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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詩正義(2)

모시정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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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定之方中 美衛文公也 衛爲狄所滅하여 東徙渡河하여 野處漕邑이러니 齊桓公 攘戎狄而封之하니
정지방중定之方中〉은 위 문공衛 文公찬미讚美한 시이다. 나라가 에게 멸망되자 〈유민遺民이〉 동쪽으로 가서 하수河水를 건너가 조읍漕邑의 들판에 기거寄居하였는데, 제 환공齊 桓公융적戎狄을 몰아내고 해주었다.
文公 徙居楚丘하여 始建城市而營宮室이러니 得其時制하니 百姓說之하고 國家殷富焉이라
이에 문공文公초구楚丘로 옮겨 거처하고 비로소 과 저자를 만들고 집을 지었는데 시절時節제도制度에 알맞게 하니 백성이 기뻐하고 국가가 크게 부강해졌다.
【箋】春秋閔公二年冬 狄人入衛 衛懿公 及狄人으로 戰于熒澤而敗하니
춘추春秋노 민공魯 閔公 2년 적인狄人나라를 침입侵入하였는데, 위 의공衛 懿公적인狄人형택熒澤에서 전투하여 패하였다.
宋桓公 迎衛之遺民하여 渡河立戴公하여 以廬於漕러니
이에 송 환공宋 桓公나라의 유민을 맞이하여 하수河水를 건너가 대공戴公을 세워 땅에 임시로 살게 하였다.
戴公 立一年而卒하니 魯僖公二年 齊桓公 城楚丘而封衛 於是 文公 立而建國焉이라
대공戴公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죽으니, 노 희공魯 僖公 2년에 제 환공齊 桓公초구楚丘에 성을 만들어 나라를 봉하였다. 이에 문공文公이 즉위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다.
○定 星名이니 爾雅云 營室 謂之定이라하여늘 孫炎云 定 正也라하다
은 별의 이름이니 ≪이아爾雅≫ 〈석천釋天〉에 “영실성營室星이라고 한다.”라고 했는데, 손염孫炎은 “이다.”라고 하였다.
衛爲狄所滅 一本作狄人이라 本或作衛懿公爲狄所滅 非也
위위적소멸衛爲狄所滅’의 이 ‘적인狄人’으로 되어 있는 도 있다. 혹 ‘위의공위적소멸衛懿公爲狄所滅’로 되어 있는 은 잘못된 것이다.
【疏】‘定之方中(三章章七句)’至‘富焉’
의 [정지방중定之方中]에서 [부언富焉]까지
○衛國, 爲狄人所滅, 君爲狄人所殺, 城爲狄人所入, 其有遺餘之民, 東徙渡河, 暴露野次, 處於漕邑,
위국衛國적인狄人에게 멸망되어 적인狄人에게 살해되고 도성이 적인狄人에게 함락되자, 남아 있던 백성들이 동쪽으로 황하黃河를 건너가서 들판에서 노숙을 하다가 조읍漕邑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齊桓公, 攘去戎狄而更封之, 立文公焉. 文公, 乃徙居楚丘之邑, 始建城, 使民得安處, 始建市, 使民得交易,
제 환공齊 桓公융적戎狄을 물리치고 다시 하여 문공文公을 세웠다. 문공文公이 이에 초구楚丘의 읍으로 거처를 옮기고는 비로소 성을 세워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고, 비로소 시장을 세워 백성들끼리 교역을 하게 하였는데,
而營造宮室, 旣得其時節, 又得其制度, 百姓喜而悅之. 民旣富饒, 官亦充足, 致使國家殷實而富盛焉, 故百姓所以美之.
집짓기가 시절에 알맞고 또 제도에 알맞아 백성이 기뻐한 것이다. 백성이 부유해지자 관부官府도 풍족해져 국가가 부유하고 번성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문공文公을 찬미한 것이다.
【疏】言封者, 衛國已滅, 非謂其有若新造之然, 故云‘封’也.
’이라고 한 것은 위국衛國이 멸망하였으니 이는 새로 세운 것과 같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이라고 한 것이다.
言‘徙居楚丘’, 卽二章 升墟․望楚․卜吉․終臧, 是也, 而‘營宮室’者, 而首章‘作于楚宮’, ‘作于楚室’, 是營宮室也.
사거초구徙居楚丘’라고 한 것은 바로 둘째 의 ‘옛터에 올라가[승허升墟]’, ‘초구를 살펴보네.[망초望楚]’와 ‘점에 길하더니.[복길卜吉]’와 ‘끝내는 진실로 좋네.[종장終臧]’가 이것이고, ‘영궁실營宮室’은 첫 의 ‘작우초궁作于楚宮’과 ‘작우초실作于楚室’이니 바로 궁실宮室경영經營한 것이다.
‘建市’ 經無其事, 因徙居而始築城立市, 故連言之. 毛則‘定之方中’, ‘揆之以日’, 皆爲得其制, 旣得其制則得時可知.
건성시建城市’는 에는 그 일이 없으나, 거처를 옮기면 먼저 성과 시장을 세우기 때문에 연이어 말한 것이다. 모형毛亨은 ‘정지방중定之方中’과 ‘규지이일揆之以日’을 모두 제도에 알맞은 것으로 여겼으니, 제도에 알맞고 보면 때에 알맞음을 알 수 있어서이다.
鄭則‘定之方中’, 得其時, ‘揆之以日’, 爲得其制, 旣營室得其時, 樹木爲豫備, 雨止而命駕, 辭說于桑田,
정현鄭玄은 ‘정지방중定之方中’은 때에 알맞은 것이고 ‘규지이일揆之以日’은 제도에 알맞은 것으로 여겼으니, 알맞은 때에 집을 짓고, 수목을 미리 갖추어 심고, 비가 그치면 수레를 타고 상전桑田에 가서 가르친 것이다.
故百姓說之, ‘匪直也人’, ‘秉心塞淵’, 是悅之辭也. ‘國家殷富’, 則‘騋牝三千’, 是也.
그리하여 백성이 기뻐한 것이니, ‘한갓 용렬한 군주 아니어서[비직야인匪直也人]’와 ‘마음가짐 진실하고도 깊네[병심색연秉心塞淵]’가 바로 기뻐한 말이다. ‘국가은부國家殷富’는 바로 ‘내마騋馬빈마牝馬 3천 마리[내빈삼천騋牝三千]’가 이것이다.
【疏】序先言‘徙居楚丘’者, 先言所徙之處, 乃於其處而營宮室, 爲事之次,
에서 ‘사거초구徙居楚丘’를 먼저 말한 것은 옮긴 곳을 먼저 말하고 다음에 그곳에 집을 짓는 것으로 일의 순서를 삼은 것이다.
而經主美宮室得其時制, 乃追本將徙觀望之事, 故與序倒也. ‘國家殷富’, 在文公末年,
그러나 에서는 궁실宮室을 지음이 때와 제도에 알맞음을 위주로 찬미하고, 이어 장차 옮겨갈 곳을 바라보는 일을 뒤이어 근거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와 〈순서가〉 바뀐 것이다. ‘국가은부國家殷富’는 문공文公말년末年에 해당된다.
故左傳曰 “元年, 革車三十乘, 季年, 乃三百乘.” 明其‘騋牝三千’, 亦末年之事也. 此詩, 蓋末年始作, 或卒後爲之.
그리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민공閔公 2년에 “원년元年에는 혁거革車가 30이었는데, 말년末年에는 마침내 300이었다.”라고 하였으니, 분명 ‘내빈삼천騋牝三千’도 문공 말년文公 末年의 일이다. 이 시는 문공의 말년에 처음 지어졌거나 혹은 죽은 뒤에 지어진 듯하다.
【疏】箋‘春秋’至‘國焉’
의 [춘추春秋]에서 [국언國焉]까지
○正義曰:此序, 摠說衛事, 故直云衛, 不必斥懿公.
정의왈正義曰:이 나라의 〈멸망滅亡부흥復興에 대한〉 일을 총괄하여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나라를 멸망滅亡시킨 것만 말하고 굳이 의공懿公을 지칭하지 않은 것이다.
, 見懿公死而戴公立, 夫人之唁, 戴公時, 故言懿公爲狄人所滅,
재치載馳〉는 의공懿公이 죽고 대공戴公이 즉위한 것과 〈허 목공許 穆公부인夫人의 위로한 말이 대공戴公 때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에서〉 ‘의공懿公적인狄人에게 멸망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實滅也, 而序云‘衛國有狄人之敗’者, 敗滅一也. 但此見文公滅而復興, 載馳見國滅而唁兄,
실제는 멸망滅亡인데, 〈목과木瓜〉의 에서 ‘위국衛國적인狄人에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은 같다. 다만 이 편은 나라가 멸망한 뒤에 문공文公이 다시 일으킨 것을 나타내고, 〈재치載馳〉는 나라가 멸망하여 오빠를 위로하려 한 것을 나타낸 것이다.
故言‘滅’, 木瓜見國敗而救之, 故言‘敗’, 是文勢之便也.
그리하여 ‘’이라 하고, 〈목과木瓜〉는 나라가 패망하였다가 구조됨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라고 하였으니, 이는 문세의 편리함을 따른 것이다.
【疏】閔二年左傳曰 “狄人侵衛, 衛懿公好鶴, 鶴有乘軒者. 將戰, 國人受甲者, 皆曰‘使鶴, 鶴實有祿位. 余焉能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민공閔公 2년에 “적인狄人나라를 습격하였는데, 〈이전에〉 위 의공衛 懿公을 좋아하여 학 중에는 대부의 수레를 타는 놈도 있었다. 〈과〉 전투하려 할 때에 갑옷을 받은 도성의 백성들이 한 목소리로 ‘학에게 싸우게 하십시오. 학에게는 실로 祿작위爵位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우리들이야 어찌 싸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公, 與石祈子玦, 與甯莊子矢, 使守, 曰 ‘以此贊國, 擇利而爲之.’ , 曰 ‘聽於二子.’
석기자石祈子에게는 〈결단決斷을 표시한〉 ‘’을 주고, 영장자甯莊子에게는 〈환난患難을 막는 표시인〉 ‘’를 주어 도성을 지키게 하면서 ‘이것으로 나라를 돕되 이로운 쪽을 선택해 일을 하라.’ 하고, 부인夫人에게는 ‘수의繡衣’를 주면서 ‘두 사람의 명을 따르라.’ 하였다.
渠孔御戎, 子伯爲右, 黃夷前驅, 孔嬰齊殿, 及狄人戰于澤, 衛師敗績, 遂滅衛.” 是爲狄所滅之事.
거공渠孔으로 융거戎車를 몰게 하고, 자백子伯거우車右로 삼고, 황이黃夷를 선봉으로 삼고, 공영孔嬰을 후군으로 삼고서, 적인狄人형택熒澤에서 전투를 하였으나 나라의 군대가 대패하여 마침내 나라가 멸망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에게 멸망滅亡당한 일이다.
【疏】傳言‘滅’, 經書‘入’者, 賈逵云 “不與夷狄得志於中國.” 杜預云 “君死國散, 經不書‘滅’者,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는 ‘’이라 하였는데 ≪춘추春秋≫의 에서는 ‘’으로 쓴 것에 대해 가규賈逵는 “이적夷狄중국中國에서 뜻을 성취한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고, 두예杜預는 “군이 죽고 백성이 흩어졌는데도 에서 ‘’자를 쓰지 않은 것은
狄不能赴, 衛之君臣皆盡, 無復文告, 齊桓爲之告諸侯, 言狄已去, 言衛之存, 故但以入爲文.”
나라에 달려와 통고하지 않았고, 나라의 군신들은 모두 죽어 다시는 문서로 고한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 환공齊 桓公이 그들을 위해 제후들에게 통고하되 이 이미 떠났음을 말하고 나라가 아직 보존되어 있음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다만 ‘’자로 글을 쓴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是春秋書‘入’之意也. 詩則據實而言, 以時君死民散, 故云‘滅’耳.
이것이 ≪춘추春秋≫에서 ‘’을 쓴 뜻이다. 〈그러나〉 ≪≫는 사실에 의거해 말을 하니 이때에 은 죽고 백성은 사방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에서〉 ‘’이라고 한 것이다.
【疏】言‘東徙渡河’, 則戰在河北也.
동사도하東徙渡河’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전투한 곳은 하수河水 북쪽에 있는 것이다.
禹貢豫州 ‘熒波旣豬’, 注云 “沇水溢出河爲澤, 今塞爲平地, 熒陽民, 猶謂其處爲熒澤, 縣東.
〈그런데〉 ≪상서尙書≫ 〈우공禹貢예주豫州의 ‘형택熒澤의 출렁이는 물이 이미 막혀 못이 되었다.’의 에 “연수沇水하수河水로 흘러넘쳐 못이 되었다. 지금은 메워져 평지平地가 되었는데 형양熒陽 사람들은 아직도 그곳을 형택熒澤이라고 부르니 이 쪽에 있다.
春秋魯閔公二年, 衛侯及狄人, 戰于熒澤, 此其地也.” 如禹貢之注, 則當在河南.
춘추春秋노 민공魯 閔公 2년에 위후衛侯적인狄人형택熒澤에서 전투하였으니 이곳이 그 지역이다.”라고 하였으니, 우공禹貢와 같다면 당연히 하수河水 남쪽에 있을 것이다.
時衛都河北, 狄來伐而禦之, 旣敗而渡河, 在河北明矣, 故杜預云 “此熒澤, 當在河北.”
그러나 이때 나라가 하수河水 북쪽에 도읍하였는데, 이 침입해오자 막다가 패하여 하수河水를 건넜으니, 전투한 곳이 하수河水 북쪽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두예杜預가 “이 형택熒澤은 당연히 하수河水 북쪽에 있어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但沇水, 發源河北, 入于河, 乃溢爲熒, 則沇水所溢, 被河南北, 故河北亦有熒澤, 但在河南多耳,
다만 연수沇水하수河水 북쪽에서 발원하여 하수河水로 들어가 마침내 넘쳐 형택熒澤이 된 것이니, 그렇다면 연수沇水의 넘친 물이 하수의 남쪽과 북쪽을 뒤덮은 것이다. 그리하여 하수 북쪽에도 형택熒澤이 있는 것이다. 다만 대부분이 하수의 남쪽에 있다.
故指其豬水大處, 則在豫州, 此戰於熒, 則在其北畔, 相連猶一物, 故云‘此其地’.
그리하여 저수豬水의 큰 곳을 말하자면 예주豫州에 있지만, 여기의 형택熒澤에서 전투한 것으로 말하면 북쪽 경계에 있는 것이니, 서로 이으면 같은 곳이다. 그리하여 〈우공禹貢〉의 에서 ‘이곳이 그 지역이다.’라고 한 것이다.
【疏】左傳又曰 “及敗, 宋桓公, 逆諸河, 濟. 衛之遺民, 男女七百有三十人, 益之以共․滕之民, 爲五千人.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또 “〈나라가〉 패하자 송 환공宋 桓公이 〈도망해 오는 나라의 유민을〉 하수河水 가에서 맞이하여 밤에 하수를 건넜다. 이때에 나라의 유민이 남녀 730인이었는데, 〈나라의 하읍下邑인〉 의 백성을 보태 5천 인이었다.
立戴公, 以廬於漕.” 是宋桓, 迎衛之遺民, 渡河立戴公, 廬於漕之事. 杜預云 “廬, 舍也.” 言國都亡滅, 且舍於此也.
대공戴公을 세워 〈나라의 하읍下邑인〉 에 임시로 거주하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송 환공宋 桓公나라의 유민을 맞이하여 하수를 건너고 대공戴公을 세워 에서 임시로 거주하게 해준 일이다. 두예杜預는 “이다.”라고 하였으니, 도성都城이 멸망되어 우선 여기에 머문 것을 말한다.
【疏】此渡河處漕, 戴公時也. 傳唯言戴公之立, 不言其卒, 而世家云 “戴公申, 元年卒, 復立其弟文公, 二十五年, 文公卒.”
여기의 하수河水를 건너 거처居處한 것은 대공戴公 때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는 대공戴公의 즉위만을 말하고 죽음은 말하지 않았으나, ≪사기史記≫ 〈위세가衛世家〉에는 “대공 신戴公 申원년元年에 죽어 아우 문공文公을 다시 세웠는데, 〈즉위한 지〉 25년에 문공文公이 죽었다.”라고 하였다.
案經僖二十五年, 衛侯燬卒, 則戴公之立, 其年卽卒, 故云‘一年’. 然則狄以十二月入衛, 懿公死, 其月戴公立而卒, 又文公立,
살펴보면 ≪춘추春秋≫의 경문經文에 ‘희공僖公 25년에 위후 훼衛侯 燬가 죽었다.’라고 하였으니, 대공戴公이 즉위하여 그해에 바로 죽은 것이다. 그리하여 ‘일년一年’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12월에 나라를 침입하여 의공懿公이 죽었고 그 달에 대공戴公이 즉위하였는데 죽자, 다시 문공文公이 즉위한 것이다.
故閔二年傳, 說衛文公衣, ‘大布之衣, 大帛之冠’, 服虔云 “戴公卒在於此年.” 杜預云 “衛文公以此年冬立.” 是也.
그리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민공閔公 2년에 ‘위 문공衛 文公의 복식을 설명하면서 ‘거친 삼베옷을 입고 두꺼운 명주로 만든 을 썼다.’라고 하였는데, 복건服虔이 “대공戴公의 죽음이 이 해에 있었다.”라고 하고, 두예杜預가 “위 문공衛 文公이 이해 겨울에 즉위하였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疏】戴公立未踰年, 而成君稱諡者, 以衛旣滅而立, 不繫於先君, 故臣子成其喪而爲之諡, 而爲之諡者, 與繫世者異也.
대공戴公이 즉위하여 한 해를 넘기지 못했는데 군주로 예우하고 시호諡號를 칭한 것은 나라가 멸망하고 나서 즉위하여 선군과 연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하들이 그의 을 치르고 시호를 정한 것이니, 그를 위해 시호한 것은 대를 이어 즉위한 군주의 경우와는 다르다.
又言‘僖二年齊桓城楚丘而封衛’者, 春秋僖二年, “春, 王正月, 城楚丘.” 左傳曰 “諸侯城楚丘而封衛.” 是也.
희이년제환성초구이봉위僖二年齊桓城楚丘而封衛’는 ≪춘추春秋희공僖公 2년에 “봄이다. 주왕정월周王正月초구楚丘을 쌓았다.”라고 하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제후齊侯초구楚丘에 성을 쌓고 나라를 봉했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引證齊桓公攘戎狄而封之, 木瓜序云 “救而封之.” 與此一也.
제 환공齊 桓公융적戎狄을 물리치고 봉해준 것을 인용해 증명하였으니, 〈위풍 목과衛風 木瓜〉의 에서 “구원하고서 봉해준 것이다.[구이봉지救而封之]”라고 한 것은 이와 똑같다.
【疏】左傳, 無攘戎狄救衛之事, 此言‘攘戎狄’者, 以衛爲狄所滅, 民尙畏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융적戎狄을 물리쳐 나라를 구조救助한 일이 없는데 여기에서 ‘양융적攘戎狄’이라고 한 것은 나라가 에게 멸망滅亡당하여 백성들이 아직도 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閔二年傳, 曰 “齊侯使公子無虧, 帥車三百乘, 以戍漕.” 至僖二年, 又帥諸侯, 城楚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민공閔公 2년에 “제후齊侯공자 무휴公子 無虧에게 수레 300을 이끌고 가서 에 주둔하게 하였다.”라고 하고, 희공僖公 2년에 이르러 또 제후를 인솔하여 초구楚丘에 성을 쌓았다.
於是, 戎狄避之, 不復侵衛, 是亦攘救之事, 不必要與狄戰, 故樂緯稽耀嘉云 “狄人與衛戰, 桓公不救, 於其敗也然後救之.”
이에 융적戎狄이 피하여 다시는 나라를 침입하지 못하였으니, 이것도 물리쳐 구조해준 일이다. 그러니 반드시 과 전투할 필요는 없다. 그리하여 ≪악위樂緯≫ 〈계요가稽耀嘉〉에서 “적인狄人나라와 전투할 때에는 환공桓公이 구조하지 않다가 나라가 패한 뒤에야 구조하였다.”라고 하였는데,
宋均注云 “救謂使公子無虧戍之.” 公羊傳曰 “以城楚丘, 爲力能救之, 則救之可也.” 是戍漕․城楚丘, 竝是救之之事也.
송균宋均은 “구조했다는 것은 공자 무휴公子 無虧를 주둔하게 한 것을 말한다.”라고 하고,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초구楚丘에 성을 쌓은 것으로 볼 때 힘이 능히 구해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니, 그렇다면 구해주었다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으니, 이 ‘수조戍漕’와 ‘성초구城楚丘’는 모두 구조해준 일이다.
【疏】滅衛者, 狄也, 兼言戎者, 戎․狄同類, 協句而言之. 序自‘攘戎狄而封之’以上, 摠說衛事, 不指其君,
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인데 을 겸하여 말한 것은 이 같은 부류이므로 를 맞추어 말한 것이다. 에서 ‘양융적이봉지攘戎狄而封之’ 이전에 대하여는 나라의 일을 총괄하여 설명하고 해당 군주를 지칭하지 않았다.
故爲狄所滅 懿公時也, 野處漕邑, 戴公時也, 攘戎狄而封之, 文公時也.
그리하여 에게 멸망당한 것은 의공懿公의 때이고, 조읍漕邑의 들판에서 산 것은 대공戴公의 때이고, 융적戎狄을 물리치고 봉해준 것은 문공文公의 때라고 여긴 것이다.
自‘文公徙居楚丘’以下, 指說文公建國營室, 得其制, 所以美之, 故箋云 ‘於是文公立而建國焉’.
에서〉 ‘문공사거초구文公徙居楚丘’ 이후에 대하여는 문공文公이 나라를 세워 집을 지음이 제도에 알맞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찬미하였음을 가리켜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에서 ‘이에 문공文公이 즉위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다.[어시문공립이건국언於是文公立而建國焉]’라고 한 것이다.
定之方中 作于楚宮하니
초저녁 하늘 정성定星 뜨는 계절에 초구楚丘궁실宮室을 세우니
【傳】定 營室也 方中 昏正四方이라 楚宮 楚丘之宮也 曰 初立楚宮也
은 〈북방 현무수玄武宿의〉 영실성營室星이고, 방중方中은 〈영실성이〉 초저녁에 하늘 한가운데에 뜨는 것이다. 초궁楚宮초구楚丘이니, 중량자仲梁子는 “처음으로 초궁을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箋】箋云 楚宮 謂宗廟也 定星 昏中而正이면 於是 可以營制宮室이라 故謂之營室이라
전운箋云초궁楚宮은 종묘를 말한다. 정성定星이 초저녁에 하늘 한가운데 뜨는 계절이 되면 이때에 궁실을 지을 수 있다. 그리하여 ‘영실營室’이라고 한 것이다.
定昏中而正 謂小雪時이라
정혼중이정定昏中而正’은 소설小雪 때에 이 별의 동벽성東壁星과 연결되어 정사각형인 것을 말한다.
揆之以日하여 作于楚室이요
해 그림자로 헤아려 초구楚丘에 궁실을 짓고
【傳】揆 度也 度日出日入하여 以知東西하고 南視定하고 北準極하여 以正南北이라 猶宮也
는 ‘헤아림’이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헤아려 西를 알고, 남으로 정성定星을 보고 북으로 북극성北極星을 기준하여 을 바르게 정한 것이다. 과 같다.
【箋】箋云 楚室 居室也 君子將營宮室 宗廟爲先이요 廐庫爲次 居室爲後
전운箋云초실楚室은 사는 집이다. 군자가 궁실을 지을 때에는 종묘를 먼저 짓고, 〈희생犧牲을 기르는〉 마구간과 〈세곡稅穀을 보관하는〉 곳간[고방庫房]을 그 다음에 짓고, 살 집을 마지막에 짓는다.
樹之榛栗 椅桐梓漆하니 爰伐琴瑟이로다
의椅와 동桐(≪모시품물도고毛詩品物圖攷≫)의椅와 동桐(≪모시품물도고毛詩品物圖攷≫)
심었네 개암나무 밤나무의 나무 오동나무 재나무 옻나무 이를 베어 거문고 비파 만들리라
재梓와 칠漆(≪모시품물도고毛詩品物圖攷≫)재梓와 칠漆(≪모시품물도고毛詩品物圖攷≫)
【傳】椅 梓屬이라
는 재나무 종류이다.
【箋】箋云 爰 曰也 樹此六木於宮者 曰其長大 可伐以爲琴瑟이니 言豫備也
전운箋云이다. 이 여섯 종류의 나무를 의 안에 심는 것은 크게 자라면 베어 거문고와 비파를 만들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니, 미리 준비함을 말한다.
○草木疏云 梓實桐皮曰椅也
육기陸機의 ≪모시초목조수충어소毛詩草木鳥獸蟲魚疏≫에 “나무 열매에 오동나무의 껍질인 나무를 ‘’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疏】‘定之’至‘琴瑟’
의 [정지定之]에서 [금슬琴瑟]까지
○毛以爲 “言定星之昏正四方而中, 取則視之, 以正其南, 因準極以正其北, 作爲楚丘之宮也.
모형毛亨은 “정성定星이 초저녁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하늘 한가운데 뜨는 것을 말하였으니, 이는 정성定星을 기준으로 바라보아 남쪽을 바르게 정하고, 북극성北極星을 기준으로 북쪽을 바르게 정하여 초구楚丘을 지은 것이고,
度之以日影, 度日出之影, 與日入之影, 以知東西, 以作爲楚丘之室也. 東西南北, 皆旣正方, 乃爲宮室, 別言宮室, 異其文耳.
해 그림자로 헤아림을 말하였으니 이는 해가 뜰 때의 그림자와 질 때의 그림자를 헤아려 동과 서를 알아 초구楚丘을 지은 것이다. 동서남북의 방향이 모두 바르게 정해지고 나서 을 지은 것이니, 을 구별하여 말한 것은 글자를 달리 쓴 것일 뿐이다.
旣爲宮室, 乃樹之以榛․栗․椅․桐․梓․漆六木於其宮中, 曰此木長大, 可伐之以爲琴瑟.”
궁실을 짓고 나서 여섯 종류의 나무를 궁의 안에 심었으니 이는 이 나무가 크게 자라면 베어서 거문고와 비파를 만들 수 있음을 말한 것”으로 여겼다.
言公非直營室得其制, 又能樹木爲豫備, 故美之.
문공文公이 집을 지은 것만 제도에 알맞은 것이 아니고, 또 나무를 미리 심어 잘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문공을 찬미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疏】鄭以爲, “文公, 於定星之昏正四方而中之時, 謂夏之十月, 以此時而作楚丘之宮廟,
정현鄭玄은 “정성定星이 초저녁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하늘 한가운데 뜨는 시기는 하력夏曆의 10을 말하니, 문공文公이 이때에 초구楚丘궁묘宮廟를 짓고,
又度之以日影, 而營表其位, 正其東西南北, 而作爲楚丘之居室. 室與宮, 俱於定星中而爲之,
또 해 그림자로 헤아려 그 위치를 측량해 표시하여 동서남북을 바르게 정하여 초구楚丘에 살 집을 지은 것이다. 은 모두 정성定星이 하늘 한가운데에 있을 때에 짓는 것인데,
同度日影而正之, 各於其文, 互擧一事耳.” 餘同.
해 그림자를 함께 헤아려 동서를 바르게 정한다는 것은 각각 한 문장에서 한 가지 일을 번갈아 든 것일 뿐이다.”라고 여긴 것이다. 나머지는 모형毛亨의 뜻과 같다.
【疏】傳‘楚宮’至‘立楚宮’
의 [초궁楚宮]에서 [입초궁立楚宮]까지
○正義曰:鄭志, “張逸問 ‘楚宮今何地, 仲梁子何時人.’ 答曰‘楚丘在濟河間, 疑在今東郡界,
정의왈正義曰:≪정지鄭志≫에 “장일張逸이 ‘초궁楚宮은 지금 어느 곳이며, 중량자仲梁子는 어느 시대 사람입니까?’ 하자, 정현鄭玄이 ‘초구楚丘제수濟水하수河水 사이에 있었으니 아마도 지금 동군東郡의 경계 안에 있었을 것이고,
仲梁子, 先師, 魯人, 當時, 在毛公前, 然衛本河北, 至懿公滅, 乃東徙渡河, 野處漕邑, 則在河南矣.
중량자仲梁子선사先師인데, 나라 사람으로 6국 시대에 해당되니 모공毛公보다 앞의 시기이다. 그러나 나라는 본래 하수 북쪽에 있었는데, 의공懿公 때에 멸망하여 동으로 옮겨 하수河水를 건너 조읍漕邑에서 임시로 거처할 때에는 하수 남쪽에 있었다.
又此二章, 「升漕墟, 望楚丘」, 楚丘與漕, 不甚相遠, 亦河南明矣, 故疑在東郡界中.’”
또 이 편 둘째 장에서 「조허漕墟에 올라가 초구楚丘를 바라본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초구楚丘는 서로 그다지 멀지 않으니 역시 하수 남쪽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동군의 경계 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한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라고 하였는데,
杜預云 “楚丘, 濟陰成武縣西南, 屬濟陰郡.” 猶在濟北, 故云‘濟河間’也.
두예杜預는 “초구楚丘제음군 성무현濟陰郡 成武縣의 서남에 있으니 제음군濟陰郡에 속한다.”라고 하였으니, 오히려 제수濟水의 북쪽에 있게 된다. 그리하여 ‘제수濟水하수河水의 사이이다.[제하간濟河間]’라고 한 것이다.
但漢之郡境, 已不同, 鄭疑在東郡, 杜云‘濟陰’也. 毛公, 魯人, 而春秋時, 魯有仲梁懷, 爲毛所引, 故言‘魯人當六國時’, 蓋承師說而然.
다만 나라의 의 경계가 그때와 같지 않기 때문에 정현鄭玄동군東郡에 있을 것이라고 의심한 것이고, 두예杜預제음군濟陰郡이라고 한 것이다. 모공毛公나라 사람이고, 춘추시대 나라에 중량회仲梁懷가 있었는데 모공毛公이 인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라 사람으로 6국 시대에 해당된다.[노인 당육국시魯人 當六國時]’라고 한 것이니, 아마도 스승의 말을 따라 그렇게 말한 것일 것이다.
【疏】箋‘定星’至‘四方’
의 [정성定星]에서 [사방四方]까지
○正義曰:傳雖不以方中爲記時, 亦以定爲營室, 方中爲昏正四方, 而箋以爲記時, 故因解其名定爲營室及其方中之意.
정의왈正義曰에서는 비록 ‘방중方中’을 시기를 기술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지만, 역시 정성定星영실성營室星으로 여기고 방중을 ‘혼정사방昏正四方’으로 여겼다. 그러나 에서는 시기를 기술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정성을 영실로 이름한 것과 ‘방중’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釋天云 “營室, 謂之定.” 孫炎曰 “定, 正也, 天下作宮室者, 皆以營室中爲正.”
이아爾雅≫ 〈석천釋天〉에 “영실營室은 정성을 말한다.”라고 하고, 손염孫炎은 “이다. 천하의 궁실을 짓는 자는 모두 영실營室이 하늘 한가운데에 뜰 때를 으로 삼는다.”라고 하였으니,
言定星昏中而正四方, 於是, 可以營制宮室, 故謂之營室, 是取爾雅爲說也.
이는 정성定星이 초저녁에 하늘 한가운데에서 정사각형이 되면 이때에 궁실을 지을 수 있음을 말한다. 그리하여 ‘영실營室’이라고 한 것이니, 이는 ≪이아爾雅≫의 내용으로 설명한 것이다.
然則毛不取記時而名營室者, 爲視其星而正南北, 以營宮室, 故謂之營室.
그렇다면 모형毛亨이 ‘시기를 기술함’을 취하지 않고 ‘영실營室’로 이름한 것은 정성을 살펴서 남북을 바르게 정하여 궁실을 짓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실營室’이라고 한 것이다.
又云‘定星昏而正中 謂小雪時’, 小雪者, 十月之中氣. , 十月立冬節, 小雪中, 於此時, 定星昏而正中也.
또 ‘정성혼이정중 위소설시定星昏而正中 謂小雪時’의 소설小雪은 10월의 중기이다. 열두 달에는 모두 절기와 중기가 있는데, 10월은 입동이 절기이고 소설이 중기이니, 이 시기에 정성定星이 초저녁이 되면 정중앙에 뜬다.
【疏】又解中得方者, 由其體與東壁相成, 故得正四方, 以於列宿, 室與壁別星, 故指室云其體, 又壁居南則在室東, 故因名東壁.
으로 해석한 것은 실성室星가 동쪽의 벽성壁星과 같이 모양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사방正四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28宿에 있어서는 실성과 동쪽의 벽성은 다른 별이기 때문에 실성을 가리켜 ‘’라고 한 것이고, 또 벽성壁星이 남쪽에 있을 때에는 곧 실성의 동쪽에 있다. 그리하여 ‘동벽東壁’이라고 한 것이다.
釋天云 “娵觜之口, 營室東壁也.” 孫炎曰 “娵觜之口, 則口開方, 營室東壁四方, 似口故因名云.” 是也.
이아爾雅≫ 〈석천釋天〉에 “추자성娵觜星의 입이 영실과 동벽성이다.”라고 하고, 〈이에 대하여〉 손염孫炎이 “추자娵觜는 탄식을 하면 입이 사방으로 벌어지는데, 영실과 동벽성이 연결되어 사각형 모양이 되는 것이 ‘’자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此‘定之方中’, 小雪時, 則在周十二月矣.
여기의 ‘정지방중定之方中’이 소설小雪인 시기는 주력周曆의 12월에 해당된다.
【疏】春秋‘正月城楚丘’, 穀梁傳曰 “不言城衛, 衛未遷.” 則諸侯先爲之城其城, 文公乃於其中, 營宮室也.
춘추春秋≫의 ‘정월성초구正月城楚丘’에 대하여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서 “에 성을 쌓았다고 하지 않은 것은 나라가 아직 천도遷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제후들이 먼저 문공文公을 위하여 성을 쌓고, 이에 문공文公이 성 안에 궁실을 지은 것이다.
建城在正月, 則作室亦正月矣, 而云‘得時’者, 左傳曰 “, 日至而畢.” 則冬至以前, 皆爲土功之時.
성을 쌓은 것이 정월에 있었으면 궁실을 지은 것도 정월일 것인데 ‘득시得時’라고 한 것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장공莊公 29년에 “모든 토목공사는 수성水星이 초저녁에 정남방에 보이면 축판을 세워 흙을 쌓고 동지冬至가 되면 일을 마친다.”라고 하였으니, 동지 이전까지는 모두 토목공사를 할 수 있는 시기이다.
以歷校之, , 正月之初, 未冬至, 故爲得時也.
책력으로 고찰해보면, 희공僖公 2년은 윤여閏餘가 17년차이니 곧 윤월閏月이 정월의 뒤에 있으니, 〈여기의〉 정월 초는 동지 이전이다. 그리하여 ‘득시得時’가 되는 것이다.
【疏】箋言定星中, 小雪時, 擧其常期耳, 非謂作其楚宮, 卽當十月也. 如此則小雪以後, 方興土功.
에서 정성定星이 초저녁에 하늘 한가운데에 나타나는 것이 소설小雪 때라고 한 것은 원칙적인 시기를 거론한 것이지 초궁楚宮을 짓는 것이 10월에 해당됨을 말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와 같다면 소설 이후에야 비로소 토목공사를 시작해야 한다.
而禮記云‘君子旣蜡, 不興功者.’ 謂不復興農功, 而非土功也.
그러니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서 말한 ‘군자가 제사를 지내고 나면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다시 농사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토목공사를 말한 것이 아니다.
月令仲秋云‘月也, 可以築城郭, 建都邑’者, , 仲冬云‘命有司曰 土事無作’, 亦與左傳同.
예기禮記≫ 〈월령 중추月令 仲秋〉에서 말한 ‘이 달(중추仲秋)에 성곽을 쌓고 도읍을 세울 수 있다.’라고 한 것은 진법秦法으로 주력周曆과 다르며, 〈월령 중동月令 仲冬〉에서 말한 ‘유사有司에게 토목공사를 시작하지 말라고 명한다.’라고 한 것은 역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뜻과 같다.
然則左傳所云, 乃是正禮, 而召誥 ‘於三月之下, 營洛邑之事’, 於周之三月起土功, 不依禮之常時者.
그렇다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말한 것은 바로 바른 예이고, ≪상서尙書≫ 〈소고召誥〉의 ‘3월 하순에 낙읍洛邑을 경영한 일’은 나라의 3월에 토목공사를 시작한 것이니, 예법의 원칙적인 시기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鄭志答趙商云 “傳所言者, 謂庸時也, 周召之作洛邑, 因欲觀衆殷樂之與否.” 則由欲觀民之意, 故不依常時也.
정지鄭志≫에서 조상趙商에게 “에 말한 바는 평상시를 말한 것이고, 주공周公소공召公낙읍洛邑을 지은 것은 이것으로 나라의 백성들이 즐거워하는지의 여부를 살피고자 한 것이다.”라고 대답하였으니, 그렇다면 이를 통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살피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원칙적인 시기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疏】傳‘度日’至‘南北’
의 [도일度日]에서 [남북南北]까지
○正義曰:此‘度日出日入’, 謂度其影也, 故公劉傳曰 “考於日影.” 是也.
정의왈正義曰:이 ‘도일출일입度日出日入’은 해 그림자로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대아 공류大雅 公劉〉의 에서 “해 그림자에 따져본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其術則匠人云 “, 以縣, 視以影, 爲規, 識日出之影, 與日入之影,
그 방법은 ≪주례周禮≫ 〈고공기 장인考工記 匠人〉에 “땅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사각의 땅을 만들어 그 안에 물을 붓고 그 네 모퉁이에 기둥을 세워 줄을 매달아 수평이 되게 하고[수지이현水地以縣], 그 가운데에 말뚝을 세우고 줄을 매달아 말뚝이 곧게 하여[치열이현置槷以縣] 그림자를 살펴 원규圓規를 만들되 해가 뜰 때와 질 때의 그림자를 표시하여,
晝參諸日中之影, 夜考之極星, 以正朝夕.” 注云 “於四角立植而縣, 以水望其高下.
낮에는 정오正午의 그림자를 참고하고, 밤중에는 북극성北極星을 살펴 아침부터 저녁때까지의 방위를 바르게 정한다.”라고 하였는데, 에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우고 줄을 매달아 높이를 살피고,
高下旣定, 乃爲位而平地. 於所平之地中央, 樹八尺之臬, 以縣正之. 視之以其影, 將以正四方也, 日出日入之影, 其端則東西正也.
높이가 정해지면 자리를 만들고 땅을 평평하게 한다. 평평해진 땅의 중앙에 8의 말뚝을 세우되 줄을 매달아 바르게 한다. 그림자로 살피는 것은 사방의 방위를 바르게 하고자 해서이니, 일출과 일몰 때 그림자의 끝이 바로 정동서正東西이다.
又爲規以識之者, 爲其難審也. 自日出而畫其影端, 以至日入旣, 則爲規, 測影兩端之內規之, 規之交, 乃其審也,
원규圓規를 만들어 표시하는 것은 확실하게 알기 어렵기 때문이니, 해가 뜰 때부터 그림자의 끝을 표시하여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표시하고, 다음에 원규圓規를 만들어 측정한 그림자 양끝의 안쪽을 측량하여 헤아리면 헤아린 곳의 교차점이 마침내 분명해진다.
度兩交之間, 中屈之以指臬, 則南北正也. 日中之影, 最短者也, 極星謂北辰也.” 是揆日瞻星, 以正東西南北之事也.
두 교차점의 사이를 헤아려 절반으로 접은 것이 말뚝을 향하면 정남북이다. 해가 중천일 때의 그림자는 가장 짧다. 극성極星북극성北極星을 말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해를 헤아리고 별을 바라보아 동서남북을 바르게 정하는 일이다.
【疏】如匠人注度日出日入之影, 不假於視定․視極, 而東西南北皆知之.
주례周禮≫ 〈고공기 장인考工記 匠人〉의 와 같이 일출과 일몰의 그림자를 살펴보면 정성定星극성極星을 살필 필요도 없이 동서남북을 다 알게 된다.
此傳 ‘度日出入, 以知東西, 視定․極, 以正南北’者, 考工之文, 止言以正朝夕, 無正南北之語,
에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살펴 동서를 알고, 정성定星과 북극성을 보아 남북을 확정한다.’라고 하였으나, 〈고공기考工記〉의 글에는 ‘정조석正朝夕’만을 말하고 남북을 바르게 정한다는 말은 없다.
故規影之下, 別言考之極星, 是視極, 乃南北正矣. 但鄭因屈橫度之繩, 卽可以知南北, 故細言之, 與此不爲乖也.
그리하여 〈고공기考工記〉에서 ‘규영規影’의 뒤에 따로 ‘고지극성考之極星’을 말하였으니, 북극성을 살핌이 바로 남북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다만 정현鄭玄은 가로로 헤아린 끈을 절반으로 접으면 곧 남북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자세히 말하였으니, 〈고공기考工記〉와 어긋나지 않는다.
唯傳言‘南視定’者, 鄭意不然. 何者, 以匠人云‘晝 參諸日中之影’, 不言以定星參之.
에서 ‘남으로 정성定星을 살핀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만 정현鄭玄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고공기 장인考工記 匠人〉에서 ‘낮에는 정오正午의 그림자를 참고한다.[주 참제일중지영晝 參諸日中之影]’라고만 말하고 ‘정성定星으로 참작하는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經傳未有以定星正南北者, 故上箋以定爲記時, 異於傳也. 傳以視定爲正南北, 則四句同言得制, 非記時也.
에는 ‘정성定星으로 남북을 바르게 한다.’라고 한 말이 없다. 그리하여 위의 에서 정성定星으로 시기를 기술하여 과 달리한 것이다. 정성定星을 살펴 남북을 정하는 것으로 여겼으니, 그렇다면 네 구는 동일하게 제도에 맞음을 말한 것이니 시기를 기술한 것이 아니다.
【疏】傳‘室 猶宮’
의 [실 유궁室 猶宮]
○正義曰:釋宮云 “宮謂之室, 室謂之宮.” 郭璞曰 “皆所以通古今之異語.” 明同實而兩名, 故云‘室猶宮’也.
정의왈正義曰이아爾雅≫ 〈석궁釋宮〉에 “을 말하고 을 말한다.”라고 하였는데, 곽박郭璞은 “모두 고금에 통용되는 다른 말이다.”라고 하였으니, 실제로는 같은데 이름이 두 가지임을 밝힌 것이다. 그리하여 ‘과 같다.’라고 한 것이다.
【疏】箋‘楚室’至‘爲後’
의 [초실楚室]에서 [위후爲後]까지
○正義曰:釋宮以宮室爲一, 謂通而言之, 其對文則異, 故上箋 楚宮謂廟, 此楚室謂居室, 別其文以明二者不同也,
정의왈正義曰:≪이아爾雅≫ 〈석궁釋宮〉에서 을 같다고 한 것은 통합하여 말한 것이나, 상대하여 쓴 글인 경우는 뜻이 다르다. 그리하여 위의 에서는 ‘초궁楚宮’을 ‘’라고 하고, 여기에서는 ‘초실楚室’을 ‘거실居室’이라고 하여, 글을 달리하여 둘이 같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故引曲禮曰 ‘君子將營宮室, 宗廟爲先, 廐庫爲次, 居室爲後’, 明制有先有後, 別設其文也.
그리하여 ≪예기禮記≫ 〈곡례曲禮〉에서 ‘군자가 궁실을 지을 때에 종묘宗廟를 먼저 짓고, 구고廐庫를 그 다음에 짓고, 거실居室을 그 다음에 짓는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으니, 분명 제도에 선후가 있어서 그 글을 구분하여 쓴 것이다.
綿與斯干, 皆述先作宗廟, 後營居室也.
대아 면大雅 綿〉의 과 〈소아 사간小雅 斯干〉의 에도 모두 종묘를 먼저 짓고 거실을 뒤에 짓는 것을 기술하였다.
【疏】傳‘椅 梓屬’
의 [의 재속椅 梓屬]
○正義曰:釋木云 “椅, 梓也.” 舍人曰 “梓, 一名椅.” 郭璞曰 “卽楸也.” 湛露曰 “其桐其椅.” 桐椅旣爲類, 而梓一名椅, 故以椅桐爲‘梓屬’.
정의왈正義曰:≪이아爾雅≫ 〈석목釋木〉에 “이다.”라고 하였는데, 사인舍人은 “일명 의一名 椅이다.”라고 하고, 곽박郭璞은 “바로 이다.”라고 하고, 〈소아 잠로小雅 湛露〉에 “이요 로다.”라고 하였으니, 는 같은 부류이고, 일명 의一名 椅이기 때문에 나무 종류로 여긴 것이다.
言梓屬, 則椅梓別, 而釋木, 椅梓爲一者, 陸機云 “梓者, 楸之疏理白色而生子者爲梓, 梓實桐皮曰椅.” 則大類同而小別也.
나무 종류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는 다른 것인데, 〈석목釋木〉에서 를 하나로 여긴 것은 육기陸機가 “ 중에서 결이 성글고 백색이고 열매가 있는 이고, 나무 열매에 오동나무의 껍질인 것은 라 한다.”라고 해서이니, 크게 분류하면 같고 세분細分하면 다르다.
箋云‘樹此六木於宮中’, 明其別也.
에서 ‘이 여섯 종류의 나무를 집 담장 안에 심는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가〉 다른 것임을 밝힌 것이다.
升彼虛矣하여 以望楚矣로다望楚與堂 景山與京하고
저 옛터에 올라 초구를 바라보았네 초구와 당읍 큰 산과 언덕 바라보고
【傳】虛 漕虛也 楚丘有堂邑者 景山 大山이요 高丘也
조읍漕邑의 터이다. 초구楚丘당읍堂邑이 있다. 경산景山은 큰 산이고 은 높은 언덕이다.
【箋】箋云 自河以東으로 夾於濟水 文公將徙 登漕之虛하여 以望楚丘하고
전운箋云:〈초구楚丘는〉 하수河水에서 동쪽으로 제수濟水 사이에 있다. 문공文公국도國都를 옮기려 할 적에 조읍漕邑의 옛터에 올라가 초구楚丘를 바라보고,
觀其旁邑及其丘山하여 審其高下所依倚하고 乃後建國焉하니 愼之至也
그 옆의 당읍堂邑과 언덕 및 산들을 살펴서 의지해 살 만한 높고 낮은 곳을 자세히 알고 난 후에, 비로소 국도를 세웠으니 지극히 신중하게 한 것이다.
○虛 本或作墟
는 ‘’자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降觀于桑하니
내려와 뽕밭 살펴보니
【傳】地勢宜蠶하여 可以居民이라
지세가 누에치기에 마땅하여 백성들을 살게 할 만한 곳이다.
卜云其吉하여 終然允臧이로다
점괘도 하여 끝까지 참으로 좋다 하네
【傳】龜曰卜이라이요 善也 建國必卜之 故建邦能命龜하고 田能施命하고 作器能銘하고 使能造命하고
거북점을 ‘’이라고 한다. 은 ‘진실로’이고 은 ‘좋음’이다. 국도國都를 세울 때는 반드시 거북점을 친다. 그리하여 국도를 세울 적에는 거북점을 치고, 사냥을 할 적에는 교명敎命을 하고, 그릇을 만들고는 명문銘文을 새기고, 사신을 감에는 사명辭命을 짓고,
升高能賦하고 師旅能誓하고 山川能說하고 喪紀能誄하고 祭祀能語하니 君子能此九者라야 可謂有德音이요 可以爲大夫
높은 곳에 올라가서는 형상을 시부詩賦로 표현하고, 전투할 때에는 장병들에게 맹서를 하고, 산천을 보고는 형상을 설명하고, 상사喪事에는 시호諡號[]를 짓고, 제사祭祀에는 귀신에게 고하는 말로 기도하는 것, 이 9가지를 잘 할 수 있는 군자라야 훌륭한 명성[덕음德音]이 있다 할 수 있고 대부가 될 수 있다.
○能說如字 鄭志 問曰 山川能說 何謂也 答曰 兩讀이니 或言說하니 說者 說其形勢也
능설能說의 ‘’은 본음대로 읽는다. ≪정지鄭志≫에 “묻기를 ‘산천능설山川能說’은 무엇을 말함입니까?’라고 하니, 하기를 ‘두 가지로 읽는데, 혹자는 이라고 하니 설은 형세를 설명하는 것이고,
或曰述하니 述者 述其故事也 讀如라하다
혹자는 이라고 하니 술은 고사故事를 기록하는 것이니, 은 ≪논어論語≫의 「수사불간遂事不諫」의 「」와 같은 음으로 읽는다.’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本又作讄하고 又作誄한대 說文云 讄 禱也 累功德以求福也라하니라 諡也
’는 또 ‘’자로 되어 있기도 하고, 또 ‘’자로 되어 있는 본이 있는데,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는 복을 비는 것이니, 공덕을 쌓아서 복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는 시호이다.
【疏】‘升彼’至‘允臧’
의 [승피升彼]에서 [윤장允臧]까지
○正義曰:此追本欲遷之由, 言文公將徙, 先升彼漕邑之墟矣, 以望楚丘之地矣,
정의왈正義曰:이 부분은 천도하고자 한 사유를 거슬러 올라가 따져서 문공文公이 도읍을 옮기려 할 적에 먼저 조읍漕邑의 옛터에 올라가 초구楚丘의 땅을 바라보고,
又望其傍堂邑及景山與京丘. 言其有山林之饒, 高丘之阻, 可以居處,
또 옆에 있는 당읍堂邑 및 큰 산과 큰 구릉을 바라보았음을 말하였으니, 이곳은 풍요한 산림과 험준하게 높은 산과 구릉이 있어 거처할 만하였다.
又下漕墟, 而往觀於其處之桑, 旣形勢得宜蠶桑, 又茂美, 可以居民矣.
조읍漕邑의 터에서 내려와 초구楚丘의 뽕밭에 가서 살펴보니, 형세가 누에치기에 알맞고 또 매우 아름다워 백성들을 거주시킬 만하였다.
人事旣從, 乃命龜卜之, 云 ‘從其吉矣, 終然信善, 非直當今而已.’ 乃由地勢美而卜又吉, 故文公徙居楚丘而建國焉.
사람의 판단에 모든 것이 알맞자, 마침내 거북을 명하여 점을 치니 점괘에 ‘하다. 끝까지 진실로 좋을 것이요, 지금뿐만이 아니다.[종기길의 종연신선從其吉矣 終然信善 비직당금이이非直當今而已]’라고 하였으니, 지세가 아름답고 점도 길하였다. 그리하여 문공文公초구楚丘로 옮겨 국도를 세운 것임을 말한 것이다.
【疏】傳‘虛漕’至‘高丘’
의 [허조虛漕]에서 [고구高丘]까지
○正義曰:知墟漕墟者, 以文公自漕而徙楚丘, 故知升漕墟.
정의왈正義曰:옛터가 조읍漕邑의 옛터임을 안 것은 문공文公조읍漕邑에서 초구楚丘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읍漕邑의 옛터에 오른 것을 안 것이다.
蓋地有故墟, 高可登之以望, 猶僖二十八年左傳稱 ‘晉侯登有莘之墟也’. 升墟而幷望楚堂, 明其相近, 故言楚丘有堂邑.
대체로 옛 성터가 있는 곳은 높아서 올라가 조망을 할 수 있으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僖公 28년에 ‘진후晉侯유신有莘의 옛 성터에 올라갔다.’라고 한 것과 같다. 성터에 올라 초구楚丘당읍堂邑을 아울러 조망하였으니 분명 서로의 거리가 가깝다. 그리하여 초구楚丘당읍堂邑이 있다고 한 것이다.
楚丘本亦邑也, 但今以爲都, 故以堂繫楚丘而言之. 釋詁云 “景, 大也.” 故知景山爲大山. 京與山相對, 故爲高丘.
초구楚丘도 본래 이었는데 지금은 수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당읍堂邑초구楚丘에 연계시켜 말한 것이다. ≪이아爾雅≫ 〈석고釋詁〉에 “은 큼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경산景山이 큰 산임을 안 것이다. 언덕[]은 산과 서로 상대가 되므로 ‘고구高丘’라고 한 것이다.
釋丘云 “絶高爲之京.” 郭璞曰 “人力所作也.” 又云 “非人爲之丘.” 郭璞曰 “地自然生.” 則丘者, 自然而有, 京者, 人力所爲,
이아爾雅≫ 〈석구釋丘〉에 “매우 높은 곳이 이다.”라고 하였는데, 곽박郭璞은 “인력으로 만든 것이다.”라고 하고, 또 〈석구釋丘〉에 “사람이 만든 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곽박郭璞은 “땅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는 자연히 있는 것이고 은 인력으로 만든 것이다.
形則相類, 故云‘京 高丘也.’ 公劉箋云 ‘絶高爲之京.’ 與此一也. 皇矣傳曰 “京, 大阜也.” 以與‘我陵’․‘我阿’相接類之, 故爲大阜.
그러나 모양은 서로 비슷하다. 그리하여 ‘고구高丘이다.’라고 한 것이니, 〈대아 공류大雅 公劉〉의 에서 ‘매우 높은 곳이 이다.’라고 한 것이 여기와 똑같다. 〈대아 황의大雅 皇矣〉의 에서 “은 큰 언덕[대부大阜]이다.”라고 한 것은 의 ‘가 ‘우리 구릉[아릉我陵]’․‘우리 언덕[아아我阿]’과 서로 이어져서 그렇게 유추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부大阜’라고 한 것이다.
【疏】箋‘自河’至‘濟水’
의 [자하自河]에서 [제수濟水]까지
○正義曰:箋解楚丘所在, 故云‘自河以東 夾於濟水’, 言楚丘在其間.
정의왈正義曰초구楚丘의 소재지를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하수河水에서 동쪽으로 제수濟水 사이에 있다.’라고 하였으니, 초구가 그 사이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禹貢云 “道沇水, 東流爲濟, 入于河, 溢爲熒, 出于陶丘北, 又東至于菏, 又東北, .”
상서尙書≫ 〈우공禹貢〉에 “연수沇水를 유도하되 동으로 흘러 제수濟水가 되어 하수河水로 들어가며, 넘쳐 형택熒澤이 되고, 동쪽으로 도구陶丘의 북쪽으로 나와 또 동으로 하택菏澤에 이르고, 또 동북쪽으로 흘러 문수汶水에 모여서 〈다시 북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가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是濟自河北而南入於河, 又出而東, 楚丘在於其間, 西有河, 東有濟, 故云‘夾於濟水’也.
이는 제수濟水하수河水 북쪽에서 남쪽으로 하수河水에 들어가고, 또 나와 동쪽으로 흐른 것이다. 그러니 초구楚丘가 그 사이에 있어 서쪽에는 하수河水가 있고 동쪽에는 제수濟水가 있다. 그리하여 ‘협어제수夾於濟水’라고 한 것이다.
【疏】傳‘龜曰卜’至‘大夫’
의 [구왈복龜曰卜]에서 [대부大夫]까지
○正義曰:大卜曰 “國大遷, 大師則貞龜.” 是建國必卜之, 綿云 “爰契我龜.” 是也.
정의왈正義曰:≪주례周禮≫ 〈춘관 대복春官 大卜〉에 “나라에 대규모의 천도나 군사 행동이 있을 때에는 거북점을 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국도國都를 세움에 반드시 거북점을 치는 것이니, 〈대아 면大雅 綿〉에 “이에 우리의 거북점을 치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大遷必卜, 而筮人掌九筮, “一曰筮更.” 注云 “更謂筮遷都邑也.” 鄭志答趙商云 “此都邑, 比於國爲小, 故筮之.”
대규모 천도를 할 때엔 반드시 거북점을 치고, 서인筮人이 아홉 가지의 시초점을 담당하는데, 〈≪주례周禮≫ 〈춘관 서인春官 筮人〉에〉 “첫 번째가 ‘서갱筮更’이다.”라고 하고, 에는 “은 천도할 을 시초로 점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고, ≪정지鄭志≫에서 조상趙商에게 “이 도읍은 국도에 비하여 작기 때문에 시초점을 치는 것이다.”라고 답하였으니,
然則都邑則用筮, 國都則卜也. 此卜云‘終吉’, 而僖三十一年又遷于帝丘,
그렇다면 도읍엔 시초점을 사용하고 국도엔 거북점을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의 거북점에서 ‘끝까지 길하리라.[종길終吉]’라고 하였는데도, 노 희공魯 僖公 31년에 〈문공文公이〉 또 제구帝丘로 천도하였다.
而言‘終善’者, 卜所以決疑, 衛爲狄人所滅, 國人分散, 文公徙居楚丘, 興復祖業, 國家殷富, 吉莫如之,
그런데 〈이때의 거북점에서〉 ‘종선終善’이라 한 것은 이란 의심되는 사안을 결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가 적인狄人에게 멸망당하여 도성의 백성들이 흩어졌는데, 문공文公초구楚丘로 옮겨 선조의 왕업을 회복하여 국가가 크게 부유하였으니 이만큼 길한 것이 없다.
後自更, 以時事不便而遷, 何害‘終然允臧’也.
그리고 뒤에 스스로 다시 천도한 것은 그 당시 국사를 처리할 때에 불편하여 옮긴 것이다. 그러니 에서 ‘끝까지 참으로 좋다 하네.[종연윤장終然允臧]’라고 함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疏】傳因引‘建邦能命龜’, 證建國必卜之, 遂言‘田能施命’, 以下本有成文, 連引之耳.
은 ‘건방능명구建邦能命龜’를 인용하여 국도를 세울 때에는 반드시 거북점을 친다는 것을 증명하고, 이로 인하여 마침내 ‘전능시명田能施命’을 말한 것인데 그 이하는 본래 성문成文이 있기 때문에 이어서 인용한 것이다.
‘建邦能命龜’者, 命龜以遷, 取吉之意, 若少牢史述曰 “假爾大筮有常, 孝孫某, 來日丁亥, 用薦歲事于皇祖伯某, 以某妃配某氏, 尙饗.”
건방능명구建邦能命龜’는 천도하는 일로 거북에 명하여 길한 뜻을 취하는 것이니, 예컨대 ≪의례儀禮≫ 〈소뢰궤식례少牢饋食禮〉에 “사관史官이 〈주인의 명을〉 따라 ‘신령함이 있는 너의 큰 점사를 빌리려 한다. 효손 모孝孫 某(주인)는 오는 정해일丁亥日황조 백모皇祖 伯某에게 세시歲時의 제사를 올리고 모비某妃모씨某氏에게 배향하려 하오니 부디 흠향하소서.’라고 한다.” 하고,
士喪卜曰 “哀子某, 卜葬其父某甫.” 如此之類也. 建邦, 亦言 ‘某事以命龜.’ 但辭亡也.
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에 복관卜官이 “애자 모哀子 某부 모보父 某甫의 장례를 위해 점을 칩니다. 혼신魂神이 오르고 내림에 허물이 없겠습니까?”라고 한 것과 같은 따위이다. 나라를 세울 때에도 ‘모사某事로 거북점을 친다.[모사이명구某事以命龜]’라고 할 것이나 분명한 글이 없다.
【疏】‘田能施命’者, 謂於田獵, 而能施敎命以設誓, 若士師職云 “, 用諸田役.”
전능시명田能施命’은 사냥을 할 때에 교명敎命을 내려 맹서를 할 수 있음을 말하니, 예컨대 ≪주례周禮≫ 〈추관 사구秋官 司寇 사사직士師職〉에 “세 번째가 이니 전역田役에 사용한다.”라고 하였는데,
注云 “禁, 則曰 ‘無干車, 無自後射, 其類也.’” 大司馬職云 “斬牲, 以左右徇陳曰 ‘不用命者, 斬之.’” 是也.
에 “은 곧 군례軍禮에서 ‘수레를 몰 때에 남의 수레를 범하지 않도록 하고, 화살을 한 번 쏘아 맞지 않으면 뒤에서 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종류이다.’라고 했다.” 한 것과 ≪주례周禮≫ 〈하관 대사마직夏官 大司馬職〉에 “희생犧牲을 잡아 군진을 좌우로 돌면서 ‘군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참수한다.’라고 했다.” 한 것이 이것이다.
田所以習戰, 故施命以戒衆也.
사냥은 전법을 익히는 것이기 때문에 명을 내려 군사를 경계시키는 것이다.
【疏】‘作器能銘’者, 謂旣作器, 能爲其銘. 若“爲量, 其銘曰 ‘時文思索, 允臻其極. 嘉量旣成, 以觀四國, 永啓厥後, 玆器維則.’” 是也.
작기능명作器能銘’은 기구器具를 만들고 거기에 명문銘文을 잘 쓰는 것을 말하니, ≪주례周禮≫ 〈고공기 율씨考工記 栗氏〉에 “율씨栗氏양기量器를 만들고 거기에 명문銘文을 새기기를 ‘이 문덕文德 있는 군주께서 법도를 생각하여 진실로 지극함에 이르렀도다. 훌륭한 양기量器가 완성됨에 사방의 나라에 보여주니, 길이 네 자손 계도하여 이 기물을 준칙으로 삼을지어다.’ 했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大戴禮, 說武王, 盤․盂․几․杖, 皆有銘, 此其存者也. 銘者, 名也, 所以因其器名, 而書以爲戒也.
대대례기大戴禮記≫에 무왕武王에 모두 명문이 있음을 말하였으니, 이는 현존한 것이다. ‘’이란 이니 그 기구의 이름에 따라 글을 써서 경계로 삼는 것이다.
‘使能造命’者, 謂隨前事應機, 造其辭命以對, 若, , 君無常辭也.
사능조명使能造命’은 일어난 일에 따라 임기응변하여 사명辭命을 지어 상대하는 것을 말하니, 예컨대 굴완屈完제후齊侯에게 대답하고 국좌國佐진사晉師에게 대답함에 두 이 떳떳하게 응답하지 못한 것 등이다.
【疏】‘升高能賦’者, 謂升高有所見, 能爲詩賦其形狀, 鋪陳其事勢也.
승고능부升高能賦’는 높은 곳에 올라가 보이는 것이 있으면 그 형상을 시부詩賦로 표현하고, 그 형세를 펼쳐 진술할 수 있음을 말한다.
‘師旅能誓’者, 謂將帥能誓戒之, 若之類. ‘山川能說’者, 謂行過山川, 能說其形勢而陳述其狀也.
사려능서師旅能誓’는 〈전투에 앞서〉 장수가 맹서하여 군사를 경계시키는 것을 말하니, 예컨대 의 전투에서 조앙趙鞅이 군사에게 맹서한 따위이다. ‘산천능설山川能說’은 산천을 지나면서 그 형세를 설명하여 그 모습을 진술하는 것을 말한다.
鄭志 “張逸問 ‘傳曰「山川能說」, 何謂.’ 答曰 ‘兩讀, 或云「說」者, 說其形勢, 或云「述」者, 述其古事.’” 則鄭爲兩讀, 以義俱通故也.
정지鄭志≫에 “장일張逸이 ‘에서 말한 「산천능설山川能說」은 무엇을 말합니까?’라고 묻자, 정현鄭玄이 ‘두 가지로 읽으니 「」로 말한 경우는 형세를 설명함이고, 「」로 말한 경우는 고사古事를 기술함이다.’라고 답했다.”라고 하였으니, 정현鄭玄이 두 가지로 읽은 것은 뜻이 모두 통하기 때문이다.
【疏】‘喪紀能誄’者, 謂於喪紀之事, 能累列其行, 爲文辭以作諡, 若之類,
상기능뢰喪紀能誄’는 상기喪紀(상례喪禮)의 일 중에 죽은 자의 행적을 모아 나열하여 글을 만들어 시호를 정하는 것을 말하니, 예컨대 자낭子囊나라의 왕을 ‘’이라 시호한 따위이다.
故曾子問注云 “誄, 累也, 累列生時行迹, 以作諡.” 是也.
그리하여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의 에 “는 ‘모음’이니 생시의 행적을 모아 나열하여 시호를 짓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祭祀能語’者, 謂於祭祀, 能祝告鬼神而爲言語, 若, 之類, 是也.
제사능어祭祀能語’는 제사에 귀신에게 기도하며 고하는 글을 짓는 것을 말하니, 예컨대 순언荀偃하수河水를 건널 때에 기도한 것과 괴귀蒯瞶가 조상신에게 기도한 따위가 이것이다.
君子由能此上九者, 故可爲九德, 乃可以列爲大夫. 定本․集注, 皆云‘可謂有德’, 與俗本不同.
군자는 위의 아홉 가지를 잘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구덕九德을 할 수 있어야 이에 대부의 반열이 되는 것이다. 정본定本과 ≪모시집주毛詩集注≫에는 모두 ‘가위유덕음可謂有德音’이라 하여 속본俗本과 다르다.
獨言‘可以爲大夫’者, 以大夫, 事人者, 當賢著德盛, 乃得位極人臣.
유독 ‘대부가 될 수 있다.[가이위대부可以爲大夫]’라고 한 것은, 대부는 인군을 섬기는 자이니, 어짊이 드러나고 덕이 높아야 비로소 인신人臣으로 지극히 높은 곳에 자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大夫, 臣之最尊, 故責其九能, 天子諸侯嗣世爲君, 不可盡責其能此九者.
대부는 신하 중에서 가장 존귀하다. 그리하여 이 아홉 가지의 능함을 요구하지만, 천자와 제후로서 대를 이어 인군이 된 자에게는 이 아홉 가지에 능할 것을 다 요구할 수 없다.
靈雨旣零이어늘 命彼倌人하여星言夙駕하여 說于桑田하니
단비가 내리거늘 마부에게 명하여 새벽 별 보며 수레 달려 뽕밭에 가 머무니
【傳】零 落也 倌人 主駕者
은 ‘떨어짐’이다. 관인倌人은 수레를 담당하는 자이다.
【箋】箋云 靈 善也 雨止星見이라 早也
전운箋云은 ‘좋음’이다. 은 비가 그쳐 별이 보이는 것이다. 은 ‘일찍’이다.
文公於雨下 命主駕者하되 雨止 爲我晨早駕하라 欲往爲辭說于桑田하여 敎民稼穡이라하니 務農急也
문공文公이 비가 내릴 때에 수레를 담당하는 자에게 명하기를 “비가 그치면 나를 위해 새벽 일찍 수레를 준비하라. 뽕밭에 가서 백성들에게 이야기하여 농사일을 가르치고자 한다.”라고 한 것이니, 농사에 힘쓰는 것을 급선무로 한 것이다.
○倌 說文云 小臣也 星言 韓詩云 星 舍也라하고 如字라하다이라
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지위가 낮은 신하이다.”라고 하였다. ‘성언星言’은 ≪한시韓詩≫에 “별이 뜨고 맑음이다.”라고 하였다. 모형毛亨은 ‘머물다’라고 하고, 정현鄭玄은 본음대로 읽었다. 는 ‘’이다.
匪直也人이요
용렬한 군주 아니오
【傳】非徒庸君이라
용렬한 군주가 아니다.
秉心塞淵이라
마음가짐 진실하고도 깊으니
【傳】秉 操也
은 ‘잡음’이다.
【箋】箋云 塞 充實也 深也
전운箋云은 ‘충실함’이고 은 ‘깊음’이다.
騋牝三千이로다
키 큰 말과 암말이 3천 필이네
【傳】馬七尺以上曰騋 騋馬與牝馬也
〈키가〉 7척 이상 되는 말을 라 한다. 〈3천 필은〉 큰 말과 암말이다.
【箋】箋云 國馬之制 天子 十有二으로 三千四百五十六匹이요 邦國 六閑 馬四種으로 千二百九十六匹이라
전운箋云국마國馬의 제도에, 천자는 12개의 우리에 6종의 말로 3,456필이고, 제후諸侯는 6개의 우리에 4종의 말로 1,296필이다.
衛之先君 兼邶鄘而有之하여 而馬數過禮制러니 今文公 滅而復興하고 徙而能富하여 馬有三千하니 雖非禮制 國人美之
나라의 선군이 을 겸병하여 말의 수가 예법禮法을 초과하였는데, 지금 문공文公이 멸망된 나라를 다시 부흥시키고 국도를 옮겨 부유하게 하여 말이 3,000필이나 되었으니, 비록 예법禮法에 맞지는 않지만 백성들이 이를 찬미한 것이다.
○騋牝 馬六尺已上也
내마騋馬빈마牝馬는 6척 이상인 말이다.
【疏】‘靈雨’至‘三千’
의 [영우靈雨]에서 [삼천三千]까지
○正義曰:此章, 說政治之美, 言文公, 於善雨旣落之時, 命彼倌人云‘汝於雨止星見, 當爲我早駕.
정의왈正義曰:이 은 훌륭하게 다스린 것을 설명한 것이니, 문공文公이 알맞은 비가 내릴 때에 관인倌人에게 명하길 ‘너는 비 그치고 별이 보이거든 나를 위해 일찍 수레를 준비하라.
當乘之往, 辭說於桑田之野, 以敎民之稼穡.’ 言文公, 旣愛民務農如此, 則非直庸庸之人,
수레타고 뽕밭이 있는 들에 가서 이야기하여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겠다.’라고 한 것을 말하고, 문공文公이 백성을 사랑하여 농사에 힘씀이 이와 같았으니, 그렇다면 한갓 용렬한 사람이 아니다.
故秉操其心, 能誠實, 且復深遠, 是善人也. 旣政行德實, 故能興國, 以致殷富, 騋馬與牝馬, 乃有三千, 可美之極也.
그리하여 마음가짐이 성실하고도 깊고 원대하였으니, 바로 훌륭한 사람이다. 정사가 올바르게 시행되고 덕이 진실하였다. 그리하여 나라를 부흥시켜 크게 부유하게 하여 내마騋馬빈마牝馬를 마침내 3,000필이나 소유하였으니, 지극히 찬미할 만하다고 말한 것이다.
【疏】傳‘倌人 主駕者’
의 [관인 주가자倌人 主駕者]
○正義曰:以命之使駕, 故知主駕者. 諸侯之禮亡, 未聞倌人爲何官也.
정의왈正義曰:수레를 준비하도록 명하였기 때문에 ‘수레를 주관하는 자’임을 안 것이다. 제후의 예가 없어져 관인倌人이 어떤 관직인지 알 수 없다.
【疏】傳‘馬七尺’至‘牝馬’
의 [마칠척馬七尺]에서 [빈마牝馬]까지
○正義曰:七尺曰騋, 廋人文也. 此三千, 言其摠數.
정의왈正義曰:‘칠척왈래七尺曰騋’는 ≪주례周禮≫ 〈하관 수인夏官 廋人〉의 글이다. 여기의 3,000은 총수를 말한다.
國馬供用, 牝牲俱有, 或七尺六尺, 擧騋牝以互見, 故言騋馬與牝馬也, 知非直牝而七尺.
국마國馬는 나라의 용도에 제공되기 때문에 암말과 희생용 말이 모두 있어 혹 7척이고 6척이지만 내마騋馬빈마牝馬를 들어 서로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내마騋馬빈마牝馬를 말하였으니 빈마牝馬만이 7척이 아님을 알 수 있다.
‘有三千’者, 以諸侯之, 三千已多, 明不得獨牝有三千.
유삼천有三千’은 제후의 제도로 보면 3,000필도 이미 많으니, 분명 빈마牝馬만 3,000필이 있는 것은 아니다.
輈人職注云 “國馬, 謂種馬․戎馬․齊馬․道馬, 高八尺, 田馬七尺, 駑馬六尺.” 此天子國馬有三等,
주례周禮≫ 〈고공기 주인직考工記 輈人職〉의 에 “국마는 종마種馬융마戎馬제마齊馬도마道馬를 이르니 키가 8척이고, 전마田馬는 7척이고, 노마駑馬는 6척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천자의 국마에 3등급이 있는 것을 말한다.
則諸侯國馬之制, 不一等, 明不獨七尺也. 乘車兵車及田車, 高下各有度,
그렇다면 제후의 국마 제도도 한 등급만이 아닐 것이니, 분명 7척뿐만이 아니다. 승거乘車병거兵車전거田車는 높고 낮음에 각각의 제도가 있다.
則諸侯亦齊․道高八尺, 田馬高七尺, 駑馬高六尺, 獨言騋馬者, 擧中言之.
그렇다면 제후에 있어서도 제마齊馬도마道馬는 키가 8척이고, 전마田馬는 7척이고, 노마駑馬는 6척일 것인데, ‘내마騋馬’만 말한 것은 중간을 들어 말한 것이다.
【疏】箋‘國馬’至‘美之’
의 [국마國馬]에서 [미지美之]까지
○正義曰:言國馬, 謂君之家馬也, 其兵賦, 則左傳曰 “元年革車三十乘, 季年乃三百乘.” 是也.
정의왈正義曰:〈여기에서〉 말한 ‘국마國馬’는 군주가 사용하는 말이니, 그 병부兵賦(병거의 수)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민공閔公 2년에 “문공이 원년元年에는 병거兵車가 30이었는데, 말년에는 마침내 300이었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天子十有二閑馬六種’, ‘邦國六閑馬四種’, 皆校人文也, 其天子三千四百五十六匹, 諸侯千二百九十六匹, 皆推校人而計之.
천자天子는 12 6’이고, ‘방국邦國의 제후는 6 4’이라는 것은 모두 ≪주례周禮≫ 〈하관 교인夏官 校人〉의 글이니, 위의 ‘천자 3,456필’과 ‘제후 1,296필’은 모두 〈교인校人〉의 글로 미루어 계산한 것이다.
校人又曰 “凡頒而養乘之, 乘馬, 一師四圉. 三乘爲皁, 皁一趣馬, 三皁爲繫, 繫一馭夫,
교인校人〉에 또 “양마良馬를 나누어주어 길러서 수레를 끌게 하는데, 승마乘馬(4필)는 사관師官 1명과 어관圉官 4명이고, 3(12필)이 가 되니 에는 취마관趣馬官이 1명이고, 3(36필)가 가 되니 에는 어부관馭夫官이 1명이고,
六繫爲廏, 廏一僕夫, 六廐成校, 校有左右. 駑馬, 三良馬之數.” 注云 “二耦爲乘. 自乘至廏, 其數二百一十六匹.
6(216필)가 가 되니, 에는 복부관僕夫官이 1명이고, 6(1,296필)가 를 이루니, 에는 좌교와 우교가 있다. 노마駑馬양마良馬 수의 3배이다.”라고 하였는데, 에 “두 (2필)가 (4필)이 되니, 에서 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216필이다.
易乾爲馬, 此應也. 至校變言成者, 明六馬各一廏, 而王馬小備也.
주역周易≫에서 로 여겼으니, 이는 책수策數에 응한 것이다. 에 이르러 〈‘’자를〉 바꾸어 ‘’자로 말한 것은 여섯 종류의 말이 각각 1(216필)씩이면 왕마王馬가 다소 갖추어짐을 밝힌 것이다.
校有左右, 則良馬一種者, 四百三十二匹, 五種合二千一百六十匹, 駑馬三之, 則爲千二百九十六匹,
에는 좌교와 우교가 있다. 그렇다면 양마良馬의 1은 432(216×2)필이니, 5이 2,160(432×5)필이고, 노마駑馬는 양마의 3배수이니 곧 1,296(432×3)필이므로
五良一駑, 凡三千四百五十六匹, 然後王馬大備.” 由此言之, 六廏成校, 校有左右, 則爲十二廏, 卽是十二閑,
5양마良馬에 1노마駑馬는 모두 3,456(2,160+1,296)필이다. 이와 같은 연후에 왕마가 크게 갖추어진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통해 말하면 6를 이루고 에는 좌교와 우교가 있으니, 그렇다면 12가 되니 이것이 곧 12이다.
故鄭又云 “每廏爲一閑.” 明廏別一處, 各有閑衛, 故又變廏言閑也.
그리하여 정현鄭玄이 또 “매 가 1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분명 별로 한 곳마다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또 ‘’자를 바꾸어 ‘’이라고 말한 것이다.
【疏】以一乘四匹, 三乘爲皁, 則十二匹, 三皁爲繫, 則三十六匹, 六繫成廏, 以六乘三十六, 則二百一十六匹,
1은 4필이고, 3가 되니 12필이고, 3가 되니 36필이고, 6를 이루니 6으로 〈36을〉 곱하면 216필이다.
故云 ‘自乘至廏, 其數二百一十六匹, 應乾之策.’ 謂變者, 爲揲蓍用四. 四九三十六, 謂一爻之數, 純乾六爻, 故二百一十六也.
그리하여 ‘에서 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216필이니, 책수策數에 응한다.’라고 한 것이다. ‘’이라 한 것은 시초蓍草를 헤아릴 때에 4를 쓰기 때문이다. 4×9 36은 1의 수를 말하니, 순건純乾(건괘乾卦)은 6이다. 그리하여 216인 것이다.
以校有左右, 故倍二百一十六, 爲四百三十二, 駑馬三之, 又三乘此四百三十二, 爲千二百九十六匹.
는 좌교와 우교가 있기 때문에 216의 배이니 432가 되고, 노마駑馬는 이의 3배이니 3으로 432를 곱하면 1,296필이 된다.
此天子之制, 雖駑馬數言三良, 亦以三駑之數共廏爲一閑. 諸侯言六閑馬四種, 則不種爲二閑,
이는 천자의 제도로 비록 노마駑馬양마良馬의 3배라고 하였으나, 역시 노마駑馬를 3으로 하여 를 공통으로 하면 1이 된다. 제후에 있어서 ‘6 4’을 말하였으니, 그렇다면 종마다 2이 되는 것은 아니니,
明因駑三良之數, 而分爲三閑, 與上三種各一閑而六閑, 皆二百一十六匹, 以六乘之, 故諸侯千二百九十六匹也.
분명 노마駑馬양마良馬의 3배수인 것으로 인하여 나누어 3이 되는 수에 위 3종마種馬의 각 1인 수를 더하여 6인 것이니, 모두 216필을 6으로 곱한 것이다. 그리하여 제후諸侯가 1,296필인 것이다.
【疏】是以校人又云 “大夫四閑, 馬二種.” 鄭因諸侯不種爲二閑, 亦分駑馬爲三,
이 때문에 〈교인校人〉에서 또 “대부大夫는 4 2이다.”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은 ‘제후는 종마다 2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것에 따라 노마駑馬를 나누어 3으로 하였다.
故注云 “諸侯有齊馬․道馬․田馬, 大夫有田馬, 各一閑, 其駑, 皆分爲三.” 是也,
그리하여 에서 “제후는 제마齊馬도마道馬전마田馬가 있고 대부는 전마田馬가 있는데 각 1이고, 노마駑馬는 나누어 모두 3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故鄭志“趙商問曰 ‘校人職, 天子十有二閑, 馬六種, 爲三千四百五十六匹, 邦國六閑, 馬四種, 爲二千五百九十二匹,
그리하여 ≪정지鄭志≫에 “조상趙商이 묻기를 ‘〈교인직校人職〉에는 천자는 12에 6종의 말로 3,456필이고, 방국邦國은 6에 4종의 말로 2,592필이고,
家四閑, 馬二種, 爲千七百二十八匹. 商案大夫食縣, 何由能供此馬.
는 4에 2종의 말로 1,728필이라고 하였으나, 제가 살펴보니 대부는 을 채읍으로 하니, 어떻게 이 의 말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論之, 一甸之田方八里, 有戎馬四匹, 長轂一乘, 今大夫采四甸, 一甸之稅, 以給王, 其餘三甸裁有十二匹,
사마법司馬法≫으로 논해보면 1 8융마戎馬 4필과 병거兵車 1인데, 대부는 4을 채읍으로 하니 1로 왕에게 바치면, 나머지 3에는 겨우 12필이 있게 됩니다.
今就校人職相覺, 甚.’ 答曰 ‘邦國六閑 馬四種, 其數適當千二百九十六匹, 家四閑 馬二種, 又當八百六十四,
이제 〈교인직校人職〉으로 서로 비교해보면 매우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정현鄭玄이 답하기를 “방국육한 마사종邦國六閑 馬四種은 그 수가 다만 1,296필이어야 하고, 가사한 마이종家四閑 馬二種은 또 864필이어야 하는 것이다.
今子何術計之乎. 此馬皆國君之制, 非民之賦. 司馬法, 甸有戎馬四匹, 長轂一乘, 此謂民出, 無與於天子國馬之數.’”
그런데 지금 그대는 무슨 방법으로 계산하였는가? 이 마수馬數는 모두 국군의 제도이지 백성이 내는 부세賦稅가 아니다. ≪사마법司馬法≫에 ‘마다 융마戎馬 4필과 병거 1은 백성이 내는 군부軍賦를 말한 것으로 천자 국마의 수와는 상관이 없다.’라고 했다.” 하였으니,
是鄭計諸侯大夫之明數. 趙商因校有左右, 謂二廏爲一閑, 故其數皆倍而誤.
이는 정현鄭玄이 제후와 대부가 소유하는 분명한 의 수를 헤아린 것이다. 조상趙商에 좌교와 우교가 있는 것에 연유하여 2가 1이 된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그 수가 모두 배가 되어 잘못된 것이다.
鄭以十二廏, 卽十二閑數, 諸侯大夫閑數, 駑與良同, 故云‘子以何術計之’.
정현鄭玄은 12가 곧 12이고, 제후와 대부에 있어서도 노마駑馬양마良馬한수閑數가 같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대는 무슨 방법으로 계산하였는가?[자이하술계지子以何術計之]’라고 한 것이다.
【疏】鄭以諸侯之馬, 千二百九十六匹, 而此亦諸侯之國, 馬有三千過制, 明非始文公, 所從遠矣,
정현鄭玄은 제후의 는 1,296필인데, 나라 또한 제후의 나라인데도 말이 3,000필이나 되어 에 정한 수를 초과하였지만, 이는 분명 문공文公 때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기원이 오래된 것으로 여겼다.
故本之先君, 言由衛之先君, 兼邶鄘而有之, 謂有此邶鄘之富, 而馬數過禮制, 故今文公過制也.
그리하여 선군에 근원하여 나라의 선군이 을 겸병하여 소유하였음을 말하였으니, 의 부를 소유하여 말의 수가 에서 정한 숫자를 넘었으므로, 지금 문공文公이 제도를 초과하게 된 것임을 말한 것이다.
然則三千之數違禮者也, 而校人注引詩云 ‘騋牝三千, 王馬之大數’者, 以三千與王馬數近相當,
그렇다면 3,000필의 수는 예에 어긋나니, 〈교인校人〉의 에서 이 시를 인용하여 ‘내마騋馬빈마牝馬 3,000필은 왕마王馬대수大數이다.’라고 한 것은 3,000이 왕마王馬의 수에 상당히 가깝기 때문이다.
故因言之, 其實此數, 非王馬之數也.
그리하여 이를 인하여 말한 것이니, 실제로 이 수는 왕마王馬의 수가 아니다.
定之方中三章이니 章七句
정지방중定之方中〉은 3이니 마다 7이다.
역주
역주1 (成)[城]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城’으로 번역하였다.
역주2 (城)[滅]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滅’로 번역하였다.
역주3 載馳 : ≪詩經≫ 鄘風의 편명이다. 許 穆公 夫人이 자기의 종국인 衛나라가 전복되었는데도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오빠인 懿公을 위로하는 것도 의리상 할 수 없어 지은 것이다.
역주4 木瓜 : ≪詩經≫ 衛風의 편명이다. 衛나라가 狄人에게 패하여 도망가 漕 땅에 거처하고 있을 때에, 齊 桓公이 구원하고 봉해준 것을 衛人들이 생각하고 보답하고자 지어 찬미한 것이다.
역주5 與夫人繡衣 : 懿公이 石祈子에게는 玦을 주고 甯莊子에게는 矢를 주어 나라의 장래를 부탁하고, 夫人에게 繡衣를 주면서 이 두 사람의 명을 따르라 분부한 것이다.
역주6 (滎)[熒]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熒’으로 번역하였다. 이후도 모두 같다.
역주7 (其在)[在其]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在其‘로 번역하였다.
역주8 (霄)[宵]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宵’로 번역하였다.
역주9 仲梁子 : 魯나라의 대부 季桓子의 嬖臣인 仲梁懷이다.
역주10 體與東壁連 正四方 : 28宿 중에 室星의 다음 성좌가 壁星인데 각각 두 개의 별로 이루어져서 나란히 떠서 이어지면 정사각형의 모습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역주11 [爲]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爲’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역주12 (今)[中]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中’으로 번역하였다.
역주13 六國 : 春秋時代의 齊․楚․燕․趙․韓․魏나라를 말한다.
역주14 (北)[此]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此’로 번역하였다.
역주15 十二月……有中氣 : 달마다 節氣와 中氣가 있는데, 지난달 끝에서부터 이달 반까지가 절기이고, 이달 반에서부터 끝까지가 중기이다. 예를 들면 立春은 정월의 절기가 되고, 雨水는 정월의 중기가 된다. ≪易經蒙引≫
역주16 (鄭)[歎]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歎’으로 번역하였다.
역주17 凡土功……日至而畢 : 모든 토목공사는 夏曆 9월에 角宿와 亢宿의 별이 새벽에 동쪽에 뜰 때에 측량 등 준비를 하고, 10월 초에 心宿가 새벽에 동쪽으로 나오는 때에 공사장비 등을 준비하고, 10월에 大水星이 초저녁 정남향에 뜰 때에 축판을 세워 공사를 시작하여 冬至에 마치는 것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莊公 29년≫
역주18 (裁)[栽]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栽’로 번역하였다.
역주19 僖二年……則閏在正月之後 : 僖公 2년은 閏餘가 17년에 해당되어 윤달이 4월에 있다는 말이다. 閏餘는 실제의 한 해가 달력상의 한 해보다 많은 나머지 부분이니, 이것으로 조정하여 해를 알맞게 하는 역법이다. ≪春秋左氏傳≫의 疏에 의하면 “古曆에 19년이 1章이 되는데 1章에는 7번의 윤달이 있다. 章에 들어가 살펴보면 3년차에는 윤달이 9월에 있고, 6년차에는 윤달이 6월에 있고, 9년차에는 윤달이 3월에 있고, 11년차에는 윤달이 11월에 있고, 14년차에는 윤달이 8월에 있고, 17년차에는 윤달이 4월에 있고, 19년차에는 윤달이 12월에 있다.[古曆十九年爲一章 章有七閏 入章 三年閏九月 六年閏六月 九年閏三月 十一年閏十一月 十四年閏八月 十七年閏四月 十九年閏十二月]”라고 하였다.
역주20 秦法與周異 : 秦나라는 지역이 한랭하여 공사의 일 등을 규정한 법이 주나라 월력보다 빠른 것을 말한다.
역주21 水地以縣 : 水準器의 원리를 이용하여 지면이 평평한가 아닌가를 재거나 기울기를 측량하는 것으로, 鄭玄의 注에 “四角의 땅 네 모퉁이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끈을 매달아 물의 높낮이를 살핀다. 높낮이가 정해지면 이에 자리를 만들어 땅을 평평하게 한다.[於四角立植 以縣以水 望其高下 高下旣定 乃爲位而平地]”라고 하였다. ≪周禮 考工記 匠人≫
역주22 置槷以縣 : 置槷은 해그림자를 관찰하기 위하여 세우는 말뚝인데, 말뚝의 四角과 四中에 줄을 매달아 8개의 줄이 말뚝에 붙으면 말뚝이 바른 것이다. 鄭玄의 注에 “평평하게 한 땅의 중앙에 8척의 말뚝을 세우고 줄을 매달아 말뚝을 똑바로 세우고 말뚝의 그림자를 관찰한다.[於所平之地中央 樹八尺之臬 以縣正之 眡之以其景]”라고 하였다. ≪周禮 考工記 匠人≫
역주23 (𣙗)[槷] : 북경대본의 교감기와 ≪周禮≫ 〈考工記 匠人〉에 따라 ‘槷’로 번역하였다.
역주24 遂事不諫之遂 : 이는 述의 음을 遂로 읽는 것을 밝힌 것이다. ≪論語 八佾≫
역주25 (又)[東]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東’으로 번역하였다.
역주26 會于汶 : ≪尙書≫ 〈禹貢〉에는 이 뒤에 ‘又北東 入于海’가 더 있다.
역주27 考降 無有近悔 : ≪儀禮≫ 〈士喪禮〉 鄭玄의 注에는 ‘考는 오름[登]이고 降은 내림[下]이다.’라고 하고, ‘無有近悔’는 ‘무덤이 무너지는 재앙이 없겠는가.’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역주28 三曰禁 : 士師(법관)가 나라의 다섯 가지 禁法을 가지고 형벌을 헤아리고, 다섯 가지 규율로 형벌을 가르쳐 백성들이 죄에 걸리지 않게 하는 규율 중의 하나이다. ≪周禮 秋官 司寇≫
역주29 軍禮 : 周나라 때의 吉․凶․軍․賓․嘉禮 등 五禮 가운데 하나로 정벌과 군사훈련 때에 사용하는 예절과 의식을 설명한 것이다. ≪周禮 春官 大宗伯≫
역주30 栗氏 : ≪周禮≫ 〈考工記〉에 의하면, 나라에 6가지의 직종을 두어 각종 기물을 담당하게 하는데, 금속을 다루는 工人 즉 築․冶․鳧․栗․段․桃氏 가운데 栗氏가 무게를 재는 기구(量器인 釜)를 만든 것을 말한다.
역주31 屈完之對齊侯 : 齊 桓公이 楚나라를 침략하자, 屈完이 召陵에서 齊侯에게 “侯께서 진실로 덕으로 한다면 제후들이 복종하겠지만 힘으로 楚나라를 침략한다면 楚나라는 긴 ‘方城’과 漢水로 防禦할 수 있다.”라고 하니, 齊侯가 楚나라의 방어공사가 견고함을 보고 屈完과 맹약을 맺고 군사를 철수한 일이다. ≪春秋左氏傳 僖公 4년≫
역주32 國佐之對晉師 : 齊 頃公이 재위 10년에 鞍의 전쟁에서 晉나라에게 대패하였는데, 齊나라의 國佐가 정성을 다해 이치로 설득하자 晉나라가 그해 7월에 爰婁에서 강화를 맺은 일이다. ≪春秋左氏傳 成公 2년≫
역주33 鐵之戰 趙鞅誓軍 : 晉나라의 大夫 范氏와 中行(항)氏가 鄭나라와 齊나라가 연합하여 鐵의 지역에서 같은 대부인 趙間子(趙鞅)를 공격할 때, 조간자가 장병들에게 적을 무찌른 등급에 따라 포상의 등급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이어 도망한 자에게는 엄한 벌을 내리겠다고 맹서하여 승리한 일이다. ≪春秋左氏傳 哀公 2년≫
역주34 子囊之誄楚恭 : 楚 恭王이 병들었을 때, 자기가 왕업을 잘 계승하지 못한 것과 晉나라와 전쟁에서 패한 일을 들어 諡號를 ‘靈’이나 ‘厲’로 하라고 하였는데, 子囊이 그 뜻을 어기고 ‘赫赫한 楚나라를 군왕께서 통치하여 蠻夷를 安撫하고 南海를 정벌하여 諸夏의 각국을 귀속시키고, 당신의 허물을 알았으니 共(恭遜)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시호를 ‘恭’으로 정한 일을 가리킨다. ≪春秋左氏傳 襄公 13년≫
역주35 荀偃禱河 : 晉侯 獻子(荀偃)가 齊나라를 치려고 河水를 건널 때 “만약 전쟁에서 승리하여 신께 수치를 끼치지 않게 된다면 官臣인 偃은 감히 다시 河水를 건너오지 않을 것이니, 신께서 헤아려 결정하기 바랍니다.”라고 기도하고 하수를 건넌 일을 가리킨다. ≪春秋左氏傳 襄公 18년≫ 官臣은 관직이 있는 신하를 이른다.
역주36 蒯聵禱祖 : 鄭나라와 晉나라의 전쟁에 衛나라의 태자 蒯聵가 晉나라를 돕기 위해 갈 때, 황조인 文王과 열조인 康叔과 문조인 襄公의 神에게 “이 전쟁을 이겨 三祖의 신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해주소서. 大命이야 감히 청할 수 없으나 佩玉이야 어찌 감히 아끼겠습니까.”라고 기도한 일을 가리킨다. ≪春秋左氏傳 哀公 2년≫
역주37 (旨)[音]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音’으로 해석하였다.
역주38 (精)[晴] : 저본에는 ‘精’으로 되어 있으나, ≪經典釋文≫에 의거하여 ‘晴’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9 閑 馬六種 : 閑은 말을 기르는 우리이고, 여섯 종류의 말은 玉路를 끄는 種馬, 戎路를 끄는 戎馬, 金路를 끄는 齊馬, 象路를 끄는 道馬, 田路를 끄는 田馬, 宮中의 일에 쓰이는 駑馬를 말한다. ≪周禮注疏 夏官 校人≫
역주40 (牝)[制] : 북경대본의 교감기에 따라 ‘制’로 번역하였다.
역주41 良馬 : 善馬를 말하니 駑馬 이외의 五路을 끄는 데 쓰는 말이다.[良 善也 善馬 五路之馬] ≪周禮 校人職 注≫
역주42 乾之策 : ≪周易≫ 〈繫辭傳 上〉에 “乾의 책수가 216개이고 坤의 책수가 144개이다. 그러므로 모두 360개이니, 期年의 日數에 해당하고, 上․下 두 篇의 책수가 11,520개이니, 萬物의 수에 해당한다.[乾之策二百一十有六 坤之策百四十有四 凡三百有六十 當期之日 二篇之策 萬有一千五百二十 當萬物之數也]”라고 하였다.
역주43 司馬法 : 司馬穰苴가 기원전 350년경에 지은 古代兵書인데, 戰國時代에 이미 散失되었다 한다.
역주44 (矣)[異]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異’로 번역하였다.
역주45 軍賦 : 軍事 수요에 따라 徵發하는 賦役을 말한다.

모시정의(2) 책은 2019.10.3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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