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은
노자老子의 말하기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이는
유가儒家가 취하는 것과는 사뭇 구분된다.
《
논어論語》 〈
양화陽貨〉에서 이렇게 말한다. “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자공이 여쭈었다. ‘선생님께서 말씀을 안 하시면 저희들은 무엇을 기술하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네 계절이 돌아가고 만물이 생장하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자왈子曰 여욕무언予欲無言 자공왈子貢曰 자여불언子如不言 즉소자하술언則小子何述焉 자왈子曰 천하언재天何言哉 사시행언四時行焉 백물생언百物生焉 천하언재天何言哉]” 스승 공자가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말이란 무엇일까? 말을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공자는 그것을 거부한 것일까?
공자孔子(《만고제회도상萬古際會圖像》 고대 중국의
직하稷下 계열의 문헌인 《
관자管子》 〈
내업內業〉에서는 “한마디 말이 얻어지면 하늘 아래 모두가 복종하고, 한마디 말이 정해지면 하늘 아래 모두가 경청한다.[
일언득이천하복一言得而天下服 일언정이천하청一言定而天下聽]”고 한다. 고대 중국의 지식인 세계에서 ‘말한다는 것[
언言]’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말을 한다는 것, 특히 도에 대해 말을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천하와 관련된다. 천하에 대고서 어찌
허언虛言을 하겠는가? 어쩌면 공자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독실하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죽어도 도를 지키고 보전해야 한다. 그러나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서는 살지 않는다. 천하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면 나와 일하고,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숨는다.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는데도 가난하고 미천한 것은 치욕이요,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않는데도 부유하거나 귀한 것은 치욕이다.[
자왈子曰 독신호학篤信好學 수사선도守死善道 위방불입危邦不入 난방불거亂邦不居 천하유도즉현天下有道則見 무도즉은無道則隱 방유도邦有道 빈차천언貧且賤焉 치야恥也 방무도邦無道 부차귀언富且貴焉 치야恥也]”
그런데 《노자》의 말은 이와 다르다. 《노자》는 공자처럼 ‘
불언不言’을 말하지 않는다. 물론 《노자》도 ‘불언’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를 외치는 듯하지만, 실상 그가 말하는 진의는 다른 곳에 있다. 제왕은 말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하상공주河上公注는 아주 단순하다. “희언이란 말을 아끼라는 뜻이다. 말을 아끼는 것이 자연의 도이다.[
희언자希言者 위애언야謂愛言也 애언자愛言者 자연지도自然之道]” 황제가 하는 말은 그 자체로 법과도 같다.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실언失言은 용서되지 않는다. 아낄수록 좋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왕필王弼은 말을 돌린다. ‘
희언希言’에 나름 심원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노자》
경經14.1에서는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이름하여 ‘
희希’라 한다.”고 했고, 《노자》
경經35.3에서는 “도에 대해 입으로 내뱉는 말은 담담하여 아무 맛이 없고 쳐다보아도 잘 보이지 않고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무 맛이 없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란 곧
자연自然의 지극한 말이다.
‘
희希’는 이미 《노자》에서 말하듯,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단순하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감각이나 경험을 초월하여 있는 실체나 선험적 존재에 대한 말은 아니다. 왕필은 그것이 ‘자연의 지극한 말’ 또는 ‘도에 대해 하는 말’이라고 부연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