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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詩正義(1)

모시정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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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之興也 諒不於上皇之世
시의 시작은 분명 상황上皇의 시대는 아니다.
【疏】正義曰:上皇, 謂伏犧, 三皇之最先者, 故謂之上皇.
정의왈正義曰상황上皇복희伏犧를 말하니, 삼황三皇 중에 가장 앞선다. 그리하여 상황上皇이라 한 것이다.
鄭知於時信無詩者, 上皇之時, 擧代淳樸, 田漁而食, 與物未殊.
정현鄭玄이 그 시대에 진실로 시가 없었음을 안 것은, 상황의 시대는 온 시대가 순박淳樸하여, 사냥하고 물고기 잡아먹고 살아 짐승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居上者設言而莫違, 在下者群居而不亂, 未有禮義之敎, 刑罰之威,
위에 있는 이는 말을 하면 어김이 없고, 아래에 있는 자는 무리지어 살면서도 난잡하지 않아 예의의 가르침과 형벌의 위엄이 없어
爲善則莫知其善, 爲惡則莫知其惡, 其心旣無所感, 其志有何可言, 故知爾時未有詩詠.
을 해도 선인 줄 모르고 을 해도 악인 줄을 몰라, 마음에 느낀 바가 없었으니 어찌 말할 만한 뜻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 당시에는 아직 읊조린 시가 없었을 것임을 안 것이다.
大庭軒轅으로 逮於高辛 其時有亡載籍 亦蔑云焉이라
대정大庭헌원軒轅에서 고신高辛에 이르기까지 그 당시에 문적文籍이 없었을까. 역시 없었을 것이다.
【疏】正義曰:鄭注․勅省圖, 以伏犧․女媧․神農三代爲三皇, 以軒轅․少昊․高陽․高辛․陶唐․有虞六代爲五帝,
정의왈正義曰정현鄭玄의 ≪상서중후尙書中候≫ 〈칙성도勅省圖에, 복희伏犧여와女媧신농神農 3삼황三皇으로, 헌원軒轅소호少昊고양高陽고신高辛도당陶唐유우有虞 6오제五帝로 삼아,
德合北辰者皆稱皇, 感者皆稱帝, 故三皇三而五帝六也. 大庭, 神農之別號.
북신北辰에 합치되는 이를 모두 이라 하고, 오제좌성五帝座星에 감응한 이를 모두 라 하였다. 그리하여 삼황三皇은 셋인데 오제五帝는 여섯이다. 대정大庭신농神農별호別號이다.
大庭․軒轅疑其有詩者, 大庭以還, 漸有樂器, 樂器之音, 逐人爲辭, 則是爲詩之漸, 故疑有之也.
대정大庭헌원軒轅 때에 가 있었을까를 의심한 것은, 대정 이후로 점차 악기樂器가 있었는데, 악기의 은 사람의 소리를 따른다. 그러고 보면 이것이 시를 짓는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있었을까를 의심한 것이다.
【疏】禮記明堂位曰 “, 伊耆氏之樂也.” 注云 “伊耆氏, 古天子號.”
예기禮記≫ 〈명당위明堂位〉에 “토고土鼓궤부蕢桴위약葦籥이기씨伊耆氏 때의 악기樂器이다.” 하였는데, 에 “이기씨伊耆氏는 옛 천자天子의 호칭이다.” 하였다.
禮運云 “夫禮之初, 始諸飮食, 蕢桴而土鼓.” 注云 “中古未有釜甑.” 而中古謂神農時也.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의 처음은 음식에서 시작되었으니, 흙덩이를 다져서 북채를 만들고 흙을 다져서 북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는데, 에, “중고시대에는 아직 부증釜甑이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중고시대는 신농神農 때이다.
郊特牲云 “伊耆氏始爲蠟.” 蠟者, 爲田報祭.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는 “이기씨伊耆氏가 처음 섣달 제사를 지냈다.” 하였는데, 은 농사 신에 대한 제사이다.
案易繫辭稱 “神農始作耒耜以敎天下.” 則田起神農矣. 二者相推, 則伊耆․神農竝與大庭爲一.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을 살펴보니 “신농이 처음 뇌사耒耜를 만들어 천하天下를 가르쳤다.”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농사는 신농에서 시작된 것이다. 두 가지를 미루어 보면 이기伊耆신농神農대정大庭은 같은 한 사람이다.
大庭有鼓籥之器, 黃帝有雲門之樂, 至周尙有雲門, 明其音聲和集.
대정 때에는 의 악기가 있었으며, 황제黃帝 때에는 ‘운문雲門’의 이 있어, 주대周代까지도 ‘운문雲門’의 악이 있었으니, 분명 이 어울렸을 것이다.
旣能和集, 必不空弦, 弦之所歌, 卽是詩也. 但事不經見, 故總爲疑辭.
어울렸고 보면 필시 악기만 연주하지 않았을 것이니 연주하며 노래한 것이 바로 시인 것이다. 다만 그러한 일이 경서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심하는 말로 결론한 것이다.
【疏】案云 “伏犧作瑟.” 明堂位云 “女媧之笙簧.” 則伏犧․女媧已有樂矣.
고사고古史考≫를 살펴보면 “복희伏犧을 만들었다.”라고 하고, ≪예기禮記≫ 〈명당위明堂位〉에는 “여와女媧생황笙簧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복희와 여와의 시대에 이미 이 있었던 것이다.
鄭旣信伏犧無詩, 又不疑女媧有詩, 而以大庭爲首者, 原夫樂之所起, 發於人之性情, 性情之生, 斯乃自然而有,
정현鄭玄은 복희 때에는 시가 없었다고 믿고, 또 여와 때에는 시가 있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정大庭(신농神農) 때에 처음으로 〈시가 있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은, 악이 시작되는 것을 따져보면 악은 사람의 성정性情에서 나오는 것이니, 성정에서 나온 것이 바로 자연히 있는 것이다.
故嬰兒孩子則懷嬉戲抃躍之心, 玄鶴蒼鸞亦合歌舞節奏之應, 豈由有詩而乃成樂, 樂作而必由詩,
그러기에 젖먹이와 어린아이도 기뻐하고 춤추는 마음을 지니고, 현학玄鶴창란蒼鸞도 노래 가락과 박자에 맞추어 춤추니, 어찌 시가 있어야 악이 이루어지며 음악 연주가 꼭 시를 통해야만 하겠는가.
然則上古之時, 徒有謳歌吟呼, 縱令土鼓葦籥, 必無文字雅頌之聲,
그렇다면 상고시대에는 흥얼거리고 읊조림만 있고, 설사 토고土鼓위약葦籥을 연주해도 필시 문자文字아송雅頌의 소리는 없었을 것이다.
故伏犧作瑟, 女媧笙簧, 及蕢桴土鼓, 必不因詩詠. 如此則時雖有樂, 容或無詩.
그리하여 복희가 비파를 타고 여와가 생황笙簧궤부蕢桴토고土鼓를 연주할 때에 꼭 시를 읊조린 것을 통해서 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하다면 당시에 비록 은 있었지만 어쩌면 시는 없었을 것이다.
【疏】鄭疑大庭有詩者, 正據後世漸文, 故疑有爾, 未必以土鼓葦籥遂爲有詩.
정현이 대정大庭 때에 시가 있었는지 의심한 것은 바로 후세에 점차 글이 있음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있었는가를 의심한 것일 뿐, 꼭 토고土鼓위약葦籥을 마침내 시가 있는 것이라 여긴 것은 아니다.
若然, 詩序云 “情動於中而形於言, 言之不足, 乃永歌嗟歎. 聲成文謂之音.” 是由詩乃爲樂者.
만일 그렇다면 ≪시경詩經≫ 〈모시서毛詩序〉에 “이 속에서 움직여 말로 나타나고 말로 다 표현하기 부족하여 길게 노래하고 탄식한다. 소리가 무늬를 이룸을 음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시를 통하여 이 되는 것이다.
此據後代之詩因詩爲樂, 其上古之樂必不如此. 鄭說旣疑大庭有詩, 則書契之前, 已有詩矣.
이는 후대의 시가 시를 통하여 악이 된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니 상고시대의 음악은 꼭 이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현鄭玄대정大庭 때에 시가 있었는가 의심하였으니 그렇다면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이미 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而六藝論論詩云 “詩者, 弦歌諷諭之聲也.
그러나 ≪육예론六藝論≫ 〈논시論詩〉에서 “는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는 풍유의 소리이다.
自書契之興, 樸略尙質, 面稱不爲諂, 目諫不爲謗, 君臣之接如朋友然, 在於懇誠而已. 斯道稍衰, 奸僞以生, 上下相犯.
처음 문자가 만들어졌을 때에는 순박하여 면전에서 칭송을 해도 아첨이 되지 않고, 목전에서 간언을 해도 비방이 되지 않아 군신간의 만남이 마치 친구와 같아 간절하고 진실함에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도리가 점차 쇠퇴하면서 간사함과 허위가 생겨나 상하가 서로 침범하였다.
及其製禮, 尊君卑臣, 君道剛嚴, 臣道柔順, 於是箴諫者希, 情志不通, 故作詩者以誦其美而譏其過.”
〈그리하여〉 를 제정함에 이르러서는 군주는 높고 신하는 낮으며, 군주의 도리는 강하고 엄하며 신하의 도리는 부드럽고 순종하니, 이에 경계하고 간하는 자가 드물어 감정과 생각이 소통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를 지은 자가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과실을 풍자하였다.”라고 하였다.
【疏】彼書契之興旣未有詩, 製禮之後始有詩者, 所云今詩所用誦美譏過, 故以製禮爲限.
앞에서 ‘처음 문자가 생겨났을 때에는 시가 아직 있지 않았고, 예가 제정된 뒤에 비로소 시가 있었다.’는 것은 ≪육예론六藝論≫에서 말한 ‘오늘날 시가 사용되는 것이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과실을 풍자하는 것’이기에 예가 제정된 때를 한계로 삼은 것이다.
此言有詩之漸, 述情歌詠, 未有箴諫, 故疑大庭以還.
이는 시가 처음 지어지기 시작했을 때에는 감정을 기술하고 노래로 불러 경계하거나 간하는 내용이 아직 없었음을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시가 지어진 것이〉 대정 이후일 것이라고 의심한 것이다.
由主意有異, 故所稱不同. 禮之初與天地竝矣, 而藝論論禮云 “禮其初起, 蓋與詩同時.” 亦謂今時所用之禮, 不言禮起之初也.
주장하는 뜻이 다름으로 인하여 표현한 말이 다른 것이니, 기원起源은 천지와 같은데, ≪육예론六藝論≫ 〈논례論禮〉에는 “예가 처음 생긴 것은 아마 시와 같은 시기일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역시 지금 사용하는 예를 말하는 것이지 예의 기원을 말한 것이 아니다.
虞書曰 이라하니 然則詩之道放於此乎인저
상서尙書≫ 〈우서虞書〉에 “는 뜻을 말하는 것이고, 는 말을 길게 하는 것이고, 은 긴 노래를 따르는 것이고, 은 성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의 도는 여기에서 시작한 것이다.
【疏】正義曰:虞書者, 舜典也. 鄭不見古文尙書, 伏生以舜典合於堯典, 故鄭注在堯典之末.
정의왈正義曰:‘우서虞書’는 〈순전舜典〉이다. 정현鄭玄은 ≪고문상서古文尙書≫에 복생伏生이 〈순전舜典〉을 〈요전堯典〉에 합한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현의 가 〈요전堯典〉의 끝에 있는 것이다.
彼注云 “詩, 所以言人之志意也. 永, 長也, 歌, 又所以長言詩之意. 聲之曲折, 又長言而爲之. 聲中律, 乃爲和.”
에 “는 사람의 생각을 말한 것이다. 은 길게 하는 것이니, 는 또 시의 뜻을 길게 말한 것이다. 소리의 선율은 또 말을 길게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소리가 음률音律에 맞는 것이 바로 가 된다.”라고 하였다.
, 經典言詩, 無先此者, 故言詩之道也.
순전舜典〉에서 악관에게 명할 때에 이미 를 말하였는데, 경전經典 중에서 를 말한 것이 이보다 앞선 것이 없다. 그리하여 ‘시지도詩之道’라 한 것이다.
放於此乎, 猶言適於此也, 放於此乎, 隱二年公羊傳文.
방어차호放於此乎’는 ‘이에서 나아간다’라 한 것과 같으니, ‘방어차호放於此乎’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은공隱公 2년의 글이다.
言放於此者, 謂今誦美譏過之詩, 其道始於此, 非初作謳歌, 始於此也.
방어차放於此’라는 것은 지금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과실을 풍자하는 는 그 방법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음을 말한 것이지, 처음 노래함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疏】益稷稱 “舜云‘之庸之, 否則威之.’”
상서尙書≫ 〈익직益稷〉에서 “임금이 익직益稷에게 ‘악관樂官인 너는 간언을 올리되 때에 맞게 거양하고 백성 중에 이 에 이른 자가 있으면 받들어 등용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형벌을 내려라.’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彼說舜誡群臣, 使之用詩. 是用詩規諫, 舜時已然. 大舜之聖, 任賢使能, 目諫面稱, 似無所忌,
이는 순임금이 군신群臣들을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를 사용하게 한 것을 설명한 것이다. 이는 시를 가지고 규간規諫한 것이니 임금 때에 이미 그렇게 한 것이다. 성인聖人이신 대순大舜현자賢者를 등용하고 능력 있는 자를 써서 목전에서 간하고 면전에서 칭찬하게 하여 꺼리는 것이 없는 듯하다.
而云‘情志不通, 始作詩’者, 六藝論云‘情志不通’者, 據今詩而論, 故云‘以誦其美而譏其過’.
그런데도 ≪육예론六藝論≫에서 ‘감정과 뜻이 통하지 않아 비로소 시를 지었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서 말한 ‘정지불통情志不通’은 지금의 를 근거로 논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송기미이기기과以誦其美而譏其過’라고 한 것이다.
其唐虞之詩, 非由情志不通, 直對面歌詩, 以相誡勖, 且爲濫觴之漸, 與今詩不一,
요임금과 순임금의 가 감정과 뜻이 통하지 않아 직접 대면하여 시를 노래하여 서로 경계하고 힘쓰게 한 것이 아니고, 또 처음 지어진 시는 지금의 와는 같지 않다.
그리하여 ≪상서尙書≫ 〈고요모皐陶謨〉에서 고요皐陶임금이 서로 화답하여 노래하였음을 말하였으니 바로 이 이다.
【疏】虞書所言, 雖是舜之命夔, 而舜承於堯, 明堯已用詩矣, 故六藝論云‘唐虞始造其初, 至周分爲六詩’, 亦指堯典之文.
상서尙書≫ 〈우서虞書〉에서 말한 바는 비록 임금이 에게 명한 것이지만, 순임금이 임금을 이었으니 분명 요임금도 시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육예론六藝論≫에서 ‘나라와 나라 시대에 비로소 처음 시를 지었는데, 나라 때에 이르러 육체六體로 나뉘었다.’ 한 것은 또한 〈〈순전舜典〉이 아닌〉 〈요전堯典〉을 가리키는 말이다.
謂之造初, 謂造今詩之初, 非謳歌之初. 謳歌之初, 則疑其起自大庭時矣.
조초造初’라 한 것은, 지금의 시가 처음 만들어진 것을 말한 것이지, 노래가 처음 만들어졌다는 것이 아니다. 노래의 처음은 그 시작이 대정大庭의 때로부터인 듯하다.
然謳歌自當久遠, 其名曰詩, 未知何代. 雖於舜世, 始見詩名, 其名必不初起舜時也.
그러나 노래의 시작은 본래 오래되었을 것이니, 시로 이름한 것은 어느 때인지 알 수 없다. 비록 순임금 때에 시라는 명칭이 처음 보이지만 그 명칭이 반드시 순임금 때에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名爲詩者, 內則說負子之禮云‘’, 注云 “詩之言承也.”
라 이름한 것은, ≪예기禮記≫ 〈내칙內則〉에서 세자를 업는 를 설명하면서 ‘시부지詩負之’라고 하였는데, 그 에 “의 뜻은 이다.”라고 하고,
春秋說題辭云 “在事爲詩, 未發爲謀, 恬澹爲心, 思慮爲志, 詩之爲言, 志也.” 詩緯含神務云 “詩者, 持也.”
춘추위春秋緯≫ 〈춘추설제사春秋說題辭〉에서 “일에 연관이 있는 것이 이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 이고, 청정淸靜하고 담박한 것이 이고, 사려가 이니, 의 뜻은 이다.”라고 하고, ≪시위詩緯≫ 〈함신무含神務〉에서 “이다.”라고 하였다.
然則詩有三訓, 承也․志也․持也.
그렇다면 에는 세 가지의 풀이가 있으니 이다.
作者承君政之善惡, 述己志而作詩, 爲詩所以持人之行, 使不失隊, 故一名而三訓也.
시를 짓는 자가 인군의 정사 중에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받들어 자기의 뜻을 기술해 시를 지으니, 시가 이 때문에 사람의 행동을 지켜 실추되지 않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이름에 세 가지 풀이가 있는 것이다.
有夏承之 篇章泯棄하여 靡有孑遺
나라는 나라를 이었지만 시의 편장篇章이 없어져 남아 있는 것이 없다.
【疏】正義曰:夏承虞後, 必有詩矣. 但篇章絶滅, 無有孑然而得遺餘.
정의왈正義曰나라는 나라의 뒤를 이었으니 반드시 시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편장篇章이 없어져 조금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此夏之篇章, 不知何時滅也, 有商頌而無夏頌, 蓋周室之初, 記錄不得.
나라 시의 편장이 어느 때에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송商頌은 있고 은 없으니, 아마도 왕실의 초창기에 기록되지 않은 듯하다.
邇及商王하얀 不風不雅
가까이 나라 에 미쳐서는 도 없고 도 없다.
【疏】正義曰:湯, 以諸侯行化, 卒爲天子.
정의왈正義曰임금이 제후諸侯로서 교화를 행하여 마침내 천자天子가 되었다.
商頌, “成湯, 命於下國, 封建厥福.” 明其政敎漸興, 亦有風雅.
상송 은무商頌 殷武〉에 “성탕成湯하국下國에 명하여 크게 복을 세웠다.”라고 하였으니, 분명 성탕의 정교政敎가 차츰 일어나 역시 가 있었을 것이다.
商周相接, 年月未多, 今無商風雅, 唯有其頌, 是周世棄而不錄, 故云‘近及商王 不風不雅’, 言有而不取之.
나라와 나라는 서로 이어져 세월이 많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지금 상풍商風상아商雅는 없고 상송商頌만 있으니, 이는 주나라 때에 버리고 채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가까이 상나라 왕에 미쳐서는 도 없고 도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있었는데도 취하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何者 論功頌德 所以將順其美 刺過譏失 所以匡救其惡이니 各於其黨 則爲法者彰顯하고 爲戒者著明이라
어째서인가? 공을 논하고 덕을 칭송함은 그의 아름다움을 따르고자 한 것이고, 허물을 풍자하고 잘못을 기롱함은 그의 악을 바로잡고자 한 것이니, 각각 자기의 족친에 있어서는 법이 될 만한 것은 밝게 드러내고, 경계警戒가 될 만한 것은 드러내 밝힌 것이다.
【疏】正義曰:此論周室不存商之風雅之意. 風雅之詩, 止有‘論功頌德’ ‘刺過譏失’之二事耳. 黨, 謂族親.
정의왈正義曰:이는 나라 왕실이 나라의 를 보존시키지 않은 뜻을 논한 것이다. 에는 ‘논공송덕論功頌德’과 ‘자과기실刺過譏失’의 두 가지 일만 있다. 족친族親을 말한다.
此二事各於己之族親, 周人自錄周之風雅, 則法足彰顯, 戒足著明, 不假復錄先代之風雅也,
이 두 가지 일이 각각 자기 족친에 해당될 경우,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를 채록한 것이니 그렇게 하면 법이 충분히 밝게 드러나고 경계가 충분히 드러나, 선대先代()의 는 다시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頌則前代至美之詩, 敬先代, 故錄之.
그러나 의 경우는 전조前朝()의 지극히 아름다운 시이니, 선대先代()를 공경하였기 때문에 채록한 것이다.
周自后稷播種百穀으로 黎民阻飢하니 玆時乃粒하여 自傳於此名也
나라는 후직后稷이 온갖 곡식을 파종함으로부터 백성이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비로소 곡식을 먹게 되어 자연히 지금까지 이름이 전해진 것이다.
【疏】正義曰:自此下, 至‘詩之正經’, 說周有正詩之由.
정의왈正義曰:이 아래로부터 ‘시지정경詩之正經’까지는 나라에 정시正詩가 있게 된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言后稷種百穀之時, 衆人皆厄於飢, 此時乃得粒食.
후직后稷이 온갖 곡식을 파종할 때엔 백성들이 모두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이때에 비로소 곡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后稷有此大功, 稱聞不朽, 是后稷自彼堯時, 流傳於此後世之名也’.
후직의 이런 큰 공이 길이 전해지니, 이것이 후직이 임금 때로부터 지금의 후세에까지 이름이 전해지게 됨을 말한 것이다.
堯典說舜命后稷云 “帝曰 棄, 黎民阻飢, 汝后稷, 播時百穀.’”
상서尙書≫ 〈요전堯典〉에서 이 후직에게 명한 것을 말하기를, “가 명하길 ‘야!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 네가 후직이니 온갖 곡식을 때에 맞게 파종토록 하라.’ 했다.”라고 하였고,
皐陶謨稱禹曰 “予曁稷播, .” 是其文也.
상서尙書≫ 〈고요모皐陶謨〉에서 가 말하기를, “제가 후직과 함께 오곡을 파종하여 모든 간식艱食선식鮮食을 가져다주니 백성이 이에 곡식을 먹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글이다.
陶唐之末 中葉公劉 亦世脩其業하여 以明民共財
도당陶唐(요임금)의 말엽으로부터 중엽의 공류公劉에 이르기까지 또한 대대로 자기의 직무를 잘 수행하여, 백성의 의복에 등급을 정하고 재물을 공유하게 하였다.
【疏】正義曰:公劉者, 后稷之曾孫, 當夏時爲諸侯, 以后稷當唐之時, 故繼唐言之也.
정의왈正義曰공류公劉후직后稷의 증손이니 나라 때에 제후가 되었지만, 후직이 요임금 때에 해당되기 때문에 를 이어 말한 것이다.
中葉, 謂中世, 后稷至於大王, 公劉居其中, 商頌云‘昔在中葉’, 亦謂自契至湯之中也.
중엽中葉중세中世이니, 후직에서 태왕太王에 이르기까지에 공류公劉가 그 중간에 있었음을 말하니, 〈상송 장발商頌 長發〉에 ‘석재중엽昔在中葉’이라 한 것도 에서 임금 때까지의 중간을 말한 것이다.
祭法云 “黃帝正名百物, 以明民共財.” 明民, 謂使衣服有章, 共財, 謂使之同有財用,
예기禮記≫ 〈제법祭法〉에 “황제黃帝가 온갖 사물에 대한 이름을 바르게 정하여 명민明民공재共財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명민明民’은 의복을 귀천에 따라 문양이 있게 함을 말하고, ‘공재共財’는 백성들에게 재물을 공유하게 함을 말하니,
公劉在豳敎民, 使上下有章, 財用不乏, 故引黃帝之事, 以言之.
공류公劉 땅에 있으면서 백성을 가르쳐, 위와 아래의 등급이 드러나게 하고 재용이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황제黃帝의 일을 가져다 말한 것이다.
至於大王王季하여 克堪顧天이라
태왕太王왕계王季에 이르러 하늘의 부탁하는 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疏】正義曰:此尙書多方, 說天以紂惡, 更求人主之意, 云 “天惟求爾多方, 大動以威, 開厥顧天,
정의왈正義曰:이는 ≪상서尙書≫ 〈다방多方〉에서 하늘이 나라의 주왕紂王이 악하기 때문에 다시 백성의 주인을 찾는 뜻을 풀이하기를, “하늘이 백성의 군주를 너희의 여러 지방에서 찾으면서, 크게 위엄으로 주왕을 주벌하고 하늘의 부탁하는 명을 돌아보아 대신할 수 있는 자를 찾았는데,
惟爾多方, 罔堪顧之, 惟我周王, 靈承于旅, 克堪用德, 惟典神天, 天惟式敎我用休, 簡畀殷命, 尹爾多方.”
너희 여러 지방에는 하늘의 부탁하는 명을 감당할 자가 없고, 우리 의 왕만이 백성을 잘 받들고 능히 덕으로써 감당해 신과 하늘의 제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이에 하늘이 우리를 아름다움으로 가르쳐 나라가 가지고 있던 을 크게 주어서 너희 여러 지방을 바로잡게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注云 “顧, 由視念也.” 其意, 言天下災異之威, 動天下之心, 開其能爲天, 以視念者.
에서 “는 살피고 생각함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이 뜻은 하늘이 재이災異의 위엄으로 천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능히 하늘을 위하여 살피고 생각할 수 있는 자를 찾았다.
衆國無堪爲之, 惟我周能堪之, 彼言文王武王能顧天耳. 大王王季, 爲天所祐, 已有王跡, 是能顧天也.
그런데 많은 나라들 중에 이를 감당할 자가 없고 우리 주나라만이 이를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니, 이는 문왕文王무왕武王이 능히 하늘의 뜻을 살피고 생각한 것을 말한다. 태왕太王왕계王季가 하늘에 도움을 받아 이미 왕의 자취를 두었으니, 이것이 능히 하늘의 뜻을 살펴 생각한 것이다.
文武之德 光熙前緖하여 以集大命於厥身하여 遂爲天下父母하여 使民有政有居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덕이 태왕太王왕계王季가 이룬 공업을 빛나게 이어서 자신에게 천명을 모아, 마침내 천하의 부모가 되어 백성들에게 밝은 정사가 있고 편안한 거처가 있게 하였다.
【疏】正義曰:泰誓說武王伐紂衆鹹曰 “孜孜無怠, 天將有立父母, 民之有政有居.”
정의왈正義曰:≪상서尙書≫ 〈태서泰誓〉에 무왕武王를 정벌할 때에 중함衆鹹에게 설명하기를 “부지런히 하고 태만함이 없도록 하라. 하늘이 장차 너희들의 부모를 세워 백성들에게 바른 정사가 있게 하고 편안한 거처가 있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言民得聖人爲父母, 必將有明政, 有安居. 文武道同, 故竝言之.
백성이 성인聖人을 얻어 부모로 삼으면 반드시 바른 정사가 있고 편안한 거처가 있게 될 것을 말한 것이다. 문왕文王무왕武王이 도가 같았기 때문에 아울러 말한 것이다.
其時詩 風有周南召南하고 雅有鹿鳴文王之屬이라
이 당시의 에는 주남周南소남召南이 있고, 에는 〈녹명鹿鳴〉과 〈문왕文王〉 등이 있다.
【疏】正義曰:此總言文․武之詩皆述文․武之政, 未必皆文․武時作也,
정의왈正義曰:이는 문왕文王무왕武王가 모두 문왕과 무왕의 정사에 대해 기술한 것이지, 반드시 모두 문왕과 무왕의 때에 지어진 것은 아님을 총괄하여 말한 것이다.
故文王․大明之等, 檢其文, 皆成王時作.
그리하여 〈문왕文王〉과 〈대명大明〉 등은 그 글을 검토해보면 모두 성왕成王 때에 지어진 것이다.
及成王하여 周公致大平하고 制禮作樂하여 而有頌聲興焉하니 盛之至也
성왕成王에 이르러서는 주공周公이 태평성대를 이루고 예를 제정하고 악을 지어 칭송하는 소리가 일어났으니 지극히 성대함이다.
【疏】正義曰:時當成王, 功由周公, 故譜說成王之詩, 皆竝擧周公爲文.
정의왈正義曰:때는 성왕成王에 해당되나 주공周公으로 말미암았다. 그리하여 정현鄭玄의 ≪시보詩譜≫에서 성왕成王를 설명할 때에 모두 주공을 함께 거론하여 글을 쓴 것이다.
制禮作樂, 大平無爲, 故與大平連言.
예를 제정하고 악을 지음에 세상이 태평해져 할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대평大平’과 이어 말한 것이다.
頌聲之興, 不皆在制禮之後也, 故春官樂師職云 “及徹, 帥學士而歌徹.”
송성頌聲’이 일어남은 모두 예를 제정한 뒤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주례周禮≫ 〈춘관 악사직春官 樂師職〉에 “제사祭祀를 마치고 철상할 때에 학사學士를 거느리고 노래하며 철상을 한다.”라고 하였는데,
玄謂徹者, 歌雍也, 是頌詩之作, 有在制禮前者也.
정현鄭玄은 “은 〈주송 옹周頌 雍를 노래함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송시頌詩가 지어진 것은 예를 제정하기 전에 있었던 것이다.
本之 由此風雅而來 故皆錄之 謂之詩之正經이라
의 근원을 따져보면 이 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채록한 것이니, 이를 의 ‘정경正經’이라 이른다.
【疏】正義曰:此解周詩竝錄風․雅之意, 以周南․召南之風, 是王化之基本, 鹿鳴․文王之雅, 初興之政敎.
정의왈正義曰:이는 나라의 시가 를 아울러 채록한 뜻을 풀이한 것이니, 주남周南소남召南은 바로 왕화王化의 기본이고, 〈녹명鹿鳴〉과 〈문왕文王〉의 는 처음 흥성한 정교政敎이기 때문이다.
今有頌之成功, 由彼風․雅而就, 據成功之頌, 本而原之, 其頌, 乃由此風․雅而來, 故皆錄之.
지금 성공에 대한 이 있게 된 것은 이 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니, 이루어진 공을 노래한 의 근원을 따져보면, 이 은 바로 이 를 통하여 왔다. 그리하여 모두 채록한 것이다.
‘謂之詩之正經’, 以道衰乃作者, 名之爲變, 此詩謂之爲正.
위지시지정경謂之詩之正經’이란, 도가 쇠미해진 때에 지어진 것을 으로 이름하였기 때문에 이 이라 한 것이다.
此等正詩, 昔武王采得之後, 乃成王卽政之初, 於時, 國史自定其篇, 屬之大師, 以爲常樂, 非孔子有去取也.
이러한 부류의 정시正詩는 옛날 무왕武王이 채록한 뒤이고 바로 성왕成王이 정사에 나아간 초기이니, 이때에 사관이 스스로 편을 정하여 대사大師에게 맡겨서 상악常樂으로 만든 것이지 공자孔子가 취사선택한 것이 아니다.
【疏】儀禮鄕飮酒 “工歌鹿鳴․四牡․皇皇者華, 笙入奏南陔․白華․華黍,
의례儀禮≫ 〈향음주례鄕飮酒禮〉에 “악공이 소아小雅의 〈녹명鹿鳴〉과 〈사모四牡〉와 〈황황자화皇皇者華〉를 노래하면 생황笙簧을 연주하는 악공이 들어가 소아小雅의 〈남해南陔〉와 〈백화白華〉와 〈화서華黍〉를 연주하고,
閒歌魚麗, 笙由庚, 歌南有嘉魚, 笙崇丘, 歌南山有臺, 笙由儀, 合樂周南關雎․葛覃․卷耳, 召南鵲巢․采蘩․采蘋.”
조금 있다가 소아小雅의 〈어리魚麗〉를 노래하면 생황이 소아小雅의 〈유경由庚〉을 연주하고, 소아小雅의 〈남유가어南有嘉魚〉를 노래하면 생황이 소아小雅의 〈숭구崇丘〉를 연주하고, 소아小雅의 〈남산유대南山有臺〉를 노래하면, 생황을 연주하는 악공이 소아小雅의 〈유의由儀〉를 연주하고, 주남周南의 〈관저關雎〉와 〈갈담葛覃〉과 〈권이卷耳〉 및 소남召南의 〈작소鵲巢〉와 〈채번采蘩〉과 〈채빈采蘋〉을 합주한다.” 하였다.
燕禮用樂與鄕飮酒文同, 唯采蘋越草蟲之篇, 其餘在於今詩, 悉皆次比.
의례儀禮≫ 〈연례燕禮〉에서 악을 쓰는 것이 〈향음주례鄕飮酒禮〉의 글과 같은데, 〈채빈采蘋〉만은 소남召南의 〈초충草蟲〉을 건너뛰고, 나머지 지금의 ≪시경詩經≫에 있는 것은 모두 다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又左傳及國語稱 魯叔孫穆子聘於晉, 晉人爲之歌文王․大明․綿,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국어國語≫에서 숙손목자叔孫穆子나라에 빙문하자, 진인晉人이 그를 위하여 대아大雅의 〈문왕文王〉과 〈대명大明〉과 〈綿〉을 노래하고,
又歌鹿鳴․四牡․皇皇者華, 亦各取三篇, 風․雅異奏, 明其先自次比, 非孔子定之, 故譜於此不言孔子.
소아小雅의 〈녹명鹿鳴〉과 〈사모四牡〉와 〈황황자화皇皇者華〉를 노래하되 또한 각각 3편씩을 취하였고 를 달리 연주하였다. 하였으니, 분명 이전에 본래 순서대로 배열된 것이지 공자가 정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시보詩譜≫에서 이 부분에 대하여 공자孔子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疏】其變風․變雅, 皆孔子所定, 故下文, 特言孔子錄之.
변풍變風변아變雅는 모두 공자孔子가 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래 글에서 특별히 공자孔子가 채록한 것을 말한 것이다.
春官大師職, 鄭司農注云 “古而自有風․雅․頌之名,
주례周禮≫ 〈춘관 대사직春官 大師職〉의 정사농鄭司農(정중鄭衆) 에서 “옛날부터 본래 의 명칭이 있었다.
故延陵季子, 觀樂於魯時, 孔子尙幼, 未定詩․書, 而爲之歌邶․鄘․衛,
그리하여 연릉계자延陵季子(계찰季札)가 나라에서 음악을 관찰할 적에는, 공자孔子가 아직 어려서 ≪시경詩經≫과 ≪상서尙書≫를 산정하지 않았는데, 나라가 이에 그를 위해 패풍邶風용풍鄘風위풍衛風을 노래하자,
曰‘是其衛風乎’, 又爲之歌小雅․大雅, 又爲之歌頌,
계찰이 ‘이는 아마도 위풍衛風일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그를 위해 소아小雅대아大雅를 노래하고, 또 을 노래하였다.
論語曰 ‘吾自衛反魯, 然後樂正, 雅․頌各得其所’, 時禮樂, 自諸侯出, 頗有謬亂不正者, 孔子正之耳.”
그리고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내가 나라에서 나라로 돌아온 이후에 악이 바르게 되어 이 각각 제자리를 얻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때에는 예와 악이 제후로부터 나와 매우 잘못되어 바르지 못한 것을 공자孔子가 바로잡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是司農之意亦與鄭同, 以爲風․雅先定, 非孔子爲之.
이는 정사농의 뜻도 정현鄭玄과 같으니, 가 먼저 정해진 것이지 공자孔子가 정한 것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疏】襄二十九年左傳, 服虔注云 “哀公十一年, 孔子自衛反魯, 然後樂正, 雅頌各得其所, 距此六十歲.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양공襄公 29년의 복건 주服虔 注에 “애공哀公 11년에 공자孔子나라에서 나라로 돌아온 뒤에 악이 바르게 되어 이 각각 제자리를 얻었으니, 이때와의 시차가 61년이다.
當時雅頌未定, 而云‘爲之歌小雅大雅頌’者, 傳家據已定錄之.” 此說非也.
〈이〉 당시에는 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위지가소아대아송爲之歌小雅大雅頌’이라 한 것은 을 지은 사람이 〈의 명칭이〉 이미 정해진 것에 의거하여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이 말은 잘못된 것이다.
六詩之目, 見於周禮, 豈由孔子始定其名乎.
육체 시六體 詩의 명목이 ≪주례周禮≫에 보이니, 어찌 공자孔子로 말미암아 처음 그 이름이 정해졌겠는가.
儀禮歌召南三篇, 越草蟲而取采蘋, 蓋采蘋舊在草蟲之前, 孔子以後, 簡札始倒, 或者草蟲有憂心之言, 故不用爲常樂耳.
의례儀禮≫에서 소남召南 3을 노래할 때에 〈초충草蟲〉을 건너뛰어 〈채빈采蘋〉을 취하였으니, 이는 〈채빈采蘋〉이 옛날에는 〈초충草蟲〉의 앞에 있었는데, 공자孔子 이후에 죽간竹簡이 처음 뒤바뀐 것이거나, 어쩌면 〈초충草蟲〉에 걱정하는 심정을 언급한 것이 있기 때문에 상악常樂으로 쓰지 않은 듯하다.
後王 稍更陵遲하여 懿王 始受譖亨齊哀公하고 夷身失禮之後 邶不尊賢이라
그 뒤의 왕들이 차츰 다시 쇠미해져서, 의왕懿王이 처음으로 참소를 받아들여 애공哀公팽형烹刑에 처하였고, 이왕夷王 자신이 예를 잃은 뒤에 나라가 어진 이를 존중하지 않았다.
【疏】正義曰:自此以下, 至‘刺怨相尋’, 解變風․變雅之作時節.
정의왈正義曰:이 아래로부터 ‘자원상심刺怨相尋’까지는 변풍變風변아變雅가 지어진 시절을 풀이한 것이다.
變風之作, 齊․衛爲先, 齊哀公, 當懿王, 衛頃公, 當夷王, 故先言此也.
변풍變風의 지어짐은 나라와 나라가 먼저인데, 애공哀公의왕懿王 때에 해당되고 경공頃公이왕夷王 때에 해당된다. 그리하여 먼저 제 애공齊 哀公의 일을 말한 것이다.
莊四年公羊傳曰 “齊哀公, 亨乎周, 紀侯譖之.” 徐廣以爲周夷王亨之.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장공莊公 4년에 “의 애공이 나라에서 팽형烹刑을 당했는데, 가 참소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서광徐廣은 주의 이왕이 팽형烹刑에 처한 것이라고 여겼다.
鄭知懿王者, 以齊世家云 “周亨哀公, 而立其弟靖, 爲胡公, 當夷王之時, 哀公母弟山, 殺胡公而自立.”
그런데 정현鄭玄이 의왕이 죽인 것임을 안 것은 ≪사기史記≫ 〈제세가齊世家〉에 “주나라가 애공을 팽형에 처하고 그의 동생 을 세워 호공胡公으로 삼았는데, 이왕의 때에 애공의 동모제同母弟이 호공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다.”라고 하였으니,
言夷王之時, 山殺胡公, 則胡公之立, 在夷王前矣.
이왕 때에 산이 호공을 죽였다고 말하였으면 호공의 즉위는 이왕의 이전에 있었을 것이다.
受譖亨人, 是衰闇之主, 夷王上有孝王, 書傳不言孝王有大罪惡,
참소를 받아들여 사람을 팽형에 처하는 것은 바로 쇠미한 시대의 어두운 군주인데, 이왕의 앞에는 효왕孝王이 있으나 ≪상서尙書≫의 에 효왕에게 큰 죄악이 있음을 말하지 않았으며,
周本紀云 “懿王立, 王室遂衰, 詩人作刺.” 是周衰自懿王始, 明懿王受譖矣.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에 “의왕이 즉위함에 왕실이 마침내 쇠미해져서 시인이 풍자시를 지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주의 쇠미해짐이 의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분명 의왕이 참소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本紀言‘詩人作刺’, 得不以懿王之時, 雞鳴之詩作乎. 是以知亨之者懿王也.
주본기周本紀〉에 ‘시인詩人이 풍자시를 지었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어찌 의왕의 때에 〈제풍 계명齊風 雞鳴〉의 시가 지어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팽형烹刑으로 의 애공을 죽인 자가 의왕임을 안 것이다.
衛世家云 “貞伯卒, 子頃侯立, 頃侯厚賂周夷王, 夷王命爲衛侯.” 是衛頃公當夷王時.
사기史記≫ 〈위세가衛世家〉에 “정백貞伯이 죽자 아들 경후頃侯가 즉위하였는데, 경후가 주의 이왕에게 뇌물을 많이 주어 이왕이 명하여 위후衛侯로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의 경공이 이왕의 때에 해당되는 것이다.
郊特牲云 “覲禮, 天子不下堂而見諸侯.” 下堂而見諸侯, 天子之失禮也, 由夷王以下, 是夷王身失禮也.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근례覲禮에 천자는 을 내려가 제후를 만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천자가 당을 내려가 제후를 만나 예를 잃음은 이왕으로부터 이후이니, 이것이 이왕 자신이 예를 잃음이다.
柏舟言 “仁而不遇.” 是邶不尊賢也.
패풍 백주邶風 柏舟〉에 “어진 이가 인군의 알아줌을 받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패부존현邶不尊賢’이다.
自是而下 厲也幽也 政敎尤衰하여 周室大壞 十月之交民勞板蕩 勃爾俱作하니 衆國紛然하여 刺怨相尋이라
이로부터 이후로 여왕厲王유왕幽王 때에는 정교政敎가 더욱 쇠미해져서 주실周室이 크게 무너짐에 소아小雅의 〈시월지교十月之交〉와 대아大雅의 〈민로民勞〉와 〈〉과 〈〉 등이 다투어 모두 지어졌으니, 이는 여러 나라가 어지러워 풍자와 원망이 이어진 것이다.
【疏】正義曰:大率變風之作, 多在夷․厲之後, 故云‘衆國紛然 刺怨相尋’.
정의왈正義曰:대체로 변풍變風이 지어진 것은 대부분 이왕夷王여왕厲王의 뒤에 있다. 그리하여 ‘중국분연 자원상심衆國紛然 刺怨相尋’이라 한 것이다.
擊鼓序云 “怨州吁.” 怨亦刺之類, 故連言之.
패풍 격고邶風 擊鼓〉의 에 “〈격고擊鼓〉는 주우州吁를 원망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원망도 풍자의 종류이다. 그리하여 이어서 말한 것이다.
五霸之末 上無天子하고 下無方伯하니 善者誰賞이며 惡者誰罰이리오 紀綱絶矣
오패五霸의 말기 때에는 위로는 〈천자天子다운〉 천자가 없고 아래로는 〈방백方伯다운〉 방백方伯이 없었으니, 선한 자에게 누가 상을 주며 악한 자에게 누가 을 내리겠는가. 이는 기강紀綱이 없어진 것이다.
【疏】正義曰:此言周室極衰之後, 不復有詩之意.
정의왈正義曰:이는 의 왕실이 지극히 쇠미해진 뒤로 다시는 시가 있지 않은 뜻을 말한 것이다.
‘五霸’之字, 或作‘五伯’. 成二年左傳云 “五伯之霸也.”
오패五霸’의 글자는 혹 ‘오패五伯’로 쓰기도 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성공成公 2년에 “오패五伯가 제후의 패자가 되었을 때”라고 하고,
注云 “霸猶把也, 把天子之事也.” 然則言伯者, 長也, 謂與諸侯爲長也.
상서중후尙書中候≫ 〈패면霸免〉의 에 “와 같으니, 천자의 일을 관장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라는 것은 ‘우두머리’이니 제후 중에서 우두머리가 된 자를 이른다.
五伯者, 三代之末, 王政衰微, 諸侯之强者, 以把天子之事, 與諸侯爲長, 三代共有五人.
오패五伯주 삼대周 三代의 말기에 왕정이 쇠미해짐에, 제후 중에 강한 자가 천자가 행해야 할 일을 관장하여, 제후 중에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삼대三代를 통틀어 5이 있다.
服虔云 “五伯, 謂夏伯昆吾, 商伯大彭․豕韋, 周伯齊桓․晉文也.”
복건服虔이 “오패五伯나라의 패 곤오伯 昆吾, 나라의 패 대팽伯 大彭시위豕韋, 나라의 패 재伯 齊 환공桓公진 문공晉 文公이다.”라고 하였는데,
知者, 鄭語云 “祝融之後, 昆吾爲夏伯矣, 大彭․豕韋爲商伯矣.”
이를 안 것은 ≪국어國語≫ 〈정어鄭語〉에 “축융祝融의 뒤에 곤오昆吾나라의 가 되었고, 대팽大彭시위豕韋나라의 가 되었다.”라고 하고,
論語云 “管仲相桓公, 霸諸侯.” 昭九年傳云 “文之伯也.” 是五者爲霸之文也.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관중管仲환공桓公을 도와 제후諸侯의 패자가 되게 하였다.”라고 하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소공昭公 9년에 “진 문공晉 文公이 패자가 되었을 때”라고 하였으니, 이 다섯이 가 된 내용의 글이다.
【疏】此言五霸之末, 正謂周代之霸齊桓․晉文之後, 明其不在夏․殷之霸也. 齊․晉最居其末, 故言五霸之末耳.
여기서 말한 ‘오패지말五霸之末’은 바로 주대周代패자霸者제 환공齊 桓公진 문공晉 文公의 뒤를 일컬으니, 나라와 나라의 패자霸者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나라와 나라가 가장 말기에 해당된다. 그리하여 ‘오패지말五霸之末’이라 한 것이다.
僖元年公羊傳云 “上無天子, 下無方伯, 天下諸侯有相滅亡者, 桓公不能救, 則桓公恥之.” 是齊桓․文能賞善罰惡也.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희공 원년僖公 元年에 “위로는 〈천자다운〉 천자가 없고 아래로는 〈방백方伯다운〉 방백이 없어 천하의 제후 중에 서로 멸망시키는 자가 있을 때에 환공桓公이 구제할 수 없으면 이를 수치로 여겼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제 환공齊 桓公진 문공晉 文公이 선악에 대하여 상벌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其後無復霸君, 不能賞罰, 是天下之綱紀絶矣, 縱使作詩, 終是無益, 故賢者不復作詩, 由其王澤竭故也.
그 뒤로 다시는 패군霸君이 없어 상벌을 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 천하의 기강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 설사 시를 짓더라도 끝내 아무런 보탬이 없었다. 그리하여 어진 자들이 다시는 시를 짓지 않았으니, 이는 왕의 은택이 다 없어졌기 때문이다.
王制云 “.” 是方伯, 謂州牧也.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왕기王畿의 천리 밖에는 방백方伯을 설치하는데, 210로 삼고 마다 을 둔다.” 하였으니, 여기의 방백은 을 말한다.
周之州長, 自名爲牧, 以其長於一方, 故公羊稱爲方伯.
주나라 은 본래 이라 이름하였는데, 한 지방에 우두머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 방백方伯으로 칭한 것이다.
言‘無天子無方伯’, 謂無賢明耳.
〈천자다운〉 천자가 없고 〈방백다운〉 방백이 없다는 것은 현명한 자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故孔子錄懿王夷王時詩 訖於陳靈公淫亂之事 謂之變風變雅
그리하여 공자孔子가 채록한 의왕懿王이왕夷王 때의 시로부터 나라 영공靈公의 음란한 일에 이르기까지를 변풍變風변아變雅라 이른다.
【疏】正義曰:懿王時詩, 齊風是也, 夷王時詩, 邶風是也. 陳靈公, 魯宣公十年, 爲其臣夏徵舒所弑,
정의왈正義曰의왕懿王 때의 시는 제풍齊風이 이것이고, 이왕夷王 때의 시는 패풍邶風이 이것이다. 나라 영공靈公나라 선공宣公 10년에 자기의 신하인 하징서夏徵舒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變風, 齊․邶爲先, 陳最在後, 變雅, 則處其閒, 故鄭擧其終始也.
그러니 변풍變風제풍齊風패풍邶風이 앞이 되고, 진풍陳風이 가장 뒤에 있으며, 변아變雅는 그 사이에 있다. 그리하여 정현鄭玄이 그 처음과 끝을 든 것이다.
史記孔子世家云 “古者, 詩本三千餘篇, 去其重, 取其可施於禮義者, 三百五篇.” 是詩三百者, 孔子定之.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옛날에 시가 본래 3천 편 남짓이었는데, 중복된 것은 버리고 예의에 시행할 만한 것 305편을 취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시경詩經≫의 300편은 공자孔子가 정한 것이다.
如史記之言, 則孔子之前, 詩篇多矣.
만약 ≪사기史記≫의 말과 같다면 공자孔子 이전에는 시편詩篇이 많았을 것이다.
案書傳所引之詩, 見在者多, 亡逸者少, 則孔子所錄, 不容十分去九, 馬遷言古詩三千餘篇, 未可信也.
살펴보건대 ≪상서尙書≫의 에 인용된 시가 현존한 것은 많고 망실된 것은 적으니, 그렇다면 공자孔子가 채록한 것은 전체 시의 10분에 9를 버린 것이 되지 않으니, 사마천司馬遷이 ‘고시 삼천여편古詩 三千餘篇’이라 한 것은 믿을 수 없다.
據今者及亡詩六篇, 凡有三百一十一篇, 皆子夏爲之作序, 明是孔子舊定, 而史記․漢書云‘三百五篇’者, 闕其亡者, 以見在爲數也.
지금 현존하는 시와 망시亡詩 6편에 의거해보면 모두 311편이 있는데, 모두 자하子夏가 이에 를 지었으니 분명 공자孔子가 예전에 정한 것인데,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서 ‘305편’이라 한 것은 망실된 시는 빼고 현존한 것만을 따진 것이다.
樂緯動聲儀․詩緯含神務․尙書璿璣鈐, 皆云‘三百五篇’者, 漢世毛學不行,
악위樂緯≫ 〈동성의動聲儀〉와 ≪시위詩緯≫ 〈함신무含神務〉와 ≪상서위尙書緯≫ 〈선기검璿璣鈐〉에 모두 ‘305편’이라 한 것은 나라 때에는 모형毛亨의 학문이 행해지지 않아,
三家不見詩序, 不知六篇亡失, 謂其唯有三百五篇, 讖緯皆漢世所作, 故言三百五耳.
위서緯書를 지은 세 사람이 〈시서詩序〉를 보지 못하여 6편이 망실된 것을 모르고 305편만 있다고 한 것이니, 참위서讖緯書들이 모두 나라 때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305편이라 말한 것이다.
【疏】此言‘訖於陳靈’, 則在魯僖之後.
여기에서 ‘흘어진령訖於陳靈’이라고 말하였으니, 곧 나라 희공僖公의 뒤에 있는 것이다.
藝論云 “孔子錄周衰之歌, 及衆國賢聖之遺風, 自文王創基, 至於魯僖, 四百年間, 凡取三百五篇, 合爲國風․雅․頌.”
육예론六藝論≫에 “공자孔子나라가 쇠미해진 뒤의 노래와 여러 나라에 남겨진 현성賢聖의 풍화를 채록하면서, 문왕文王이 창업한 때로부터 노나라 희공 때까지의 400년간에서 모두 305편을 취하여, 합하여 국풍國風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는데,
唯言‘至於魯僖’者, 據詩之首君爲文也. 陳靈公, 非陳詩之首, 曹昭公, 以僖七年卒, 卽位在僖之前, 故擧魯僖以爲言也.
지어노희至於魯僖’라고만 말한 것은 시의 첫 번째 인군人君을 들어 글을 만든 것이다. 영공靈公진시陳詩의 처음이 아닐뿐더러, 소공昭公이 희공 7년에 죽었으니 즉위한 것이 희공의 이전에 있다. 그리하여 노의 희공을 들어 말한 것이다.
藝論云‘文王創基, 至於魯僖’, 則商頌不在數矣, 而以周詩, 是孔子所錄, 商頌則篇數先定,
육예론六藝論≫에서 ‘문왕文王기업基業을 세운 뒤로부터 나라 희공僖公에 이르기까지’라고 말하였으니 상송商頌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주시周詩는 바로 공자孔子가 채록한 것이고, 상송商頌편수篇數가 먼저 정해졌기 때문이다.
論錄則獨擧周代, 數篇則兼取商詩, 而云‘合爲國風․雅․頌’者, 以商詩亦周歌所用, 故得稱之.
그러니 채록한 것으로 논하면 주대周代만 거론하지만, 편을 계산할 때에는 상시商詩를 겸하여 취한 것이다. 그런데 ‘합하여 국풍國風을 만들었다.’라고 한 것은 나라의 시도 주나라의 노래에 쓰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를 일컬은 것이다.
孔子刊定, 則應先後依次, 而鄭風淸人, 是文公詩, 處昭公之上, 衛風伯兮, 是宣公之詩, 在惠公之下者,
공자孔子가 정리하여 정하였으면 응당 차례에 선후가 있어야 하는데도, 〈정풍 청인鄭風 淸人〉은 문공文公의 시로서 소공昭公의 앞에 있고, 〈위풍 백혜衛風 伯兮〉는 선공宣公로서 혜공惠公의 뒤에 있는데,
鄭答張逸云 “詩本無文字, 後人不能盡得其次第, 錄者直錄義而已.” 然則孔子之後, 始顚倒雜亂耳.
정현鄭玄장일張逸에게 “시는 본래 〈흥얼거리고 읊조림만 있고〉 문자로 된 것은 없어서 후세 사람들이 차제를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기록하는 자가 그 뜻만 기록하였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공자孔子의 이후에 비로소 뒤바뀌고 섞여져 어지럽혀진 것이다.
以爲勤民恤功하여 昭事上帝 則受頌聲하여 弘福如彼 若違而弗用이면 則被劫殺하여 大禍如此
이를 통하여 백성을 부지런히 살피고 일을 걱정하여 상제上帝를 밝게 섬기면 칭송을 받아 홍복弘福이 이와 같을 것이고, 만약 어기고 〈≪시경詩經≫의 를〉 이용하지 않으면 겁박과 죽임을 당하여 대화大禍가 이와 같을 것이다.
吉凶之所由 憂娛之萌漸 昭昭在斯하니 足作後王之鑒 於是止矣
길흉吉凶의 원인과 우락憂樂의 싹이 분명하게 여기에 있으니, 후왕後王들의 거울이 되기에 충분한 것은 이에 있을 뿐이다.
【疏】正義曰:此言孔子錄詩, 唯取三百之意.
정의왈正義曰:이는 공자孔子가 시를 채록하면서, 300편만 취한 뜻을 말한 것이다.
‘弘福如彼’, 謂如文․武․成王, 世脩其德, 致太平也, ‘大禍如此’, 謂如厲․幽․陳靈, 惡加於民, 被放弑也.
홍복여피弘福如彼’는 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처럼 대대로 덕을 쌓아 태평성대를 이룬 것을 말하고, ‘대화여차大禍如此’는 여왕厲王유왕幽王영공靈公처럼 백성에게 악행을 더하여 쫓겨나고 죽임을 당한 것을 말한다.
‘違而不用’, 謂不用詩義, 則‘勤民恤功 昭事上帝’, 是用詩義也, 互言之也.
위이불용違而不用’은 ≪시경詩經≫의 를 이용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근민휼공 소사상제勤民恤功 昭事上帝’는 바로 ≪시경≫의 의를 사용한 것이니 호환하여 말한 것이다.
用詩則吉, 不用則凶, ‘吉凶之所由’, 謂由詩也.
≪시경≫의 의를 쓰면 길하고 쓰지 않으면 흉하니, ‘길흉지소유吉凶之所由’는 ≪시경≫에서 말미암음을 말한다.
詩之規諫, 皆防萌杜漸, 用詩則樂, 不用則憂, 是爲‘憂娛之萌漸’也. 此二事皆明明在此,
≪시경≫의 규간規諫은 모두 악이 싹틈을 예방하고 점점 커 감을 막는 것이니, ≪시경≫의 의를 사용하면 즐겁고 사용하지 않으면 걱정됨이 바로 ‘우오지맹점憂娛之萌漸’이다.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분명하게 여기에 달려 있다.
故唯錄三百一十一篇, 庶今之明君良臣, 欲崇德致治, 克稽古於先代, 視成敗於行事.
그리하여 311편만을 채록하였으니, 오늘날의 밝은 군주와 어진 신하들이 덕을 높여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고자 하여, 선대先代에서 옛것을 상고하고 행한 일에서 성패를 잘 살필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又疾時博士之說詩, 旣不精其硏覈, 又不睹其終始, 講於鄕黨, 無昭晳, 陳於朝廷, 不煥炳, 故將述其國土之分, 列其人之先後.
또 당시 박사博士들의 ≪시경≫에 대한 설명은, 연구가 정밀하지 못하고 또 전체를 잘 알지 못하여, 향당鄕黨에서 강론함에 분명함이 없고 조정에서 아룀이 환하지 못함을 미워하였다. 그리하여 나라별로 나누어 기술하고 인물별로 선후를 나열하려 한 것이다.
夷厲已上 歲數不明이나 太史年表하여 歷宣幽平王하여 而得春秋次第하여 以立斯譜
이왕夷王여왕厲王 이상은 햇수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태사공太史公의 ≪사기史記≫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가 공화共和 때로부터 시작하여, 선왕宣王유왕幽王평왕平王에 걸쳐 춘추의 차제次第를 얻었다. 이를 근거로 이 ≪시보詩譜≫를 짓는다.
【疏】正義曰:自此已下, 論作譜之意. 本紀, 夷王已上, 多不記在位之年, 是‘歲數不明’.
정의왈正義曰:이로부터 아래는 ≪시보詩譜≫를 지은 뜻을 논한 것이다.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에 이왕夷王 이상은 대부분 재위한 연수年數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햇수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周本紀云 “厲王三十四年, 王益嚴, 又三年, 王出奔於彘, 召公․周公二相行政, 號曰共和.”
주본기周本紀〉에 “여왕厲王 34년에 이 백성에게 더욱 엄하게 하였고, 또 3년 만에 왕이 땅으로 도망하자 소공召公주공周公 두 재상이 정사를 행하였기 때문에 ‘공화共和’라 호칭한 것이다.” 하였는데,
十二諸侯年表, 起自共和元年, 是歲, 魯眞公之十四年, 齊武公之十年, 晉靖侯之十八年, 秦仲之四年,
사기史記≫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가 공화共和원년元年으로부터 시작하니, 이 해는 진공眞公 14년이고, 무공武公 10년이고, 정후靖侯 18년이고, 4년이고,
宋釐公之十八年, 衛僖侯之十四年, 陳幽公之十四年, 蔡武公之二十四年, 曹夷伯之二十四年,
희공釐公 18년이고, 희후僖侯 14년이고, 유공幽公 14년이고, 무공武公 24년이고, 이백夷伯 24년이며,
鄭則於時未封. 是‘太史年表自共和始’也.
나라는 이 당시 아직 봉해지지 않았다. 이것이 ‘태사공太史公의 ≪사기史記≫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가 공화共和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이다.
又案本紀 “共和十四年, 厲王死於彘, 宣王卽位, 四十六年崩. 子幽王立, 十一年爲犬戎所殺, 子平王立, 四十九年, 當魯隱公元年.”
또 〈주본기周本紀〉를 살펴보면 “공화共和 14년에 여왕厲王 땅에서 죽자 선왕宣王이 즉위하여 재위 46년에 죽었다. 아들 유왕幽王이 즉위하여 재위 11년에 견융犬戎에게 죽임을 당하자 아들 평왕平王이 즉위하였으니, 평왕平王 49년은 은공隱公 원년에 해당된다.”라고 하였으니,
計共和元年距春秋之初一百一十九年, 春秋之時, 年歲分明, 故云‘歷宣幽平王而得春秋次第 以立斯譜’.
공화共和 원년에서 춘추시대 초까지 119년의 기간을 계산해보면 춘추시대의 시기는 햇수가 분명하다. 그리하여 ‘선왕宣王유왕幽王평왕平王에 걸쳐 춘추春秋차제次第를 얻어 이를 근거로 이 ≪시보詩譜≫를 지었다.’라고 한 것이다.
【疏】鄭於三禮․論語爲之作序, 此譜亦是序類, 避子夏序名, 以其列諸侯世及詩之次, 故名譜也.
정현鄭玄이 ≪의례儀禮≫․≪주례周禮≫․≪예기禮記≫ 3와 ≪논어論語≫에 서문序文을 지었는데, 이 ≪시보詩譜≫도 의 종류이다. 그러나 자하子夏가 지은 의 명칭을 피하고, 제후諸侯세수世數와 ≪시경詩經≫의 차서次序를 나열하였기 때문에 ‘시보詩譜’라 이름한 것이다.
易有序卦, 書有孔子作序, 故鄭避之, 謂之爲讚, 讚, 明也, 明己爲注之意.
주역周易≫에는 〈서괘序卦〉가 있고, ≪상서尙書≫에는 공자孔子가 지은 〈〉가 있다. 그리하여 정현鄭玄이 〈서괘序卦〉와 공자孔子의 〈〉를 피하여 ‘’이라 하였는데, 찬은 ‘밝힘’이니 자기가 낸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此詩不謂之讚, 謂之譜, 譜者, 普也, 注序世數, 事得周普, 故史記謂之譜牒, 是也.
그런데 이 ≪시경詩經≫에서 이라 하지 않고 라 한 것은, 보는 ‘두루함’이니 시의 차서와 세수를 내어 일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기史記≫에서 ‘보첩譜牒’이라 한 것이 이것이다.
欲知源流淸濁之所處인댄 則循其上下而省之 欲知風化芳臭氣澤之所及인댄 則傍行而觀之 此詩之大綱也
원류源流의 맑고 탁한 곳을 알고자 하면 위아래를 따라 살펴야 하고, 풍화의 아름다운 향취와 은택이 미치는 곳을 알고자 하면 여러 지역을 두루 살펴야 하니, 이것이 ≪시경詩經≫의 대강大綱이다.
擧一綱而萬目張하고 解一卷而衆篇明하여 於力則鮮하고 於思則寡하리니 其諸君子亦有樂於是與인저
하나의 벼리를 들면 수많은 그물코가 펴지고 하나의 을 풀이하면 여러 편의 뜻을 알게 되어 힘을 덜 들이고 생각을 적게 해도 될 것이니 여러 군자君子들도 여기에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疏】正義曰:此又總言爲譜之理也. 著魏有儉嗇之俗, 唐有殺禮之風, 齊有太公之化, 衛有康叔之烈,
정의왈正義曰:이는 또 ≪시보詩譜≫를 지은 이유를 총괄하여 말한 것이다. 나라에는 절검하는 풍속이 있고, 나라에는 예를 간소하게 한 풍교가 있고, 나라에는 태공太公의 교화가 있고, 나라에는 강숙康叔의 공렬이 있음을 드러냈다.
述其土地之宜, 顯其始封之主, 省其上下, 知其衆源所出, 識其淸濁也.
또 토지의 알맞음을 기술하고, 처음 봉해진 군주를 드러냈으니, 시기의 위아래를 살펴보면 여러 근원이 나온 곳을 알고, 맑고 탁함을 알 것이다.
屬其美刺之詩, 各當其君君之化, 傍觀其詩, 知其風化得失, 識其, 皆以喩善惡耳.
또 찬미하고 풍자한 시를 가져다가 인군人君마다의 교화에 해당시켰으니, 이 시들을 두루 관찰해보면 풍화의 득실을 알고 명성의 좋고 나쁨을 알 것이니, 모두 이것으로 선악에 비유한 것이다.
哀十四年公羊傳, 說‘孔子制春秋之義, 以俟後聖, 以’, 鄭取彼意也.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애공哀公 14년에 ‘공자孔子가 ≪춘추春秋≫의 의리義理를 지어 후성後聖을 기다렸으니, 군자(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지은 것도 즐거움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정현鄭玄도 이 뜻을 취한 것이다.
역주
역주1 中候 : 정식 명칭은 ≪尙書中候≫이다. 역대 帝王과 聖人들에 대한 占의 증험을 토대로 災祥을 설명한 讖緯書로 총 18篇이 있었는데, 唐나라 때 亡失되었다.
역주2 五帝座星 : 정원을 뜻하는 太微宮 안에 있는 별 5개인데, 4개의 별들이 諸侯가 上帝를 감싸듯이 황제의 별(含摳紐)을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春秋緯인 ≪運斗樞≫에는 “太微宮에 五帝坐星이 있는데, 靑帝인 靈威仰과 赤帝인 赤熛怒와 白帝인 白招拒와 黑帝인 汁光紀와 黃帝인 含摳紐이다.[紫微宮爲大帝 又云北極耀魄寶 又云大微宮有五帝坐星 靑帝曰靈威仰 赤帝曰赤熛怒 白帝曰白招拒 黑帝曰汁光紀 黃帝曰含摳紐]”라 하였다.
역주3 土鼓 蕢桴 葦籥 : 土鼓는 흙을 쌓아 만든 북이고, 蕢桴는 흙덩이를 다져 만든 북채이며, 葦籥은 갈대로 만든 피리이다.
역주4 古史考 : 魏晋時代의 史學家 譙周가 지은 책으로 사마천의 ≪史記≫ 내용 중에 周․秦 이전의 역사에 대한 오류를 考訂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모두 25권인데, 宋元時代에 散佚되어 지금은 淸의 章宗源이 집일한 1권이 전한다.
역주5 藝論 : ≪六藝論≫을 가리킨다. 53쪽 주3) 참조.
역주6 詩言志……律和聲 : 詩言志는 시를 통하여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고, 歌永言은 시를 길게 읊조리는 것이고, 聲依永은 소리의 높낮이가 긴 가락과 어울리는 것이니, 聲은 五聲으로, 宮, 商, 角, 徵, 羽이다. 律和聲은 律呂를 사용하여 五聲과 조화시키는 것이니, 律呂는 六律六呂로, 六律은 黃鍾, 太簇, 姑洗, 蕤賓, 夷則, 無射이고, 六呂는 大呂, 應鍾, 南呂, 林鍾, 仲呂, 夾鍾이다.
역주7 舜典命樂 已道歌詩 : 순임금이 夔에게 음악을 주관하도록 명하고서 詩와 歌, 聲과 律 등에 대하여 설명한 것을 말한다.[帝曰夔 命汝典樂……詩言志 歌永言 聲依永 律和聲 八音克諧 無相奪倫 神人以和] ≪尙書≫ 〈舜典〉
역주8 工以納言……否則威之 : 工은 樂官을 말한다. 舜이 악관에게 詩를 외어 諫言을 올려 義를 바르게 정하여 자신의 잘잘못을 알게 하고, 아울러 백성들에게 바른 도를 선양하여 따르는 백성은 관직을 주어 등용하고, 따르지 않은 자는 형벌로 다스리도록 하였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詩를 통하여 諫言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尙書注疏 虞書 益稷≫
역주9 (乘)[承]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承’으로 번역하였다.
역주10 皐陶謨……相答爲歌 : 본래 〈益稷〉에 있는 글인데, 순임금이 ‘손발인 신하가 즐거워하여 일하면 머리인 천자의 일이 흥기되어 온 신하의 일이 빛날 것이다.’라고 노래하자, 고요가 ‘천자가 밝으면 신하가 어질어 만사가 이루어질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신하가 태만하여 모든 일이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번갈아 노래하여 서로를 경계한 일이다. ≪尙書 虞書 益稷≫
역주11 詩負之 : 詩자가 承자의 의미로 사용된 예를 든 것이다. ≪禮記≫ 〈內則〉에 國君의 세자가 태어나면 3일째 되는 날 길한 선비를 점쳐서 세자를 업게 하되 吉한 자는 宿齊하고 침문 밖에서 조복차림으로 세자를 받들어 업는다.[國君世子生三日 卜士負之 吉者宿齊 朝服寢門外 詩負之]”라고 하였다.
역주12 (也)[世]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世’로 번역하였다.
역주13 奏庶艱食鮮食 烝民乃粒 : 艱食은 경작하여 생산한 곡식이고 鮮食은 鳥獸․魚鼈 등의 고기이다. ≪尙書注疏≫ 〈虞書 益稷〉에 “稷과 五穀을 파종하여 백성 중에 곡식을 얻기 어려운 곳에 주고, 하천을 터서 잡은 생선을 먹거리로 삼아 백성들을 모두 먹게 하였습니다.……이에 백성들이 곡식밥을 먹게 되었습니다.[與稷播種五穀 進於衆人難得食處 乃決水 所得魚鱉鮮肉爲食也……乃皆米粒之食]”라고 하였다.
역주14 (曰)[因] : 저본에는 ‘曰’로 되어 있으나, 欽定四庫全書本 ≪周禮注疏≫에 의거하여 ‘因’으로 번역하였다.
역주15 (二)[一]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一’로 번역하였다.
역주16 中候霸免 : ≪尙書中候≫의 18번째 편으로 唐나라 때 망실되고 인용된 부분만 전해진다.
역주17 (註)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衍字로 처리하였다.
역주18 千里之外……州有伯 : 天子가 千里의 밖에 관직을 설치함을 설명하는 내용의 일부이다. ≪禮記≫ 〈王制〉에 의하면 “천자는 千里의 밖은 方伯을 설치하되, 5國을 属으로 삼아 長을 두고, 10國을 連으로 삼아 帥(수)를 두고, 30國을 卒을 삼아 正을 두고, 210國을 州로 삼아 伯을 둔다.[千里之外 設方伯 五國以爲属 属有長 十國以爲連 連有帥 三十國以爲卒 卒有正 二百一十國以爲州 州有伯]”라고 하였다.
역주19 (存)[其] : 저본에는 ‘存’으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正字≫에 “‘其’가 ‘存’으로 잘못되어 있으므로 〈鄭譜〉의 疏를 따라 교감하였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其’로 번역하였다.
역주20 共和 : 共和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 설이 있다. 疏에서는 ‘厲王이 失政한 때로부터 宣王이 執政할 때까지 재상인 召公과 周公이 정사를 공동으로 담당한 14년간을 말한다.’라고 하고, ≪漢書≫ 〈古今人表〉에는 ‘共伯 和가 대리 집정한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역주21 芳臭 : 향내와 악취로서, 전하여 君子는 후세에 훌륭한 명성이 전해지고 小人은 더러운 이름이 전해짐을 이른다. 晉나라 때 大司馬 桓溫이 제위 찬탈의 음모를 꾀하면서 “기왕 후세에 좋은 명성을 남기지 못할 테면 또한 족히 만 년 뒤에까지 악명도 남기지 못한단 말이냐.[旣不能流芳後世 亦不足復遺臭萬載耶]”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68 桓溫傳≫
역주22 君子之爲……有樂乎此 : 여기서 군자는 孔子를 말한다. “孔子가 ≪春秋≫를 지은 것도 이 ≪春秋≫의 道가 영원히 법이 될 수 있음을 즐거워 한 것이다.[君子 謂孔子 所以作春秋者 亦樂此春秋之道 可以永法故也]”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春秋公羊傳注疏≫

모시정의(1) 책은 2019.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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