하여 높은 자로서 낮은 자를 상대해서 光大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上六은 울부짖을 필요가 없으니, 끝내 凶함이 있으리라.
夬의 極에 처하여 小人이 위에 있으니, 君子의 道가 자라나서 사람들이 함께 버리는 바이다. 그러므로 울부짖음으로 능히 연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正義曰:上六이 夬의 極에 거하여 小人으로서 여러 陽의 위에 있으니, 여러 사람이 함께 버리는 바이다.
君子의 道가 자라면 小人이 반드시 흉하니, 울부짖어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울부짖음을 금하여 “울부짖을 필요가 없으니, 끝내 흉함이 있으리라.”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울부짖을 필요가 없는 흉함은 끝내 연장할 수가 없는 것이다.”
正義曰:[終不可長] ‘長’은 연장함이니, 흉함과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면 울부짖음으로 능히 연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끝내 연장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역주
역주1 故可以顯然發揚決斷之事於王者之庭 : 阮元의 〈校勘記〉에 “孫志祖가 이르기를 ‘위의 「之」자는 마땅히 「其」가 되어야 한다.’ 하였다.”라고 하였는바, 孫志祖의 말을 따라 교감하면 이 句는 “그러므로 드러나게 드날려서 王者의 뜰에서 그 일을 결단할 수 있다.[故可以顯然發揚 決斷其事於王者之庭]”로 해석된다.
역주2 如此卽柔邪者危 : ‘有厲’를 孔穎達은 ‘유약하고 간사한 자들에게 위태로움이 있음’으로 해석하였는바, 즉 이 위태로움을 上六의 위태로움으로 본 것이다.
반면 程伊川과 朱子는 모두 ‘小人을 결단하는 君子에게 여전히 위태로움이 있음’으로 해석하고 이를 경계의 말로 보았다. ≪程傳≫은 다음과 같다. “君子의 道가 비록 자라고 盛하나 감히 경계와 대비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至誠으로 사람들에게 명하여 아직도 위태로운 길이 있음을 알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비록 매우 盛한 이것(陽)으로 매우 쇠한 저것(陰)을 결단하나, 만약 쉽게 여기고 대비가 없으면 예상치 못한 뉘우침이 있을 것이다.[君子之道 雖長盛 而不敢忘戒備 故至誠以命衆 使知尙有危道 雖以此之甚盛 決彼之甚衰 若易而无備 則有不虞之悔]”
역주3 以剛制斷……可也 : ‘告自邑’을 程伊川은 의리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君子가 小人을 다스림은 小人이 不善하기 때문이니, 반드시 자기의 善한 道로써 이겨 고쳐야 한다. 그러므로 聖人이 亂을 다스릴 적에는 반드시 먼저 자신을 닦는 것이니, 舜임금이 文德을 편 것이 이것이다. 邑은 私邑이니, 자기 사읍에 告한다는 것은 먼저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다.[君子之治小人 以其不善也 必以己之善道 勝革之 故聖人誅亂 必先修己 舜之敷文德是也 邑 私邑 告自邑 先自治也]”
역주4 (夬)[決] : 저본에는 ‘夬’로 되어 있으나, 經文에도 ‘決’로 되어 있으며, 阮元의 〈校勘記〉에 “살펴보건대 ‘夬’는 ‘決’이 되어야 한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決’로 바로잡았다.
역주5 以明信而宣號令……故曰其危乃光也 : 王弼과 孔穎達은 ‘有厲’를 ‘유약하고 간사한 小人에게 위태로움이 있음’으로 해석하여 ‘其危乃光’을 ‘小人들의 위태로움이 분명히 드러남’으로 해석하였다.
반면 程伊川은 ‘有厲’를 ‘君子에게 아직도 위태로움이 있음’으로 해석하여 ‘其危乃光’을 “誠信을 다하여 무리들에게 號令해서 위태로움과 두려움이 있음을 알게 하면 君子의 道가 마침내 근심이 없어 光大해지는 것이다.[盡誠信以命其衆 而知有危懼 則君子之道 乃无虞而光大也]”라고 해석하였다.
역주6 (道)[終]……夬道乃成也 : 王弼과 孔穎達은 ‘剛長乃終’의 ‘終’을 ‘成’으로 訓하였는데, 程伊川과 朱子는 ‘終極’으로 訓하였다. 程伊川은 “陽剛이 비록 盛하나 자람이 아직 끝나지 않아 아직도 한 陰이 남아 있으니, 다시 결단하여 제거하면 君子의 道가 純一되어 해치는 자가 없을 것이니, 바로 剛의 자람이 끝나는 것이다.[陽剛雖盛 長猶未終 尙有一陰 更當決去 則君子之道純一而无害之者矣 乃剛長之終也]”라고 하였고, 朱子는 “剛長乃終은 한 번 변하면 純乾이 됨을 이른다.[剛長乃終 謂一變則爲純乾也]”라고 하였다.
역주7 (道)[終] : 저본에는 ‘道’로 되어 있으나, 錢本ㆍ宋本에 의거하여 ‘終’으로 바로잡았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8 決有二義……居德則忌也 : 孔穎達은 夬에 ‘決斷’과 ‘터짐[決潰]’의 두 가지 뜻이 있음을 밝히고, 〈象傳〉은 ‘터짐’의 뜻을 위주로 하고 〈彖傳〉은 ‘결단’의 뜻을 위주로 하였다고 분석하였다. 또 〈象傳〉의 ‘施祿及下’와 ‘居德則忌’에 대해서는, 君子는 ‘결단’과 ‘터짐’의 두 가지 象을 모두 본받으므로 ‘터짐’의 象을 본받아 ‘施祿及下’하고 ‘결단’의 象을 본받아 ‘居德則忌’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반면 程伊川과 朱子는 夬卦의 象을 ‘터짐’의 뜻에 한정하였는바, ‘居德則忌’에 대해서 朱子는 “未詳이다.”라고 하였고, 程伊川은 “터지는 象을 보면 德에 거하여 禁忌를 법제화하니, 居德은 德에 편안히 처함이고 則은 約條를 만드는 것이고 忌는 방지함이니, 防禁을 約條로 만들어 세움을 이른다. 防禁이 있으면 터져 흩어짐이 없게 된다. 王弼은 ‘明忌’로 썼으니, 또한 통한다.[觀其決潰之象 則以居德則忌 居德 謂安處其德 則 約也 忌 防也 謂約立防禁 有防禁則无潰散也 王弼作明忌 亦通]”라고 하였다.
역주9 暴虎馮河 孔子所忌 : ‘暴虎’와 ‘馮河’는 모두 미련하고 무모한 행위를 의미한다. ≪論語≫ 〈述而〉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맨손으로 범을 잡으려 하고 맨몸으로 黃河를 건너려 하여 죽어도 후회함이 없는 자를 나는 함께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전쟁하는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며 도모하기를 좋아하여 成功하는 자와 함께할 것이다.’[子曰 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라고 보인다.
역주10 雖復有人惕懼號呼……故勿恤也 : ‘惕號 莫夜有戎’을 王弼과 孔穎達은 ‘두려워하여 부르짖으며 늦은 밤에 적병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함’으로 해석하고, ‘勿恤’을 ‘그 말에 현혹되지 않아 근심하지 않음’으로 해석하였다.
반면 程伊川과 朱子는 ‘惕號’를 ‘안으로는 스스로 두려움을 품고 밖으로는 경계와 호령을 엄하게 함’의 의미로 보고, ‘莫夜有戎 勿恤’을 ‘이렇게 대비하기 때문에 늦은 밤에 적병의 침공이 있더라도 걱정이 없을 수 있음’의 의미로 보았다.
역주11 頄 面權也 : ‘權’은 ‘顴(광대뼈)’이니, ≪集韻≫에 “頄는 얼굴의 광대뼈이다.[頄 面顴也]”라고 보이는바, ‘權’과 ‘顴’은 옛날에 통용되었다.
역주12 若剝之六三……是助陽爲善 : 剝卦(䷖)는 陰이 자라나 陽을 모두 깎아 없앰을 상징하는바, 즉 初六부터 六五까지의 여러 陰爻가 上九를 깎는 것이다. 그런데 六三만은 上九와 正應이 되어 上九에 응하니, 이 때문에 다른 陰爻와 달리 홀로 허물이 없는 것이다. 六三의 爻辭는 다음과 같다. “六三은 陽을 깎는 때에 있더라도 허물이 없다.[六三 剝之 无咎]”
역주13 壯于頄……獨助陰爲凶也 : 王弼과 孔穎達은 ‘頄’를 上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壯于頄 有凶’을 ‘九三이 上六에 응하여 小人을 도와주므로 흉함’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반면 程伊川은 ‘頄’를 九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이 經文을 해석하기를 “頄는 광대뼈이니, 위에 있으나 위에 지극하지 않은 자이다. 九三이 下體의 위에 거하여 비록 위에 있으나 最上은 아니니, 위에 군주가 있는데 剛決을 自任하면 광대뼈에 건장한 자이니, 흉함이 있는 道이다.[頄 顴骨也 在上而未極於上者也 三居下體之上 雖在上而未爲最上 上有君而自任其剛決 壯于頄者也 有凶之道也]”라고 하였다.
반면 朱子는 ‘頄’를 ‘剛壯함이 面目에 나타남’의 의미로 보아 “九三이 결단할 때를 당하여 剛으로서 中을 지났으니, 이는 소인을 결단하고자 하여 剛壯함이 面目에 나타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흉한 道가 있다.[九三 當決之時 以剛而過乎中 是欲決小人而剛壯 見于面目也 如是則有凶道矣]”라고 하였다.
역주14 (若)[居] : 저본에는 ‘若’으로 되어 있으나, 錢本ㆍ宋本에 의거하여 ‘居’로 바로잡았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15 獨行……故曰有慍无咎也 : ‘有慍无咎’를 王弼과 孔穎達은 ‘九三이 스스로 자신에 대한 원망과 한이 있으나 남을 탓할 수 없음’의 의미로 보았다. 남을 탓할 수 없는 이유는, 비를 만나 옷을 적신 것이 九三 스스로가 上六을 결단하지 못하고 홀로 上六에게 나아간 데에 연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朱子는 “獨行遇雨 若濡有慍 无咎”를 해석하여 “여러 陽의 가운데에 있으면서 홀로 上六과 應하니, 만약 그 決斷을 果決하게 하여 사사로운 사랑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비록 上六과 합하여 홀로 감에 비를 만나서 ‘젖는 듯하여 君子에게 노여움을 받음’에 이르나 끝내는 반드시 小人을 決斷하여 제거해서 허물이 없을 것이다.[在衆陽之中 獨與上六爲應 若能果決其決 不係私愛 則雖合於上六 如獨行遇雨 至於若濡而爲君子所慍 然終必能決去小人而无所咎也]”라고 하였는바, ‘有慍无咎’를 ‘다른 陽에게 노여움을 받으나 끝내는 허물이 없음’의 뜻으로 본 것이다.
한편 程伊川은 經文에 착오가 있다고 보고 ‘君子夬夬’를 ‘遇雨’와 ‘若濡’ 사이로 옮겨 경문을 “壯于頄 有凶 獨行遇雨 君子夬夬 若濡有慍 无咎”로 교감하였다. 程伊川의 주석에 따르면, ‘獨行遇雨’는 ‘九三이 홀로 上六에게 가서 陰과 陽이 화합함’의 의미가 되는바 이는 王弼ㆍ孔穎達의 해석과 같고, ‘君子夬夬’는 ‘군자는 이러한 때에 처하면 결단을 과결하게 함’의 의미가 되는바 이 역시 王弼ㆍ孔穎達의 해석과 같다. 반면 ‘若濡有慍 无咎’는 ‘君子夬夬’와 이어지게 해석하여 “비록 사사로이 친하나 마땅히 멀리하고 끊어서 마치 더러움에 젖는 듯이 여겨 노여워하고 미워하는 기색이 있어야 하니, 이와 같이 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雖其私與 當遠絶之 若見濡汚 有慍惡之色 如此則无過咎也]”라고 풀이하였다.
역주16 (下)[不] : 저본에는 ‘下’로 되어 있으나, 위의 王弼 注에 “不剛而進”이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不’로 바로잡았다.
역주17 牽羊悔亡……故曰牽羊悔亡 : ‘牽羊悔亡’을 王弼과 孔穎達은 ‘九四가 九五에게 끌려가면 후회가 없음’의 의미로 보았다.
그러나 程伊川과 朱子는 ‘九四가 羊을 끌 듯하면 후회가 없음’의 의미로 보았다. ‘양을 끌 듯함’에 대하여, 程伊川은 “羊은 떼 지어 다니는 물건이요 牽은 당기고 끄는 뜻이니, 만일 스스로 강하게 끌어당겨서 여럿을 따라가면 뉘우침이 없을 것임을 말한 것이다.[羊者 群行之物 牽者 挽拽之義 言若能自强而牽挽 以從群行 則可以亡其悔]”라고 설명하였고, 朱子는 “여러 陽과 다투어 나아가지 않고 편안히 그 뒤에 나오면 뉘우침이 없을 수 있다.……羊을 끌고 가는 자는 그 앞을 가로막으면 나아가지 않고, 풀어놓아 앞으로 가게 하고 그 뒤를 따라가면 갈 수 있다.[若不與衆陽競進而安出其後 則可以亡其悔……牽羊者 當其前 則不進 縱之使前而隨其後 則可以行矣]”라고 하였다.
역주18 經无凶文……知此亦爲凶也 : 噬嗑卦 上九 爻辭는 “上九는 차꼬를 메어 귀가 없어진 것이니, 흉하다.[上九 何校滅耳 凶]”인데, 〈象傳〉에서 이를 해석하여 “‘차꼬를 메어 귀가 없어짐’은 귀가 밝지 못한 것이다.[何校滅耳 聰不明也]”라고 하여 ‘흉함’과 ‘귀가 밝지 못함’을 연계하였다.
역주19 莧陸……故曰莧陸夬夬也 : ‘莧陸’을 王弼과 孔穎達은 ‘풀 중에 부드러운 것’으로 해석하여 ‘莧陸夬夬’를 ‘부드러운 풀인 莧陸을 매우 쉽게 결단하는 것처럼 九五가 上六을 쉽게 결단하는 것’의 의미로 보았다.
程伊川과 朱子는 ‘莧陸’의 의미를 ‘쉽게 결단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에 한정하지 않고 ‘陰에 감동됨이 많은 물건’이라는 의미도 추가하였는바, 九五가 上六과 매우 가까워 上六을 가까이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莧陸에 이러한 상징이 추가되면 ‘莧陸夬夬’는 ‘陰氣에 감동됨이 많지만 쉽게 끊을 수 있는 莧陸처럼 九五가 上六과 가깝지만 결단을 果決하게 함’의 의미가 된다. 程伊川은 “陰에 감동됨이 많은 물건 중에 莧陸이 끊기가 쉬우므로 취하여 象으로 삼은 것이다.[感陰多之物 莧陸爲易斷 故取爲象]”라고 하였다.
역주20 但以至尊而敵於至賤……故曰中行无咎 : ‘中行无咎’를 王弼과 孔穎達은 ‘九五가 上六을 결단한 것은 훌륭하게 여길 것이 못 되고 다만 中에 처하여 행하므로 허물을 면할 뿐임’의 의미로 해석하였다.
程伊川은 ‘九五가 上六을 가까이하지 않고 결단을 과결하게 하면 正道에 허물이 없을 것임’의 의미로 보아 “九五는 陰을 決斷하는 주체가 되어 도리어 陰을 가까이하면 그 허물이 크다. 그러므로 반드시 결단을 果決하게 하기를 莧陸과 같이 하면 中行의 德에 허물이 없음이 되니, 中行은 正道이다.[五爲決陰之主而反比之 其咎大矣 故必決其決 如莧陸然 則於其中行之德 爲无咎也 中行 中道也]”라고 하였다.
朱子는 ‘上六을 결단하되 중도에 맞게 함’의 의미로 보아 “만약 결단하고 결단하되 또 지나치게 포악하지 않게 하여 中行에 합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니, 점치는 자에게 마땅히 이와 같이 하라고 경계한 것이다.[若決而決之 而又不爲過暴 合於中行 則无咎矣 戒占者當如是也]”라고 하였다.
역주21 (黃)[董]遇 : 字가 季直으로, 弘農 사람이다. 後漢 獻帝 建安 연간에 孝廉으로 등용되었고 魏 明帝 때 大司農을 지냈다. ≪老子≫에 밝아 訓注를 지었다.
역주22 (黃)[董] : 저본에는 ‘黃’으로 되어 있으나, ≪周易集解纂疏≫에 의거하여 ‘董’으로 바로잡았다.(北京大 整理本 참조)
역주23 子夏傳云……以莧陸爲二 : 孔穎達의 疏에 따르면, ≪子夏易傳≫에서는 ‘莧陸’을 ‘商陸’으로 본 것으로, 이는 ‘장록(자리공)’이라고 하는 宿根草이다. 뿌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므로 ‘나무의 뿌리’라고 하였고, 잎과 줄기는 가을에 서리를 맞으면 죽기 때문에 ‘풀의 줄기’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董遇는 “莧은 人莧이고, 陸은 商陸이다.”라 하여 莧陸을 두 가지로 보았는바, 人莧은 사람이 나물로 먹는 비름의 일종이다. 한편 孔穎達이 인용한 이 말은 현전하는 ≪子夏易傳≫에 보이지 않는다.
역주24 中未光者……未足以爲光大也 : ‘中未光也’를 王弼과 孔穎達은 ‘九五가 上六을 결단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므로 光大함이 될 수 없음’의 의미로 보았다. 이때의 中은 九五가 처한 中의 자리를 의미한다.
반면 程伊川은 ‘中未光也’를 ‘九五의 마음에 치우친 바가 있어서 中道에 있어서는 光大함이 되지 못함’의 의미로 해석하였다. ‘마음에 치우친 바가 있다.’는 것은 九五가 上六과 親比하려는 마음이 있음을 말한다. ≪程傳≫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마음이 바르고 뜻이 誠實하여야 中正한 道를 극진히 해서 充實하여 光輝한 것인데, 九五는 마음에 친한 바가 있으니, 義에 不可하므로 決斷하여 비록 밖에 행함에 있어서는 中正의 뜻을 잃지 않아서 허물이 없을 수 있으나 中道에 있어서는 光大함이 되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은 한 번이라도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道를 떠나게 되니, 夫子가 여기에서 사람에게 보여주신 뜻이 깊도다.[夫人心正意誠 乃能極中正之道而充實光輝 五心有所比 以義之不可而決之 雖行於外 不失中正之義 可以无咎 然於中道 未得爲光大也 蓋人心一有所欲 則離道矣 夫子於此 示人之意 深矣]”

주역정의(3) 책은 2019.10.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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