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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道德經注

노자도덕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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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皆知善之爲善이나 斯不善已
有無相生하며 難易相成하며 長短相하며 高下相하며 音聲相和하며 相隨니라
[注]美者 惡者 人心之所惡疾也
美惡 猶喜怒也 善不善 猶是非也
喜怒同根하고 是非同門이라 故不可得偏擧也
此六者 皆陳自然이니 니라
2.2 是以 聖人 하고
2.3 하여
[注]智慧自備하니 니라
2.4 하며 하며 爲而不恃하며
하나니
[注]因物而用이니 功自彼成이라 故不居也니라
2.5 夫唯 是以不去니라
[注]使功在己 則功不可久也


제2장은 크게 세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첫 부분은 가치價値상대성相對性에 관한 유명한 문장文章이다. 우리가 통상적通常的으로 생각하는 은 실상 []과 불선不善일 수 있음을 노자老子는 지적한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보면 분명한 상대주의相對主義에 해당한다. 하지만 노자老子의 맥락은 장자莊子처럼 상대주의相對主義를 철저하게 긍정하기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추한 것일 수 있고 선한 것이 불선한 것일 수 있다는 역설逆說의 논리에 입각해 있다. 이것은 수단적 상대주의에 그치는 것이지 철저한 상대주의를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예컨대 하상공河上公이 해석하는 방식처럼 우리는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일종의 처세處世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는 서로를 낳는다.”는 구절에 대해 하상공은 “있음을 보거든 없음을 행하라.[견유이위무야見有而爲無也]”는 처세훈으로 이해한다.
둘째 부분에서는 유명한 성인聖人의 ‘무위無爲’와 ‘불언지교不言之敎’를 한다. 무위無爲는 통상 도가道家의 고유한 사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선진先秦 제자백가諸子百家 공통共通이상理想이라고 이해하는 경향傾向이 있다. 예컨대 《논어論語》 〈위영공衛靈公〉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무위無爲하면서 다스리신 분은 아마도 순임금일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하였는가? 공손히 몸을 바르게 한 채 남면하였을 뿐이다.’[자왈子曰 무위이치자無爲而治者 기순야여其舜也與 부하위재夫何爲哉 공기정남면이이의恭己正南面而已矣]”라고 하였는데, 이는 예치禮治 혹은 에 의한 교화敎化의 이상이 실현된 상태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논어論語》의 이상은 왕필王弼이 《노자老子》의 무위無爲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왕필王弼무위無爲와 관련된 논의는 제3장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어지는 세 번째 부분에서는 이 이루어져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지 말아야 공이 스스로를 보전하고, 그 공이 온전히 자기 것이 된다는 역설逆說을 논하고 있다. 이런 논의는 《노자老子》가, 본래 취지가 스스로를 보전하는 를 추구하였던 정치적 성격이 강한 문헌임을 보여준다.
천하天下가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길 줄 아는데 이것은 추한 것이다. 천하가 모두 선한 것을 선하다고 여길 줄 아는데 이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있음)와 (없음)는 서로 낳고, 쉬움과 어려움은 서로 이루어주고, 긺과 짧음은 서로 비교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악소리와 〈사람의〉 노랫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 진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요, 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기쁨과 노여워함과 같고, 선과 선하지 않음은 옳음과 그름과 같다.
기쁨과 노여워함은 같은 뿌리에서 나오고, 옳음과 그름은 같은 문에서 나온다. 그래서 어느 한쪽만을 들어 말할 수 없다.
〈‘있음과 없음’, ‘쉬움과 어려움’, ‘긺과 짧음’, ‘높음과 낮음’, ‘음악소리와 노랫소리’, ‘앞과 뒤’〉 이 여섯 가지는 모두 자연스러움을 늘어놓은 것이니 어느 한쪽만을 들어 밝힐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성인聖人무위無爲의 일에 거하고
자연스럽게 되어 이미 충분하니 〈자연스러움에 거슬러〉 하면 실패하게 된다.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하여,
지혜가 저절로 갖추어져 있으니 〈자연스러움에 거슬러〉 하면 거짓이다.
만물(만백성)이 움직이더라도 억지로 시작으로 삼지 않고, 살게 두되 소유하려 하지 않고, 베풀면서도 자신이 베풀었다 하지 않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을〉 자처하지 않는다.
만물에 따라 〈그 각각의 쓰임새에 맞춰〉 쓰이니 이 저것(만물萬物)으로부터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 공을〉 자처하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공을 자처하지 않으니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공을 자신의 것으로 하면 그 공이 오래 갈 수 없다.


역주
역주1 天下……斯惡已 : 저본, 河上公本에는 ‘斯’가 있으나 竹簡本과 帛書本에는 없다. 이 부분은 통상 아름다움의 상대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웨일리(Arthur Waley)는 이와 전혀 다른 시각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고 본다. 웨일리는 현실주의자들 예컨대 法家의 경우에는, “국가가 권장하는 덕목들을 완벽하게 成文化하면 쉽사리 아름다운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해석이다. 즉 “사람들이 西施와 같은 미녀를 보게 되면 보자마자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되지만, 훌륭한 사람 예컨대 힘은 장사이지만 유순해서 다루기 쉬운 사람을 보면 종종 얼뜨기라고 잘못 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해놓아야 한다.”(《The Way and its Power》)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생각(주로 法家)에 반대하는 것이 道家의 입장이며 이런 맥락을 전제할 때 《老子》의 “아름다운 것이 추한 것이다.”란 말의 의미가 훨씬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역주2 : 저본에는 ‘故’가 있으나, 竹簡本, 帛書本에는 없다.
역주3 : 저본에는 ‘較’로 되어 있으나, 竹簡本, 帛書本, 河上公本에는 ‘形’으로 되어 있다.
역주4 : 저본, 河上公本에는 ‘傾’으로 되어 있으나, 竹簡本에는 ‘涅’, 帛書本에는 ‘盈’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漢 惠帝 劉盈의 避諱로 보인다. 劉殿爵은 본래 ‘盈’이었다가 피휘로 ‘滿’으로 바꾸었다가 韻을 맞추기 위해 ‘傾’으로 다시 바꾼 것이라 보았다.(《Tao Te Ching》)
역주5 前後 : 저본, 河上公本에는 ‘前後’로 되어 있으나, 竹簡本, 帛書本에는 ‘先後’로 되어 있다.
역주6 人心之所進樂 : 古逸叢書本에는 ‘樂進’으로 되어 있다. 《老子》에서 心은 “使民心不亂”(經3.1), “令人心發狂”(經12.1), “愚人之心”(經20.7), “聖人無常心”(經49.1), “爲天下渾其心”(經49.4)과 같이 많이 사용되지 않으며 대체로 부정적 뉘앙스를 갖는다. 《노자》에서 聖人은 常心이 없이 百姓의 心을 자신의 心으로 삼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을 뒤섞는다.”거나 “그 마음을 비우라.”고 말하듯이 통치의 수단이거나 행위의 대상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王弼의 注에서는 훨씬 많은 용례로 쓰이면서 전통적인 儒學의 개념 즉 知的‧情緖的 차원의 의미를 모두 갖는 마음으로 쓰인다. 그래서 린(Richard J. Lynn)은 정서적 차원과 지적 차원을 함께 지칭하기 위해 ‘heart‧mind’라고 번역한다.
역주7 2) [而] : 저본에는 ‘而’가 없으나, 樓宇烈이 道藏集注本에 근거하여 보충한 것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8 不可得而偏擧之明數也 : 樓宇烈은 ‘明數’가 ‘有無’에서 ‘前後’까지 어느 하나만을 들어서 말할 수 없는 名에 해당하므로 의미상 ‘名數’로 보아야 한다고 보았다.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즉 어느 하나만을 들어서 밝히는 방법으로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왕필은 여기서 《장자》의 논리를 원용하고 있지만 《장자》와 같은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毛嬙과 麗姬를 미인이라고 여기지만, 물고기가 그녀들을 보면 물속 깊이 숨어버리고, 새가 그녀들을 보면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순록이 그녀들을 보면 꽁지가 빠지도록 달아난다. 과연 이 네 가지 가운데 어느 누가 천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아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 仁義의 단서와 是非의 길은 번잡하고 어수선하며 혼란스럽다. 내가 어찌 그것들을 구별하는 법을 알 수 있겠나!”(《莊子》 〈齊物論〉) 장자는 여기서 분명한 구분을 회피한다. 그러나 왕필은 美惡‧喜怒, 是非‧善不善은 언어적 개념들이고 상대적임을 말하면서도 그 근원이 모두 인간의 마음[心]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왕필은 이와 같은 인간의 마음 현상을 情으로 이해한다. 《論語釋義》에서는 이러한 情을 ‘自然’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도 自然으로 표현하고 있다. 왕필은 《장자》와 달리 세계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데 멈추지 않고, ‘마음[心]’이라는 하나의 근원을 긍정한다. 왕필은 《노자》의 이 문장에서 美惡‧喜怒, 是非‧善不善을 동일하게 ‘自然’의 층위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그에게 心은 오늘날 우리가 이성과 감성을 구분하는 것과 달리 자연스러운 情의 범주 안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왕필의 논리는 신유학의 性情論을 예견하게 한다. 따라서 왕필이 말하는 ‘理恕’란 신유학에서 말하는 ‘仁義禮智의 본체로서의 仁’과 다를 바가 없다. 달리 말해 왕필의 사유는 漢代 경학을 주도하였던 ‘荀子的’ 노선으로부터 ‘孟子的’ 노선으로의 회귀를 암시한다. 왜냐하면 그가 근원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하나’는 《노자》의 다양한 용어를 거쳐, 《주역》의 ‘太極’과 復卦의 ‘천지의 마음’을 경유하여 《논어》의 ‘恕’로 차츰 대체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성인의 도가 실현된 세상으로 다가가기 위해 가장 근원적인 것, 궁극적인 것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자리 잡고 있는 ‘恕’의 정신이라는 점을 드러내준다. 그래서 《노자주》에서 표현하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은, “만약 六親이 저절로 조화를 이루고 국가가 저절로 다스려진다면 효도와 자애 충신이 제가 있어야 할 곳을 모르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논어》의 서술과 같은 분위기를 띠고 있다. “스스로 그러하게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孝라고 하고, 이 사랑을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까지 확대하여 실천하는 것을 仁이라고 한다.[自然親愛爲孝 推愛及物爲仁也]”(《論語釋疑》) 왕필에게서 유가 정신의 精華란 다름이 아닌 ‘사랑[愛]의 실천’이지만 그것은 禮의 가식적인 실천이나 ‘억지로 仁한 척하는 것[爲仁]’과 달리 그것의 근본이 되는 것, 보다 궁극적인 것으로서 孔子가 말하는 ‘恕’로 돌아가는 것에 있다. 이러한 ‘서’가 자연스럽게 부모에게 행해질 경우 그것은 ‘효’이고, 이것이 확대되어 타인에게 확장되는 것이 바로 ‘인’이다. 왕필에게 ‘서’는 모든 사랑의 궁극적 원리[理恕]를 의미한다.
역주9 處無爲之事 : 저본, 河上公本에는 ‘處’로 되어 있으나, 竹簡本, 帛書本에는 ‘居’로 되어 있다. 王弼本의 경우에도 ‘處’로 되어 있으나, 바그너는 注17.1에서 ‘居無爲之事’라 하였으니 ‘處’를 ‘居’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그러나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역주10 自然已足 爲則敗也 : 자연스럽게 되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데 거기에 간섭하거나 억지로 하려 들면 오히려 실패한다는 뜻이다. 왕필은 自然을 주로 “자연스러움에 맡김[任自然]”(注5.1), “자연스러움을 본받음[法自然]”(注25.12), “자연스러움을 해침[傷自然]”(注12.1)과 같은 방식으로 언급하는데, 이는 따르고 맡겨야 할 것으로 이를 어기면 해를 입고 상하게 된다는 뜻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점을 참고하면 ‘爲’를 통상 우리말 번역에서 ‘억지로 하다’ 혹은 ‘인위적으로 하다’는 투의 번역보다 “〈자연스러움에 거슬러서〉 하다.”의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더 낫게 보인다. 특히 注12.1에서 “타고난 性命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해친 격이다.[不以順性命 反以傷自然]”라고 한 것을 보면 왕필이 ‘性命’과 ‘自然’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주11 行不言之敎 : 洪奭周는 《老子》의 經57.3에서 “내가 하는 게 없으니 백성들이 저절로 교화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니 백성들이 저절로 바르게 되고, 내가 일삼는 게 없으니 백성들이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게 없으니 백성들이 저절로 소박해진다.”라고 한 것을 지적하며 “말하지 않는 가르침이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몸을 공손히 할 뿐인데 백성이 교화가 되니 말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이 또한 王弼의 견해와 통한다.
역주12 爲則僞也 : ‘爲’는 일반적으로 ‘억지로 하다’, ‘간섭하다’의 뜻으로 이해하지만 王弼의 脈絡에서는 自然을 어기거나[違], 반하는[反] 방향으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앞의 注2.2 참조.
역주13 萬物 作焉而不(辭)[爲始] : 저본, 河上公本에는 ‘作焉而不辭’라고 되어 있고, 竹簡本, 帛書本에는 ‘作而不始’로 되어 있으나, 王弼의 注17.1에 ‘萬物作焉而不爲始’라 하였으므로 이를 따른다. 作은 范應元에 따르면 움직인다[動]는 뜻이다. ‘不爲始’는 “시작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呂氏春秋》 〈貴公〉에서 “천지는 위대하구나. 낳으면서도 자식으로 삼지 않고 이루면서도 소유하지 않는다. 만물이 모두 그 은혜를 입고 이익을 얻으면서도 그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한다.[莫知其所由始] 이것이 삼황오제의 덕이다.”라 한 것과 통한다. 成玄英처럼 ‘始’를 ‘앞서다[先]’로 보아 앞에 나서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老子義疏》) 이와 달리 ‘作焉而不辭’를 그대로 받아들여 린(Richard J. Lynn)처럼 “만물(백성)은 〈성인의 행동을〉 모범으로 삼아 따르지만 성인은 〈백성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라고 옮기기도 한다.(《The Classic of the Way and Virtue》)
역주14 生而不有 : 저본, 河上公本에는 ‘生而不有’가 있으나, 竹簡本과 帛書本에는 없다. 聖人은 百姓이 살아가도록 보살펴주기만 할 뿐 그들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역주15 功成而(弗)[不]居……是以不去 : 《淮南子》 〈道應訓〉에서는 이 부분을 子發과 宣王의 이야기를 통해 해설하는데 이 이야기는 《荀子》 〈彊國〉에도 나온다. 《회남자》에서는 子發이 蔡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하자 齊 宣王이 그에게 큰 상을 내리고자 한다. 하지만 자발은 “무릇 백성의 공로에 편승해 爵祿을 취하는 것은 仁義의 도가 아니다.[夫乘民之功勞 而取其爵祿者 非仁義之道也]”라고 말하며 끝내 사양한다. 《회남자》는 이 고사를 소개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한다.
역주16 功成而(弗)[不]居 : 저본에는 ‘不’이 ‘弗’로 되어 있으나, 아래 注文에는 ‘不’로 되어 있으니 이에 따른다. 王弼에 따르면 功이 이루어지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되는 것이므로 그 공을 자기의 것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다음의 注2.5에서 분명해진다.
역주17 (弗)[不]居 : 저본에는 ‘弗居’라고 되어 있으나, 앞의 注2.4에 따라 ‘不’로 바꾸었다. 王弼은 아래의 注에서 말하듯이 不居를 공을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洪奭周는 성인이 그 공을 자처하지 않으니[不居] 백성들이 떠나가지 않는다[不去]는 뜻으로 풀이하였는데 참고할 만하다.

노자도덕경주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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