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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道德經注

노자도덕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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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하니 淵兮似萬物之宗이로다
吾不知誰之子로되 象帝之先이니라
[注]夫執一家之量者 不能全家하고 執一國之量者 不能成國하니
窮力擧重일새 不能爲用이라
故人雖知萬物治也 則不能贍也
地雖形魄이나 不法於天이면 則不能全其寧하고 天雖精象이나 不法於道하면 則不能保其精이라
沖而用之 用乃不能窮이라 滿以造實하면 實來則溢이라
故沖而用之又復不盈이니 其爲無窮亦已極矣니라
形雖大 不能累其體하고 事雖殷이나 不能充力量하니
萬物舍此而求 主其安在乎리오
不亦淵兮似萬物之宗乎
銳挫而無損하고 紛解而不勞하며 和光而不汚其體하고 同塵而不渝其眞하니 不亦湛兮아하니라
存而不有하고 沒而不無하며 有無莫測하니 故曰 似存이라
地守其形하니 德不能過其載하고 天慊其象하니 德不能過其覆
天地莫能及之하니 不亦似帝之先乎 天帝也


골짜기, 문 그리고 뿌리의 자연적 과정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여기서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뜻의 한자 ‘綿’은 가느다란 비단실 가닥을 나타내는데, 이 ‘면’자는 또한 ‘관통해 나아간다’는 함축적 의미도 갖고 있다. 골짜기, 문 그리고 뿌리는 “꽉 채워져 있지” 않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비어[]’ 있거나 또는 《노자》에서 말하듯이 마치 있는 듯 없는 듯하다. 그러한 활동의 중심은 비어 있다. 즉 ‘있지[]’ 않지만 결코 ‘없지도[]’ 않은 통로이다. 이러한 ‘없는[]’ 것들의 존재라는 ‘틈새적(in-between)’ 형식은 제4장에서 하나의 감탄으로 인유引喩되고 있기도 하다.
뿌리는 그윽하게 거기에 있는 듯하다. 우리의 시야로부터 숨어 있거나 비어 있는 또는 어떠한 형체도 없는 그것은 어쨌거나 존재한다. 그것은 ‘심원’하거나 ‘모호’한 존재의 방식이며 ‘있으면서 없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제4장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대단히 많은 자연 환경과 인공 구조물의 경우처럼 ‘없는’ 것들이 다함이 없는 유용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도는 비어 있는데 아무리 써도 다시 차오르지 않는다. 그윽함이 마치 만물의 으뜸 같도다.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그 얽힘을 풀고, 그 빛남을 부드럽게 하고, 그 티끌과 함께한다. 담담함이 마치 있는 듯하도다.
나는 그가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겠지만 천제天帝보다 앞서는 것 같다.
대저 한 가문을 다스릴 역량을 지닌 자는 그 가문을 온전하게 할 수 없고, 한 나라를 다스릴 역량을 지닌 사람은 그 나라를 번성하게 할 수 없다.
가진 힘을 다해 무거운 것을 들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물을 다스릴 지혜를 갖고 있어도 이의二儀의 도리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넉넉할 수 없다.
땅에게 비록 형백形魄이 있어도 하늘을 본받지 않는다면 그 안정성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없고, 하늘에게 비록 정상精象이 있어도 도를 본받지 않는다면 그 정함을 지킬 수가 없다.
비어 있는 가운데 그것을 쓰면 그 쓰임이 다하지 않게 될 것이다. 가득 채워서 그 속을 꽉 채우면 그 채워짐으로 인하여 넘치게 된다.
그러므로 비어 있는 가운데 그것을 쓰는 것이니 다시 채워지지 않은 상태가 회복되니 그 하는 바가 무궁하여 이미 지극해진다.
형체가 아무리 커도 그 몸에 누가 될 수 없고, 일이 아무리 커도 그 역량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만물이 이것을 버리고 주인을 구한다면 그 주인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그윽함이 마치 만물의 으뜸 같지 않은가.
날카로움이 꺾여도 손상됨이 없고, 얽힘을 풀어도 수고롭지 않고, 빛남을 누그러뜨려도 그 몸을 더럽히지 않으며, 티끌과 같이 되어도 그 참된 본성을 바꾸지 못하니, 또한 담담함이 마치 있는 듯하지 않은가.
있으면서 있지 않고 없으면서 없지 않아 있는지 없는지 헤아릴 길이 없으므로 ‘있는 듯하다’고 했다.
땅이 그 형체를 지키니 〈땅의〉 덕이 그 실어줌을 넘지 못하고, 하늘이 형상을 만족하니 그 덕이 덮어줌을 넘지 못한다.
하늘과 땅 또한 결코 그에 미칠 수가 없는데 또한 보다 앞서는 듯하지 않은가? 천제天帝이다.


역주
역주1 道沖而用之 (或)[又]不盈 : 저본과 河上公本에는 ‘又’가 ‘或’으로 되어 있으나, 帛書本, 傅奕本에는 ‘又’로 되어 있다. 그런데 注文에 ‘又復’으로 되어 있으니 이를 따른다. 이 부분은 《呂氏春秋》 〈愼大覽〉, 《淮南子》 〈道應訓〉에서 趙襄子의 고사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회남자》에서는 趙襄子가 翟을 공격하여 尤人과 終人 두 성을 얻는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자신이 德이 없는데 승리를 했다고 근심한다. 조양자의 이런 태도야말로 ‘승리를 지키는 법[持勝]’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더해 孔子와 墨子가 뛰어난 힘과 재주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힘과 뛰어난 재주를 세상에 알리려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회남자》는 《노자》의 이 구절을 인용한다. 이를 보면 《회남자》는 “승리를 잘 지키는 자는 강하면서 약한 척한다.[善持勝者 以强爲弱]”는 의미로 이 구절을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역주2 挫其銳……同其塵 : 이 부분을 《淮南子》 〈道應訓〉에서는 吳起와 屈宜若의 이야기로 설명하는데, 이 이야기는 《說苑》 〈指武〉에도 실려 있다. 屈宜若은 《史記》 〈韓世家〉에는 ‘屈宜臼’, 《說苑》에는 ‘屈宜臼’ 또는 ‘屈宜咎’로 나온다. 《淮南子》에서는 吳起가 楚나라의 令尹이 되어 魏나라의 屈宜若에게 가르침을 구한다. 오기가 자신의 개혁 정치에 대한 포부를 들려주자 굴의약은 “내가 듣기에 옛날에 나라를 잘 다스리던 사람은 옛것을 변화시키지 않고 일상적인 것을 바꾸지 않는다.[昔善治國家者 不變其故 不易其常]”는 가르침과 “백성을 돈독히 사랑하고 독실히 실천하라.[敦愛而篤行之]”는 조언을 한다. 이 고사를 소개한 후 《회남자》는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역주3 [其] : 저본에는 ‘其’가 없으나 바그너는 注25.1에서 ‘不知其誰之子’라 했고, 帛書乙本에도 ‘其’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교감하였는데, 이를 따른다.
역주4 治而不以二儀之道 : ‘二儀’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명이 쉽지 않다. 하지만 임채우는 ‘天地의 道’라고 보았고, 정세근은 ‘乾坤의 道’라고 보았는데, 두 주장이 모두 타당성이 있다. 이어지는 내용에 근거할 때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말은 經25.12에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라고 한 말을 원용한 것으로 곧 三才之道에 해당하며, 易道와도 통한다. 왕필은 《周易》의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도’란 《周易》에서 드러나는 하늘[天]과 땅[地] 그리고 인간[人]의 ‘도’일 뿐이다. 그것은 성인의 말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근거는 《周易》, 《論語》와 같은 경전에 예시되어 있다. 더 나아가 유가 철학자였던 왕필에게 천지 ‘이전의’ 세계란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주어진 세계는 오로지 현실의 세계로서 성인의 뜻이 실현되어야 하는 ‘의미의 세계’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왕필이 ‘無名’을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有’의 세계에서 의미 있는 것이지 무명의 세계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無名’과 ‘無形’이란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성인의 ‘도’에 대한 서술어로서만 의미를 지닌다. 이와 달리 하상공은 선진시대 이래 우주론적 사유의 전통을 이어 해석을 가한다. 河上公의 우주론은 《莊子》나 《淮南子》 같은 문헌들 속에서 수없이 발견되는 것들과 차이가 없다. 예를 들어, 《淮南子》 〈天文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지가 아직 형태조차 없었던 때에는 이리저리 떠다니며 고요하고 막연한 모습이었는데 이 상태를 太始라고 한다. 이 태시가 虛廓을 낳고 허확이 宇宙를 낳고 우주는 氣를 낳았다. 이 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어서 맑고 밝은 기는 넓게 펼쳐져서 하늘[天]이 되고, 무겁고 탁한 기는 응고되고 모여서 땅[地]이 되었다. 맑고 오묘한 기운은 모이기는 쉬우나 무겁고 탁한 기는 응고되기가 어려우니, 따라서 하늘이 먼저 이루어지고 땅이 그 후에 정해졌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습합하여 陰陽이 되었고, 이 음양의 기운이 갈마들어 四時가 되었고, 사시의 정기가 흩어져 萬物이 되었다.” 《하상공장구》의 무명과 유명을 기준으로 허무(虛無‧無名)에서 천지(天地‧有名) 그리고 음양으로 이어지는 세계에 대한 발생적 설명은 《회남자》 우주론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河上公이 “기를 내뿜고 온갖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虛無로부터 나오므로 천지의 뿌리와 시작이라고 한 것이다.[吐氣布化 出於虛無 爲天地本始也]”라고 한 구절은, 《淮南子》 〈天文訓〉에서 “기를 뿜어내는 것을 ‘베푼다[施]’라고 하고, 기를 머금는 것을 ‘변화시킨다[化]’고 한다. 따라서 陽은 베풀고 陰은 변화시킨다.[吐氣者施 含氣者化 是故陽施陰化]”와 같이 《회남자》를 통해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이렇게 볼 때, 河上公이 말하는 ‘吐氣布化’는 천지(음양)에 의한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작용을 의미한다. 또한 앞서 《하상공장구》가 천지와 인간의 신체를 연속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논의한 바 있듯이, 천지의 근원적 상태를 형용하는 ‘虛無’는 바로 인간 마음의 근원적 상태이기도 하다. 《淮南子》 〈精神訓〉에 따르면 “고요하고 막막한 것은 神明이 머무는 집이요,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은 도가 거처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비어 있어야 도가 머물 듯이 인간의 마음도 고요한 상태에서만 신명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이다. 河上公은 이 신명이 머무는 곳이 ‘五臟’이며 머무는 곳에 따라 ‘魂’, ‘魄’, ‘志’, ‘精’, ‘神’으로 달리 부른다. 河上公은 이러한 논의 속에서 ‘정신을 기르는 방법’으로서의 도에 관한 논의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사실 이런 논의를 보면 황로학의 우주에 대한 이해는 세계상에서 인간상으로의 확장 논리가 아니라 거꾸로 인간상으로부터 세계상으로 이해를 확장하는 논리를 따르고 있다. 이와 같이 河上公과 王弼의 ‘천지’와 ‘만물’의 세계에 대한 이해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하상공이 養生論的 입장에서 신체적 정치적 생명의 보전을 목적으로 한다면, 왕필은 義理論的 입장에서 가치의 실현을 의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상공의 우주가 생명 세계를 그 일차적 의미로 한다면, 왕필의 우주는 의리와 가치의 세계이다.
역주5 [其] : 저본에는 ‘其’가 없으나, 道藏集注本, 道藏集義本, 永樂大典本 등에는 ‘其’가 있다는 바그너의 설에 따라 보충하였다.
역주6 似或存乎 : 저본 및 기타 판본에는 이와 같이 되어 있으나, 道藏集解 趙學士本에서는 王弼의 注를 인용하면서 “있으면서 있지 않고 없으면서 없지 않아 있는지 없는지 헤아릴 길이 없기 때문에 ‘있는 듯하다’라고 한 것이다.[存而不有 沒而不無 有無莫測 故曰 似存]”라는 문장을 더하고 있는데, 樓宇烈 등 대개의 학자들은 근거가 불분명하다고 받아들이지 않으나 바그너는 이를 수용한다. 따라서 本文에 포함시키지 않고 注에서 밝혀둔다.

노자도덕경주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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