夫詩者는 論功頌德之歌요 止僻防邪之訓이니 雖無爲而自發이나 乃有益於生靈이라
靜於中
을 百物盪於外
하니 情緣物動
하고 物感情遷
이라
若政遇醇和면 則歡娛被於朝野하고 時當慘黷이면 亦怨刺形於詠歌라
作之者所以暢懷舒憤하고 聞之者足以塞違從正이라 發諸情性하여 諧於律呂라
若夫哀樂之起는 冥於自然이요 喜怒之端은 非由人事라 故燕雀表啁噍之感하고 鸞鳳有歌舞之容이라
然則詩理之先은 同夫開辟이요 詩跡所用은 隨運而移라
上皇道質이라 故諷諭之情寡하고 中古政繁이라 亦謳謌之理切이라 唐虞乃見其初요 犧軒莫測其始라
於後時經
하여 篇有三千
하고 成康沒而頌聲寢
이요 陳靈興而變風息
이라
先君
釐正遺文
하사 緝其精華
하고 褫其煩重
하시니 上從周始
하고 下暨魯僖
하여 四百年閒
의 備矣
라
卜商闡其業하여 雅頌이 與金石同和러니 秦正燎其書하여 簡牘與煙塵共盡이러라
漢氏之初에 詩分爲四하니 申公騰芳於鄢郢하고 毛氏光價於河閒하며 貫長卿傳之於前하고 鄭康成箋之於後라
晉宋
之世
에 其道大行
하여 齊魏兩河之閒
에 玆風不墜
러라
其近代爲義疏者에 有全緩 何胤 舒瑗 劉軌思 劉醜 劉焯 劉炫等이러니 然焯 炫은 竝聰穎特達하여 文而又儒라
擢秀幹於一時하여 騁絶轡於千里하니 固諸儒之所揖讓이 日下之無雙이라
於其所作疏內特爲殊絶일새 今奉勅刪定에 故據以爲本이라
然焯炫等이 負恃才氣하고 輕鄙先達하여 同其所異하고 異其所同하며 或應略而反詳하고 或宜詳而更略하여
準其繩墨에 差忒未免이니 勘其會同에 時有顚躓이라
今則削其所煩하고 增其所簡하니 唯意存於曲直이요 非有心於愛憎이라
謹與朝散大夫行太學博士 臣王德韶와 徵事郞 守四門博士 臣齊威等으로 對共討論하여 辨詳得失이라
至十六年하여 又奉勅與前脩疏人 及給事郞 守太學助敎雲騎尉 臣趙乾叶과 登仕郞 守四門助敎雲騎尉 臣賈普曜等이 對勅使趙弘智 覆更詳正하니 凡爲四十卷이라
庶以對揚聖範하고 垂訓幼蒙이라 故序其所見하여 載之於卷首云爾라
시詩는 공功을 논하고 덕德을 칭송하는 노래이고, 괴벽함을 그치게 하고 사악함을 막는 교훈이니 비록 시키는 이 없이 자발적인 것이지만 생령生靈에게는 유익한 것이다.
마음속에 고요한 육정六情을 밖의 온갖 사물이 흔드니 정은 사물로 인하여 움직이고 사물은 감정에 따라 변한다.
이를테면 순화醇和한 정치를 만나면 조야朝野에 기쁨과 즐거움이 미치고, 혼란한 시대를 만나면 역시 노래에 원망과 풍자가 나타난다.
시를 짓는 자는 감회를 드러내거나 울분을 토로하고, 듣는 자는 잘못을 막고 바름을 따르기에 충분하다. 정성情性에서 나와 음악과 어울린다.
그리하여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시詩보다 나은 게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시의 작용이 크게 이로운 것이다.
슬픔과 즐거움의 시작은 자연 속에 담겨있고, 기쁨과 노여움의 단초는 인간에 연유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제비나 참새는 재잘거려 감정을 표현하고, 난새와 봉황은 노래와 춤추는 모습이 있다.
그러고 보면 시詩를 처음 지음은 개벽開闢과 같은 시기이고, 시詩 작용의 자취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였다.
상황上皇(복희伏羲)시대時代에는 도가 질박하였기에 풍유諷諭하는 감정이 적었고, 중고시대에는 정사가 번잡하였기에 구가謳謌하는 이치가 긴절하였다. 당우시대唐虞時代에 비로소 그 처음이 보이고, 복희伏羲와 헌원시대軒轅時代는 그 처음을 헤아릴 수가 없다.
이후 오대五代를 거쳐 3천 편이 있었고,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이 죽자 송성頌聲이 그치고, 진陳의 영공靈公이 나타나자 변풍變風이 끝났다.
선군 선보先君 宣父께서 유문遺文을 바르게 정리하시어 정화精華를 모으고 번중煩重함을 삭제하시니, 위로는 주나라 시작부터 아래로 노나라 희공僖公까지 4백 년간의 육시六詩가 갖추어졌다.
복상卜商(자하子夏)이 그 학업을 밝혀 아雅와 송頌이 악기와 어울리더니 진시황이 그 서적을 태워 간독簡牘이 재와 함께 다 사라졌다.
한漢나라 초기에 시詩가 넷으로 나뉘니 신공申公이 언영鄢郢에서 이름을 날리고 모씨毛氏는 하간河間에서 값을 빛내며 관장경貫長卿이 앞서 전傳을 짓고 정강성鄭康成이 뒤에 전箋을 지었다.
진晉과 송宋, 이소二蕭의 세상에 그 도가 크게 행해져 제齊와 위 양하魏 兩河의 사이에 이 풍도가 실추되지 않았었다.
근대에 의소義疏를 지은 이로는, 전완全緩․하윤何胤․서원舒瑗․유궤사劉軌思․유추劉醜․유작劉焯․유현劉炫 등이 있는데, 그중에도 유작劉焯과 유현劉炫은 모두 총명하고 걸출하여 문장가이자 유학자였다.
당시에 출중하여 천하에 이름을 드날리니, 모든 학자들의 존경이 천하에 짝할 사람이 없었다.
의소를 지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뛰어났기 때문에, 이제 칙명을 받들어 산정刪定함에 이를 근거로 저본을 삼았다.
그러나 유작劉焯과 유현劉炫 등은 재주를 믿고 선배들을 가볍게 여겨 다른 것은 같다 하고 같은 것은 다르게 해석하며, 간략해야 할 것은 도리어 자세하게 하고 자세해야 할 부분은 더 간략하게 하기도 하여,
원칙에 어긋남을 면치 못하였으니 회동會同하여 교감함에 때로 곤란함이 있었다.
이번에 번잡한 부분은 삭제하고 간략한 부분은 보태었으니, 옳고 그름에만 뜻을 두었을 뿐, 좋아하고 싫어함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삼가 조산대부 행태학박사朝散大夫 行太學博士 신 왕덕소臣 王德韶와 징사랑 수사문박사徵事郞 守四門博士 신 제위臣 齊威 등과 함께 토론하여 옳고 그름을 자세하게 판별하였다.
정관貞觀 16년(642)에 이르러 또 앞서 의소義疏를 찬수纂修하던 사람과 급사랑 수태학조교운기위給事郞 守太學助敎雲騎尉 신 조건협臣 趙乾叶과 등사랑 수사문조교운기위登仕郞 守四門助敎雲騎尉 신 가보요臣 賈普曜 등이 칙명을 받들어 칙사 조홍지勅使 趙弘智와 다시 자세히 바로잡으니 모두 40권이다.
부디 성상聖上의 규범規範에 보답하고 어리고 몽매한 이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보아온 것을 차례로 기록하여 책의 머리에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