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注]孔은 空也이니 唯以空爲德然後에 乃能動作從道하니라
21.3 惚兮恍兮로다 其中有象이며 恍兮惚兮로다 其中有物이며
注
故曰 恍兮惚兮
로다 이며 惚兮恍兮
로다 其中有象也
라하니라
注
深遠不可得而見이나 然而萬物由之하니 其可得見이 以定其眞이라
注
[注]信은 信驗也라 物反窈冥이면 則眞精之極得하고 萬物之性定이라
注
[注]至眞之極은 不可得名이니 無名은 則是其名也라
注
[注]此는 上之所云也라 言吾何以知萬物之始於無哉리오 以此知之也러라
제21장은 도道의 원초적 모습에 대한 묘사를 통해 인간 세상의 군주가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를 유비적類比的으로 표현한 문장으로 볼 수 있다.
이석명은 《백서로자帛書老子》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황홀恍忽이나 요명窈冥 등은 모두 희미하고 어렴풋한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즉 있는 듯하나 그 실체를 찾아볼 수 없고, 없는 듯하나 여전히 어떤 조짐이 존재하는 미묘한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도道에 대한 표현은 사실상 이상적 통치자가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말로 볼 수 있다. 도가 홀황하고 황홀하여 잘 파악할 수 없듯이 통치자 또한 자신의 속을 함부로 밖에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홀황한 도 가운데 형상[상象]이 있고 사물[물物]이 있고 알맹이[정精]가 있듯이 통치자 또한 그러한 ‘안개 행보’ 속에 실질적인 통치 내용이 있다. 이렇게 처신할 때 도가 그러하듯이 통치자 또한 그 이름이 영원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왕필王弼은 이러한 통치자의 행동방식에 대한 의미로 풀이하지 않는다. 왕필은 무명無名한 도道로부터 만물萬物이 비롯되는데 이 근원의 상태를 형용하는 말들로 홀황忽恍, 요명窈冥 등을 해석하고, 오히려 이들을 통해 도道 본연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여기서 왕필王弼에게 가장 중요한 말은 소이연所以然으로서의 도道이다. 만물萬物은 바로 도道에 의해 시작되고 이루어지므로 만물에 대한 이해는 곧 도道라는 소이연所以然을 살피는 데에 있다. 이러한 해석은 판본상板本上의 차이와 병행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백서본帛書本과 왕필본王弼本은 전혀 다른 텍스트가 된다.
텅 빈 덕德의 모습은 오로지 도道를 따를 뿐이다.
注
공孔은 텅 비다는 뜻이다. 오로지 텅 빔을 덕으로 삼은 후에야 비로소 행동이 도를 따를 수 있다.
도라는 것은 오로지 황恍하고 오로지 홀惚하다.
注
‘황홀恍惚’이란 〈구체적〉 형체가 없고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음을 탄미한 것이다.
홀하고 황하도다. 그 가운데 형상이 있으며, 황하고 홀하도다. 그 가운데 사물이 있으며,
注
〈도가〉 무형으로 만물을 시작하고 매이지 않음으로 만물을 이루어준다.
만물은 〈이 도에 의해〉 시작하고 이루어지지만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황하고 홀하도다. 그 가운데 물건이 있으며, 홀하고 황하도다. 그 가운데 형상이 있다.”고 하였다.
그윽하고 아득하도다. 그 가운데 정기가 있으며,
注
깊고 아득하여 볼 수가 없지만 만물은 그것을 말미암는다. 〈아마도 우리가 도를〉 볼 수 있는 것은 〈그 도가 만물의〉 참된 본성을 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윽하고 아득하도다. 그 가운데 정기가 있다.”라고 했다.
그 정기精氣가 매우 참되도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다.
注
신信은 믿을 만한 증험이다. 만물이 그윽하고 아득함으로 돌아가면 참된 정기의 극치를 얻고 만물의 본성이 정해진다.
그래서 “그 정기가 매우 참되도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다.”고 했다.
注
지극한 참됨의 극치는 이름 지을 수 없으니, ‘무명無名(이름 없음)’은 바로 그 이름이 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했다.
注
‘중보衆甫’란 만물의 시작이니, 〈이열중보以閱衆甫는〉 이름 없음으로 만물의 시작을 살핀다는 뜻이다.
내가 어떻게 만물의 처음 모습을 알겠는가. 이 〈도〉로써 알 뿐이다.
注
차此는 위에서 말한 것을 가리킨다. 내가 어떻게 만물이 ‘무無’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겠는가. 이것으로 알 뿐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