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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詩正義(2)

모시정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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邶鄘衛者 商紂畿內方千里之地
나라 주왕紂王기내畿內 사방 천리의 지역이니
【疏】○正義曰:地理志云 “河內, 本殷之舊都, 周旣滅殷, 分其畿內爲三國, 詩風, 邶․鄘․衛是也.”
정의왈正義曰:≪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하내河內는 본래 나라의 옛 도읍인데 나라가 나라를 멸하고 그 기내畿內를 나누어 세 나라로 만들었으니 ≪시경詩經국풍國風에 나오는 가 이곳이다.”라고 하였다.
如志之言, 故知畿內, 以畿內, 故知方千里也.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의 말과 같기 때문에 〈나라의〉 기내畿內임을 알 수 있고, 기내畿內이기 때문에 그 사방이 천리임을 안 것이다.
其封域在禹貢 之東이라
강숙康叔이〉 봉해진 지역은 ≪상서尙書≫ 〈우공禹貢〉의 기주冀州에 있었으니 태항산大行山의 동쪽이다.
위세차衛世次(≪송판육경도宋板六經圖≫)위세차衛世次(≪송판육경도宋板六經圖≫)
【疏】○正義曰:案禹貢, 大行屬冀州. 地理志云 “大行在河內山陽縣西北.”
정의왈正義曰:≪상서尙書≫ 〈우공禹貢〉을 살펴보니 태항산大行山기주冀州에 속한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태항산大行山하내 산양현河內 山陽縣서북西北쪽에 있다.”라고 하였고,
以詩言 皆在山東, 故皆云在大行之東.
시경詩經≫에서 초구楚丘상중桑中기수淇水조읍漕邑준읍浚邑이 모두 산 동쪽에 있다고 하였기에 모두 태항산大行山의 동쪽에 있다고 한 것이다.
大行屬河內, 河內卽紂都, 而西不逾大行者, 蓋其都近西也.
태항산大行山하내河內에 속하는데 하내河內는 바로 주왕紂王 때의 도읍이었고, 서쪽으로 태항산大行山을 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도읍이 서쪽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北逾이요
북쪽으로는 형장衡漳을 넘고,
【疏】○正義曰:鄭注禹貢云 “衡漳者, 漳水橫流.” 地理志云 “漳水上黨沾縣大黽谷, 東北至入河.”
정의왈正義曰정현鄭玄의 ≪상서尙書≫ 〈우공禹貢에 “형장衡漳장수漳水가 가로로 흘러서 하수河水로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장수漳水상당군 첨현上黨郡 沾縣 대민곡大黽谷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안평현安平縣부성현阜城縣에 이르러 하수로 흘러든다.”라고 하였다.
以漳水自上黨而過鄴城之北, 南距紂都百餘里耳, 故知踰之.
장수漳水상당上黨에서 나와 업성鄴城 북쪽을 지나므로 남쪽으로 주왕紂王의 도읍과 백여 리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곳을 넘어감을 알 수 있다.
東及兗州桑土之野
동쪽으로는 연주 상토兗州 桑土의 들에 미친다.
【疏】○正義曰:禹貢兗州云 “” 注云 “其地尤宜蠶桑, 因以名之.”
정의왈正義曰:≪상서尙書≫ 〈우공禹公연주兗州에 “뽕나무가 잘 자라는 곳이라 누에를 칠 수 있으니”라고 하였는데, 그 에 “그 땅이 누에치기에 알맞아서 그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今濮水之上, 地有桑間者, 僖三十一年 “”, 杜預云 “帝丘, 今東郡濮陽縣也.” 濮陽在濮水之北, 是有桑土明矣.
지금의 복수濮水 가에 상간桑間이라는 곳이 있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僖公 31년에 “나라가 도읍을 제구帝丘로 옮겼다.”라고 하였는데, 두예杜預는 “제구帝丘는 지금의 동군 복양현東郡 濮陽縣이다.”라고 하였다. 복양濮陽복수濮水 북쪽에 있으니 이곳에 상토桑土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周武王 伐紂하고 以其京師 封紂子武庚하여 爲殷後
나라 무왕武王를 정벌하고 그 도읍을 의 아들 무경武庚에게 봉하여 의 후예로 삼았다.
【疏】○正義曰:此皆史記衛世家文.
정의왈正義曰:이것은 모두 ≪사기史記≫ 〈위세가衛世家〉의 글이다.
庶殷頑民 被紂化日久하여 未可以建諸侯 乃三分其地하고하여 使管叔蔡叔霍叔으로 尹而敎之
모든 나라의 완민頑民들은 주왕紂王의 다스림을 받은 지가 오래되어 제후로 세울 만하지 않기에 마침내 그 땅을 셋으로 나누고, 세 감관監官을 두어 관숙管叔채숙蔡叔곽숙霍叔으로 하여금 맡아서 교화하게 하였다.
【疏】正義曰:地理志云 “邶, 以封紂子武庚, 鄘, 管叔尹之, 衛, 蔡叔尹之, 以監殷民, 謂之三監.” 則三監者, 武庚爲其一, 無霍叔矣.
정의왈正義曰:≪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에게 봉해주고, 관숙管叔에게 다스리게 하고, 채숙蔡叔에게 다스리게 하여 나라 백성들을 감찰하니 이를 삼감三監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삼감三監에는 무경武庚이 그중 하나이고, 곽숙霍叔삼감三監에 들어있지 않다.
王肅․服虔皆依志爲說. 鄭不然者, 以書傳曰 “武王殺紂, 立武庚繼公子, 使管叔․蔡叔監祿父, 祿父及三監叛.”
왕숙王肅복건服虔도 모두 〈지리지地理志〉의 설을 따랐는데 정현鄭玄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상서대전尙書大傳≫에 “무왕武王를 죽이고 무경武庚을 세우고 공자 녹부公子 祿父로 왕업을 잇게 하였다. 관숙管叔채숙蔡叔으로 하여금 녹보祿父를 감찰하게 하였는데 녹보祿父삼감三監이 배반하였다.”라고 해서이니,
言使管․蔡監祿父, 祿父不自監也. 言祿父及三監叛, 則祿父 外更有三人爲監, 祿父非一監矣.
관숙管叔채숙蔡叔으로 하여금 녹보祿父를 감찰하게 한 것이고 녹보祿父가 스스로 감찰한 것은 아니다. 녹보祿父삼감三監이 배반했다고 말했으니, 녹보祿父 이외에 따로 세 사람을 삼감三監으로 삼은 것이지 녹보祿父삼감三監 중 하나가 아니다.
【疏】古文尙書蔡仲之命曰 “惟周公位冢宰, 正百工, , 乃致辟管叔于商, 囚蔡叔于郭隣, 降霍叔于庶人, 三年不齒”,
고문상서古文尙書≫ 〈채중지명蔡仲之命〉에 “주공周公총재冢宰로 있으면서 백관百官을 바로잡자 군숙群叔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마침내 관숙管叔나라에서 주륙하고 채숙蔡叔곽린郭隣에 가두고 곽숙霍叔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3년 동안 반열에 끼지 못하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則以管․蔡․霍三叔爲三監明矣. 亦云 “三監當有霍叔, 鄭義爲長.”
관숙管叔채숙蔡叔곽숙霍叔삼감三監임이 분명하다. 손육孫毓도 “삼감三監에는 당연히 곽숙霍叔이 들어가니 정현鄭玄의 의견이 가장 타당하다.”라고 하였다.
然則書敍唯言伐管叔․蔡叔, 不言霍叔者, 鄭云 “”.
그렇다면 ≪상서尙書≫ 〈강고康誥〉의 소서小序에서 관숙管叔채숙蔡叔을 친 것만을 말하고 곽숙霍叔을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정현鄭玄은 “이는 사면해주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疏】王制 “使大夫監於方伯之國, 國三人.” 謂使大夫三人監也.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대부大夫로 하여금 방백方伯의 나라를 감찰하게 하되 한 나라에 3인을 두었다.”라고 하니, 대부大夫 3인으로 하여금 주장州長을 감찰하게 했음을 말한 것이다.
此爲殷民難化, 且使監之. 武庚又非方伯, 不與王制同也.
이는 나라 백성을 교화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우선 대부로 하여금 감찰하게 한 것이다. 무경武庚은 또 방백方伯이 아니니 〈왕제王制〉와는 다르다.
史記云 “武王爲武庚未集, 恐其有賊心, 乃令弟管叔․蔡叔傅相之, 三分其地, 置三監.” 則三叔各監一國, 不知所監之國爲誰也.
사기史記≫ 〈위세가衛世家〉에 “무왕武王무경武庚이 복종하지 않자 그가 모반하려는 마음을 품을까 걱정하여 마침내 아우 관숙管叔채숙蔡叔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게 하고 그 땅을 셋으로 나누어 삼감三監을 두었다.”라고 하였으니, 삼숙三叔이 각각 한 나라를 감찰하였지만 감찰한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는 알 수 없다.
地理志雖云管叔尹鄘, 蔡叔尹衛, 以武庚在三監之中, 未可據信, 則管․蔡所監不足明矣, 故鄭不指言之.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서 비록 관숙管叔을 다스리고, 채숙蔡叔를 다스리고, 무경武庚삼감三監에 두었다고 하였지만 근거하여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니 관숙管叔채숙蔡叔이 감찰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정현鄭玄이 지적하여 말하지 않은 것이다.
監者, 且令監之, 非所封也. 封, 卽管․蔡․霍, 是也.
’이라는 것은 시켜서 감찰하게 한 것이지 봉해준 것이 아니다. 봉해준 것은 곧 관숙管叔채숙蔡叔곽숙霍叔이 이것이다.
自紂城而北 謂之邶 謂之鄘이요 謂之衛
주왕紂王의 도성 이북을 라 하고, 도성 이남을 이라 하고, 도성 동쪽을 라 하였다.
【疏】○正義曰:此無文也. 以詩人之作, 自歌土風, 驗其水土之名, 知其國之所在.
정의왈正義曰:이 부분은 문헌이 없다. 시인이 시를 지을 때 그 지역의 풍속을 읊었기 때문에 그 물과 땅의 이름을 징험하여 그 나라의 소재를 알 수 있다.
衛曰 “送子涉淇, 至于頓丘”, 頓丘今爲名, 在朝歌紂都之東也.
위풍 맹衛風 氓〉에 “그대를 전송하느라 기수淇水를 건너 돈구頓丘에 이르렀노라.”라고 하였으니, 돈구頓丘는 지금 의 이름이니 주왕紂王의 도읍인 조가朝歌의 동쪽에 있다.
紂都河北, 而鄘曰 “在彼中河”, 鄘境在南明矣. 都旣近西, 明不分國, 故以爲邶在北.
주왕紂王하북河北에 도읍하였는데 〈용풍 백주鄘風 柏舟〉에 “저 황하 가운데 있도다.”라고 하였으니, 의 경계가 남쪽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도읍이 이미 서쪽에 가까웠다면 나라를 나누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는 북쪽에 있다고 한 것이다.
三國之境地相連接, 故邶曰 “亦流于淇”, 鄘曰 “送我乎淇之上矣”, 衛曰 “瞻彼淇奧”, 是以三國皆言淇也.
세 나라의 경계지역이 서로 연접하였으므로 〈패풍 천수邶風 泉水〉에 “기수淇水로 흐르도다.”라고 하였고, 〈용풍 상중鄘風 桑中〉에 “나를 기수淇水 가에서 전송하였도다.”라고 하였고, 〈위풍 기오衛風 淇奧〉에 “저 기수淇水 벼랑을 보니”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삼국의 시에 모두 기수淇水를 언급한 이유이다.
【疏】東徙, 渡河, 野處漕邑, 則漕地在鄘也.
대공戴公이 동쪽으로 옮겨가 황하를 건너 조읍漕邑에서 임시로 거처했으니, 그렇다면 조읍漕邑에 있다.
而邶曰 “土國城漕”, 國人所築之城也, “思須與漕”, 衛女所經之邑也, “河水瀰瀰”, 宣公作臺之處也.
그런데 〈패풍 격고邶風 擊鼓〉에 “서울에서 흙일도 하고 조읍漕邑에서 축성築城도 하거늘”이라고 한 것은 국인國人들이 쌓은 성이고, “수읍須邑조읍漕邑을 생각하니”라고 한 것은 나라의 딸이 경유하는 읍이고, “하수河水가 넘실넘실 흐르도다.”라고 한 것은 선공宣公를 만든 곳이다.
此詩人本述其事, 作爲自歌其土也. 王肅․服虔以爲鄘在紂都之西.
이는 시인詩人이 그 일에 근본하여 서술해서 시를 지어서 그 지역을 스스로 노래한 것이다. 왕숙王肅복건服虔은 “주왕紂王의 도읍 서쪽에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孫毓云 “據鄘風定之方中, 之歌, 鄘在紂都之南, 相證自明, 而城以西無驗.
손육孫毓은 “〈용풍 정지방중鄘風 定之方中〉에서 초구楚丘를 읊은 것에 근거해보면 주왕紂王의 도읍 남쪽에 있었음이 서로 증명되어 자명하고 ‘도성 서쪽에 있었다.’라는 설은 징험할 게 없다.
其城之西, 迫於, 南附, 之封, 皆爲列國, 鄘風所興, 不出于此, 鄭義爲長.”
그 도성 서쪽은 서산西山에 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낙읍洛邑에 가까운데 단백檀伯을 봉해준 곳이고, 가 다 그 열국이었으니 용풍鄘風에서 시정詩情을 일으킨 것은 여기(물과 땅의 이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정현鄭玄의 의견이 가장 타당하다.”라고 하였다.
武王旣喪 管叔及其群弟見周公將攝政하고 乃流言於國曰 公 將不利於孺子
무왕武王이 죽자 관숙管叔과 무왕의 여러 아우들은 주공周公이 섭정하려는 것을 보고 마침내 나라에 유언비어를 퍼뜨려 “주공이 유자孺子에게 불리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疏】○正義曰:此皆金縢之文, 唯‘見周公將攝政’一句非耳. 彼注云 “管, 國名, 叔, 字. 周公兄, 武王弟, 封於管. 群弟, 蔡叔․霍叔.”
정의왈正義曰:이것은 모두 ≪상서尙書≫ 〈주서 금등周書 金縢〉의 글인데, 다만 ‘견주공장섭정見周公將攝政’이 한 구절만은 〈금등金縢〉의 글이 아니다. 그 주에 “은 나라 이름이고, 이다. 주공周公의 형이고, 무왕武王의 아우인데 에 봉해졌다. 군제群弟채숙蔡叔곽숙霍叔이다.”라고 하였다.
武王崩, 周公免喪, 欲居攝, 小人不知天命而非之, 故流“公將不利於孺子”之言於京師.
무왕武王이 죽어 주공周公이 상을 마치고서 섭정하려 하자 소인들이 천명임을 알지 못하고 그르게 여겼다. 그리하여 “주공이 유자孺子에게 불리하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도성에 퍼뜨린 것이다.
孺子, 謂成王也. 知管叔周公之兄者, .
유자孺子성왕成王을 이른다. 관숙管叔주공周公의 형임을 안 것은 ≪맹자孟子≫의 글에 근거한 것이다.
周公避之하여 居東都二年秋 大熟未穫이어늘 有雷電疾風之異 乃後成王悅而迎之하니 反而遂居攝이라
주공이 피하여 동도東都에 머문 지 2년 되는 해 가을에 곡식이 잘 여물었는데 수확하기 전에 천둥과 번개가 치고 폭풍이 부는 재앙이 있었다. 그 후에 성왕成王이 기뻐하면서 주공을 맞이하자 돌아와 마침내 섭정하였다.
【疏】○正義曰:知者, 準的金縢之文. 如鄭注金縢 “周公初出, 成王年十三, 避居二年, 成王年十四.
정의왈正義曰:이를 안 것은 ≪상서尙書≫ 〈주서 금등周書 金縢〉의 글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정현鄭玄의 〈금등金縢에 “주공周公이 처음 피해 나온 해는 성왕成王의 나이가 13세이고, 피해 산 지 2년째인 해는 성왕成王의 나이가 14세이다.
秋, 大熟, 遭雷風, 成王迎而反之, 是成王年十五, 避居三年.” 云‘二年’者, 不數初出之年故也.
가을에 곡식이 잘 여물었는데 천둥 번개가 치고 폭풍이 불자 성왕成王이 주공을 맞이하여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해는 성왕의 나이 15세이고 피해 산 지 3년째가 된다.”라고 하였으니, ‘2년’이라고 한 것은 처음 피해 나온 해를 세지 않았기 때문이다.
三監 導武庚叛하니
삼감三監무경武庚선도先導하여 배반하니
【疏】○正義曰:書序云 “武王崩, 三監及淮夷叛.”
정의왈正義曰:≪상서尙書≫ 〈대고大誥〉의 소서小序에 “무왕武王이 죽자 삼감三監회이淮夷가 배반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에 “주공周公이 돌아와 섭정하자 〈삼감三監이〉 주벌당할 것이 두려워 그로 인해 회이淮夷개도開導하여 함께 배반하였으니 섭정한 지 1년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런데 무왕武王한 것에 연계시킨 것은 그 악의 시초가 무왕이 죽은 때로부터 시작되어서이다.”라고 하였다.
又書傳曰 “使管叔․蔡叔監祿父, 武王死, 成王幼, 管․蔡疑周公而流言.
또 ≪상서대전尙書大傳≫에 “관숙管叔채숙蔡叔으로 하여금 녹보를 감찰하게 하였는데 무왕이 죽고 성왕은 어려 관숙管叔채숙蔡叔주공周公을 의심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謂祿父曰 ‘武王旣死矣, 成王尙幼矣, 周公見疑矣, 此百世之時也, 請擧事.’ 然後祿父及三監叛”,
엄군 포고奄君 蒲姑녹보祿父에게 ‘무왕武王은 죽었고 성왕成王은 아직 어린데다 주공周公은 의심을 받고 있으니, 이는 백세에 한 번 있는 기회이니 군사를 일으키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그 뒤에 녹보祿父삼감三監과 배반하였다.”라고 하였으니,
奄君導之, 祿父遂與三監叛, 則三監亦導之矣, 故左傳曰 “管․蔡啓商, 惎間王室.”是也.
의 군주가 인도하여 녹보祿父가 마침내 삼감三監과 배반한 것이니 그렇다면 삼감三監도 녹보를 인도한 것이다. 그러므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관숙管叔채숙蔡叔여민餘民을 인도하여 왕실을 해치고 이간질하였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成王旣黜殷命하여 殺武庚하고 復伐三監이라
성왕成王나라의 을 내쳐 무경武庚을 죽이고 다시 삼감三監을 쳤다.
【疏】○正義曰:“成王旣黜殷命, 殺武庚.” 書序文也. 注云 “黜殷命, 謂誅武庚”, 是也.
정의왈正義曰:“성왕成王나라의 을 내쳐 무경武庚을 죽였다.”는 것은 ≪상서尙書≫ 〈미자지명微子之命소서小序의 글인데, 정현의 주에 “나라의 명을 내쳤다는 것은 무경武庚을 죽인 것을 이른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旣殺武庚, 復伐三監, 爲異時伐者, 以書序‘黜殷命’, ‘伐管․蔡’, 別文言之, 明非一時也.
무경武庚을 죽이고 나서 다시 삼감三監을 친 것은 각각 다른 때에 주벌한 것이 되니, ≪상서尙書≫ 〈미자지명微子之命소서小序에 ‘출은명黜殷命’과 ‘벌관伐管’를 별도의 문장으로 말하였으니 같은 때가 아님이 분명하다.
殺武庚, 伐三監, 皆在攝政二年, 故書傳曰 “二年克殷”, 注云 “誅管․蔡及祿父等也.”
무경武庚을 죽이고 삼감三監을 친 것이 모두 섭정 2년에 있었기 때문에 ≪상서대전尙書大傳≫에 “2년에 을 이겼다.”라고 하였고, 에 “관숙管叔채숙蔡叔녹보祿父 등을 주벌하였다.”라고 한 것이다.
更於此三國 建諸侯하고 以殷餘民으로 封康叔於衛하여 使爲之長이러니
다시 이 세 나라에 제후를 세우고 나라의 여민餘民을 〈강숙康叔에게 내려주고〉 강숙康叔에 봉하여 그들의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疏】○正義曰:以未可建諸侯, 故置三監, 今旣伐三監, 明於此建諸侯矣.
정의왈正義曰:제후를 세울 만하지 않았으므로 삼감을 두었는데 이제 삼감을 주벌하였으니, 이곳에 제후를 세운 것이 분명하다.
상서尙書≫ 〈강고康誥〉의 소서小序에 “성왕成王관숙管叔채숙蔡叔을 주벌한 뒤에 여민餘民강숙康叔에게 봉해주고 〈강고康誥〉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攝政二年伐管․蔡, 四年建侯於衛, 則伐管․蔡, 封康叔, 異年, 而書序連言之者, 注云 “言伐管․蔡者, 爲因其國也.”
섭정 2년에 관숙과 채숙을 주벌하고, 섭정 4년에 위나라에 제후를 세웠으니, 관숙과 채숙을 주벌한 것과 강숙을 봉한 것은 각기 다른 해인데도 〈강고康誥〉의 소서小序에서 연이어 말한 것에 대하여 에서는 “관숙과 채숙을 주벌했다고 한 것은 그 나라를 가지고 배반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疏】王肅康誥注云 “康, 國名, 在千里之畿內. 旣滅管․蔡, 更封爲衛侯.” 鄭無明說, 義或當然. 或者康謚也.
왕숙王肅은 〈강고康誥에서 “은 나라 이름이니 기내畿內 천 리 안에 있었다. 관숙과 채숙을 멸하고 나서 다시 위후衛侯를 봉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정현의 분명한 설명이 없으니, 이는 의리義理상 옳게 여긴 것이다. 혹자는 익호謚號라 하였다.
言爲之長者, 以周公建國不過五百里, 明不以千里之地盡封康叔, 故知更建諸侯也.
위지장爲之長’이라 한 것은 주공周公이 받은 땅이 500리에 불과하니 천리의 땅을 다 강숙에게 봉하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다시 다른 제후를 세웠다는 것을 안 것이다.
妹邦於諸國屬鄘, 酒誥命康叔云 “明大命於妹邦.” 注云 “妹邦者, 紂都所處, 其民尤化紂嗜酒.
매방妹邦제국諸國 중에 에 속하니 〈주고酒誥〉에서 강숙康叔에게 명하기를 “대명大命매방妹邦에 밝혀라.”라고 하였는데, 에 “매방妹邦주왕紂王이 도읍한 곳으로 그 백성이 주왕紂王의 술을 좋아하는 습성에 더욱 물들어 있었다.
今祿父見誅, 康叔爲其連屬之監, 是康叔幷監鄘也.” 又季札見歌邶․鄘․衛, 言“康叔․武公之德如是.” 故知爲之長.
이제 녹보가 주륙당하고 강숙이 그들을 이어서 이 되었으므로 이에 강숙이 을 아울러 감찰하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계찰季札패풍邶風용풍鄘風위풍衛風의 음악을 듣고 “강숙康叔무공武公의 덕이 이러하구나.”라고 하였으므로 그가 우두머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後世子孫 稍幷彼二國하고 混而名之
후세 자손들이 점차 저 두 나라를 병합하고 합쳐서 이름하였다.
【疏】○正義曰:以康叔不得二國, 故知後世子孫也. 頃公之惡, 邶人刺之, 則頃公以前已兼邶, 其鄘或亦然矣.
정의왈正義曰강숙康叔 때 두 나라를 차지한 것이 아니므로 후세 자손 때임을 안 것이다. 경공頃公패인邶人들이 풍자하였으니 경공頃公 이전에 이미 를 병합한 것이고 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周自昭王以後, 政敎陵遲, 諸侯或强弱相陵, 故得兼彼二國, 混一其境, 同名曰衛也.
나라가 소왕昭王 이후로 정교政敎가 점점 쇠미해지자 강한 제후들이 약한 제후를 능멸하였다. 그러므로 〈위후衛侯가〉 저 두 나라를 병합하여 그 국경을 하나로 합치고 국명을 동일하게 ‘’라 하였다.
此殷畿千里, 不必邶․鄘之地止建二國也. 或多建國數, 漸幷於衛, 不必一時滅之, 故云稍幷兼也.
이는 나라 기내 천리畿內 千里이니 꼭 지역에 두 나라만을 세운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세워진 나라의 수가 많았을 것인데 점차 나라에 합병되었고, 반드시 일시에 멸한 것도 아니므로 ‘점차 병합하였다.’라고 한 것이다.
【疏】地理志云 “武王崩, 三監叛, 周公誅之, 盡以其地封弟康叔, 號曰孟侯, 遷邶․鄘之民於洛邑,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무왕武王이 죽자 삼감三監이 배반하니 주공周公이 그들을 주륙하고 그 땅을 전부 아우 강숙康叔에게 봉하고서 맹후孟侯라 이름하고, 의 백성을 낙읍洛邑에 옮겼다.
故邶․鄘․衛三國之詩相與同風.” 如志之言, 則康叔初卽, 兼彼二國, 非子孫矣.
그리하여 삼국의 시가 서로 나란히 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의 말과 같다면 강숙康叔이 당초에 위후衛侯에 즉위했을 때에 저 두 나라를 병합한 것이지 자손 때가 아니다.
服虔依以爲說, 鄭不然者, 以周之大國不過五百里, 王畿千里, 康叔與之同, 反過周公, 非其制也.
복건服虔은 이를 따라 설명하였는데 정현이 그렇게 여기지 않은 것은, 나라의 대국大國은 500리를 넘지 않았는데, 왕기王畿 1,000리를 강숙康叔에게 주어 같아지면 도리어 주공周公보다 커지게 되니, 이는 알맞은 제도가 아니다.
七世至頃侯하니 當周夷王時 衛國政衰하여 變風始作이라
7대〈를 지나〉 경후頃侯에 이르니 주 이왕周 夷王 때이다. 나라의 정사가 쇠퇴해지자 변풍變風이 비로소 지어졌다.
【疏】○正義曰:衛世家云 “康叔卒, 子康伯立, 卒, 子伯立, 卒, 子嗣伯立,
정의왈正義曰:≪사기史記≫ 〈위세가衛世家〉에 “강숙康叔이 죽자 아들 강백康伯이 즉위하고, 그가 죽자 아들 고백考伯이 즉위하고, 그가 죽자 아들 사백嗣伯이 즉위하고,
卒, 子疌伯立, 卒, 子靖伯立, 卒, 子貞伯立, 卒, 子頃侯立.” 除頃侯, 故七世也.
그가 죽자 아들 섭백疌伯이 즉위하고, 그가 죽자 아들 정백靖伯이 즉위하고, 그가 죽자 아들 정백貞伯이 즉위하고, 그가 죽자 아들 경후頃侯가 즉위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경후頃侯를 뺐으므로 7대인 것이다.
又曰 “頃侯厚賂周夷王, 夷王命爲衛侯.” 故知當夷王時.
또 “경후頃侯주 이왕周 夷王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이왕夷王이 명하여 위후衛侯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때가 이왕夷王 때임을 안 것이다.
此鄭數君世, 諸國不同. 齊․陳幷數有詩之君, 此及曹不數, 頃公․ 又不數, 及魯則幷數, 此皆隨便而言, 不爲例也.
정현이 헤아린 의 대수가 제국諸國의 경우와 달랐다. 나라와 나라의 경우는 시에서 읊은 군주를 다 세었는데, 나라와 나라의 경우는 다 세지 않아서 경공頃公공공共公이 또한 세수世數가 맞지 않고, 나라 군주는 대수를 다 세었으니 이는 모두 편의에 따라 말한 것이어서 사례가 되지 못한다.
故作者各有所傷하여 從其國本而異之하여 爲邶․鄘․衛之詩焉이라
그리하여 지은이가 각자 마음 아파하는 바가 있어서 나라의 본원本源을 따라 구별하여 패풍邶風용풍鄘風위풍衛風의 시로 삼은 것이다.
【疏】○正義曰:綠衣․日月․終風․燕燕․柏舟․河廣․泉水․竹竿, 述夫人衛女之事, 而得分屬三國者,
정의왈正義曰:〈녹의綠衣〉․〈일월日月〉․〈종풍終風〉․〈연연燕燕〉․〈백주柏舟〉․〈하광河廣〉․〈천수泉水〉․〈죽간竹竿〉은 부인夫人이 된 나라 여인의 일을 서술한 것인데 세 나라에 나누어 소속시킨 것은
如此譜說, 定是三國之人所作, 非夫人衛女自作矣. 泉水․竹竿, 俱述思歸之女, 而分在異國, 明是二國之人作矣.
시보詩譜≫에서 말한 것과 같이 분명 이 세 나라의 사람들이 지은 것이고, 부인夫人이 된 나라 여인 스스로 지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천수泉水〉․〈죽간竹竿〉은 모두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여인의 마음을 서술한 것인데 나누어 각기 다른 나라에 두었으니 두 나라 사람이 지은 것이 분명하다.
【疏】女在他國, 衛人得爲作詩者, 蓋大夫聘問往來, 見其思歸之狀, 而爲之作歌也.
위녀衛女가 타국에 있는데 위나라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시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대부가 빙문 차 왕래하며 그녀가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를 위해 시를 지어서이다.
唯載馳一篇序云 “許穆夫人作也”, 左傳曰 “許穆夫人賦載馳”, 列女傳稱 “夫人所親作”, 或是自作之也.
다만 〈재치載馳〉 한 편은 에 “허 목공許 穆公부인夫人이 지었다.”라고 하였는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허 목공許 穆公부인夫人이 〈용풍 재치鄘風 載馳〉를 지었다.”라고 하고, ≪열녀전列女傳≫에서도 “부인夫人이 직접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이는 자작시일 것이다.
若許穆夫人所作, 而得入鄘風者, 蓋以於時國在鄘地, 故使其詩屬鄘也.
허 목공許 穆公부인夫人이 지었는데 용풍鄘風에 넣은 것은 이때에 나라가 용 땅에 있었기 때문에 그 시를 용풍鄘風에 둔 것이다.
【疏】美齊, 刺魯, 各從所作之風, 不入所述之國.
위풍 목과衛風 木瓜〉는 재 환공齊 桓公을 찬미하고, 〈제풍 의차齊風 猗嗟〉는 노 장공魯 莊公을 풍자한 시이니, 각기 지은 사람이 속한 나라의 에 두고 시에 서술된 나라에 두지 않았다.
許穆夫人之詩得在衛國者, 以夫人身是衛女, 辭爲衛發, 故使其詩歸衛也,
그런데 허 목공許 穆公부인夫人이 지은 시를 나라에 둔 것은 부인 자신이 위나라 여인이고 시의 내용이 위나라를 위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 시를 위풍衛風에 둔 것이고,
則身已歸, 非復宋婦, 其詩不必親作, 故在衛焉.
송 양공의 어머니는 몸이 위나라에 돌아왔으므로 더 이상 나라 부인이 아니고, 그 시를 직접 지은 것도 아니므로 〈하광河廣〉을 위풍衛風에 둔 것이다.
幷邶․鄘分爲三國, 鄭幷十邑不分之者, 以鄭在西都, 十邑之中無鄭名.
땅을 병합했지만 시는 세 나라로 나누었는데 나라가 10개 읍을 병합했는데도 시를 〈10개 국으로〉 나누지 않은 것은 정나라는 주왕의 도읍 서쪽에 있었는데 10개 읍 가운데 이름이 인 읍이 없고
又皆國小, 土風不異, 不似邶․鄘之地, 大與衛同, 又先有衛名, 故分之也.
또 모두 나라가 작아 각 땅의 풍속이 다르지 않아서이니, 의 땅이 크기가 와 같고, 또 병합하기 전에 먼저 라는 명칭이 있었기 때문에 〈패풍․용풍․위풍으로〉 나눈 것과는 같지 않다.
雖分從邶․鄘, 其實衛也, 故序每篇言衛, 明是衛詩, 猶唐實是晉, 故序亦每篇言晉也.
비록 을 나누었으나 실제로는 이므로 매 편의 를 말하였으니 이는 나라의 임이 분명하다. 이는 이 실은 이므로 당풍唐風에서도 매 편마다 을 말한 것과 같다.
【疏】其 皆以字配國,
진중秦仲진타陳佗는 모두 국명國名에 붙인 것이다.
當謚號之稱, 爲國名而施也, 若異國之君, 必以國配謚, 恐與其君相亂, 若河廣宋襄, 木瓜齊桓, 猗嗟魯莊公之輩是也.
익호謚號를 일컬을 때에는 국명國名을 쓰지 않는데, 다른 나라의 군주에게는 반드시 시호 앞에 국명을 붙인 것은 아마도 자기 나라의 군주들과 혼동할까 해서이니, 〈하광河廣〉의 송 양공宋 襄公, 〈목과木瓜〉의 재 환공齊 桓公, 〈의차猗嗟〉의 노 장공魯 莊公의 무리가 이것이다.
三國如此次者, 以君世之首在前者爲先,
세 나라를 이와 같이 차례지은 것은 대수代數가 가장 앞선 나라를 먼저 한 것이다.
故世家 “頃侯卒, 子釐侯立, 四十二年卒, 子共伯餘立爲君, 共伯弟和襲攻共伯於墓上, 共伯自殺, 衛人立和爲衛侯, 是爲武公.”
그러므로 〈위세가衛世家〉에 “경후頃侯가 죽자 아들 희후釐侯가 즉위하였다. 그가 42년 만에 죽자 아들 공백 여共伯 餘가 즉위하여 군주가 되었는데 공백共伯의 아우 공백共伯묘상墓上에서 습격하여 공백共伯이 자살하자 나라 사람들이 위후衛侯로 삼았으니 이가 무공武公이다.”라고 하였으니,
以頃公三國詩之最先, 故邶在前也.
이 때문에 경공頃公을 읊은 것을 세 나라 시 중 가장 앞에 둔 것이다. 그러므로 패풍邶風위풍衛風용풍鄘風보다 앞에 있게 된 것이다.
【疏】鄘柏舟與淇奧, 雖同是武公之詩, 共姜守義事, 在武公政美入相之前, 故鄘次之, 衛爲後也.
용풍鄘風의 〈백주柏舟〉와 〈기오淇奧〉은 비록 똑같이 무공武公을 읊은 시이지만 공강共姜이 절의를 지킨 일은 무공武公이 정사를 잘하고 나라에 들어가 보좌하기 전의 일이다. 그러므로 용풍鄘風을 두 번째에 두고 위풍衛風을 그 뒤에 둔 것이다.
凡編詩以君世爲次, 此三國當其君之時, 或作或否, 其有詩者, 各於其國以君世爲次也.
시의 편차는 대수代數를 기준으로 차례지었으니, 이 세 나라의 해당 군주 대君主 代에 지은 시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였는데, 지은 시가 있는 경우는 각각 그 나라 군주의 대수에 따라 차례지었다.
世家曰 “武公卽位, 脩康叔政, 百姓和集. 五十年卒, 子莊公楊立, 二十三年卒, 太子完立, 是爲桓公.
사기史記≫ 〈위세가衛世家〉에 “무공武公이 즉위하여 강숙康叔의 정사를 본받자 백성들이 화합하고 결집하였다. 즉위 55년에 무공이 죽자 아들 장공 양莊公 楊이 즉위하고, 즉위 23년에 장공이 죽자 태자 완太子 完이 즉위하였으니 이가 환공桓公이다.
二年, 弟州吁驕奢, 桓公黜之, 十六年, 州吁襲殺桓公而自立. 九月殺州吁于濮, 迎桓公 晉於邢而立之, 是爲宣公.
환공 2년에 아우 주우州吁가 교만 방자하여 환공이 그를 내쫓았는데, 16년에 주우州吁환공桓公을 엄습하여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9월에 주우州吁에서 죽이고 환공桓公의 아우 에서 맞이하여 군주로 세웠으니 이가 선공宣公이다.
十九年卒, 太子朔立, 是爲惠公. 四年奔齊, 立公子黔牟, 黔牟立八年, 惠公復入, 三十 年卒, 子懿公赤立, 九年爲狄所滅.
즉위 19년 만에 선공이 죽자 태자 이 즉위하니 이가 혜공惠公이다. 즉위 4년에 혜공惠公로 달아나자 공자 검모公子 黔牟를 세웠는데, 검모黔牟 즉위 8년에 혜공惠公이 다시 들어왔고, 혜공 31년에 그가 죽자 아들 의공 적懿公 赤이 즉위하고, 의공 9년에 에게 멸망당하였다.
立昭伯頑之子申, 爲戴公, 元年卒, 立弟燬, 是爲文公.” 此其君次也.
뒤에 소백 완昭伯 頑의 아들 을 세워 대공戴公이 되었는데 그가 원년에 죽자 그 아우 를 세웠으니 이가 문공文公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위나라 군주의 순차이다.
序者, 或以事明主, 或言其謚, 或終始備言, 或與初見末義相發明, 要在理著而已. 若一君止一篇者, 明言號謚, 多則文有詳略.
는 일로써 군주를 드러내거나, 그 시호로 말하거나, 종시終始를 갖추어 말하거나, 처음의 견해가 끝의 결론과 서로 발명發明되거나 하지만 요점은 이치를 드러냄에 있을 뿐이다. 한 군주에 대하여 한 편뿐인 것은 시호를 분명히 말했고, 여러 편인 경우에는 글마다 자세함과 소략함의 차이가 있다.
【疏】邶柏舟云‘頃公之時’, 則頃公詩也, 綠衣‘莊姜傷己, 妾上僭’, 當莊公時, 則莊公詩也. 詩述莊姜而作, 故序不言莊公也.
패풍 백주邶風 柏舟〉의 에 ‘경공지시頃公之時’라 하였으니 이는 경공頃公 때의 시이고, 〈녹의綠衣〉의 에 ‘장강상기 첩상참莊姜傷己 妾上僭’이라 하였으니 장공莊公 때에 해당되니 이는 장공莊公 때의 시이다. 하지만 시가 장강莊姜의 일을 서술하여 지은 것이므로 장공莊公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燕燕云‘莊姜送歸妾也’, 妾非夫人所當出, 出不當夫人送, 今云‘送歸妾’, 明乃送之, 是州吁詩也.
연연燕燕〉의 에 ‘장강송귀첩야莊姜送歸妾也’라 하였는데 첩은 부인이 내보내야 할 대상이 아니고, 내보낼 때에 부인이 전송해서도 안 되는 것인데, 지금 ‘송귀첩送歸妾’이라고 하였다면 자식이 죽어 이에 그녀를 전송한 것이 분명하니 이는 주우州吁 때의 시이다.
日月․終風․擊鼓, 序皆云州吁, 凱風從上明之, 皆州吁詩也.
일월日月〉․〈종풍終風〉․〈격고擊鼓〉의 에서 모두 주우州吁를 언급하였고, 〈개풍凱風〉은 위의 시를 따라 밝혔으니 모두 주우州吁 때의 시이다.
雄雉․匏有苦葉序言宣公, 擧其始, 新臺․二子乘舟復言宣公, 詳其終, 則谷風․式微․旄丘․簡兮․泉水․北門․北風․靜女在其間, 皆宣公詩也.
웅치雄雉〉․〈포유고엽匏有苦葉〉의 선공宣公을 언급한 것은 그 악행의 시작을 든 것이고, 〈신대新臺〉․〈이자승주二子乘舟〉의 에 다시 선공宣公을 언급한 것은 그 악행의 끝을 자세히 말한 것인데, 〈곡풍谷風〉․〈식미式微〉․〈모구旄丘〉․〈간혜簡兮〉․〈천수泉水〉․〈북문北門〉․〈북풍北風〉․〈정녀靜女〉는 그 사이에 있으므로 모두 선공宣公 때의 시이다.
【疏】鄘柏舟云‘共伯蚤死, 其妻守義.’, 明武公時作, 則武公詩也. 牆有茨‘公子頑通於君母’, 君母則惠公母, 則惠公詩也.
용풍 백주鄘風 柏舟〉의 에 ‘〈위 세자衛 世子공백共伯이 일찍 죽자, 그의 처 〈공강共姜이〉 절의를 지켰다.[공백조사 기처수의共伯蚤死 其妻守義]’라고 하였으니 무공武公 때에 지어진 것이 분명하니 이는 무공武公 때의 시이다. 〈장유자牆有茨〉의 에 ‘공자 완公子 頑군모君母와 정을 통하였다.[공자완통어군모公子頑通於君母]’라고 하였으니 군모君母혜공惠公이니 혜공惠公 때의 시이고,
鶉之奔奔云‘宣姜’, 亦是惠公之母, 則君子偕老․桑中在其間, 亦皆惠公詩也. 定之方中․蝃蝀․相鼠․干旄, 序皆云文公, 文公詩可知.
순지분분鶉之奔奔〉의 에 ‘선강宣姜’이라고 하였으니 또한 이가 혜공惠公인데, 〈군자해로君子偕老〉․〈상중桑中〉이 그 사이에 있으니 또한 모두 혜공惠公 때의 시이다. 〈정지방중定之方中〉․〈체동蝃蝀〉․〈상서相鼠〉․〈간모干旄〉의 에서 모두 문공文公을 언급하였으니 이는 문공文公 때의 시임을 알 수 있다.
載馳序云‘懿公爲狄人所滅, 露於漕邑.’ 則戴公詩也, 在文公下者, 後人不能盡得其次第, 爛於下耳.
재치載馳〉의 에 ‘의공懿公적인狄人에게 멸망당하고 조읍漕邑에서 노숙露宿하였다.[의공위적인소멸 노어조읍懿公爲狄人所滅 露於漕邑]’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공戴公 때의 시인데 문공文公 때의 시 아래에 있는 것은 후인들이 그 차례를 다 살피지 못하고 〈제 순서보다〉 아래에 뒤섞어 놓은 것일 뿐이다.
【疏】衛淇奧云‘美武公’, 則武公詩矣, 考槃․碩人, 序皆云‘莊公’, 則莊公詩也.
위풍 기오衛風 淇奧〉의 에 ‘무공武公〈의 〉을 찬미한 시이다.[미무공美武公]’라고 하였으니 이는 무공武公 때의 시이고, 〈고반考槃〉․〈석인碩人〉은 에 모두 장공莊公을 언급하였으니 장공莊公 때의 시이다.
氓云‘宣公之時’, 則宣公詩也, 竹竿從上言之, 亦宣公詩也. 芄蘭刺惠公, 則惠公詩也.
〉의 에 ‘선공지시宣公之時’라고 하였으니 〈〉은 선공宣公 때의 시이고, 〈죽간竹竿〉은 앞 를 따라 말하였으니 또한 선공宣公 때의 시이다. 〈환란芄蘭〉은 혜공惠公을 풍자하였으니 혜공惠公 때의 시이다.
河廣云‘宋襄公母歸于衛’, 母雖父所出, 而文繫於襄公, 明襄公卽位乃作,
하광河廣〉의 에 ‘송 양공宋 襄公의 어머니가 로 돌아갔다.[송양공모귀우위宋襄公母歸于衛]’라고 하였는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쫓겨났지만 글은 양공襄公에 연계되어 있으니 양공襄公이 즉위하고 나서 바로 지어진 것이 분명한데,
襄公以魯僖十年卽位, 二十年卒, 終始當衛文公, 則文公詩矣.
양공襄公노 희공魯 僖公 10년에 즉위하여 희공僖公 23년에 죽어 그 시종始終위 문공衛 文公 때에 해당되니 문공文公 때의 시이다.
【疏】伯兮云‘爲王前驅’, 有狐序云‘衛之男女失時’, 皆不言謚, 在河廣․木瓜之間, 則似文公詩矣.
백혜伯兮〉의 에 ‘왕을 위해 선봉에 서다.[위왕전구爲王前驅]’라 하고 〈유호有狐〉의 서에 ‘나라의 남녀가 〈혼인할〉 시기를 잃었다.[위지남녀실시衛之男女失時]’라 하여 모두 시호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하광河廣〉과 〈목과木瓜〉의 사이에 있으니 문공文公 때의 시인 듯하다.
但文公․惠公之時, 無從王征伐之事, 惟桓五年秋, 蔡人․衛人․陳人, 從王伐鄭, 當宣公時, 則伯兮宣公詩也.
다만 문공文公혜공惠公 때에는 을 따라 정벌한 일이 없고 오직 환공 5년 가을에 채인蔡人위인衛人진인陳人을 따라 나라를 정벌한 것은 선공宣公 때에 해당하니, 그렇다면 〈백혜伯兮〉는 선공宣公 때의 시이다.
【疏】伯兮旣爲宣公詩, 則有狐亦非文公詩也.
백혜伯兮〉가 선공宣公 때의 시이면 〈유호有狐〉도 문공文公 때의 시가 아니다.
文公滅而復興, 詩無刺者, 不得有男女失時之歌, 則有狐亦宣公詩也, 與伯兮俱爛於此, 本在芄蘭之上,
문공文公은 멸망한 나라를 다시 부흥시켰기에 시에 풍자한 것도 없고, 남녀가 혼인할 시기를 놓친 시도 있을 수 없으니, 〈유호有狐〉도 선공 때의 시인데 〈백혜伯兮〉와 함께 여기에 뒤섞어 놓은 것이니 본 위치는 〈환란芄蘭〉의 앞이다.
序者於氓擧國公以明下, 故不復言宣公耳. 推此則換爛在作序之後, 故擧上明下.
〉의 에서 나라의 군주를 거론하여 아래의 시를 밝혔다. 그리하여 뒤에 다시 선공宣公을 언급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이것을 미루어보면 순서가 뒤죽박죽이 된 것은 를 지은 뒤의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에서는 위의 시를 들어 아래 시를 밝힌 것이다.
若本, 則伯兮宜言謚以辨嫌, 不宜越芄蘭․河廣而蒙氓詩之序也.
만약 본래 여기가 제 위치라면 〈백혜伯兮〉의 에 시호를 언급해서 의문스러운 점을 분변했어야 하고, 〈환란芄蘭〉․〈하광河廣〉을 뛰어넘어서까지 〈〉의 에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木瓜云‘齊桓公救而封之’, 則文公詩也, 故鄭於中, 皆以此知之也.
〈〈목과木瓜〉의 〉에 ‘재 환공齊 桓公이 구원하고서 봉해주었다.[제환공구이봉지齊桓公救而封之]’라 하였으니 이는 문공文公 때의 시이다. 그러므로 정현이 좌방에 기록한 것은 모두 이 를 통해 안 것이다.
然鄭於其君之下云‘某篇某作’者, 準其時之事而言, 其作未必卽此君之世作也.
그러나 정현이 해당 군주의 아래에 편은 가 지었다고 한 것은 그 당시의 일을 근거해서 말한 것이지 그 시가 반드시 그 군주 때에 지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何則, 文王之詩有在成王時作者, 是不必其時卽作也.
어째서인가? 문왕의 시가 성왕成王 때 지어진 것이 있으니 이것이 〈그 군주의 시가〉 반드시 그 군주 때에 바로 지어진 것은 아닌 점이다.
【疏】春秋之義, , 而州吁以春弑君, 九月死於濮, 不成君而得有詩者, 以其已在君位, 百姓蒙其惡, 故得作詩以刺之也.
춘추春秋≫의 의리義理는 〈선왕을 계승하여 즉위하였으나〉 그해를 넘기지 못하면 이 되지 못하는데 주우州吁는 봄에 군주를 시해하고 9월에 에서 죽어 이 되지 못하였는데도 시가 있게 된 것은 그가 군주의 자리에 있을 때에 백성들이 그 악정惡政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를 지어 그를 풍자한 것이다.
柏舟共姜自誓, 不爲共伯詩者, 以共伯已死, 其妻守義, 當武公之時, 非共伯政敎之所及. 所以爲武公詩也.
백주柏舟〉는 공강共姜 스스로 맹세한 것인데 공백共伯 때의 시가 아닌 것은, 공백은 이미 죽었고 그의 처가 절의를 지킨 일은 무공 때이니, 공백의 정사와 교화가 미친 결과가 아니어서이다. 이 때문에 무공 때의 시가 되는 것이다.
【疏】諸變詩, 一君有數篇者, 大率以事之先後爲次,
변풍變風의 시에서 한 군주에 여러 편의 시가 있는 경우는 대부분 일의 선후에 따라 차례지은 것이다.
於夷姜, 後納伋妻, 邶詩先匏有苦葉, 後次新臺, 是以事先後爲次也.
그러므로 위 선공衛 宣公이 서모인 이강夷姜과 먼저 간통하고 뒤에 가 될 제나라 여인을 들였으므로 패풍의 〈포유고엽匏有苦葉〉이 앞에 있고 〈신대新臺〉가 뒤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 일의 선후에 따라 차례지은 것이다.
擧此而言, 則其餘皆以事次也.
이에 근거해서 말해보면 그 나머지도 모두 일의 선후에 따라 차례지은 것이다.
牆有茨․鶉之奔奔, 皆刺宣姜, 其篇不次, 而使桑中間之, 則編篇之意, 或以事義相類, 或以先後相次, 序․注無其明說, 難以言之.
장유자牆有茨〉․〈순지분분鶉之奔奔〉은 다 선강宣姜을 풍자한 것인데 두 편을 차례로 두지 않고 〈상중桑中〉이 그 사이에 끼게 한 것은 편을 엮은 뜻이 사의事義가 비슷한 것을 따랐거나 일이 선후로 차례가 되는 것을 따른 것일 텐데 에 분명한 설명이 없어 단정 짓기가 어렵다.
역주
역주1 冀州 : ≪尙書≫ 〈禹貢〉 冀州에 “삼면이 黃河에 접해 있으니, 兗河의 서쪽이요 雍河의 동쪽이요 豫河의 북쪽이니, ≪周禮≫ 〈職方〉에 ‘河內를 冀州라 한다.’”라고 하였다.
역주2 大行 : 大行山이다. 중국 하남성과 산서성 경계에 있는 산으로 ≪漢書≫ 〈地理志〉에 “지금의 懷州 河內이다.”라고 하였다.
역주3 楚丘……浚 : 楚丘는 ≪詩經≫ 〈鄘風 定之方中〉에, 桑中은 〈鄘風 桑中〉에, 淇水는 〈衛風 淇奧〉에, 漕는 〈鄘風 載馳〉에, 浚은 〈衛風 干旄〉에 나오는 지명이다.
역주4 衡漳 : 옛 水名이다. ≪尙書≫ 〈禹貢〉에 “覃懷에서 공적을 이루어 衡漳에 이르게 하였다.[覃懷底績 至于衡漳]”라고 하였고, ≪尙書正義≫에 “衡漳은 水名이다. 衡은 橫의 古字이다.”라고 하였다. 衡漳의 衡은 橫의 의미이다. 옛날 黃河가 남에서 북으로 흘렀는데 지금의 河北 남부를 지날 때 서쪽에서 동으로 흐르던 漳水가 橫으로 황하의 물줄기로 유입된다. 그리하여 衡漳이라고 한 것이다.
역주5 (在)[出]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出’로 번역하였다.
역주6 安平阜城 : ≪尙書≫ 〈禹貢〉에는 渤海 阜城으로 되어 있는데, ≪漢書≫ 〈地理志〉에는 涿郡의 安平縣 서남쪽이 渤海郡 阜城縣의 남쪽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漳水의 물길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역주7 桑土旣蠶 : ≪尙書≫ 〈禹貢〉에 “뽕나무가 잘 자라는 곳이라 누에를 칠 수 있으니 이 때문에 언덕에서 내려와 평지에 산다.[桑土旣蠶 是降丘宅土]”라고 하였다.
역주8 衛遷于帝丘 : ≪春秋左氏傳≫ 僖公 31년에 狄이 포위하여 衛나라가 12월에 帝丘로 도읍을 옮겼다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9 三監 : ≪漢書≫ 〈地理志〉에 “邶에는 紂王의 아들 武庚을 봉하고, 鄘은 管叔에게 맡기고, 衛는 蔡叔에게 맡겨서 殷나라 백성들을 감독하게 하였으니 이것을 三監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공영달은 ≪古文尙書≫의 〈蔡仲之命〉에 “周公이 冢宰로 있으면서 百官을 바로잡자 群叔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마침내 管叔을 商나라에서 주륙하고 蔡叔을 郭隣에 가두고 霍叔을 庶人으로 강등시켜 3년 동안 반열에 끼지 못하게 하였다.[惟周公位冢宰 正百工 群叔流言 致辟管叔于商 囚蔡叔于郭隣 降霍叔于庶人 三年不齒]”라고 한 것에 근거하여 衛는 管叔, 鄘은 蔡叔, 邶는 霍叔에게 감독하게 하였고 이 셋을 총칭하여 三監이라고 하니, 武庚은 三監에 들지 않는다는 설을 옳게 여겼다. ≪尙書正義≫
역주10 [而] : 저본에는 없으나, ≪尙書大傳≫에 근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역주11 祿父 : 武庚의 이름이다. ≪尙書大傳≫ 〈金縢〉에 “周王이 紂를 죽이고 公子 祿父로 왕업을 잇게 하였다.[周王殺紂 而繼公子祿父]”라고 하였고, 그 주에 鄭玄은 “‘繼’라는 것은 武庚을 商의 후예로 삼은 것이다.[繼者 以武庚爲商後也]”라고 하였다.
역주12 (也)[已]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已’로 번역하였다.
역주13 群叔流言 : ≪尙書≫ 〈金縢〉에 “武王이 죽자, 管叔과 여러 아우들이 나라에 流言을 퍼뜨리기를 ‘公(周公)이 孺子(成王)에게 불리하게 할 것이다.[武王旣喪 管叔及其群弟 乃流言於國曰 公將不利於孺子]”라고 하였다. 流言을 퍼뜨렸다는 것은 三叔이 武庚과 난을 일으킨 일을 가리킨다.
역주14 孫毓 : 晉나라 사람으로 長沙 太守와 博士 등의 관직을 지냈으며, ≪毛詩異同評≫ 10권, ≪春秋左氏傳義注≫ 18권 등을 저술하였다.
역주15 盖赦之也 : ≪尙書≫ 〈周書 蔡仲之命〉의 注에 “곽숙은 庶人으로 강등되어 3년 동안 반열에 끼지 못하다가 3년 뒤에야 비로소 끼워 기록하여 그 나라를 회복하게 하였다. 三叔에 대한 형벌의 경중은 그 죄의 크기에 따랐을 뿐이다.[降霍叔于庶人 三年不齒 三年之後 方齒錄以復其國也 三叔刑罰之輕重 因其罪之大小而已]”라고 하였다.
역주16 州長 : 한 주의 長이다. ≪周禮≫ 〈地官 司徒 敍官〉에 “州長은 매 州의 中大夫 1인으로 한다.[州長 每州中大夫一人]”라고 하였고, ≪周禮≫ 〈地官 司徒 州長〉에 “그 州의 敎治와 政令의 법을 관장한다.[各掌其州之敎治政令之法]”라고 하였다.
역주17 (郡)[縣]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縣’으로 번역하였다.
역주18 戴公 : ≪春秋左氏傳≫ 閔公 원년에 “衛 懿公 9년 겨울에 오랑캐가 衛나라를 침입하자, 懿公이 오랑캐와 熒澤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죽었다. 宋 桓公이 衛나라의 遺民들을 맞이하여 黃河를 건너 남쪽으로 가서 宣姜의 아들 申을 세워 漕邑에 임시로 초막을 짓고 살게 하니, 이가 戴公이다.”라고 하였다.
역주19 楚丘 : 〈鄘風 定之方中〉에 “定星이 바야흐로 昏中星이 되거늘 楚宮을 지으니 해 그림자로써 헤아려 楚丘에 宮室을 짓고[定之方中 作于楚宮 揆之以日 作于楚室]”라고 하였다.
역주20 西山 : 太行山을 가리킨다.
역주21 洛邑 : 西周의 2대 국왕인 成王 재위 시에 건설되었으며 成周라고도 불린다. 周나라의 東都로 지금 하남 洛陽 王城公園 일대의 지역에 해당된다. 西周가 멸망한 후 周 平王이 동천하여 도읍을 낙읍에 두었으며 이때부터 王城으로 불리었다.
역주22 檀伯 : ≪春秋左氏傳≫ 桓公 15년에 “9월에 鄭伯 突이 櫟(정나라의 큰 고을) 지방 사람을 시켜서 檀伯을 죽였다. 檀伯은 曼伯으로 정나라의 櫟을 지키는 대부이다.”라고 하였다.
역주23 溫原樊州 : 溫은 지금의 溫縣 西部 孟州市 東部이니, 魯 隱公 3년에 “溫의 보리를 베었다.”라고 한 곳이고, 原은 濟源市 北部이니, ≪濟源誌≫에 “西周 武王이 아우 原叔을 봉하고 原國이라 하였다.”라고 실려 있다. 樊은 周 宣王 元年에 宣王이 仲山甫를 봉한 곳이고, 州는 지금의 河內縣이다.
역주24 孟子文也 : 陳賈가 공자에게 주공이 관숙을 주벌한 일에 대해 묻자, 공자가 답하기를 “周公은 아우요 管叔은 형이니, 周公의 과실이 당연하지 않은가.[周公弟也 管叔兄也 周公之過 不亦宜乎]”라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 下≫
역주25 注云……居攝一年之時 : 鄭玄의 주이다. 단, ≪尙書今古文注疏≫에 인용된 것을 살펴보니 ‘因遂其惡 開導淮夷與俱叛’으로 되어 있고, ‘居攝二年之時’로 되어 있어 약간의 오탈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주26 奄君蒲姑 : 蒲姑는 山東 濱州 博興縣 동북쪽에 있었다. ≪漢書≫ 〈地理志〉에 “殷나라 말엽에 蒲姑氏가 諸侯가 되었는데 周 成王 때에 蒲姑氏가 네 나라와 난을 일으켜 성왕이 멸하였다.”라고 하였고, ≪尙書注疏≫ 권16 周書에 “成王이 奄을 멸하고 그 君을 蒲姑로 옮기고 주공이 소공에게 고하여 〈將蒲姑〉를 지었다.”라고 하였으니, 蒲姑는 奄君을 가리키는 듯하다.
역주27 : ‘彼’는 정현을 가리킨다.
역주28 成王旣伐管叔蔡叔……作康誥 : 〈康誥〉의 小序에 “成王이 관숙과 채숙을 주벌한 뒤에 은나라의 남은 백성들을 강숙에게 봉해주고 〈康誥〉와 〈酒誥〉와 〈梓材〉를 지었다.[成王 旣伐管叔蔡叔 以殷餘民 封康叔 作康誥酒誥梓材]”라고 하였다.
역주29 (孝)[考]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考’로 번역하였다.
역주30 共公 : 소인을 가까이하고 군자를 멀리한 曹의 군주로, 〈曹風 候人〉에서 그를 풍자하였다.
역주31 木瓜 : 衛風의 편명으로 衛나라가 狄人에게 패하여 曹邑에 임시로 거처할 때에 齊 桓公이 구원하여 나라를 봉해주고 車馬와 器服을 보내주었으므로 위나라 사람들이 보답하고자 이 시를 지었다는 내용이 毛氏의 序에 보인다.
역주32 猗嗟 : 齊風의 편명으로, 齊 僖公의 딸 文姜이 魯 桓公의 부인이 되었는데 행실이 음란해서 오빠인 齊 襄公과 간통하였으며 환공이 이를 알고 노여워하자 양공에게 일러서 환공을 죽이게 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이 魯 莊公이 禮로써 어머니의 악행을 막지 못한 것을 서글퍼하며 이 시를 지었다.
역주33 宋襄之母 : 〈衛風 河廣〉의 화자로, 衛나라 宣姜의 딸이 宋 桓公의 부인이 되었는데 襄公을 낳고는 쫓겨나서 위나라에 돌아왔다. 양공이 즉위하자 부인이 송나라를 그리워했으나 義理상 갈 수 없어 〈河廣〉의 시를 지었다는 내용이 序에 보인다.
역주34 (宋)[衛]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衛’로 번역하였다.
역주35 秦仲 : 姓은 嬴이고, 秦 公伯의 아들로 나라 이름인 ‘秦’과 그의 字인 ‘仲’을 붙여 그를 秦仲이라고 하였다. 〈秦風 車隣〉은 秦仲이 나라를 강대하게 만들어 車馬와 禮樂과 侍御의 아름다움이 있음을 찬미한 것이다.
역주36 陳佗 : ≪春秋左氏傳≫ 桓公 5년에 “陳侯 鮑가 죽자……文公의 아들 佗가 태자 免을 죽이고 그를 대신하여 즉위했다.”라고 하였고 ≪春秋左氏傳≫ 桓公 6년에 “蔡人이 陳佗를 죽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때부터 ‘陳’에 그의 字인 ‘佗’를 붙여 부른 것으로 보인다. 〈陳風 墓門〉은 陳佗의 악이 만민에게 가해짐을 풍자한 것이다.
역주37 (舜)[非]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非’로 번역하였다.
역주38 [五]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역주39 (子)[弟]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弟’로 번역하였다.
역주40 (三)[一]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一’로 번역하였다.
역주41 子死 : 莊公의 后인 莊姜이 자식이 없어 장공이 陳나라에 장가들어 孝伯을 낳았는데 그는 일찍 죽었고 잉첩 戴嬀가 完(桓公)을 낳자 장강이 그를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莊公이 죽고 완이 즉위한 2년에 아우 州吁가 그를 죽이자 대규가 陳나라로 돌아가게 된 일이다. ≪春秋左氏傳 隱公 3년․4년≫
역주42 (一)[三]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三’으로 번역하였다.
역주43 第於此 : 衛風 시편의 차례는 〈淇奧〉, 〈考槃〉, 〈碩人〉, 〈氓〉, 〈竹竿〉, 〈芄蘭〉, 〈河廣〉, 〈伯兮〉, 〈有狐〉, 〈木瓜〉 순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伯兮〉의 본래 위치가 위의 순서대로 〈芄蘭〉의 뒤가 맞다면 序에서 시호를 언급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44 左方 : 저본의 교감기에 따르면 정현이 ≪詩譜≫ 내용의 왼쪽 옆줄 상단에 해당 시의 편명과 君主의 世系를 행 옆에 기록한 것을 가리키는데, 南宋 때 자료를 병합하면서 빼버려서 지금은 없다고 한다.
역주45 未踰年不成君 : ≪春秋公羊傳≫에 “군주가 살아 있으면 嗣子를 ‘世子’라고 하고, 군주가 薨하면 ‘子某’라고 하고, 장례를 마쳤으면 ‘子’라고 하고 그해를 넘기면 ‘君’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魯 莊公 32년 겨울 8월에 장공이 薨하여 子般이 즉위하였는데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10월에 죽었기 때문에 이름 앞에 子라는 호칭을 붙여 기록하였다. ≪春秋左氏傳 莊公 32년≫
역주46 衛宣公先(蒸)[烝]於夷姜 後納伋妻 : 衛 宣公이 庶母인 夷姜과 간통하여 伋을 낳았는데 뒤에 伋의 처가 될 齊나라 여인을 가로채서 壽와 朔을 낳은 일이다. ≪春秋左氏傳 桓公 16년≫ 단, ≪春秋左氏傳≫에는 ‘伋’이 ‘急子’로 되어 있다.
역주47 (蒸)[烝]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烝’으로 번역하였다.

모시정의(2) 책은 2019.10.3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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