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 有無相生
하며 難易相成
하며 長短相
하며 高下相
하며 音聲相和
하며 相隨
니라
제2장은 크게 세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첫 부분은 가치價値의 상대성相對性에 관한 유명한 문장文章이다. 우리가 통상적通常的으로 생각하는 미美와 선善은 실상 악惡[추醜]과 불선不善일 수 있음을 노자老子는 지적한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보면 분명한 상대주의相對主義에 해당한다. 하지만 노자老子의 맥락은 장자莊子처럼 상대주의相對主義를 철저하게 긍정하기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추한 것일 수 있고 선한 것이 불선한 것일 수 있다는 역설逆說의 논리에 입각해 있다. 이것은 수단적 상대주의에 그치는 것이지 철저한 상대주의를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예컨대 하상공河上公이 해석하는 방식처럼 우리는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일종의 처세處世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有와 무無는 서로를 낳는다.”는 구절에 대해 하상공은 “있음을 보거든 없음을 행하라.[견유이위무야見有而爲無也]”는 처세훈으로 이해한다.
둘째 부분에서는 유명한 성인聖人의 ‘무위無爲’와 ‘불언지교不言之敎’를 논論한다. 무위無爲는 통상 도가道家의 고유한 사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선진先秦 제자백가諸子百家 공통共通의 이상理想이라고 이해하는 경향傾向이 있다. 예컨대 《논어論語》 〈위영공衛靈公〉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무위無爲하면서 다스리신 분은 아마도 순임금일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하였는가? 공손히 몸을 바르게 한 채 남면하였을 뿐이다.’[자왈子曰 무위이치자無爲而治者 기순야여其舜也與 부하위재夫何爲哉 공기정남면이이의恭己正南面而已矣]”라고 하였는데, 이는 예치禮治 혹은 덕德에 의한 교화敎化의 이상이 실현된 상태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논어論語》의 이상은 왕필王弼이 《노자老子》의 무위無爲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왕필王弼의 무위無爲와 관련된 논의는 제3장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어지는 세 번째 부분에서는 공功이 이루어져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지 말아야 공이 스스로를 보전하고, 그 공이 온전히 자기 것이 된다는 역설逆說을 논하고 있다. 이런 논의는 《노자老子》가, 본래 취지가 스스로를 보전하는 도道를 추구하였던 정치적 성격이 강한 문헌임을 보여준다.
천하天下가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길 줄 아는데 이것은 추한 것이다. 천하가 모두 선한 것을 선하다고 여길 줄 아는데 이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유有(있음)와 무無(없음)는 서로 낳고, 쉬움과 어려움은 서로 이루어주고, 긺과 짧음은 서로 비교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악소리와 〈사람의〉 노랫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注
아름다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 진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요, 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기쁨과 노여워함과 같고, 선과 선하지 않음은 옳음과 그름과 같다.
기쁨과 노여워함은 같은 뿌리에서 나오고, 옳음과 그름은 같은 문에서 나온다. 그래서 어느 한쪽만을 들어 말할 수 없다.
〈‘있음과 없음’, ‘쉬움과 어려움’, ‘긺과 짧음’, ‘높음과 낮음’, ‘음악소리와 노랫소리’, ‘앞과 뒤’〉 이 여섯 가지는 모두 자연스러움을 늘어놓은 것이니 어느 한쪽만을 들어 밝힐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성인聖人은 무위無爲의 일에 거하고
注
자연스럽게 되어 이미 충분하니 〈자연스러움에 거슬러〉 하면 실패하게 된다.
注
지혜가 저절로 갖추어져 있으니 〈자연스러움에 거슬러〉 하면 거짓이다.
만물(만백성)이 움직이더라도 억지로 시작으로 삼지 않고, 살게 두되 소유하려 하지 않고, 베풀면서도 자신이 베풀었다 하지 않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을〉 자처하지 않는다.
注
만물에 따라 〈그 각각의 쓰임새에 맞춰〉 쓰이니 공功이 저것(만물萬物)으로부터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 공을〉 자처하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공을 자처하지 않으니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注
공을 자신의 것으로 하면 그 공이 오래 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