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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道德經注

노자도덕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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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기는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성인聖人의 중요한 이미지이다. 제52장에서 말하는 ‘어미로의 회귀(the return to the mother)’는 도가적道家的 수양修養의 목적으로 읽힐 수 있다.
사람은 유아幼兒 상태 또는 심지어 태아胎兒 상태로 회귀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데, 그때는 사람이 생명의 정기가 새나가는 어떠한 ‘구멍들’(제52장을 보라.)도 없는 상태이다. 갓난아기는 상처 입힐 수 없다고 묘사된다. 제50장의 언어로 말하자면 갓난아기나 태아는 ‘삶을 살려고 하는[생생生生]’ 것을 아직 시작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아직 사지死地가 없다. 이것이 바로 야생동물이 해치지 못하는 까닭이다.
동시에 구멍이 없고 정기가 새나가는 일도 없기에 갓난아기는 잠재력이 무한한 정기精氣를 갖게 된다. 그래서 하루 종일 울어도 지치지 않고 손을 쥐면 꽉 쥘 수 있는 것이다. 비슷하게 성적性的 활동을 하지 않는데도, 즉 사정射精하지 않는데도 그 성기性器가 오랫동안 곧게 서 있다. 이런 것들은 정기의 지극함(the maximum of vital essence)의 사례들인데, 이것은 어떠한 힘도 낭비하거나 잃지 않음으로써 유지된다.
‘어미로의 회귀’ 그리고 ‘갓난아기로의 회귀’는 최소한 문자 그대로는 신체수양을 위한 처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도가적 수행은 자신의 신체를 ‘닫는 것(closing)’, 예를 들어 사정을 피하는 방중술房中術이 잘 증명하듯이 자기 안의 모든 정기를 보지保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의식 출현 이전 상태로의 회귀라는 철학적 해석도 가능하다. 갓난아기나 태아는 아직 발달된 자아自我가 없으며, 자유의지도 도덕성도 없고, 옳고 그름도 분별할 줄 모른다. 갓난아기와 태아는 여전히 ‘동물적 본성’을 보존하고 있는 본능적 존재이다. 갓난아기와 태아는 무위無爲하듯이 행동하고, 하는 바가 ‘자연스럽게[자연自然]’ 일어난다. 삶의 변두리에서 갓난아기의 상태는 우리 삶의 최소의 ‘인간적’ 국면이다. 그래서 가장 자연적이다.
도가적인 정신 수양은 이러한 전의식적前意識的 상태(preconscious state)로의 회귀를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상태는 제30장에서 말하는 ‘강장强壯하면 늙는[장즉로壯則老]’ 상태와 대립된다. 갓난아기가 자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도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55.1 含德之厚 比於赤子하니
도타운 덕을 품은 사람은 갓난아기에 견줄 수 있다.
蜂蠆虺蛇不螫하고 이니라
벌과 전갈, 도마뱀과 뱀도 쏘지 않고, 맹수猛獸도 덤비지 않고, 날짐승도 낚아채지 않는다.
[注]赤子 無求無欲하여 不犯衆物이라
갓난아기는 구하는 게 없고 하고자 하는 것도 없어 뭇 사물을 범하지 않는다.
故毒蟲之物無犯人也
그래서 독으로 쏘는 벌레들도 〈갓난아기 같은〉 사람을 범하는 일이 없다.
含德之厚者 不犯於物이라
도타운 덕을 품은 사람은 다른 사물을 범하지 않는다.
故無物以損其全也
그래서 어떤 것도 그 온전함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다.
55.2 骨弱筋柔而握固하고
뼈가 여리고 근육이 부드러운데도 꽉 움켜쥐면 빼기 어렵고
[注]以柔弱之故 故握能하니라
여리고 부드럽기 때문에 쥔 것이 아주 견고할 수 있다.
암수의 교합交合을 알지 못하는데도 온전하게 자라나는 것은
[注]作 長也
은 ‘자라난다[]’는 뜻이다.
無物以損其身이라 故能全長也
어떤 것도 그 몸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다. 그래서 온전하게 자라날 수 있다.
言含德之厚者 無物可以損其德渝其眞이라
도타운 덕을 품은 사람은 어떤 것도 그의 덕을 손상시키고 그 참된 본성을 바꾸는 일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柔弱不爭而不摧折하니 皆若此也니라
여리고 부드럽게 대하면서 다투지 않아 꺾이고 부러지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다.
55.4 精之至也 終日號而不嗄
정기의 지극함 때문이며, 하루가 다하도록 울어 젖히는데도 그 목이 쉬질 않는 것은
[注]無爭欲之心이라 故終日出聲而不嗄也
다투려는 마음이나 욕심이 없기 때문에 하루 종일 소리 내어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이다.
55.5 和之至也니라
조화의 지극함 때문이다. 조화를 아는 것을 ‘늘 그러함’이라 하고
[注]物以和爲常이라 故知和則得常也
만물은 조화로움을 늘 그러함으로 여기기 때문에 조화로움을 알면 늘 그러함을 얻는 것이다.
55.6 知常曰明이요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하며,
[注]不曒不昧하고 不溫不凉하니 此常也 無形不可得而見이라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으며, 따뜻하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으니 이것이 늘 그러함이다. 형체가 없어 볼 수가 없다.
曰明也라하니라
그래서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고 했다.
55.7 益生曰祥이요
삶을 보태는 것을 ‘상서롭다’고 하며,
[注]生不可益하니 益之 則夭也니라
삶이란 보탤 수가 없으니, 보태면 요절한다.
55.8 心使氣曰强이니
마음이 몸의 를 부리는 것을 ‘강하다’ 한다.
[注]心宜無有하니 使氣則强이라
마음속에 마땅히 아무것도 없으니 〈이 마음이〉 기를 부리면 강해진다.
55.9 物壯則老하니 謂之不道 不道 早已니라
만물은 강장强壯하면 곧 늙어버리니 이를 일컬어 답지 못하다고 한다. 도답지 못하면 일찍 죽는다.
역주
역주1 [者] : 저본에는 없으나, 아래의 注에 의거하여 ‘者’를 보충한 바그너의 설에 따라 ‘者’를 보충하였다.
역주2 猛獸不據 攫鳥不搏 : 바그너는 帛書本, 竹簡本 등을 근거로 ‘猛獸攫鳥不搏’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수용하지 않고 참고로만 밝혀둔다.
역주3 : 樓宇烈은 ‘於’로 교감하였으나, ‘之’에 ‘於’의 훈고가 있으므로 교감하지 않고 ‘於’의 뜻으로 풀이하였다.
역주4 (周)[堅] : 저본에는 ‘周’로 되어 있으나, 道藏集注本에 의거하여 ‘堅’으로 바로잡는다.
역주5 未知牝牡之合而全作 : 帛書本에는 ‘合’이 ‘會’로 되어 있는데 뜻의 차이는 없다. 하지만 ‘全作’의 경우 河上公本에는 ‘䘒作’, 傅奕本에는 ‘脧作’, 帛書本에는 ‘脧怒’, 竹簡本에는 ‘然怒’로 되어 ‘갓난아기의 고추가 발기하다.’는 뜻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에 비추어보면 王弼의 注가 모호하게 이루어진 까닭을 유월은 《諸子平議》에서 ‘全作’이라 되어 있는 誤本에 근거했기 때문일 것이라 추정하였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6 知和曰常……心使氣曰强 : 《淮南子》 〈道應訓〉은 中山公子 牟와 詹子의 이야기로 이 부분을 해설하는데, 이 고사는 《呂氏春秋》 〈開春論 審爲〉, 《莊子》 〈讓王〉에도 보인다. 中山公子 牟가 詹子에게 자신의 욕망을 이기기 어려움을 말하자, 첨자는 “욕망을 스스로 이겨낼 수 없으면 그냥 욕망을 따르라. 욕망을 따르면 정신에 한이 맺히지 않는다. 욕망을 스스로 이겨낼 수 없는데 억지로 욕망을 따르지 않는 것을 ‘몸이 심하게 상한다.’고 한다. 몸이 심하게 상한 사람은 長壽하지 못한다.[不能自勝則從之 從之神無怨乎 不能自勝 而强弗從者 此之謂重傷 重傷之人 無壽類矣]”고 답한다. 이 이야기를 소해한 후 《회남자》는 여기의 문장과 經52.7-8의 “그 밝은 빛을 써서 다시 그 밝음으로 돌아온다.[用其光 復歸其明也]”는 문장을 인용한다.
역주7 [故曰 知常] : 저본에는 없으나, 宇惠의 《王注老子道德經》의 설에 따라 ‘故曰知常’을 보충한다.

노자도덕경주 책은 2019.06.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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