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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道德經注

노자도덕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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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하나니 當其無일새 有車之用하고
以其無 能受物之故 統衆也
11.2 하나니 當其無일새 有器之用하고 鑿戶牖以爲室하나니 當其無일새 有室之用이라
[注]木埴壁으로 所以成三者 而皆以無爲用也
역주
역주1 三十輻 共一轂 : 帛書本에는 ‘卅輻 同一轂’으로 되어 있다. ‘卅’은 ‘三十’과 뜻이 같다. 秦 始皇陵에서 발굴된 戰車의 바퀴살이 실제 30개로 되어 있는데, 河上公本에서는 바퀴살이 서른 개인 것은 ‘한 달의 날 수를 본받은 것[法月數]’이라 하였으니 참고할 만하다.
역주2 轂所以能統三十輻者 無也 : 王弼은 無의 쓰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쓰임은 ‘비어 있음[無]’으로부터 유래한다.
역주3 故能以(實)[寡]統衆也 :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거느린다는 말은 注41.13에서도 “나누면 많은 것을 거느릴 수 없다.[分則不能統衆]”고 하였다. 이것은 王弼의 중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이다. 漢의 鄭玄은 《周禮》의 ‘輪人’에 관한 注에서 ‘轂’에 대해 “바퀴통은 그 비어 있음으로 인해 쓰이게 된다.[轂 以無有爲用也]”라 하였는데, 孔穎達은 疏에서 《老子》 11장과 연결하여 설명하였다.
역주4 (實)[寡] : 저본에는 ‘實’로 되어 있으나, 陶鴻慶이 ‘寡’의 잘못이라 校改한 이래, 일반적으로 이를 따르므로 ‘寡’로 바로잡는다.
역주5 埏埴以爲器 : 帛書本 甲本에는 ‘埏’이 ‘然’으로, 乙本에는 ‘燃’으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許抗生(《帛書老子注譯與硏究》)은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진흙을 구워서 그릇을 만든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帛書本 整理者는 ‘燃’을 ‘埏’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역주6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 정세근은 《노장철학》에서 이러한 태도를 《莊子》와 비교하여 莊子가 ‘쓸모없는 것의 쓸모[無用之用]’를 강조한다면, 王弼은 ‘무의 쓸모[無之用]’를 강조한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王弼은 注40.1에서도 ‘有以無爲用(유는 무를 쓰임으로 삼는다.)’이라 하고 있다.
역주7 言(無者)有之所以爲利 皆賴無以爲用也 : 저본에는 ‘言無者有之所以爲利’라 하여 ‘無者’ 두 글자가 더 있는데 日本學者 波多野太郞은 《老子王注校正》에서 이를 衍字로 보았다. 樓宇烈과 바그너 또한 이를 지적하였는데, 注1.4에서 ‘凡有之爲利 必以無爲用’이라 하였고 또 注40.1에서 ‘有以無爲用’이라 하였으니 衍字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왕필이 ‘無’를 작용이나 쓰임새로 연결시키는 중요한 논리가 드러나는 곳이다. 왕필은 ‘無’를 두 가지 차원에서 중시한다. 하나는 ‘大衍之數’를 설명하면서 50개의 산가지 가운데 하나가 작용의 중심인 하나[一]이며, 이 때문에 나머지 산가지가 모든 괘를 낳는 작용을 한다고 풀이하는 점에서 쓰임과 관련된다. 또 하나는 바로 ‘無’를 ‘비어 있음[虛]’으로 설명하면서 빈 곳에 다른 물건을 담거나 쓰임새가 있다는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無의 쓰임을 이끌어낸다. 이 모두에서 無가 존재론적인 虛無의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易學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用九(陽爻), 用六(陰爻)처럼 用은 역학의 세계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제11장은 《노자老子》의 유명한 장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장은 바퀴, 그릇, 방, 창문은 물론 문 등의 형상을 통해 의 일정한 기능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기본적으로는 가 갖는 효용성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달리 말해서 이런 사례들은 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를 통해 최고의 덕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판본板本에 따른 차이는 크게 없으나 죽간본竹簡本에는 이 장이 빠져 있다.
빈 중심과 가득 찬 주변으로 이루어진 구조(the structure of an empty and a full periphery)는 물질적으로 또는 기계적으로는 물론이고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기능한다. 성인은 자신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스스로를 다스린다고 가정되는데, 사회의 중심에 있는 성인 군주는 함이 없고 그럼으로써 국가가 잘 기능하도록 한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언제나 비어 있음 또는 없음이 있음과 가득 차 있음과 나란히 간다는 점이다. 비어 있음 혼자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심지어 그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중심이란 중심이 되게 하는 주변을 필요로 한다. 도가는 일방적으로 비어 있음 또는 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도의 한 가지 또는 중심적인 측면일 뿐이며 그것만을 분리하여 말할 수 없다. 비어 있음과 가득 차 있음이 함께해야 이로움을 낳고 완벽하게 사용될 수 있다.
왕필王弼은 다양한 비유적 표현이 등장하는 《노자老子경문經文에 비해 두 가지에 주로 초점을 맞춘다. 하나는 가 인간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되려면 에 의지하거나 혹은 무 자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사용되는 는 실질적으로는 비어 있음[]의 의미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왕필의 논리는 대연지수大衍之數에도 해당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수적인 의미는 ‘적은 것이 많은 것을 다스리고 거느린다.[이과통중以寡統衆]’는 사상과도 연결된다.
서른 개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이는데 그 바퀴통이 비어 있기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
곡轂(《고공기도考工記圖》곡轂(《고공기도考工記圖》
바퀴통이 서른 개의 바퀴살을 거느릴 수 있는 것은 〈그 바퀴통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 빈 곳으로 모든 바퀴살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거느릴 수 있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니 그 그릇 속이 비어 있기에 그릇의 쓰임이 있고,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니 그 방 속이 비어 있기에 방의 쓰임이 있다.
그러므로 가 이로움이 되는 까닭은 가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
나무와 찰흙과 벽으로 〈수레와 그릇과 방〉 세 가지를 완성하는 것은 모두 (비어 있음)를 쓰임으로 삼아서이다.
〈이것은〉 가 이로움이 되는 까닭이 모두 에 의지하여 쓰임이 됨을 말한 것이다.
역주
역주1 三十輻 共一轂 : 帛書本에는 ‘卅輻 同一轂’으로 되어 있다. ‘卅’은 ‘三十’과 뜻이 같다. 秦 始皇陵에서 발굴된 戰車의 바퀴살이 실제 30개로 되어 있는데, 河上公本에서는 바퀴살이 서른 개인 것은 ‘한 달의 날 수를 본받은 것[法月數]’이라 하였으니 참고할 만하다.
역주2 轂所以能統三十輻者 無也 : 王弼은 無의 쓰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쓰임은 ‘비어 있음[無]’으로부터 유래한다.
역주3 故能以(實)[寡]統衆也 :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거느린다는 말은 注41.13에서도 “나누면 많은 것을 거느릴 수 없다.[分則不能統衆]”고 하였다. 이것은 王弼의 중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이다. 漢의 鄭玄은 《周禮》의 ‘輪人’에 관한 注에서 ‘轂’에 대해 “바퀴통은 그 비어 있음으로 인해 쓰이게 된다.[轂 以無有爲用也]”라 하였는데, 孔穎達은 疏에서 《老子》 11장과 연결하여 설명하였다.
역주4 (實)[寡] : 저본에는 ‘實’로 되어 있으나, 陶鴻慶이 ‘寡’의 잘못이라 校改한 이래, 일반적으로 이를 따르므로 ‘寡’로 바로잡는다.
역주5 埏埴以爲器 : 帛書本 甲本에는 ‘埏’이 ‘然’으로, 乙本에는 ‘燃’으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許抗生(《帛書老子注譯與硏究》)은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진흙을 구워서 그릇을 만든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帛書本 整理者는 ‘燃’을 ‘埏’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역주6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 정세근은 《노장철학》에서 이러한 태도를 《莊子》와 비교하여 莊子가 ‘쓸모없는 것의 쓸모[無用之用]’를 강조한다면, 王弼은 ‘무의 쓸모[無之用]’를 강조한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王弼은 注40.1에서도 ‘有以無爲用(유는 무를 쓰임으로 삼는다.)’이라 하고 있다.
역주7 言(無者)有之所以爲利 皆賴無以爲用也 : 저본에는 ‘言無者有之所以爲利’라 하여 ‘無者’ 두 글자가 더 있는데 日本學者 波多野太郞은 《老子王注校正》에서 이를 衍字로 보았다. 樓宇烈과 바그너 또한 이를 지적하였는데, 注1.4에서 ‘凡有之爲利 必以無爲用’이라 하였고 또 注40.1에서 ‘有以無爲用’이라 하였으니 衍字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왕필이 ‘無’를 작용이나 쓰임새로 연결시키는 중요한 논리가 드러나는 곳이다. 왕필은 ‘無’를 두 가지 차원에서 중시한다. 하나는 ‘大衍之數’를 설명하면서 50개의 산가지 가운데 하나가 작용의 중심인 하나[一]이며, 이 때문에 나머지 산가지가 모든 괘를 낳는 작용을 한다고 풀이하는 점에서 쓰임과 관련된다. 또 하나는 바로 ‘無’를 ‘비어 있음[虛]’으로 설명하면서 빈 곳에 다른 물건을 담거나 쓰임새가 있다는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無의 쓰임을 이끌어낸다. 이 모두에서 無가 존재론적인 虛無의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易學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用九(陽爻), 用六(陰爻)처럼 用은 역학의 세계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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