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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詩正義(1)

모시정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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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甘棠 美召伯也 召伯之敎 明於南國이라
감당甘棠〉은 소백召伯을 찬미한 것을 읊은 시이다. 소백召伯교화敎化남국南國에 밝게 드러난 것이다.
【箋】召伯 姬姓이요 名奭이라 食采於召하고 作上公하여 爲二伯하고 後封于燕이라 此美其爲伯之功이라 故言伯云이라
소백召伯이고, 이다. 채읍采邑으로 받았고, 상공上公이 되어 이백二伯이 되었으며, 뒤에 에 봉해졌다. 이 시가 을 찬미하였으므로, 이라 한 것이다.
○甘棠 草木疏云 今棠라하니라 召康公名也
감당甘棠은 ≪모시초목조수충어소毛詩草木鳥獸蟲魚疏≫에 “지금의 당리棠梨이다.”라고 하였다. 소강공召康公의 이름이다.
燕世家云 與周同姓라하고 孔安國及鄭皆云爾이어늘 皇甫謐云 文王之庶子라하니
사기史記≫ 〈연세가燕世家〉에 “동성同姓이다.”라고 하고, 공안국孔安國정현鄭玄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는데, 황보밀皇甫謐은 “문왕文王서자庶子이다.”라고 하니,
案左傳富辰言 無燕也 未知士安之言何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부신富辰이 말한 ‘문지소文之昭’를 살펴보면 16 안에 이 들어 있지 않으니, 사안士安(황보밀皇甫謐)의 말은 무엇을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國名이니 在周禮 幽州之域이요 今涿郡薊縣 是也
은 나라 이름이니, ≪주례周禮≫에서 말한 유주幽州의 지역에 속하고, 지금 탁군 계현涿郡 薊縣이 이곳이다.
【疏】‘甘棠(三章章三句)’至‘南國’
의 [감당甘棠]에서 [남국南國]까지
○正義曰:謂武王之時, 召公爲西伯, 行政於南土, 決訟於小棠之下, 其敎著明於南國, 愛結於民心, 故作是詩以美之.
정의왈正義曰무왕武王 때에 소공召公서백西伯이 되어 남쪽 지방에서 정사를 행할 때에 작은 팥배 나무 아래에서 송사를 판결하였는데, 그의 교화가 남국南國에 밝게 드러나 백성들의 마음에 사랑을 얻었다. 그리하여 이 시를 지어 찬미한 것이라 한 것이다.
經三章, 皆言國人愛召伯而敬其樹, 是爲美之也.
의 세 은 모두 나라 사람들이 소백召伯을 사랑하여 그 나무를 공경히 대함을 말하였으니, 이것이 찬미한 것이다.
諸風․雅正經皆不言美, 此云‘美召伯’者, 二南, 文王之風, 唯不得言美文王耳, 召伯, 臣子, 故可言美也.
모든 정경正經에서는 모두 ‘찬미’라고 말하지 않는데 여기서 ‘소백召伯을 찬미한 것’이라고 한 것은 주남周南소남召南문왕文王이지만 문왕文王만을 찬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소백召伯은 신하이므로 찬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서이다.
芣苢言后妃之美, 謂說后妃之美行, 非美后妃也, 皇矣言美周, 不斥文王也.
주남 부이周南 芣苢〉에서 후비后妃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한 것은 후비后妃의 아름다운 행실을 말한 것이지 후비后妃를 찬미한 것은 아니고, 〈대아 황의大雅 皇矣〉에서 를 찬미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문왕文王을 가리킨 것은 아니다.
至於變詩, 美刺各於其時, 故善者言美, 惡者言刺, 豳亦變風, 故有美周公.
변시變詩의 경우는 각각의 그 시대에 따라 찬미하거나 풍자하였으므로, 한 것은 찬미한 것이라고 말하고, 한 것은 풍자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니, 빈풍豳風변풍變風이므로 주공周公을 찬미함이 있는 것이다.
【疏】箋‘召伯’至‘伯云’
의 [소백召伯]에서 [백운伯云]까지
○正義曰:燕世家云 “召伯奭與周同姓.” 是‘姬姓 名奭’也, 皇甫謐以爲文王庶子, 未知何所據也. 言‘作上公 爲二伯’, 故云‘召伯’.
정의왈正義曰:≪사기史記≫ 〈연세가燕世家〉에 “소백 석召伯 奭동성同姓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이고 임을 말하는 것인데, 황보밀皇甫謐문왕文王서자庶子라고 한 것은 무엇을 근거했는지 모르겠다. ‘작상공 위이백作上公 爲二伯’이라 하였기 때문에, ‘소백召伯’이라 말한 것이다.
典命職云 “上公九命爲伯.” 然則二伯卽上公, 故言‘作上公 爲二伯’也.
주례周禮≫ 〈전명직典命職〉에 “구명九命상공上公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백二伯이 곧 상공上公이다. 그리하여 ‘작상공 위이백作上公 爲二伯’이라 한 것이다.
食采, 文王時, 爲伯, 武王時, 故樂記曰武王伐紂, “而分陜, 周公左召公右.” 是也.
채읍采邑을 받은 것은 문왕文王 때이고, 이 된 것은 무왕武王 때이다. 그리하여 ≪예기禮記≫ 〈악기樂記〉에서 무왕武王를 정벌하고서 “다섯 번째 악곡에서 섬서陝西를 나누어 주공周公에게 왼쪽(동쪽)을, 소공召公에게 오른쪽(서쪽)을 다스리게 하였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食采爲伯, 異時連言者, 以經召與伯幷言, 故連解之. 言‘後封於燕’者, 世家云 “武王滅紂, 封召公於北燕.” 是也.
채읍采邑을 받은 때와 이 된 때의 시기가 다른데 연이어 말한 것은 에서 을 아울러 말했기 때문에 연이어 풀이한 것이다.‘후봉어연後封於燕’은 〈연세가燕世家〉에서 “무왕武王하고 소공召公북연北燕에 봉하였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必歷言其官者, 解經唯言召伯之意. 不擧餘言, 獨稱‘召伯’者, 美其爲伯之功, 故言伯云.
반드시 그의 관직을 낱낱이 말한 것은 에서 소백召伯이라고만 말한 뜻을 풀이한 것이다. 다른 말은 거론하지 않고 ‘소백召伯’만을 말한 것은 이 시가 이었을 때의 을 찬미하였으므로, 이라 말한 것이다.
【疏】故鄭志張逸, 以行露箋云 “當文王與紂之時.” 謂此甘棠之詩, 亦文王時事.
그리하여 ≪정지鄭志≫에서 장일張逸이 〈소남 행로召南 行露에 “문왕文王의 때에 해당한다.”라고 하였으니, 이 〈감당甘棠〉의 문왕文王 때의 일이라고 여기었다.
故問之云 “詩傳及樂記, 武王卽位, 乃分周公左, 召公右爲二伯, 文王之時, 不審召公何得爲伯.”
그리하여 묻기를 “≪모시毛詩≫의 과 ≪예기禮記≫ 〈악기樂記〉에서 무왕武王즉위卽位하고 〈협서陜西를 나누어〉 주공周公, 소공召公우 이백右 二伯으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문왕文王 때에 어떻게 소공召公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니,
答曰 “甘棠之詩, 召伯自明, 誰云文王與紂之時乎.” 是鄭以此篇所陳, 巡民決訟, 皆是武王伐紂之後, 爲伯時事.
하기를 “〈감당甘棠〉의 소백召伯〈을 찬미한 것〉이 분명한데, 누가 문왕文王 때라 하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정현鄭玄이 이 편에서 말한바 백성을 순행巡行하여 송사를 판결한 것을 모두 무왕武王한 뒤 〈소공召公이〉 이 되었을 때의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鄭知然者, 以經云召伯, 卽此詩召公爲伯時作也. 序言‘召伯’, 文與經同, 明所美亦是爲伯時也.
정현鄭玄이 그러한 것을 안 것은 에서 ‘소백召伯’이라 하였기 때문이니, 바로 이 소공召公이었을 때 지은 것이다. 에서 말한 ‘소백召伯’이라 한 것은 글이 과 같으니, 분명 찬미한 것도 이 되었을 때이다.
若文王時, 與周公共行王化, 有美卽歸之於王. 行露直言‘召伯聽訟’, 不言美也.
만약 문왕文王 때라면 주공周公과 함께 교화敎化를 행하였으니, 찬미할 일이 있으면 바로 문왕文王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소남 행로召南 行露〉에서 ‘소백청송召伯聽訟’이라고만 하고, 찬미한 것이라 말하지 않은 것이다.
詩人何得感文王之化, 而曲美召公哉. 武王之時, 召公爲王官之伯, 故得美之, 不得繫之於王.
시인詩人이 어떻게 문왕文王교화敎化에 감복하고도 왜곡하여 소공召公을 찬미하겠는가? 무왕武王 때에 소공召公조정朝廷관직官職이 된 것이므로, 찬미할 수 있었으니, 문왕文王과 연결시킬 수가 없다.
因詩繫召公, 故錄之在召南. 論卷則摠歸文王, 指篇卽專美召伯也.
소공召公에 관계되기 때문에 채록하여 소남召南에 둔 것이다. 을 논하면 모두 문왕文王에게 돌아가고, 을 근거하면 온전히 소백召伯을 찬미한 것이다.
爲伯分陜, 當云西國, 言南者, 以篇在召南爲正耳.
을 나누어 이 되었으므로, ‘서국西國’이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라 한 것은 이 소남召南에 있는 것을 바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蔽芾甘棠 勿翦勿伐하라 召伯所茇이니라
작은 팥배나무 자르지 말고 치지 마라 소백召伯의 초막이 있던 곳이니라
甘棠(≪毛詩品物圖攷≫)甘棠(≪毛詩品物圖攷≫)
【傳】蔽芾 小貌 甘棠 杜也 擊也
폐비蔽芾는 ‘작은 모습’이다. 감당甘棠(팥배나무)이다. 은 ‘자르는 것’이고, 은 ‘치는 것’이다.
【箋】 草舍也 召伯聽男女之訟 不重煩勞百姓하여 止舍小棠之下而聽斷焉이라
전운箋云은 초막이다. 소백召伯남녀男女의 송사를 처리할 때 백성百姓을 거듭 수고롭게 하지 않으려고 작은 팥배나무 아래 초막에 머무르며 송사를 처리하였다.
國人被其德하여 說其化하고 思其人하여 敬其樹
나라 사람들이 그의 덕택德澤을 입어 그의 덕화德化를 기뻐하고, 그를 그리워하여 그 나무를 공경히 대한 것이다.
○翦 韓詩作箋하고 說文作废니라
은 ≪한시韓詩≫에 ‘’으로 되어 있고, 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로 되어 있다.
【疏】‘蔽芾’至‘所茇’
의 [폐비蔽芾]에서 [소발所茇]까지
○正義曰:國人見召伯止舍棠下, 決男女之訟, 今雖身去, 尙敬其樹,
정의왈正義曰:나라 사람들이 소백召伯이 팥배나무 아래 초막에 머무르며 남녀男女의 송사를 처리하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 비록 그는 떠났으나 아직도 그 나무를 공경히 대하여
言蔽芾然之小甘棠, 勿得翦去, 勿得伐擊, 由此樹召伯所嘗舍於其下故也.
‘작은 팥배나무를 잘라 없애지 말고, 쳐내지도 말라.’고 하였으니, 이 나무는 소백召伯이 일찍이 그 아래서 머물렀던 것이기 때문이다.
【疏】傳‘蔽芾’至‘草舍’
의 [폐비蔽芾]에서 [초사草舍]까지
○正義曰:此比於大木爲小, 故其下可息. 我行其野云 “蔽芾其樗.” 箋云 “樗之蔽芾始生.” 謂樗葉之始生形亦小也.
정의왈正義曰:이 나무가 큰 나무에 비해 작으므로, 그 아래에서 쉴 수 있는 것이다. 〈소아 아행기야小雅 我行其野〉에서 “막 돋아나는 가죽나무[폐비기저蔽芾其樗]”라고 하였는데, 에서 “가죽나무의 잎이 막 돋아 처음 생겨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가죽나무의 잎이 처음 생겨나는 모습도 작음을 말한 것이다.
釋木云 “杜, 甘棠.” 郭璞曰 “今之杜犂.” 又曰 “杜, 赤棠, 白者, 棠.”
이아爾雅≫ 〈석목釋木〉에 “감당甘棠이다.”라고 하였는데, 곽박郭璞은 “지금의 두리杜犂이다.”라고 하고, 또 〈석목釋木〉에 “적당赤棠이고, 흰 것은 이다.”라고 하였는데,
舍人曰 “杜, 赤色, 名赤棠, 白者亦名棠.” 然則其白者爲棠, 其赤者爲杜, 杕杜傳曰 “杜, 赤棠.” 是也.
사인舍人이 “는 붉은색이고 이름이 적당赤棠인데, 흰 것도 이름이 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흰 것은 이라 하고, 붉은 것은 라 한 것이니, 〈당풍 체두唐風 杕杜〉의 에 “적당赤棠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茇草舍’者, 周禮 “仲夏敎茇舍.” 注云 “舍, 草止也, 軍有草止之法.” 然則茇者, 草也, 草中止舍, 故云茇舍.
발 초사茇 草舍’는 ≪주례周禮≫ 〈하관 사마夏官 司馬〉에 “중하仲夏에 군대를 들에서 숙영宿營하게 한다.[중하교발사仲夏敎茇舍]”라고 하였는데, 에서 “는 들에서 숙영宿營함이니, 군대는 들에서 숙영宿營하는 법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은 풀이니, 풀 가운데 머물러 쉬는 것이다. 그리하여 ‘발사茇舍’라고 한 것이다.
載馳傳曰 “草行曰跋.” 以其對涉是水行, 故以跋爲草行, 且‘跋’字從足, 與此異也.
용풍 재치鄘風 載馳〉의 에 “풀길을 가는 것이 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이 물길을 가는 것에 대구對句한 것이므로 을 풀길을 가는 것이라 한 것이고, 또 ‘’자는 부수部首를 따르니 여기와는 다르다.
【疏】箋‘召伯’至‘其樹’
의 [소백召伯]에서 [기수其樹]까지
○正義曰:定本․集注於注內, 竝無‘箋云’. 知聽男女訟者, 以此舍於棠下, 明有決斷. 若餘國政, 不必於棠下斷之,
정의왈正義曰정본定本집주集注 안에는 모두 ‘전운箋云’이 없다. 남녀男女의 송사를 들었음을 안 것은 이렇게 팥배나무 아래에 묵으면서 분명하게 판결하였다. 다른 국정國政 같은 경우는 반드시 팥배나무 아래에서 판결하지 않는다.
故大車刺周大夫, 言古者大夫出聽男女之訟, 明王朝之官有出聽男女獄訟之理也.
그리하여 〈왕풍 대거王風 大車〉에서 대부大夫를 풍자하여 ‘옛날에는 대부大夫가 나가 남녀男女간의 송사를 처리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분명 조정의 관리가 나아가 남녀男女간의 옥송獄訟을 처리하는 다스림이 있는 것이다.
且下行露, 亦召伯聽男女之訟, 以此類之, 亦男女之訟可知. 武王時, 猶未刑措, 寧能無男女之訟.
또 아래편의 〈행로行露〉도 소백召伯남녀男女의 송사를 처리한 것이니, 이것으로 유추類推하면 역시 남녀男女의 송사임을 알 수 있다. 무왕武王 때에도 오히려 형벌을 사용하였으니 어찌 남녀男女의 송사가 없었겠는가.
蔽芾甘棠 勿翦勿敗하라 召伯所憩
작은 팥배나무 자르지 말고 해치지 마라 소백召伯께서 쉬던 곳이니라
【傳】憩 息也
는 ‘쉼’이다.
蔽芾甘棠 勿翦勿拜하라 召伯所說니라
작은 팥배나무 자르지 말고 뽑지 마라 소백召伯께서 머물던 곳이니라
【傳】說 舍也
는 ‘머무름’이다.
【箋】箋云 拜之言 拔也
전운箋云의 뜻은 ‘뽑는다’이다.
○說 本或作稅하고 又作脫이니 舍也
는 ‘’로 되어 있는 이 있고, ‘’로 되어 있는 도 있으니, ‘머무름’이다.
甘棠三章이니 章三句
감당甘棠〉은 3이니, 마다 3이다.
역주
역주1 (黎)[棃]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棃’로 번역하였다.
역주2 文之昭 : 文王의 아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朱子는 “文王이 穆이므로 그의 아들을 ‘文王의 昭[文之昭]’라고 일컬었다.”고 하였다.
역주3 十六國 : ≪春秋左氏傳≫ 僖公 24년에 富辰이 “管․蔡……酆․郇 16國은 文王의 아들 나라이다.[管 蔡 郕 霍 魯 衛 毛 聃 郜 雍 曹 滕 畢 原 酆 郇 文之昭也]”라고 하였다.
역주4 (慾)[憑] : 저본의 교감기에 따라 ‘憑’으로 번역하였다.
역주5 五成 : 武王의 舞樂 중 다섯 번째의 樂曲을 말한다. 成은 악곡이 한 번 끝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무왕의 악곡은 모두 六成이다. “첫 번째 악장은 처음 북쪽으로 출병한 것을 상징한 것이고, 둘째 악장은 商을 멸망시킨 것을 상징한 것이고, 셋째 악장은 殷을 정벌하고 힘이 남아 남쪽으로 돌아온 것을 상징한 것이고, 넷째 악장은 南國들이 복종한 것을 상징한 것이고, 다섯째 악장은 陝을 나누어 주공과 소공에게 좌우로 다스리게 한 것을 상징한 것이고, 여섯째 악장은 군대가 돌아와 정돈한 것을 상징한 것이다.[始奏 象觀兵盟津時也 再奏 象克殷時也 三奏 象克殷有餘力而反也 四奏 象南方荊蠻之國侵畔者服也 五奏 象周公召公分職而治也 六奏 象兵還振旅也]”라고 하였다. ≪禮記正義 樂記≫
역주6 箋云 : 아래 疏에서 定本과 集注에 ‘箋云’이란 글자가 없다고 하였으니, 定本과 集注는 이 箋이 傳에 해당된다고 여긴 것이고, 孔穎達은 아래 疏를 쓸 때에 傳은 ‘蔽芾’에서 ‘草舍’까지이며, 箋은 ‘召伯’에서 ‘其樹’까지라고 구분하여 달리 보았다.

모시정의(1) 책은 2019.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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