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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道德經注

노자도덕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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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 이요
[注]高以下爲基 貴以賤爲本이요 有以無爲用이니 此其反也
其所無 則物通矣
故曰 反者 道之動也니라
40.2 이니
[注]柔弱同通이니 不可窮極이라
[注]天下之物 皆以有爲生이로되 有之所始 以無爲本이니
將欲全有 必反於無也니라


제40장은 뒤의 제42장과 연결된다. 제40장은 《도덕경道德經》에서 가장 짧은 장이지만 가장 잘 알려진 장이면서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이기도 하다. 크게 보면 이 장은 의 운동과 작용 그리고 만물萬物의 기원과 관련하여 유무有無에 관해 언급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 부분은 죽간본竹簡本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노자老子의 사상 가운데 아주 핵심적인 부분으로 여겨진다.
특히 주목할 것은 기존에 천하만물天下萬物에서, 에서 비롯된다는 명확한 논리가 죽간본竹簡本에는 천하만물天下萬物에서 동시에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어서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통상적으로 와 가깝고 만물萬物와 가까운 것으로 이해되어 왔는데, 죽간본竹簡本에 따르면 유와 무 모두 에 가까운 것이 된다.
는 오늘날 많은 경우 서양철학西洋哲學존재론적存在論的 개념인 존재存在(being)와 비존재非存在(non-being)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는데, 그레이엄(Angus C. Graham)은 이 두 말의 의미가 “……에 있다.(there is)” 혹은 “……에 없다.(there is not)”라는 뜻이 기본 의미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로부터 더 나아가서 보다 추상화된 의미를 갖게 되더라도 그 의미는 존재와 비존재의 의미라기보다 ‘무엇이라고 규정하여 말할 수 있는 것(something)’과 ‘무엇이라고 규정하여 말할 수 없는 것(nothing 혹은 no- thing-ness)’이란 의미로 옮기기도 한다. 이러한 까닭에 최근의 영역자英譯者들은 이를 다른 방식으로 다양하게 옮기고 있는데, 에임스(Roger T. Ames)는 유무有無를 각각 ‘규정된 것(the determinate)’과 ‘규정되지 않은 것(the indeterminate)’으로, 에드먼드 라이덴(Edmund Lyden)은 ‘있음(being)’과 ‘없음(beingless)’으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어의 흐름은 동양의 전통개념이 어떻게 서양식으로 이해되는지 살피는 데 참고할 만하다.
또한 《노자老子》의 유명한 ‘역전[]’의 사상 혹은 역설의 논리가 표현된 곳이 이 장인데, 이 ‘역전’의 사상은 20세기 중국에서는 서양의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변증법辨證法 사상과 전통철학을 연결하려는 시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 역전의 사상을 변증법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은 여전히 토론의 여지가 있다.
왕필王弼의 운동과 쓰임에 대한 《노자老子》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지만, 유무有無의 관계에서는 우주론적 해석보다 쓰임의 입장에서 그 의미를 이해한다. 즉 에 대해 가 우선성[]을 갖는다는 것은 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 완전함을 위해 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 또한 왕필에게서 늘 반복하여 볼 수 있는 해석의 방식이다.
되돌아가는 것은 의 운동이요,
높임은 낮춤을 기반으로 삼고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하고 를 쓰임[]으로 삼으니, 이렇게 〈서로 상대되는 것이 순환하는 것이 도의〉 되돌아감이다.
움직일 때에 모두 로 나아가면 만물이 통한다.
이 때문에 “되돌아가는 것은 도의 운동이다.”라고 했다.
〈도의〉 부드러움과 약함은 〈다하지 않는〉 도의 쓰임이다.
〈도의〉 부드러움과 약함은 〈만물에〉 똑같이 통하니 〈그 쓰임이〉 다할 수 없다.
천하天下만물萬物에서 생겨나고 에서 생겨난다.
천하天下의 만물은 모두 로 해서 생겨나지만 유가 시작되는 곳에서는 를 근본으로 삼는다.
장차 를 온전케 하려면 반드시 로 되돌아가야 한다.


역주
역주1 反者 : 帛書本에는 ‘反也者’로 되어 있고, 竹簡本에는 ‘反’이 ‘返’으로 되어 있다. ‘되돌아간다’고 풀이한 ‘反’은 竹簡本에 ‘返’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복귀하다’ 혹은 ‘회복하다[復]’는 의미로 이해되는데, 河上公本에서 “근본으로 되돌아가다.[反本]”라거나 宋의 林希逸이 反이란 “복귀하다, 고요해진다.[復也 靜也]”라 한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呂氏春秋》 〈似順〉에 의하면, “일이란 대체로 거스르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순조롭고, 대부분 순조로운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스른다. 누구든 순조로운 것이 거스르는 것이 되고 거스르는 것이 순조로운 것이 됨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더불어 장래의 변화를 이야기할 만하다. 〈낮이〉 가장 길 때에 이르면 가장 짧을 때로 되돌아가고 가장 짧을 때에 이르면 가장 길 때로 되돌아가는데 이것이 하늘의 도이다.[事多似倒而順 多似順而倒 有知順之爲倒 倒之爲順者 則可與言化矣 至長反短 至短反長 天之道也]”라고 하였다. 이는 相反된 것으로 되돌아감이란 의미를 함축한다. 王弼은 이를 高下‧貴賤‧有無의 관계를 예로 들어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下‧賤‧無를 통해 다시금 高‧貴‧有를 긍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되돌아감이란 되돌아옴을 의미한다.
역주2 道之動 : 帛書本에는 ‘道之動也’로 되어 있고, 竹簡本에는 ‘之’가 없다.
역주3 (知)[之] : 저본에는 ‘知’로 되어 있으나, 道藏集注本과 張之象本에는 ‘之’로 되어 있다는 바그너의 설에 따라 바로잡는다.
역주4 弱者 : 帛書本, 竹簡本에는 ‘弱也者’로 되어 있다.
역주5 道之用 : 帛書本, 竹簡本에는 ‘道之用也’로 되어 있다.
역주6 天下萬物 : 帛書本, 竹簡本에는 ‘天下之物’로 되어 있다. 馬敍倫은 《老子校詁》에서 王弼 또한 注에서 ‘天下之物’이라 했으니 본래 ‘天下之物’인데 河上公本에 의거하여 後人이 고친 것이라 본다.
역주7 生於有 有生於無 : 竹簡本에는 ‘有’가 없이 ‘生於有 生於無’로 되어 있다. 이 文章은 본래 無 → 有 → 萬物로 생성하는 과정을 새롭게 보는 시각을 제공하는데, 英國의 古文獻學者 알란(Sarah Allan)과 윌리암스(Chrisphine Williams)는, “通行本에 따르면 無는 道에 가깝고, 有는 物(萬物)에 가까운 것으로 보게 되는데, 王弼이 제1장에서 ‘이 두 가지는 함께 나와서 이름을 달리했다.[此兩者 同出而異名]’고 한 문장과 호응하지 않는다. 여기서 有와 無는 모두 道를 가리킨다. 즉 ‘天下의 萬物은 有와 無 모두에서 생겨난다.’는 제1장의 ‘此兩者 同出而異名’과도 꼭 맞는다.”(《The GUODIAN LAOZI》)고 하였는데 참고할 만하다. 그런데 王弼처럼 ‘此兩者 同出而異名’에서 ‘此兩者’를 有와 無로 보지 않고 ‘始’와 ‘母’라고 보는 경우 이러한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또 왕필은 注1.3에서 “만물은 지극히 작은 것에서 시작한 뒤에 성장하고 무에서 시작한 뒤에 생장한다.[萬物始於微而後成 始於無而後生]”라고 하여 결국 無를 易學의 微로 대체한다. 또 注1.2에서는 “무릇 유는 모두 무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만물이〉 아직 형체가 없고 이름이 없는 때가 만물의 시작이 된다.[凡有皆始於無 故未形無名之時 則爲萬物之始]”라고 하여 ‘始’가 ‘無名之始’임을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왕필은 有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無로 되돌아갈 것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목적이 ‘유의 온전함[全有]’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즉 無는 쓰임에 그 초점이 있지 어떤 존재상의 근원의 의미가 약하다. 王安石 이래 有無를 독립적인 개념으로 풀이하는 경우가 있으나 김홍경은 《노자》에서 무의 실체성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무’가 ‘도’와 그대로 일치될 수 없으며, 단지 無形性, 無名性과 관련하여 도를 형용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곧 도는 ‘무’이지만 무는 도일 수 없다.” 그리고 천하의 만물이 유에서 왔고 유는 무에서 왔다는 이 《老子》의 문장은 앞의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운동”이라는 말의 연장에서 이해해야 함을 강조한다. “눈에 보이는[有形] 그리고 이름을 갖고 있는[有名] 무엇은 어디에서 왔는가?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운동’이라는 원칙에 비추어보면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無形] 또 이름도 없는[無名] 것에서 왔을 것이다.”라고 설명하는 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洪奭周는 《訂老》에서 이러한 논리를 보다 체계적으로 완비하여 이 문장이 실은 《周易》의 “한 번은 陰이 되고 한 번은 陽이 되는 것을 일컬어 도라 한다.[一陰一陽之謂道]”와 같은 의미로 이해한다. 이처럼 실제로 ‘有生於無’는 ‘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nihilo)’라는 서구적 관념으로 이해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노자도덕경주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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