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注]吾所以字之曰道者는 取其可言之稱最大也일새라
注
[注]逝는 行也라 不守一大體而已하고 周行無所不至하니
注
[注]遠
은 極也
라 周
無所不窮極
이나 不偏於一逝
라 故曰 遠也
라하고
注
雖不職大나 亦復爲大라 與三匹이라 故曰 王亦大也라하니라
注
無稱
이면 不可得而名
이라 曰 域也
라하니라 道天地王
은 皆在乎無稱之內
라
25.12 人法地하고 地法天하고 天法道하고 道法自然이니라
注
法自然者는 在方而法方하고 在圓而法圓하니 於自然無所違也하니라
제25장에서
노자老子는 ‘무엇인가 섞여 이루어진 것’이 천지보다 먼저 생겨났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왕필은 “누구의 자손인지 알지 못하므로 천지보다 먼저 생겨났다고 했다.”라고 하면서 그걸 약간 비틀어 이야기하고 있다.
‘
혼성混成’이란 만물의 다양성을 말하는 것이고, 도의 출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
혼성混成’에서 ‘
혼混’은 《장자》에 나오는 ‘
혼돈渾沌(
혼돈混沌)’을 생각나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건 중국 신화에 나오는 혼돈 이야기와 《장자》에 나오는 혼돈 이야기가 다르다는 점이다. 신화에서는 혼돈을 어둑한 한 덩어리, 하나의 달걀 같은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어두침침해 앞이 잘 보이지 않자 화가 난
반고盤古가 도끼를 힘껏 휘둘렀고, 그 바람에 달걀이 깨져 달걀 속에 있던 가볍고 맑은 기운은 점점 올라가 하늘이 되었고, 무겁고 탁한 기운은 가라앉아 땅이 되었다는 것이다. 혼돈으로부터 천지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자》에서는 이 이야기를 다르게 변주하고 있다. 눈, 코, 입, 귀가 없는 존재인 혼돈을 답답하게 생각한 북해의 천제인
홀忽과 남해의 왕
숙熟이 매일 한 개씩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주어, 혼돈을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의미도 생각해볼 수 있다.
유가儒家가 말하는
유위有爲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을 말하며,
무위無爲란
유위有爲하는 사람들 위에서 내려다보는 행위이다. 노자는 근본적으로
유위有爲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인데,
무형無形(
무명無名)을 통해서
심心(
도道)을 말하려고 했다. 얼굴 표면 속에 감추어진 마음(내면)을 읽고자 했다는 것. 도를 통해
음양陰陽,
사시四時, 우리 삶의 이치를 설명하고 싶어 했던 것! 그럼으로써 주기적이며 규칙적인 규범적이고 규율적인
도道(길)를 찾고 싶었던 것이 노자의 관심이다.
반고씨盤古氏(《만고제회도상萬古際會圖像》)
뒤섞인 가운데 〈만물을〉 이루어주는 것이 있으니,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겨났다!
注
뒤섞여 있어 알 수 없는데 만물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래서 “뒤섞인 가운데 이루어준다.”고 했다. 〈이미 《노자》 경經4.1에서 말하였듯이 나는〉 그가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겠다.
고요하고 텅 비었구나! 홀로 서서 〈변화의 한가운데에서도〉 바뀌지 않고,
注
만물 가운데 〈어느 것도 그에〉 짝할 수 없으므로 ‘홀로 서다.’라고 했다.
돌아오고 변화하고 마치고 시작함에 그 항상됨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바뀌지 않는다.’라고 했다.
두루 다니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니 천하의 어미가 될 만하다.
注
두루 다녀서 이르지 못할 곳이 없으면서 위태로움을 면하고, 커다란 형체를 낳고 온전히 할 수 있다.
注
이름이란 〈어떤 사물의〉 형체를 규정하는 것이다. 뒤섞인 가운데 이루어주고 형체가 없어 〈그 이름을〉 규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라고 했다.
注
무릇 이름이란 그것을 통해 〈어떤 사물의〉 형체를 규정하는 것이요 자字란 그것을 통해 대략[가可]을 지칭하는 것이다.
도는 만물 가운데 어느 것도 그것을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는 데에서 취한 것이다.
이것은 〈도道가〉 뒤섞여 있으면서 〈만물을〉 이루어주는 중에 말로 할 수 있는 지칭 가운데 가장 큰 것임을 말한 것이다.
注
내가 자字를 지어 도道라고 말한 까닭은 그것이 말로 할 수 있는 지칭 가운데 가장 큰 것을 취했기 때문이다.
자字를 정하게 된 까닭을 너무 깊이 따지면 ‘크다’는 말에 매이게 된다.
크다는 말에 매이게 되면 반드시 나뉨이 있고, 나뉨이 있으면 그 궁극성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억지로 이름을 지어 ‘크다’고 하였다.”라고 했다.
注
서逝는 ‘다니다[행行]’는 뜻이다. 하나의 커다란 몸을 지키며 머물지 않고, 두루 다녀서 이르지 못할 곳이 없다.
가는 것은 멀어지기 마련이고, 멀어진 것은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注
원遠은 ‘다한다’는 뜻이다. 두루 다녀서 끝까지 다하지 못하는 바가 없으나 한쪽으로 가는 데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그래서 “멀어지기 마련이다.”라고 했다.
나아간 곳을 따르지 않으나 그 몸이 홀로 선다. 그래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고, 왕 또한 크다.
注
“하늘과 땅이 낳은 만물의 본성 가운데 사람이 가장 존귀하다.”고 하였는데 왕은 바로 사람의 주인이다.
비록 큰 것을 맡지는 않았으나 또한 다시 큰 것이 된다. 다른 세 가지 큰 것과 짝이 되기 때문에 “왕 또한 크다.”고 했다.
〈이름 지을 수 없는〉 영역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注
네 가지 큰 것이란 도, 하늘, 땅, 왕이다.
무릇 만물 가운데 지칭이 있고 이름이 있으면 그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도道라고 말하면 말미암는 것이 있는데 말미암는 것이 있은 후에야 그것을 일컬어서 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도는 곧 지칭되어지는 것 가운데 큰 것으로 지칭이 없는 큰 것만 못하다.
지칭이 없으면 이름 지을 수 없는 까닭에 ‘역域’이라 하였다. 도, 하늘, 땅, 왕은 모두 지칭이 없는 영역 안에 있다.
그래서 “〈이름 지을 수 없는〉 영역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다.”고 했다.
注
〈왕 또한〉 사람의 주인이라는 커다란 〈자리에〉 처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注
〈다른 사람의 주인이 되는〉 사람은 땅을 어기지 않아야 〈자신의〉 평안함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땅을 본받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땅은 하늘을 어기지 않아야 온전하게 〈만물을〉 실을 수 있다. 이것이 “하늘을 본받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하늘은 도를 어기지 않아야 온전하게 〈만물을〉 덮어줄 수 있다. 이것이 “도를 본받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어기지 않아야 〈만물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이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는 것은 네모난 데 있으면 네모남을 본받고 동그란 데 있으면 동그람을 본받으니, 스스로 그러함에 대해서 어기는 게 없는 것이다.
‘자연自然’이란 말은 지칭하는 게 없는 말이며 궁극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세상의 왕이 습관처럼 그렇게 하듯이〉 꾀를 쓰는 것은 ‘무지無知’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땅처럼〉 ‘물리적 형태[형백形魄]’가 있는 것은 〈하늘처럼〉 ‘정미한 기로 이루어진 상[정상精象]’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정미한 기로 이루어진 상’은 〈도와 같이〉 ‘무형無形’한 것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음양陰陽과 같이 두 가지〉 ‘기준을 갖는 것[유의有儀]’은 〈스스로 그러함과 같이〉 ‘기준 없는 것[무의無儀]’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이와 같은 까닭에 돌아가며 서로 본받는 것이다. 도가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으니 하늘이 이러한 도를 바탕으로 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늘이 도를 본받으니 땅이 이러한 하늘을 본받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땅이 하늘을 본받으니 〈다른 사람의 주인이 되는〉 사람이 이러한 땅을 본받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누구든 다른 모든 사람의〉 주인이 되는 까닭은 아마도 〈이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것을 주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