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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詩正義(1)

모시정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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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召者 禹貢雍州岐山之陽地名이라
는 ≪상서尙書≫ 〈우공禹貢〉의 옹주雍州에 속한 기산岐山 남쪽의 지명이다.
【疏】正義曰:禹貢雍州云 “荊岐旣旅.” 是岐屬雍州也.
정의왈正義曰:≪상서尙書≫ 〈우공禹貢〉의 옹주雍州에 “형산과 기산에 여제旅祭를 지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기산이 옹주에 속한 것이다.
綿之篇, 說“大王遷於.” 閟宮言 “大王居岐之陽.” 是周地在岐山之陽也.
대아 면大雅 綿〉에 “태왕이 주원周原으로 옮겼다.”라고 하고, 〈노송 비궁魯頌 閟宮〉에 “태왕이 기산의 남쪽에 거처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의 영토가 기산의 남쪽에 위치한 것이다.
孟子云 “文王以百里而王.” 則周․召之地, 共方百里而皆名曰周, 其召是周內之別名也. 大王始居其地, 至文王, 乃徙於豐.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 上〉에 “문왕이 백리의 땅으로 왕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의 땅이 사방 100리 안에 같이 있는데, 모두 라고 부른 것이니, 안의 다른 지명인 것이다. 태왕이 처음 그 지역에 거처하였다. 문왕 때에 이르러 마침내 으로 옮겼다.
周書稱王季宅程, 皇矣說文王旣伐密須, “度其鮮原, 居岐之陽.” 不出百里, 則王季居程, 亦在岐南, 程是周地之小別也.
상서尙書≫ 〈주서周書〉에 ‘왕계가 에 거처하였다.’라고 하였고, 〈대아 황의大雅 皇矣〉에 문왕이 밀수密須를 정벌하였음을 설명하면서 “좋은 언덕에 터를 잡아 기산의 남쪽에 거처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백리를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왕계가 거처한 도 기산의 남쪽이니, 경내의 작은 지역이다.
周公世次․召公世次圖(≪宋板六經圖≫)周公世次․召公世次圖(≪宋板六經圖≫)
今屬右扶風美陽縣하니 地形險阻而原田肥美
지금은 우부풍 미양현에 속하니, 지형은 험준하지만 고원의 밭은 비옥하다.
【疏】正義曰: “右扶風郡有美陽縣, 禹貢岐山在西北, 周王所居也.”
정의왈正義曰:≪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우부풍군에 미양현이 있는데, 〈우공禹貢〉에는 기산이 〈미양현의〉 서북西北에 있다고 하였으니, 주 태왕이 기거한 곳이다.”라고 하였는데,
云 “今美陽西北有岐城舊趾是也. 本或作杜陽.”
황보밀皇甫謐이 “지금 미양현 서북쪽에 기성岐城의 옛 터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미양美陽’이 간혹 ‘두양杜陽’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라고 하였다.
案志, 扶風自別有杜陽縣, 而岐山在美陽, 不在杜陽. 鄭於禹貢注云 “岐山在扶風美陽西北.” 則作‘杜’者誤也.
그러나 〈지리지地理志〉를 살펴보면 부풍군에는 본래 따로 두양현이 있으니, 기산은 미양현에 있는 것이지 두양현에 있지 않다. 정현鄭玄이 〈우공禹貢〉의 주석에서 “기산은 부풍군 미양현 서북에 있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라 한 것은 잘못이다.
皇矣稱“居岐之陽, 在渭之將.” 是其處險阻也, 綿云 “周原膴膴, 堇荼如飴.” 是地肥美也.
대아 황의大雅 皇矣〉에 “기산의 남쪽에 기거하며 위수의 곁에 머무셨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곳이 험준한 곳이고, 〈대아 면大雅 綿〉에 “의 넓은 들은 기름져서 쓴나물 씀바귀도 엿처럼 다네.”라고 하였으니, 이는 땅이 비옥한 것이다.
周之先公 曰大王者 避狄難하여 自豳始遷焉하여 而脩德建王業이라
선공先公 중에 태왕이 오랑캐의 난을 피하여 에서 처음으로 이곳에 옮겨와 덕을 쌓아 왕업을 세웠다.
商王帝乙之初 命其子王季爲西伯하고 至紂하여 又命文王하여 典治南國江漢汝旁之諸侯
상왕 제을商王 帝乙의 초기에 그 아들 왕계王季를 서백으로 삼았고, 에 이르러 또 문왕에게 명하여 남국의 강수江水한수漢水, 여수汝水를 끼고 있는 제후를 다스리게 하였다.
【疏】正義曰:以帝乙, 紂之父, 準其年世, 與王季同時. 旱麓說大王․王季之事云 “瑟彼玉瓚, 黃流在中.” 言王季受玉瓚之賜也.
정의왈正義曰제을帝乙의 부왕이므로 그 연대를 따져보면 왕계와 같은 시기이다. 〈대아 한록大雅 旱麓〉에 태왕과 왕계의 일을 설명하여 “아름다운 옥 술잔에 누런 울창주가 담겨있네.”라고 하였으니, 왕계가 옥술잔을 하사받았음을 말한 것이다.
尙書謂文王爲西伯, 當是繼父之業, 故知王季亦爲西伯. 殷之州長曰伯, 謂爲雍州伯也.
상서尙書≫에서 문왕을 서백이라 하였으니 당연히 아버지의 업을 이은 것이다. 그리하여 왕계도 서백이었음을 안 것이다. 주장州長이라 하였으니 〈문왕이〉 옹주백이 되었음을 말한다.
周禮 “作牧.” 殷之州伯, 蓋亦八命也.
주례周禮≫ 〈대종백大宗伯〉에 “팔명八命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주백州伯은 아마도 역시 팔명八命이었을 것이다.
【疏】如旱麓傳云 “九命然後, 錫以圭瓚.”
예컨대 〈대아 한록大雅 旱麓〉의 에 “구명九命이 된 뒤에 거창주와 옥 술잔을 내린다.”라고 한 것은
云 “羊容問於子思曰 ‘古之帝王, 中分天下而二公治之, 謂之二伯.
공총자孔叢子≫에 “양용이 자사에게 묻기를 ‘옛날 제왕이 천하를 둘로 나누어 이공二公(주공周公소공召公)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고 이백二伯이라 하였습니다.
周自后稷封爲王者之後, 大王․王季, 皆爲諸侯, 奚得爲西伯乎.’
후직后稷이 왕으로 봉해진 뒤로부터 태왕과 왕계가 모두 제후가 되었는데 어떻게 서백이 될 수 있었습니까?’ 하니,
子思曰 ‘吾聞諸子夏云 殷王帝乙之時, 王季以九命, 作伯於西, 受圭瓚秬鬯之賜, 故文王, 因之得專征伐. 此諸侯爲伯, 猶周․召分陝.’”
자사가 ‘내가 자하에게 들으니, 은왕 제을의 시대에 왕계가 구명九命으로 서쪽의 이 되어 옥 술잔과 거창주를 받았다. 그리하여 문왕이 이 때문에 정벌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이는 제후가 이 된 것이니, 주공周公소공召公을 나누어 다스린 것과 같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皇甫謐亦云 “王季於帝乙殷王之時, 賜九命爲西長, 始受圭瓚秬鬯.” 皆以爲王季受九命, 作東西大伯.
황보밀皇甫謐도 “왕계가 은왕 제을의 시대에 구명九命의 직을 하사받아 서쪽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어 비로소 옥 술잔과 거창주를 받았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왕계가 구명九命의 직을 받아 동서東西대백大伯 중 하나가 된 것이라 여긴 것이다.
鄭不見孔叢之書, 旱麓之箋, 不言九命, 則以王季爲州伯也.
정현鄭玄은 ≪공총자孔叢子≫를 보지 못해 〈대아 한록大雅 旱麓〉의 에서 구명九命의 직을 받은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니, 그렇다면 왕계를 주백州伯으로 여긴 것이다.
文王亦爲州伯, 故西伯戡黎注云 “文王爲雍州之伯, 南兼梁․荊, ‘在西故曰西伯.’”
문왕도 주백州伯이라 여겼기 때문에 ≪상서尙書≫ 〈서백감려西伯戡黎〉의 주석에 “문왕이 옹주의 이 되어 남쪽으로 양주梁州형주荊州의 지역을 겸하였는데, 서쪽 지역이기 때문에 ‘서백西伯’이라 하였다.”라고 한 것이다.
文王之德, 優於王季, 文王尙爲州伯, 明王季亦爲州伯也.
문왕의 덕이 왕계보다 출중했는데도 문왕을 아직 주백이라 하였으니, 왕계도 분명 주백인 것이다.
【疏】楚辭天問曰 “伯昌號衰, 秉鞭作牧.” 注云 “伯謂文王也, 鞭以喩政, 言紂號令旣衰, 文王執鞭持政, 爲雍州牧.”
초사楚辭≫ 〈천문天問〉에 “서백 의 호령이 쇠미해지자 채찍을 잡고 이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왕일王逸의 주석에 “은 문왕을 이르고 은 정사를 비유한 것이니, 의 호령이 쇠미해지자 문왕이 채찍을 잡고 정사를 하여 옹주雍州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天問, 屈原所作, 去聖未遠, 謂文王爲牧, 明非大伯也, 所以不從毛說.
천문天問〉은 굴원이 지은 것으로 성인의 시대로부터 아직 멀지 않았으니, 문왕을 이라 하였다. 분명 대백大伯이 아닌 것이니 모형毛亨의 설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言‘至紂 又命文王’者, 旣已繼父爲州伯, 又命之使兼治南國江․漢․汝旁之諸侯也.
지주 우명문왕至紂 又命文王’이라 한 것은, 아버지를 이어 주백이 되었는데 또 그에게 남국의 강수와 한수, 여수를 끼고 있는 제후를 겸하여 다스리게 한 것이다.
知者, 以漢廣序云 “美化行乎江漢之域.” .”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주남 한광周南 漢廣〉의 에 “아름다운 교화가 강수와 한수의 지역에까지 행해졌다.”라고 하고, 〈주남 여분周南 汝墳〉의 에 “여분汝墳의 나라는 부인이 〈부역나간〉 남편을 걱정하였다.”라고 한 것 때문이다.
文王三分天下而有其二, 此詩猶美江․漢․汝墳, 明是江․漢之濱, 先被文王之敎.
문왕이 천하를 3등분하여 둘을 소유하였는데 이 시에서 오직 강수와 한수, 여분을 찬미하였으니, 분명히 강수와 한수의 주변이 먼저 문왕의 교화를 받은 것이다.
若非受紂之命, 其化無由及之, 明紂命之矣.
만약 의 명을 받은 것이 아니면 그 교화가 미칠 수 없을 것이니, 분명히 가 명하였을 것이다.
江․漢之域, 卽梁․荊二州, 故尙書注云 “南兼梁․荊.” 其後化廣民附, 三分有二, 不必皆紂命也.
강수와 한수의 지역은 바로 양주와 형주 두 주이다. 그리하여 ≪상서尙書≫ 〈서백감려西伯戡黎〉의 주석에 “〈문왕文王옹주雍州이 되어〉 남쪽으로 양주와 형주를 겸하여 다스렸다.”라고 한 것이다. 그 후에 교화가 넓어지고 백성이 따라서 〈천하의〉 3분의 2를 소유하였으니 반드시 모두 가 명령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於時 三分天下有其二로대 以服事殷이라 故雍梁荊豫徐揚之人 咸被其德而從之
이때에 천하를 3등분하여 둘을 소유했는데도 을 복종하여 섬겼다. 그리하여 옹주雍州양주梁州형주荊州예주豫州서주徐州양주揚州의 사람들이 모두 그 덕화에 감화되어 따랐다.
【疏】正義曰:旣引論語‘三分有二’, 故據禹貢州名, 指而言之.
정의왈正義曰:≪논어論語≫ 〈태백泰伯〉의 ‘천하를 3등분하여 둘을 소유하였다.[삼분유이三分有二]’를 인용하였다. 그리하여 ≪상서尙書≫ 〈우공禹貢〉의 의 명칭에 의거하여 지적하여 말한 것이다.
雍․梁․荊․豫․徐․揚歸文王, 其餘冀․靑․兗屬紂, 九州而有其六, 是爲‘三分有其二’也.
옹주雍州양주梁州형주荊州예주豫州서주徐州양주揚州는 문왕에게 귀의하고, 나머지 기주冀州청주靑州연주兗州에게 속하여 9주에서 6주를 소유하였으니 이것이 ‘삼분유기이三分有其二’인 것이다.
禹貢九州, 夏時之制, 於周則夏官職方氏辨九州之域, 有揚․荊․豫․靑․兗․雍․幽․冀․幷, 校之於禹貢, 無徐․梁有幽․幷,
우공禹貢〉의 9주는 하대夏代의 제도이고, 주대周代에 대해서는 ≪주례周禮≫ 〈하관 직방씨夏官 職方氏〉에 9주의 지역을 구분하여 양주揚州형주荊州예주豫州청주靑州연주兗州옹주雍州유주幽州기주冀州병주幷州를 두었으니, 이를 〈우공禹貢〉에 견주면 서주徐州양주梁州가 없고 유주幽州병주幷州가 있다.
故地理志云 “周監二代而損益之, 改禹貢徐․梁二州, 合之於雍․靑, 分冀州之地, 以爲幽․幷.” 是其事也.
그리하여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의 2대를 살펴 덜고 더하여 〈우공禹貢〉의 서주徐州양주梁州를 고쳐 옹주雍州청주靑州에 합하고, 기주冀州의 지역을 나누어 유주幽州병주幷州로 삼았다.” 하였으니, 이것이 그 일이다.
爾雅釋地九州之名, 有冀․豫․雍․荊․揚․兗․徐․幽․營, 孫炎曰 “此蓋殷制, 禹貢有梁․靑無幽․營, 周禮有幽․幷無徐․營.”
이아爾雅≫ 〈석지釋地〉의 9주의 명칭에 기주冀州예주豫州옹주雍州형주荊州양주揚州연주兗州서주徐州유주幽州영주營州가 있는데, 손염孫炎이 “이는 아마도 은대殷代의 제도일 것이니, 〈우공禹貢〉에는 양주梁州청주靑州는 있고 유주幽州영주營州는 없으며, ≪주례周禮≫에는 유주幽州병주幷州는 있고 서주徐州영주營州는 없다.” 하였다.
【疏】然則此說不同, 不言殷․周九州而遠指禹世者, 孫炎以爾雅之文, 與禹貢不同, 於周禮又異, 故疑爲殷制耳, 亦無明文言殷改夏也.
그렇다면 이에 대한 설이 같지 않으니, 의 9주를 말하지 않고 멀리 하대夏代의 제도를 말한 것은, 손염孫炎이 ≪이아爾雅≫의 글이 〈하서 우공夏書 禹貢〉과 다르고 ≪주례周禮≫와도 다르므로 은대殷代의 제도일 것이라 의심하였고, 의 제도를 고쳤다는 명문도 없기 때문이다.
地理志云 “殷因於夏, 無所變改.” 班固不以爾雅爲世法, 又周禮冀․幽․幷, 於禹貢唯一州耳, 相率三分無一, 故從岐而橫分之.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를 따르고 바꾸어 고친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반고班固는 ≪이아爾雅≫를 세상의 바른 법으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또 ≪주례周禮≫의 기주冀州유주幽州병주幷州는 〈우공禹貢〉에는 다만 한 (기주冀州)일 뿐이니 천하를 3등분한 것에서 하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산으로부터 가로로 지역을 나눈 것이다.
據禹貢正經之文, 取六州以爲三分之二, 準禹貢之境, 論施化之處, 不言當時有此州名也.
상서尙書≫ 〈우공禹貢〉의 정경正經의 글에 의거하여 6를 취한 것을 ‘천하를 3등분하여 둘을 취했다.’ 한 것은, 〈우공禹貢〉의 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교화가 미친 지역을 논한 것이지, 당시 이러한 의 명칭이 있었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序言 “化自北而南.”, 則於岐東西之南, 得有三分二者, 岐於土中, 近北故也.
모형毛亨에서 “교화가 북에서부터 남쪽에 이르렀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기산 동서쪽의 남쪽 방향에서 3분의 2를 소유한 것이니, 기산이 영토 중앙에서 북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文王受命하여 作邑於豐하고 乃分岐邦하여 周召之地 爲周公旦召公奭之采地하여 施先公之敎於己所職之國이라
문왕文王이 천명을 받아 에 도읍을 정하고 마침내 기방을 나누어, 의 땅을 주공 단과 소공 석의 채지로 삼아 선공의 가르침을 자신이 맡은 나라에 시행하게 한 것이다.
【疏】正義曰:‘文王受命, 作邑於豐’, 文王有聲之文也.
정의왈正義曰:‘문왕수명 작읍어풍文王受命 作邑於豐’은 〈대아 문왕유성大雅 文王有聲〉의 글이다.
地理志云 “京兆鄠縣, 豐水出其東南.” 皇甫謐云 “豐在京兆鄠縣東, 豐水之西, 文王自程徙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경조京兆호현鄠縣이니 풍수豐水가 그 동남쪽에서 발원發源한다.” 하였는데, 황보밀皇甫謐은 “은 경조의 호현 동쪽과 풍수의 서쪽에 있는데, 문왕이 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하였다.
案皇矣篇云 “文王旣伐密須, 徙於鮮原, 從鮮原徙豐.” 而謐云自程, 非也.
대아 황의大雅 皇矣〉를 살펴보면 “문왕이 밀수를 정벌한 뒤에 선원으로 옮겼다가 선원에서 풍으로 옮겼다.” 하였으니, 황보밀이 ‘정에서 옮겨왔다.’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豐在岐山東南三百餘里, 文王旣遷於豐, 而岐邦地空, 故分賜二公以爲采邑也.
은 기산의 동남쪽 300여 리에 있으니 문왕이 풍으로 천도하고 나서는 기방의 땅은 통치자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공과 소공에게 나누어주어 채읍으로 삼은 것이다.
言分采地, 當是中半, 不知孰爲東西. 或以爲東謂之周, 西謂之召, 事無所出, 未可明也.
‘나누어 채지로 삼았다.’ 하였으니, 당연히 반으로 나누었을 것이지만 누가 동서를 맡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동쪽을 라 하고 서쪽을 라 한다.’ 하였으나, 근거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분명히 말할 수 없다.
【疏】知在居豐之後, 賜二公地者, 以泰誓之篇, 伐紂時事, 已言周公曰.
〈문왕이〉 으로 천도한 뒤에 주공과 소공에게 채지를 하사함을 안 것은, ≪상서尙書≫ 〈태서泰誓〉의 를 정벌할 때의 일에 ‘주공왈周公曰’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樂記說之樂, 象伐紂之事, 云 “而分陝, 周公左而召公右.” 明知周․召二公, 竝在文王時, 已受采矣.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대무大武의 음악이 를 정벌한 일을 형상했음을 말하여 “오성五成을 나누어 주공은 왼쪽을 맡고 소공은 오른쪽을 맡았다.”라고 하였으니, 주공과 소공이 모두 문왕 때에 채지를 받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文王若未居豐, 則岐邦自爲都邑, 不得分以賜人, 明知分賜二公, 在作豐之後.
문왕이 만약 아직 으로 천도하지 않았다면 기방은 본디 도읍이니 나누어 다른 사람에게 하사할 수 없다. 그리하여 주공과 소공에게 나누어 하사한 것이 을 도읍으로 정한 뒤의 일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且二南, 文王之詩, 而分繫二公, 若文王不賜采邑, 不使行化, 安得以詩繫之, 故知此時, 賜之采邑也.
또 주남과 소남은 문왕을 노래한 시인데 나누어 주공과 소공에 연계시켰으니, 만약 문왕이 채읍으로 하사하지 않고 주공과 소공으로 하여금 교화를 행하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시를 주공과 소공에 연계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이때에 주공과 소공에게 채읍으로 하사하였음을 안 것이다.
【疏】旣以此詩繫二公, 明感二公之化, 故知使‘施先公之敎於己所職之國’也.
주남과 소남의 시가 주공과 소공에게 연계된 것을 가지고 주공과 소공의 교화에 감복하였음을 밝혔다. 그리하여 주공과 소공에게 ‘시선공지교어기소직지국施先公之敎於己所職之國’하게 한 것을 안 것이다.
言‘先公’者, 大王․王季賢人, 文王承其業, 文王自有聖化, 不必要用先公.
선공先公’을 말한 것은 태왕과 왕계가 현인이고 문왕이 그들의 업을 계승하였으나 문왕은 본디 성인의 교화가 있기 때문에 굳이 선공의 교화를 쓸 필요가 없었다.
但子當述父之事, 取其宜者行之, 以先公爲辭耳, 猶自兼行聖化, 故有聖人之風.
다만 자식은 당연히 아버지의 일을 계승하여 마땅한 것을 취하여 행해야 하므로 ‘선공’으로 말을 한 것이다. 그래도 스스로 성인의 교화를 겸하여 행하였다. 그리하여 성인의 교화가 있었던 것이다.
此獨言‘施先公之敎’, 明化己之可知, 以召南有先公之敎, 故特言之耳.
여기에서 ‘시선공지교施先公之敎’만을 말한 것은 분명 자기가 아는 것으로 교화하였으나 소남召南에 선공의 교화가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말한 것이다.
文王使二公施化早矣, 非受采之後, 於此言之者, 明詩繫二公之意也.
문왕이 주공과 소공에게 교화를 베풀게 한 것이 이전의 일이고, 채지를 받은 뒤가 아닌데도 여기에서 말한 것은, 주남과 소남의 시가 주공과 소공에게 연계된 뜻을 밝힌 것이다.
言‘己所職’者, 指謂六州之人, 服從於己者.
기소직己所職’이라 한 것은 6주의 사람이 자신에게 복종한 것을 가리킨 것이다.
武王伐紂하고 定天下하여 陳誦諸國之詩하여 以觀民風俗이라
무왕이 를 정벌하고 천하를 평정하여 순수하고 술직할 때에 모든 나라의 시를 채록해 노래하게 하여 백성의 풍속을 살폈다.
六州者 得二公之德敎하여 尤純이라 故獨錄之하여 屬之大師하여 分而國之
6는 주공과 소공의 덕과 교화를 받아 더욱 순수하였다. 그리하여 그것만을 채록하여 태사에게 맡겨 주남과 소남으로 나누어 국풍國風으로 삼은 것이다.
【疏】正義曰:宣十二年左傳, 引時邁之詩云 “昔武王克商, 而作頌曰 ‘載戢干戈, 載櫜弓矢.’” 時邁序云‘巡守’, 則武王巡守矣.
정의왈正義曰:≪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선공宣公 12년에 〈주송 시매周頌 時邁〉의 시를 인용하여 “옛날 무왕이 을 정벌하고 을 짓기를 ‘창과 방패를 거두고 활과 화살을 포대에 넣도다.’라고 했다.” 하였는데, ≪시경詩經≫ 〈시매時邁〉의 에서 ‘순수巡守이다.’라고 하였으니, 곧 무왕이 순수한 것이다.
王制說巡守之禮曰 “命大師陳詩, 以觀民風俗.” 故知武王巡守, 得二南之詩也.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순수巡守의 예를 말하여 “태사에게 시를 채록하도록 하여 백성의 풍속을 살폈다.” 하였다. 그리하여 무왕이 순수하여 주남과 소남의 시를 얻었음을 안 것이다.
譜云 “天子納變雅, 諸侯納變風, 其禮同.” 則文王亦采詩, 而必知武王始得之者,
시보詩譜≫에 “천자가 변아變雅를 받아들이고 제후가 변풍變風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가 같다.”라고 하였으니, 문왕도 시를 채록하였지만 반드시 무왕이 처음으로 주남과 소남의 시를 얻었음을 안 것은,
諸侯之納變風, 直欲觀民之情, 以知己政得失耳, 非能別賢聖之異風, 立一代之大典也.
제후가 변풍을 받아들여 다만 백성의 실정을 보고 자신의 정사에 대한 잘잘못을 알고자 한 것일 뿐, 현인과 성인의 다른 풍을 분별하여 당대當代의 큰 법을 세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疏】文王猶爲諸侯, 王業未定, 必不得分定二南, 故據武王言之耳.
문왕이 아직 제후로 있을 때에는 왕업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주남과 소남으로 나누어 정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무왕에 근거하여 말했을 뿐이다.
武王徧陳諸國之詩, 非特六州而已. 而此二南之風, 獨有二公之化, 故知六州者得二公之德敎, 風化尤最純絜,
무왕이 모든 제후국의 시를 두루 채록하여 올리게 하였으니 비단 6주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주남과 소남의 국풍만이 주공과 소공의 교화가 있었다. 그리하여 6주가 주공과 소공의 덕의 교화를 받아 풍속의 교화가 가장 순수함을 알 수 있다.
故獨取其詩, 付屬之於大師之官, 使分而國之, 爲二國之風. 以大師掌之歌, 達聲樂之本, 故知屬之使分繫也.
그리하여 그 시들만을 취하여 태사에게 맡겨 구분하여 국풍으로 만들어 주남과 소남의 국풍이 되게 한 것이니, 태사가 육시六詩의 노래를 관장하여 성악의 근본에 통달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맡겨 나누어 연계시키게 한 것임을 안 것이다.
其得聖人之化者 謂之周南이요 得賢人之化者 謂之召南이니 言二公之德敎 自岐而行於南國也
성인의 교화를 받은 것을 주남周南이라 하고, 현인의 교화를 받은 것을 소남召南이라 하니, 주공과 소공의 덕의 교화가 기산으로부터 남쪽 나라에 행해진 것이다.
【疏】正義曰:文王將建王業, 以諸侯而行王道, 大王․王季是其祖父, 皆有仁賢之行, 己之聖化未可盡行,
정의왈正義曰:문왕이 왕업을 세우고자 하여 제후로서 왕도를 실행하였는데, 태왕과 왕계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서 모두 인인仁人현인賢人의 행실이 있고, 자신의 성화는 아직 다 행해질 수가 없었다.
乃取先公之敎, 宜於今者, 與己聖化, 使二公雜而施之.
그리하여 마침내 선공의 가르침으로 당시에 합당한 것과 자신의 성화를 취하여 주공과 소공으로 하여금 섞어 시행하게 한 것이다.
又六州之民, 志性不等, 或得聖人之化, 或得賢人之化, 由受敎有精麤, 故歌詠有等級.
또 6주의 백성이 성정이 같지 않아 어떤 지역은 성인의 교화를 받고 어떤 지역은 현인의 교화를 받았으니, 교화를 받음에 정밀함과 거침이 있기 때문에 노래하고 읊조림에 등급이 있는 것이다.
大師曉達聲樂, 妙識本源, 分別所感, 以爲二國其得聖人之化者, 謂之周南, 得賢人之化者, 謂之召南, 解大師分作二南之意也.
태사가 성악을 환히 알고 근본에 정통하여 감화된 것을 분별하였으니, 두 나라 중에서 ‘성인聖人의 교화를 받은 것을 주남周南이라 하고, 현인賢人의 교화를 받은 것을 소남召南이라 하였으니’는 태사가 주남과 소남으로 구분한 뜻을 해석한 것이다.
【疏】知有此理者, 序云 “關雎․麟趾之化, 王者之風, 故繫之周公. 鵲巢․騶虞之德, 諸侯之風, 故繫之召公.”
이러한 이치가 있음을 안 것은, 에서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교화는 왕자의 이기 때문에 주공에게 연계하고, 〈작소鵲巢〉와 〈추우騶虞〉의 덕은 제후의 풍이기 때문에 소공에게 연계한 것이다.” 하였기 때문이다.
以聖人宜爲天子, 賢人宜作諸侯, 言王者之風, 是得聖人之化也, 言諸侯之風, 是得賢人之化也.
이는 성인은 마땅히 천자가 되어야 하고 현인은 마땅히 제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니 ‘왕자지풍王者之風’이라 한 것은 성인의 교화를 받은 것이고, ‘제후지풍諸侯之風’이라 한 것은 현인의 교화를 받은 것이다.
以周公聖人, 故以聖人之風繫之, 以召公賢人, 故以賢人之風繫之.
그리하여 주공은 성인이므로 주남을 성인의 풍에 연계하고, 소공은 현인이므로 현인의 풍에 연계한 것이다.
以六州本得二公之敎, 因有天子之風義, 一聖一賢, 事尤相類,
6가 본디 주공과 소공의 교화를 받아 이로 인하여 천자의 풍격과 의리가 있고, 주공은 성인이고 소공은 현인으로 일이 더욱 유사하였다.
故繫之二公, 旣分繫二公, 以優劣爲次, 先聖後賢, 故先周後召也.
그리하여 주공과 소공에게 연계한 것인데, 주공과 소공에 나누어 연계하여 뒤에 우열로 차서를 삼는다면 성인을 앞에 두고 현인을 뒤에 두어야 하므로 주남을 앞에 두고 소남을 뒤에 둔 것이다.
【疏】不直稱周․召, 而連言南者, 欲見行化之地. 且作詩之處, 若不言南, 無以見斯義也. 且直言周․召, 嫌主美二公.
다만 라 하지 않고 을 이어 말한 것은 교화가 행해진 지역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고, 또 시가 지어진 곳에 대해 ‘’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뜻을 나타낼 수가 없으며, 또 만을 말하면 주공과 소공을 위주로 찬미한 것이라고 혐의할까 해서이다.
此實文王之詩, 而繫之二公, 故周․召二國竝皆云南, 見所化之處, 明其與諸國有異故也.
주남과 소남은 사실은 문왕의 교화를 노래한 시인데 주공과 소공에 연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의 두 지역에 모두 이라 하여 교화를 받은 곳을 드러내어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이 있는 이유를 밝힌 것이다.
此詩旣二公, 卽二公爲其詩主, 若有美二公, 則各從其國, 甘棠之在召南, 是其事也.
이 시를 이미 주공과 소공에게 연계하였으니, 곧 주공과 소공이 시의 주인공이다. 만약 주공과 소공을 찬미한 것이 있다면 각각 그 지역에 소속시켜야 되니, 〈감당甘棠〉이 소남에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周南無美周公, 或時不作, 或錄不得也.
주남周南에 주공을 찬미한 시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시에 지어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채록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乃棄其餘 謂此爲風之正經이라
마침내 그 나머지 시를 버렸으니, 이것이 국풍의 정경이 됨을 말한다.
【疏】正義曰:武王徧陳諸國之詩, 今唯二南在矣, 明是棄其餘也.
정의왈正義曰:무왕이 여러 나라의 시를 두루 채록해 노래하게 하였는데 현재 주남과 소남만이 남아 있으니, 분명 그 나머지 시를 버린 것이다.
하고 其後 하니 歷世有賢妃之助하여 以致其治
처음에 고공단보가 와서 집터를 정할 때에 강녀姜女와 함께하였고, 그 뒤에 태임이 주강周姜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태사가 아름다운 명성을 이었으니, 대를 이어 어진 후비后妃의 내조가 있어서 그 다스림을 지극히 한 것이다.
【疏】正義曰:此事皆在大雅也.
정의왈正義曰:이 일은 모두 대아大雅에 있다.
鄭言此者, 以二國之詩, 以后妃夫人之德爲首, 召南夫人, 雖斥文王夫人, 而先王夫人亦有是德, 故引詩文以歷言.
그런데 정현鄭玄이 이것을 말한 것은 주남과 소남의 시가 후비와 부인의 덕을 첫머리로 삼았는데, 소남에서의 부인이 비록 문왕의 부인을 가리킨 것이지만 선왕의 부인도 이러한 덕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문을 인용하여 하나하나 말한 것이다.
文王 刑于寡妻하여 至于兄弟하여 以御于家邦이라
문왕이 후비에게 모범이 되어 형제에게 미쳐서 나라를 다스렸다.
【疏】正義曰:此思齊文也. 言文王先化於妻, 卒治家國, 此明二國之詩, 先以后妃夫人爲首之意.
정의왈正義曰:이는 〈대아 사제大雅 思齊〉의 글이다. 문왕이 먼저 후비를 교화하여 마침내 나라를 다스렸음을 말하였으니, 이는 주남과 소남의 시가 먼저 후비와 부인을 첫머리로 삼은 뜻을 밝힌 것이다.
是故 二國之詩 以后妃夫人之德爲首하고 終以麟趾騶虞하니 言后妃夫人有斯德하여 興助其君子하여 皆可以成功하여 至于獲嘉瑞
이 때문에 주남과 소남의 시가 후비와 부인의 덕을 첫머리로 삼고, 〈인지지麟之趾〉와 〈추우騶虞〉를 끝으로 삼았으니, 후비와 부인에게 이러한 덕이 있음을 말하여 그 군자를 도와 모두 공을 이루어 아름다운 상서를 얻음에 이를 수 있었음을 한 것이다.
【疏】正義曰:此論二國之詩次比之意.
정의왈正義曰:이는 주남과 소남을 배열한 뜻을 논한 것이다.
‘是故’者, 緣上事生下勢之稱. 此后妃夫人, 皆大姒也, 一人而二名, 各隨其事立稱.
시고是故’는 위의 일로 인하여 아래 형세形勢가 생기는 것을 일컫는다. 여기에서 후비와 부인은 모두 태사이니, 한 사람인데 두 가지로 호칭한 것은 각각 그 일에 따라 호칭을 삼은 것이다.
禮, “天子之妃曰后, 諸侯之妃曰夫人.” 以周南王者之化, 故稱后妃, 召南諸侯之化, 故云夫人.
예기禮記≫ 〈곡례 하曲禮 下〉에 “천자의 비를 라 하고, 제후의 비를 부인夫人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니, 주남은 왕자王者의 교화를 노래하였으므로 후비后妃라 하고, 소남은 제후의 교화를 노래하였으므로 부인夫人이라 한 것이다.
直以化感爲名, 非爲先後之別, 有陳聖化, 雖受命前事, 猶稱后妃, 有說賢化, 雖受命後事, 尙稱夫人.
다만 감화됨을 명칭으로 삼은 것이지 선후의 분별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성인의 교화를 말한 것이 비록 천명을 받기 이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오히려 후비后妃라 하고, 현인의 교화를 말함이 비록 천명을 받은 뒤에 있었던 일인데도 오히려 부인夫人이라 칭한 것이다.
二國別稱, 而文王不異文者, 召南夫人爲首, 后妃變稱夫人, 足知賢聖異化, 於文王不假復異其辭,
주남과 소남을 구분하여 부르면서도 문왕에 대해서 글을 달리하지 않은 것은, 소남召南에서 부인의 덕을 첫머리에 두어 후비后妃부인夫人으로 바꾸어 불러서, 현인과 성인은 교화가 다름을 충분히 알 수 있으니, 문왕에 대해서는 다시 호칭을 다르게 할 필요가 없다.
故鵲巢之序, 言國君以, 皆以常稱言之.
그리하여 〈소남 작소召南 鵲巢〉의 국군國君을 말하되 〈부인보다〉 뒤에 뜻을 드러냈으니, 모두 통상적인 호칭으로 말한 것이다.
【疏】聖王之馭世, 符瑞必臻, 故次麟趾․騶虞於末, 欲見致嘉瑞也, 時實不致, 設以爲法, 故言耳.
성왕聖王이 세상을 다스릴 적에는 상서로운 징조가 반드시 나타난다. 그리하여 〈주남 인지지周南 麟之趾〉와 〈소남 추우召南 騶虞〉를 끝에 배열하여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음을 보이고자 하였으나 당시에 실제로 상서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가설하여 법으로 삼았기 때문에 말한 것일 뿐이다.
以詩人之作, 各言其志, 麟趾․關雎, 騶虞之與鵲巢, 未必一人作也.
시인이 시를 지음에는 각각 자기의 뜻을 말하니, 주남의 〈인지지麟之趾〉와 〈관저關雎〉, 소남의 〈추우騶虞〉와 〈작소鵲巢〉는 반드시 한 사람이 지은 것은 아니다.
麟趾言公子之信厚, 騶虞歎國君之仁心, 自取獸名, 別爲興喩, 非歎瑞應, 與前篇共相終始.
인지지麟之趾〉는 공자公子의 성실하고 인후함을 말하고 〈추우騶虞〉는 국군國君의 어진 마음을 찬탄한 것이니, 시마다 짐승의 이름을 취하여 구별하여 비유한 것이고, 상서의 응험이 앞 편과 서로 처음과 끝이 됨을 찬탄한 것이 아니다.
但君子之道, 作事可法, 垂憲後昆, 大師比之於末, 序者申明其意, 因言關雎之應, 鵲巢之應耳,
다만 군자의 도는 법이 될 일을 하여 후세에 법을 남긴다. 그리하여 태사가 〈인지지麟之趾〉와 〈추우騶虞〉를 끝에 배치하였는데, 를 지은 자가 그 뜻을 거듭 밝혀 〈인지지麟之趾〉는 〈관저關雎〉의 응험이고 〈추우騶虞〉는 〈작소鵲巢〉의 응험임을 이어 말하였을 뿐이다.
其實作者本意 不在於應, 而使詩有龍鳳之文, 亦將以之爲應, 非獨麒麟白虎也.
그러나 실제 지은이의 본뜻은 응험을 나타냄에 있지 않았다. 가령 시에 의 글이 있는 경우도 장차 이것으로 응험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니, 기린과 백호만이 아니다.
鄭答張逸云 “文王承先公之業, 積脩其德, 以致風化, 述其美以爲之法,
정현鄭玄장일張逸에게 “문왕이 선공의 기업基業을 계승하고 자신의 덕을 오래도록 실행하여 교화를 이루었으므로 그 아름다움을 찬술하여 법을 삼은 것이다.
能行其本, 則致末應, 旣致其應, 設以爲法, 是其不實致也.” 此譜於篇之大略耳.
능히 그 근본을 실천하면 의 응험을 이룰 수 있으니, 그 응험이 이루어졌으므로 가설하여 법을 삼은 것이지 이때에 실제로 상서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편의 차서를 정한 대략을 기록한 것이다.
【疏】而二風大意, 皆自近及遠, 周南關雎至螽斯, 皆后妃身事, 桃夭․兎罝․芣苢, 后妃化之所及, 漢廣․汝墳, 變言文王之化, 見其化之又遠也.
주남周南소남召南의 대의는 모두 가까운 것으로부터 먼 것에 미쳤으니, 주남周南의 〈관저關雎〉에서 〈종사螽斯〉까지는 모두 후비 자신의 일이고, 〈도요桃夭〉와 〈토저兎罝〉와 〈부이芣苢〉는 후비의 교화가 미친 것이며, 〈한광漢廣〉과 〈여분汝墳〉은 바꾸어 문왕의 교화를 말하여 문왕의 교화가 또 멀리까지 미쳤음을 드러낸 것이다.
召南鵲巢․采蘩, 夫人身事, 草蟲․采蘋, 朝廷之妻, 甘棠․行露, 朝廷之臣, 大夫之妻與夫人, 同爲陰類, 故先於召伯, 皆是夫人化之所及也.
소남召南의 〈작소鵲巢〉와 〈채번采蘩〉은 부인 자신의 일이고, 〈초충草蟲〉과 〈채빈采蘋〉은 조정 신하(대부大夫)의 아내이며, 〈감당甘棠〉과 〈행로行露〉는 조정의 신하이니, 대부大夫의 아내와 부인은 함께 음류陰類이다. 그리하여 소백보다 앞에 두었으니, 모두 부인의 교화가 미친 것이다.
羔羊以下, 言召南之國, 江沱之閒, 亦言文王之政, 是又化之差遠也.
고양羔羊〉 이하는 소남의 나라를 말한 것이고, 〈강유사江有汜〉의 강수江水타수沱水의 사이도 문왕의 정사를 말한 것이니, 이것은 더욱 교화가 멀리까지 미친 것이다.
【疏】篇之大率, 自以遠近爲差, 周南上八篇言后妃, 漢廣․汝墳言文王, 召南上二篇言夫人, 羔羊․摽有梅․江有汜․騶虞四篇言文王.
시편 배열의 대체는 본디 거리의 원근을 가지고 차등을 삼았으니, 주남에서 앞의 8편은 후비를 말하고 〈한광漢廣〉과 〈여분汝墳〉은 문왕에 대해 말하였으며, 소남에서 앞의 2편은 부인을 말하고 〈고양羔羊〉과 〈표유매摽有梅〉와 〈강유사江有汜〉와 〈추우騶虞〉 4편은 문왕에 대해 말한 것이다.
所以論后妃夫人詳於周南, 而略於召南者, 以召南夫人則周南后妃, 旣於后妃事詳, 所以召南於夫人遂略.
그리하여 후비와 부인에 대해 말한 것이 주남에 자세하고 소남에 간략한 까닭은 소남의 부인이 바로 주남의 후비이기 때문이니, 후비의 일에 대해 앞에서 자세히 말하였기 때문에 소남에서는 부인에 대해 마침내 간략히 한 것이다.
其文王之德化多少不同者, 自由作者有別, 又采得多少不同.
문왕의 덕화에 대한 시편의 가 다른 것은 본디 시를 지은 사람이 다르고 또 시를 채록한 가 다르기 때문이다.
周南桃夭, 言‘后妃之所致’, 召南羔羊云‘鵲巢之功所致’者,
주남 도요周南 桃夭〉에서는 ‘후비의 덕화가 이룬 것’이라 하고, 〈소남 고양召南 羔羊〉에서는 ‘〈작소鵲巢〉의 공이 이룬 것’이라고 한 것은,
周南桃夭以上, 皆后妃身事, 文與后妃接連, 故言后妃所致, 召南羔羊以前, 非獨夫人身事, 文與夫人不相連接, 故變言鵲巢之功所致也.
주남 도요周南 桃夭〉 이상의 시는 모두 후비 자신의 일로서 글이 후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후비소치后妃所致’라고 하고, 〈소남 고양召南 羔羊〉 이전의 시는 부인 자신의 일만이 아니고 게다가 글이 부인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작소지공소치鵲巢之功所致’라고 바꾸어 말한 것이다.
【疏】又桃夭致後三篇, 有后妃之化, 羔羊致後, 無夫人之化者, 亦是周南后妃旣詳, 於召南夫人遂略.
또 〈주남 도요周南 桃夭〉에서 아래 세 편까지는 후비의 교화가 있고, 〈소남 고양召南 羔羊〉의 아래로는 부인의 교화가 없는 것은, 역시 주남에서 후비에 대해 자세히 말했기 때문에 소남에서 부인에 대해 마침내 간략히 말한 것이다.
致者, 行化於己, 自己致人, 草蟲以下, 非復夫人身事, 亦是夫人之致也.
’는 교화가 자기에게 행해져 자신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미친 것이니, 〈초충草蟲〉 이하는 더 이상 부인 자신의 일은 아니지만 역시 부인의 덕화가 이룬 것이고,
羔羊, 召南之國化文王之政, 爲鵲巢之功所致, 則漢廣文王之道被于南國, 亦是關雎之功所致.
고양羔羊〉은 소남의 나라가 문왕의 정사에 감화되어 ‘작소지공소치鵲巢之功所致’가 된 것이니, 그렇다면 〈한광漢廣〉에서 문왕의 도가 남국에 행해진 것도 역시 〈관저關雎〉의 공이 이룬 것이다.
序者, 以此二風, 皆是文王之化, 太姒所贊. 周南, 以桃夭至芣苢三篇, 爲后妃所致,
를 지은 자는 주남과 소남이 모두 문왕의 교화로서 태사太姒가 도운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주남周南은 〈도요桃夭〉에서 〈부이芣苢〉까지 세 편을 ‘후비소치后妃所致’로 여기고,
漢廣以下, 其事差遠, 爲文王之致. 召南, 以草蟲至行露四篇, 爲夫人所致,
한광漢廣〉 이하는 그 일이 점차 멀리까지 미쳐 문왕지치文王之致로 여겼으며, 소남召南은 〈초충草蟲〉에서 〈행로行露〉까지의 네 편을 ‘부인소치夫人所致’로 여기고,
羔羊以下差遠, 爲文王之致, 各擧其事, 互相發明.
고양羔羊〉 이하는 점차 멀리까지 미쳐 ‘문왕지치文王之致’로 여긴 것이니, 각각 그 사실을 들어 서로 밝힌 것이다.
【疏】此二南之詩, 文王時作. 文王卽位, 至受命之時, 已四十餘年, 諸侯從之, 蓋亦早矣.
주남과 소남의 시는 문왕 때에 지어진 것이다. 문왕이 즉위하여 천명을 받을 때까지 40여 년이 지났으니 제후들이 문왕을 따른 것은 아마도 이보다 이른 시기일 것이다.
鄭答張逸云 “文王以諸侯而有王者之化, 卒以受命.” 是受命之前, 已行王德, 當此之時, 詩已作也,
정현鄭玄장일張逸에게 “문왕이 제후로서 왕자王者의 교화가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천명을 받았다.” 하였으니, 이는 천명을 받기 이전에 왕덕王德을 행한 것이니, 이때에 시가 이미 지어진 것이다.
何則. 化被於下, 則民述其志, 何須待布王號然後作歌.
어째서인가? 교화가 아래에 미치면 백성들이 자기의 뜻을 노래하니, 무엇 때문에 왕의 칭호가 반포되기를 기다려 노래를 만들겠는가.
武王采得之時, 二公已有爵土, 命其行化, 遂分繫之, 非由二公有土, 此詩始作也.
무왕이 채록할 때에는 주공과 소공이 작읍爵邑을 소유하여 교화를 행하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나누어 연계한 것이지, 주공과 소공이 작읍爵邑을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이 시가 비로소 지어진 것은 아니다.
周․召二十五篇, 唯甘棠與何彼襛矣二篇, 乃是武王時作.
주남과 소남 25편에 소남召南의 〈감당甘棠〉과 〈하피농의何彼襛矣〉 두 편만이 바로 무왕의 때에 지어진 것이다.
武王伐紂, 乃封太公爲齊侯, 令周․召爲二伯, 而何彼襛矣經云‘齊侯之子’, 太公已封於齊, 甘棠經云‘召伯’, 召公爲伯之後,
무왕이 를 정벌하고 태공太公제후齊侯에 봉하고 주공과 소공을 이백二伯으로 삼았으니, 〈하피농의何彼襛矣〉의 에서 ‘제후齊侯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태공이 이미 제후齊侯에 봉해진 것이고, 〈감당甘棠〉의 에서 ‘소백召伯’이라 한 것은 소공이 소백이 된 이후이다.
故知二篇皆武王時作, 非徒作在武王之時, 其所美之事, 亦武王時也.
그리하여 두 편이 모두 무왕 때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으니, 무왕의 때에 지어졌을 뿐만이 아니고 찬미한 일도 무왕의 때이다.
【疏】行露雖述召伯事, 與甘棠異時. 趙商謂其同時, 疑而發問,
행로行露〉는 비록 소백의 일을 기술한 것이지만 〈감당甘棠〉과는 때가 다르다. 조상趙商이 이 시들이 같은 때라고 여기고 의심하여 질문하였다.
“趙商問 ‘甘棠․行露之詩, 美召伯之功, 箋以爲當文王與紂之時, 不審, 召公何得爲伯’
그리하여 ≪정지鄭志≫에 “조상趙商이 묻기를 ‘〈감당甘棠〉과 〈행로行露〉의 시는 소백의 공을 찬미한 것인데, 에서 문왕과 의 때에 해당된다고 하였으니, 잘 모르겠습니다. 소공이 언제 소백이 되었습니까?’ 하니,
答曰 ‘甘棠之詩, 召伯自明, 誰云文王與紂之時乎, 至行露篇, 箋義云 ‘衰亂之俗微, 貞信之敎興’,
정현鄭玄이 ‘〈감당甘棠〉의 시는 소백의 때임이 절로 분명하니, 누가 문왕과 의 때에 지어졌다고 말했는가? 〈행로行露〉에 이르러서는 의 뜻에 「쇠란衰亂한 풍속이 줄어들고 바르고 진실한 교화가 일어났다.」 하였다.
若當武王時, 被召南之化久矣, 衰亂之俗已銷, 安得云微, 云此文王時也. 序義云 ‘召伯聽訟’者, 從後錄其意, 是以云然.”
만약 무왕의 때라면 소남의 교화가 행해진 지 오래되어서 쇠퇴하고 어지러운 풍속이 이미 사라졌으니 어떻게 「줄어들었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문왕의 때임을 말한 것이다. 〈행로行露〉의 의 뜻에서 「소백召伯이 송사를 들었다.」는 것은 뒤에 그 뜻을 기록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而鄭此答, 明甘棠箋之所云‘美其爲伯之功’, 謂武王時也.
정현鄭玄의 이 답은, 〈감당甘棠〉의 에서 말한 ‘소백이 되어 이룬 공을 찬미하였다’는 것이 무왕 때를 말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疏】此二篇, 武王時事, 得入召南風者, 以詩繫於召, 召爲詩主, 以其主美召伯, 因卽錄於召南.
이 두 편이 무왕 때의 일인데도 국풍의 소남에 넣은 것은, 시의 내용이 소공에게 연계되고 소공이 시의 주인공이 되어 소백을 주로 찬미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남에 수록한 것이다.
王姬以天子之女, 降尊適卑, 不失婦道, 召南多陳人倫, 事與相類.
왕희王姬는 천자의 딸로 높은 지위를 낮추어 낮은 제후에게 시집갔으면서도 부도婦道를 잃지 않았으니, 소남召南은 대부분 인륜을 진술한 것으로 일이 서로 같다.
又王姬賢女, 召南賢化, 又作在武王之世, 不可入文王聖化之風, 故錄之於召南也.
또 왕희는 어진 여인이고 소남은 현인賢人의 교화를 받았으며, 또 지어진 것이 무왕의 대이니, 문왕 성인의 교화를 노래한 주남에 포함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소남에 기록한 것이다.
風之始 所以風化天下而正夫婦焉이라 故周公作樂하여 用之鄕人焉하고 用之邦國焉이라
국풍國風의 시작은 천하를 교화하여 부부를 바르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공이 음악을 만들어 향인鄕人에게 사용하고 나라에도 사용하였다.
或謂之房中之樂者 后妃夫人 侍御於其君子할새 歌之하여 以節故耳
혹 이를 방중房中의 음악이라고 말한 것은, 후비와 부인이 군자를 모실 적에 여사女史가 이를 노래하여 부부간의 의리와 처첩간의 차서를 법도에 맞게 하였기 때문이다.
【疏】正義曰:云言‘或’者, 道異說也, 鄭之前世, 有爲此說者, 故因解之.
정의왈正義曰:‘’이라 한 것은 이설異說을 이르니, 정현鄭玄보다 앞선 시기에 이러한 주장이 있었기 때문에 풀이한 것이다.
二南之風, 言后妃樂得淑女, 無嫉妬之心, 夫人德如鳲鳩, 可以承奉祭祀, 能使夫婦有義, 妻妾有序.
주남과 소남의 후비后妃가 〈군자를 위하여〉 숙녀를 얻음을 기뻐하여 질투하는 마음이 없고, 부인의 덕이 뻐꾸기와 같아서 제사를 받들 만하였으니, 부부로 하여금 분별의 의리가 있게 하고 처첩妻妾으로 하여금 신분의 차서가 있게 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女史歌之, 風切后․夫人, 以節此義序, 故用之耳. 王風云 “君子陽陽, 左執簧, 右招我由房.” 謂之房.
여사가지女史歌之’는 후비와 부인을 일깨우고 권면하여 부부간의 의리와 처첩간의 차서를 법도에 맞게 하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다. 〈왕풍 군자양양王風 君子陽陽〉에서 “군자가 즐거워하여 왼손에 생황을 들고, 오른손으로 나를 불러 방중房中의 음악을 연주하네.”라고 하였으니, 노침路寢의 방을 말한 것이다.
【疏】以人君有房中之樂, 則后․夫人亦有房中之樂, 以后․夫人房中之樂, 歌周南․召南,
인군人君에게 방중의 음악이 있다면 후비와 부인에게도 방중의 음악이 있는 것이요, 후비와 부인이 방중의 음악으로 주남과 소남을 노래하였다.
則人君房中之樂, 亦歌周南․召南, 故譜下文云路寢之常樂, ‘風之正經’也.
인군의 방중 음악도 주남과 소남을 노래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남소남보周南召南譜의 아랫 글에 노침路寢(정침正寢)의 통상적인 음악을 ‘〈주남과 소남이〉 국풍의 정경正經이다.’라고 한 것이다.
天子歌周南, 諸侯歌召南, 用此‘或’說爲義也, 后․夫人用之亦當然也.
천자가 주남을 노래하고 제후가 소남을 노래한다는 것은 ‘’의 설을 따라 뜻을 삼은 것이니, 후비와 부인이 사용하였음이 또한 당연하다.
王肅云 “自關雎至芣苢, 后妃房中之樂.” 肅以此八篇, 皆述后妃身事, 故爲后妃之樂,
왕숙王肅이 “〈관저關雎〉로부터 〈부이芣苢〉까지는 후비의 방중 음악이다.” 하였으니, 왕숙은 이 8편이 모두 후비 본인의 일을 말한 것이므로 후비의 음악으로 여긴 것이다.
然則夫人房中之樂, 當用鵲巢․采蘩, 鄭無所說, 義亦或然.
그렇다면 부인의 방중악은 마땅히 〈작소鵲巢〉와 〈채번采蘩〉을 사용했을 것이니, 정현鄭玄이 말한 바는 없으나 아마도 정현의 뜻은 또한 그러하였을 것이다.
射禮 天子以騶虞하고 諸侯以貍首하고 大夫以采蘋하고 士以采蘩爲節이라
사례射禮에 천자는 〈추우騶虞〉를 절도로 삼고, 제후는 〈이수貍首〉를 절도로 삼으며, 대부는 〈채빈采蘋〉을 절도로 삼고, 는 〈채번采蘩〉을 절도로 삼았다.
【疏】正義曰:在召南之篇, 亦是用之於樂, 故言之, 禮記射義有此.
정의왈正義曰소남召南에 있는 시편도 음악에 사용하였으므로 이를 말하였으니, ≪예기禮記≫ 〈사의射義〉에 이 글이 있다.
又彼注亦以爲騶虞取其‘一發五豝’, 喩得賢者多, 貍首取‘小大莫處, 御于君所’,
또 이 〈사의射義〉의 주석에서도 〈추우騶虞〉의 ‘화살 한 발을 쏘아 다섯 마리의 멧돼지를 잡는다.’는 것을 취하여 현자賢者를 얻음이 많음을 비유한 것으로 여겼고, 〈이수貍首〉의 ‘크고 작은 벼슬아치가 자신의 관소官所에 편히 머물지 않고 모두 군주의 처소에서 군주를 모시네.’라는 것을 취하고,
采蘋取其循澗以采蘋, 喩循法度, 以成君事, 采蘩取‘夙夜在公’, 各取其篇之義以爲戒也.
채빈采蘋〉의 시내를 따라가면서 개구리밥을 따는 것을 취하여 법도를 따라서 인군의 일을 이룸을 비유한 것으로 여겼고, 〈채번采蘩〉의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공소에 있네.’를 취하였으니, 각각 그 편의 뜻을 취하여 경계로 삼은 것이다.
爲節者, 謂射之進退, 當樂節相應, 彼每篇一言爲節, 此引之省文也.
위절爲節’은 활을 쏘는 사람이 나아가고 물러남에 악절樂節에 맞게 해야 함을 말한 것이니, ≪예기禮記≫ 〈사의射義〉에서는 구절마다 ‘위절爲節’이라 했는데, 여기에서는 그 글을 인용하며 ‘위절爲節’을 생략하였다.
今無貍首 周衰 諸侯竝僭而去之하여 孔子錄詩不得也 爲禮樂之記者 從後存之로대 遂不得其次序
지금 〈이수貍首〉가 없는 것은, 가 쇠미해지자 제후들이 모두 왕을 참칭하며 이를 없애버려 공자가 시를 채록하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예악의 기록을 맡은 사람이 뒤에 기록했지만 마침내 그 차서를 얻지 못하였다.
【疏】正義曰:言此者, 以射用四篇而三篇皆在召南, 則貍首亦當在, 今無其篇, 故辨之云諸侯所以去之.
정의왈正義曰:이것을 말한 것은, 사례射禮에 네 편의 시를 사용하였는데 세 편이 모두 소남召南에 있으니, 그렇다면 〈이수貍首〉도 당연히 소남召南에 있었을 것인데, 지금 이 시편이 없기 때문에 이를 밝혀 ‘제후가 없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大射注云 “貍之言不來也. 其詩有‘射諸侯首不朝者’之言, 因以名篇, 後世失之.”
의례儀禮≫ 〈대사大射〉의 에 “라는 것은 오지 않음이다. 그 시어詩語에 ‘제후 중에 먼저 조회하지 않은 자를 쏜다.’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의 명칭으로 삼았는데 뒤에 없어졌다.” 하였으니,
然則於時, 諸侯不肯朝事天子, 惡其被射之言, 故棄之.
그렇다면 이때에 제후 중에 천자를 조회하고 섬기기를 꺼려하는 자가 화살을 맞는다는 말을 싫어하여 이 시를 버린 것이다.
【疏】爲禮樂之記者, 正謂記作射義者, 以貍首樂歌之曲, 故幷樂言之.
위예악지기자爲禮樂之記者’는 바로 사의射義를 기록하고 작성한 사람을 말하는데, 〈이수貍首〉가 악가樂歌의 곡이기 때문에 을 아울러 말한 것이다.
射義註云 “貍首, 逸詩, 下云‘曾孫侯氏’是也.” 其下文云 “故詩曰 ‘曾孫侯氏, 具擧,
예기禮記≫ 〈사의射義〉의 에 “‘〈이수貍首〉는 없어진 시이니, 아래에 ‘증손후씨曾孫侯氏’라고 한 것이 〈이수貍首〉의 이다.”라고 하였으며, 그 아랫 글에 “그리하여 에 이르기를 ‘증손曾孫제후諸侯사정四正을 모두 거행하면,
大夫君子, 凡以庶士, 小莫處, 御于君所, 以燕以射, 則燕則譽.’” 謂此是貍首經文也.
대부大夫군자君子와 모든 서사庶士로서 높고 낮은 벼슬아치가 자기의 관소에 편히 머물지 않고 모두 군주의 처소로 나아가서 연례燕禮를 행하고 사례射禮를 행하여 편안하고 명예를 얻는다.’라고 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이 〈이수貍首〉의 경문經文임을 말한 것이다.
彼雖引詩, 無貍首之字, 鄭知是貍首者, 以彼之說諸侯射法, 而引此詩,
여기에서 비록 시를 인용하였으나 ‘이수貍首’라는 글자가 없는데, 정현鄭玄이 이것이 〈이수貍首〉임을 안 것은, 저 글에서 제후의 사법射法을 말하면서 이 시를 인용하고,
其下又云 “君臣相與盡志於射以習禮樂, 則安則譽也. 是以天子制之, 而諸侯務焉.” 言諸侯用爲射節, 知是貍首之辭.
그 아래에 또 “군주와 신하가 서로 활쏘기에 마음을 다하여 예악禮樂을 익히면 편안하고 명예를 얻는다. 이 때문에 천자天子는 이 제도를 만들고 제후諸侯들은 힘쓰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제후가 이것으로 활 쏘는 절도를 삼았음을 말한 것이므로, 이것이 〈이수貍首〉의 말임을 안 것이다.
無貍首字者, 略引其文, 不盡其辭故也.
이수貍首’라는 글자가 없는 것은 그 글을 간략히 인용하여 그 말을 다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周公封魯하고 死謚曰文公하며 召公封燕하고 死謚曰康公하니 元子世之
주공을 에 봉하고 죽은 뒤에 시호를 문공文公이라 하였으며, 소공을 에 봉하고 죽은 뒤에 시호를 강공康公이라 하였는데, 원자元子가 대를 이었다.
【疏】正義曰:‘周公封魯’, ‘召公封燕’, 史記皆有世家言之.
정의왈正義曰주공周公에 봉한 것과 소공召公에 봉한 것은 ≪사기史記≫에 모두 〈세가世家〉가 있으므로 말한 것이다.
周語引常棣, 爲周文公之詩, 是周公謚曰文也, 公劉序云 “召康公戒成.” 是召公謚曰康也.
국어國語≫ 〈주어周語〉에 〈소아 상체小雅 常棣〉를 인용하여 주 문공周 文公의 시라 하였으니, 이것은 주공의 시호가 ‘’임을 말한 것이고, 〈대아 공류大雅 公劉〉의 에 “소강공召康公성왕成王을 경계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소공의 시호가 ‘’임을 말한 것이다.
閟宮云 “建爾元子.” “乃命魯公.” 是元子世之也.
노송 비궁魯頌 閟宮〉에 “그대의 원자를 세운다.”라고 하고 “이에 노공에게 명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원자가 대를 이은 것이다.
燕世家云 “自召公以下九世至惠公, 當厲王之時.” 則是失其世次, 不得召公元子名謚, 傳國於後, 是元子可知.
사기史記≫ 〈연세가燕世家〉에 “소공으로부터 아래로 9대째인 혜공에 이르러서는 여왕厲王의 때에 해당된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는 세대의 순서를 잃어 소공의 원자에 대한 이름과 시호는 알 수 없지만 나라를 후세에 전하였으니, 이가 원자元子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其次子亦世守采地하여 在王官하니 春秋時周公召公 是也
그 차자도 대대로 채지를 지켜 왕관王官(왕조王朝의 관원)에 있었으니, 춘추시대春秋時代주공周公소공召公이 이들이다.
【疏】正義曰:僖九年 “公會宰周公于葵丘.” 文五年 “召伯來會葬.” 是春秋時周公․召公也.
정의왈正義曰:≪춘추春秋희공僖公 9년에 “이 재상인 주공과 채구에서 회합했다.” 하였고, 문공文公 5년에 “소백이 와서 장례에 참여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들이 춘추시대의 주공과 소공이다.
經傳皆言周公, 謂爲, 不知何爵也. 召稱伯, 則伯爵, 以左傳多云召公, 故言公.
경과 전에서 모두 주공을 말하면서 삼공三公이 되었다 했지만 무슨 작위인지는 알 수 없다. 소공召公을 ‘’이라 칭했으니 백작일 것이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대부분 소공召公이라 하였으므로 ‘’이라 한 것이다.
其旦與奭次子名謚, 書傳無文. 平王以受采, 存本周召之名也, 非復岐周之地.
주공 과 소공 차자次子의 이름과 시호는 전해오는 전적典籍에는 언급한 글이 없다. 그러나 평왕平王서도西都에 하사했으니, 그렇다면 춘추시대에는 주공과 소공이 따로 동도東都에서 채지를 받아 본래의 의 명칭을 보존한 것이지 기주의 옛 땅을 되찾은 것이 아니다.
云 “河東郡垣縣有召亭, 周則未聞, 今爲召州.” 是也.
진서지도기晉書地道記≫에 “하동군 원현에 소정召亭이 있는데 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지금의 소주召州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左方無君世者, 此因詩繫二公, 故終言之, 其君世, 世家亡滅, 且非此所須故也.
아래에 군주의 세계世系에 대한 글이 없는 것은, 이는 주남과 소남의 시가 주공과 소공에 연계되었으므로 끝에서 이 글을 말한 것이고, 군주의 세계世系가 ≪사기史記≫의 〈세가世家〉에 사라져 없고 또한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問者曰 周南召南之詩 爲風之正經則然矣어니와 自此之後 南國諸侯政之興衰어늘 何以無變風
어떤 이가 묻기를 “주남과 소남의 시가 국풍의 정경正經인 것은 맞지만, 이후로 남쪽나라 제후들의 정치가 쇠미하였는데, 어찌하여 변풍이 없습니까?”라고 하였다.
答曰 陳諸國之詩者 將以知其缺失하고 省方設敎爲黜陟이라
답하기를 “여러 나라의 시를 채록하여 올리게 한 것은, 장차 그 나라의 실정失政을 알고 사방을 두루 살펴 교화하여 무능한 자는 축출하고 유능한 자는 높여주고자 한 것이다.
時徐及吳楚 僭號稱王하여 不承天子之風이라 今棄其詩하니 夷狄之也
당시에 는 참람하게 왕이라 칭하고 천자의 교화를 받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제 그들의 시를 버렸으니 그들을 오랑캐로 여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疏】正義曰:以列國政衰, 變風皆作, 南國諸侯, 其數多矣. 不得全不作詩, 今無其事, 故問而釋之.
정의왈正義曰열국列國의 정사가 쇠미해짐에 변풍을 모두 지었으니, 남국南國의 제후들이 그 수가 많아 전혀 시가 지어지지 않을 수 없는데도 지금 그들의 일을 노래한 시가 없다. 그리하여 묻고 대답한 것이다.
巡守陳詩者, 觀其國之風俗, 故采取詩以爲黜陟之漸, 亦旣僭號稱王, 不承天子威令, 則不可黜陟, 故不錄其詩.
천자가 순수巡守하여 시를 채록하여 올리게 한 것은 그 나라의 풍속을 관찰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를 채록하여 무능한 자는 축출하고 유능한 자는 높여 주는 단서로 삼는 것인데, 참람하게 왕이라 칭하고 천자의 정령政令을 받들지 않았다면 축출하거나 높여 줄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들의 시를 채록하지 않은 것이다.
吳․楚僭號稱王, 春秋多有其事. 知徐亦僭者, 檀弓云 “邾婁考公之喪, 徐君使容居來弔, 其辭云‘昔我先君駒王.’” 是其僭稱王也.
가 참람하게 왕이라 칭한 것은 ≪춘추春秋≫에 그 예가 많이 있다. 도 참칭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 下〉에 “주루 고공邾婁 考公의 상에 나라 군주가 그 신하 용거容居를 보내 조문하게 하였는데, 그의 말에 ‘옛날 우리 선군 구왕駒王’이라고 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참람하게 왕이라 칭한 것이다.
其餘江黃六蓼之屬 旣驅陷於彼俗하고 又亦小國으로 猶邾滕紀莒之等이라 夷其詩하여 蔑而不得列於此
그 나머지 같은 나라는 의 악한 풍속에 내몰려 물들었고, 또 작은 나라로 등의 나라도 같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시를 야만시하고 경멸하여 국풍에 포함시킬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疏】正義曰:春秋文四年, 楚人滅江, 僖十二年滅黃, 文五年, 楚滅六幷蓼, 終爲楚人所滅, 是被其驅逼陷惡俗也.
정의왈正義曰:≪춘추春秋문공文公 4년에 초인楚人을 멸망시키고, 희공僖公 12년에 을 멸망시켰으며, 문공文公 5년에 을 멸망시키고 를 병합하여, 마침내 〈가 모두〉 초인楚人에게 멸망되었으니, 이것이 에 내몰려 악한 풍속에 빠진 것이다.
旣驅陷彼俗, 亦不可黜陟, 又且小國, 政敎狹陋, 故夷其詩, 輕蔑之而不得列於國風也.
이미 악한 풍속에 내몰려 물들었으니 축출하거나 높여줄 수 없었고, 또 작은 나라로서 정사와 교화가 조잡하였다. 그리하여 그 나라의 시를 야만시하고 경멸하여 국풍에 포함시킬 수 없었다.
邾․滕․紀․莒, 春秋時小國, 亦不錄之, 非獨南方之小國也. 其魏與檜․曹, 當時猶大於邾․莒, 故得錄之.
는 춘추시대의 작은 나라로서 그들의 시를 채록하지 않은 것이니, 남방의 작은 나라만은 아니다. 는 당시에 그래도 보다는 큰 나라였으므로 그 나라의 시를 채록한 것이다.
春秋時, 燕․蔡之屬, 國大而無詩者, 云 “或時不作詩, 或有而不足錄.”
춘추시대에 와 같은 나라는 나라가 큰데도 국풍의 시가 없었으니, 이에 대하여 설종薛綜위소韋昭에게 답하기를 “어쩌면 당시에 시가 지어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지어졌지만 채록할 만하지 못해서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周原 : 西周의 故都로 周의 發祥地이다. 周城의 들판이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역주2 漢書地理志 : ≪漢書≫는 중국 25史의 하나로 後漢의 班固가 그의 아버지 班彪의 뜻을 이어 지은 漢나라 史書이고, 〈地理志〉는 漢書 28卷의 명칭이다.
역주3 (文)[大]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大’로 번역하였다.
역주4 皇甫謐 : 晉나라 사람으로 典籍과 百家에 두루 통하였으며, 성품이 침착하고 고요하여 욕심이 적었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晉書 皇甫謐列傳≫
역주5 八命 : 周代의 아홉 등급의 官秩을 九命이라고 하는데, 八命은 바로 여덟 번째의 등급이라는 말로, 州牧과 왕의 三公이 여기에 해당하였다. 후대에는 보통 고관이나 지방 장관의 대칭으로 쓰이곤 하였다. ≪周禮 春官 大宗伯≫
역주6 秬鬯 : 검은색이 나는 기장과 울금 및 향초를 버무려서 빚은 술이다.
역주7 孔叢 : 孔子의 9대손 孔鮒가 편찬한 책으로, 공자 이하 子思․子高․子順 등 일족의 언행을 모아 21편으로 엮었다.
역주8 王逸 : 후한 때 사람으로 자는 叔師이며 ≪楚辭章句≫를 지었다.
역주9 汝墳序云……婦人能閔其君子 : 〈汝墳〉 序에 “汝墳은 道德과 敎化가 행해짐을 읊은 것이다. 文王의 교화가 汝墳의 나라에 행해지니, 婦人이 부역나간 君子(남편)를 걱정하면서도 오히려 正道로써 권면한 것이다.[汝墳 道化行也 文王之化行乎汝墳之國 婦人能閔其君子 猶勉之以正也]”라고 하였다.
역주10 大武 : 周 武王이 殷 紂를 토벌하고 지은 음악이다.
역주11 五成 : 大武는 과업을 완성하고 여섯 단계로 舞樂을 연주한 것인데, 五成은 다섯 단계의 음악이다.
역주12 巡守述職 : 巡守는 천자가 제후의 정치를 살피는 것이고, 述職(朝覲의 다른 명칭)은 제후가 천자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尙書≫ 〈舜典〉에 “천자가 5년에 한 번 순수하면 제후들은 네 곳에서 조근한다.” 하였다.
역주13 六詩 : ≪詩經≫의 六義로, 賦․比․興․風․雅․頌을 말한다.
역주14 (繼)[繫]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繫’로 번역하였다.
역주15 古公……姜女 : 〈大雅 綿〉에 “고공단보가 아침에 말을 달려와 서쪽 물가를 따라 기산 아래에 이르렀도다. 이에 강씨 부인과 함께 와서 집터를 보아 잡았도다.[古公亶父 來朝走馬 率西水滸 至于岐下 爰及姜女 聿來胥宇]”라고 하였다.
역주16 大任……徽音 : 〈大雅 思齊〉에 “엄숙하신 태임이 문왕의 어머니이시니 주강에게 사랑을 받아 王室의 며느리가 되었네. 태사가 그 아름다운 명성 이으시니 아들이 백 명이나 되도다.[思齊太任 文王之母 思媚周姜 京室之婦 太姒嗣徽音 則百斯男]”라고 하였다.
역주17 著義於後 : 君主의 덕보다 后夫人의 덕을 먼저 말한 것을 말한다. 關雎章의 序에 ‘關雎 后妃之德也’라고 하고, 鵲巢章의 序에서는 ‘鵲巢 夫人之德也’라고 한 것을 해석한 것이다.
역주18 (此)[比]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比’로 번역하였다.
역주19 : ≪鄭志≫를 가리킨다. ≪鄭志≫는 鄭玄의 손자 鄭小同이 鄭玄과 그 門人들의 문답을 기록한 책이다.
역주20 女史 : 天官의 소속으로, 王后의 禮를 맡고 閨門 안의 일을 기록하였다. ≪周禮 天官 女史≫
역주21 義序 : 아래 疏의 내용에서 夫婦間 分別의 義理와 妻妾間 身分의 次序로 구분하고 있다.
역주22 路寢 : 路는 大의 뜻이고 寢은 室의 뜻이니, 곧 天子나 諸侯가 정사를 듣는 正殿을 가리킨다.
역주23 四正 : 활 쏘는 의식에서 賓과 國君, 卿과 大夫에게 술잔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역주24 (人)[大]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大’로 번역하였다.
역주25 三公 : ≪尙書≫와 ≪禮記≫에 의거하면 司馬와 司徒와 司空이라 하고, ≪周禮≫에 근거하면 太傅와 太師와 太保라 한다.
역주26 西都……東都 : 文王이 豐에 도읍하였다가 武王代에 鎬京에 도읍하였고, 成王 때에는 洛邑에 궁성을 두어 東都로 삼고 鎬京을 西都라 하였다.
역주27 晉書地道記 : 東晉의 王隱이 지은 지리서이다.
역주28 薛綜 : 삼국시대 吳나라 사람으로 자는 敬文이며 저서에는 ≪詩賦雜論≫ 등이 있다.
역주29 韋昭 : 삼국시대 吳나라 사람으로 자는 弘嗣이며 저서에는 ≪吳書≫와 ≪漢書音義≫ 등이 있다.

모시정의(1) 책은 2019.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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