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장은 제32장에서 다루었던 주제와 연결되는데, 심지어 일부는 같은 구절을 반복하고 있다. 도道는 적극적인 특성이 없고, 만약 성인 군주가 그와 일치하도록 다스린다면 치우침이 전혀 없고 무위無爲한다면 백성들이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않고서 따를 것이다.
제32장에서도 언급되었던 통나무는 통치술의 형상으로 사용되고 있다. 통나무는 아직 특정한 형태를 취하지 않은 도의 무한한 잠재력을 상징한다. 바로 이러한 힘을 통해 군주가 다스리는 것이며, 만약 국가 안의 누구든 도의 진로에 반하여 행동하고자 할 때 그들이 진압되는 것은 바로 이 힘을 통해서이다. 이른바 황로黃老 도가학파道家學派로 불리는 문헌으로서 마왕퇴馬王堆 《노자》와 함께 발굴된 《황로백서》의 첫 행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도는 법을 낳는다.[도생법道生法]”
이 문장은 제37장에서 말하는 것과 연관 지어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군주가 제정하는 표준들은 도에서 비롯된다. 만약 어떤 것이 그 자연스러운 역할을 손상시킨다면 군주는 그것을 제한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천하에 그리고 하늘에 그리고 지상에 ‘고요함’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또한 자연이 자연스럽게 질서를 이룰 것이라 말한다.
注
만물은 모두 〈도를〉 말미암지 않음이 없고, 〈또한 바로 이 도에〉 의해 시작되고 이루어진다.
후왕侯王이 그것을 잘 지키면 만물이 저절로 교화될 것이다.
교화되었는데도 억지로 하려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나는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누를 것이다.
注
‘화이욕작化而欲作(교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하려는 마음이 일어난다.)’이라 한 것은 억지로 하려는 마음이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장차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누를 것이니, 주인 노릇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누르면〉 장차 욕심이 없어질 것이니,
욕심이 없어져서 고요해지면 천하가 저절로 바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