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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道德經注

노자도덕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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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生乎彼하고 稱出乎我니라
故涉之乎無物而不由 求之乎無妙而不出이면이니
妙出乎玄하고 衆由乎道니라
故生之畜之 不禁不塞하여 通物之性하니 道之謂也
生而不有하고 爲而不恃하고 長而不宰 有德而無主 玄之德也 謂之深者也
稱之大者也 名號生乎形狀하고 稱謂出乎涉求하니 名號不虛生이요 稱謂不虛出이니라
故名號하면 則大失其旨하고 稱謂하면 則未盡其極하니
是以 謂玄하면 則玄之又玄이요 稱道라하니라


이름이란 나 이외의 사물을 확정하는 것이고, 일컬음이란 말하는 사람의 의향을 따르는 것이다.
이름은 나 이외의 사물에서 생기고, 일컬음은 나에게서 나온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것을〉 ‘어떤 사물도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에 관련시켜 본다면 일컫기를 라고 하고, 그것을 ‘미묘해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에서 구해본다면 말하기를 ‘신비하다’라고 한다.
미묘함은 신비로움에서 나오고, 모든 것은 도에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낳아주고 길러준다는 것’은 금지하지 않고 막지 않아서 사물의 성품을 통하게 한다는 것이니, 도를 말하는 것이다.
‘생겨났지만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고 일했지만 내세우지 않으며, 장성되었지만 주재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덕은 있지만 주재자가 없다는 것이니, 신비함의 덕이다. 비함은 말의 깊은 속뜻이다.
‘도’는 일컬음의 큰 것이다. ‘명명해서 부르는 것’은 형상화된 것에서 생겼고, ‘일컬어서 말하는 것’은 관련시켜 보고 구해보는 것에서 나왔으니, 명명해서 부르는 것이 공연히 생기지 않았고, 일컬어서 말하는 것이 공연히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도나 신비함을〉 명명해서 부르면 그 뜻을 크게 잃고, 일컬어서 말하면 그 극치를 다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신비하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신비하고 또 신비함’이고, 도라고 일컫는 것이라면 ‘우주에는 네 개의 큼이 있음’이다.


역주
역주1 名也者……稱出乎我 : 왕필은 〈周易略例〉 ‘明象’에서 “象이란 뜻을 드러내는 것이고, 말이란 상을 밝히는 것이다. 뜻을 다하는 데에는 상만 한 것이 없고, 상을 다하는 데에는 말만 한 것이 없다. 말은 상에서 나오니 말을 찾았으면 상을 볼 수 있고, 상은 뜻에서 나오니 상을 찾았으면 뜻을 살필 수 있다. 따라서 뜻은 상으로 다 표현되고, 상은 말로 다 드러나게 된다.[夫象者 出意者也 言者 明象者也 盡意莫若象 盡象莫若言 言生於象 故可尋言以觀象 象生於意 故可尋象以觀意 意以象盡 象以言著]”라는 확고한 입장 표명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왕필은 《周易》 〈繫辭傳〉에서 “그렇다면 성인께서 〈전하고자 한〉 뜻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까?[然則聖人之意 其不可見乎]”라는 물음에 대한 공자의 답변 가운데 “글은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 드러내지 못한다.[子曰 書不盡言 言不盡意]”는 입장을 그대로 긍정하지 않는다. 왕필에 따르면 말은 상을 통해 뜻을 다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성인의 뜻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말이 지니는 역할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왕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왕필은 《장자》의 논리를 적용하여 “상을 얻었으면 말을 잊고, 뜻을 얻었으면 말을 잊는다.[得象而忘言 得意而忘象]”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말이란 뜻을 얻기 위한 매개에 지나지 않지만 말 없이는 뜻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중요한 한 가지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말이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을 통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의 말과 뜻에 관한 논변의 입장은 ‘象論’이다. 이 상을 잊음으로써 뜻을 구하게 되고 거기에서 ‘의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忘象以求其意 義斯見矣](〈周易略例〉 明象) 적어도 이 논리에 충실하다면 《노자》에는 성인의 온전한 뜻[意]을 담고 있지 않다. 여기서 왕필이 어린 시절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왕필의 부친 王業이 尙書郞이 되었다. 그때 裵徽는 吏部郞이었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왕필이 그를 찾아가 만났다. 배휘는 그를 한 번 보더니 기이하게 여겨 왕필에게 물었다. “無라는 것은 참으로 만물이 바탕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무를 치밀하게 말씀하려고 하시지 않았으나 노자는 끊임없이 무를 말하였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왕필이 대답하였다. “성인은 무를 체득하였고 또한 무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노자는 아직 有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늘 자신이 부족한 바였던 무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三國志》 〈魏書 鍾會傳〉 注 소재 何劭의 〈王弼傳〉) 적어도 이 대화에 따르면 진정한 無의 체득자는 노자가 아닌 孔子이다. 무에 대해 어떠한 말을 하든 그것은 진짜 무의 뜻을 드러내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무는 공자와 같이 유를 통해 드러난다. 이것은 “四象이 형체로 드러나지 않으면 大象을 드러낼 수 없고, 五音이 소리 나지 않으면 大音이 이를 수 없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면 왕필에게서 《노자》가 지니는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왕필이 보기에 적어도 《노자》는 말과 뜻이 지니는 긴장 관계에 대한 인식에 이르렀다는 점에 있다. 《노자》 제1장의 유명한 언명은 이를 잘 보여준다. “道는 〈문자로〉 표현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은 〈문자로〉 규정하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도와 규정할 수 있는 이름은 ‘구체적 사태’와 ‘구체적 사물’을 가리키므로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문자로 표현할 수 없고, 또 문자로 규정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왕필이 여기에서 구사하는 용어 가운데 ‘指事’와 ‘造形’이란 표현은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왕필이 살았던 魏나라가 성립하기 직전인 後漢의 古文經學의 용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용어들은 漢字를 분류하는 기본 원칙인 ‘六書’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許愼의 《說文解字》는 전래의 한자를 指事, 象形, 形聲, 會意, 轉注, 假借 여섯 가지로 나누었는데, 이 가운데 ‘지사’와 ‘상형’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周禮》에 〈제후의 자제가〉 8살에 小學에 들어가면 保氏가 먼저 六書로 가르친다고 한다. 〈육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가 ‘指事’이다. 지사라는 것은 보아서 알 수 있고 살펴서 알 수 있는 것으로, 上‧下 같은 글자가 이에 속한다. 둘째가 ‘象形’이다. 상형이라는 것은 그려서 그 물체를 이루는 것이고 형체에 따라 구불구불한 것으로, 日‧月 같은 글자가 이에 속한다.”(《說文解字》 〈敍〉) 그런데 도대체 왜 허신은 이렇게 한자의 유래로부터 한자를 분류하는 체계를 만든 것일까 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지적되어야 한다. 상기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허신이 문자를 이해하는 방식은 지극히 합리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허신은 고문경학가의 한 사람으로서 그가 이러한 작업에 매달렸던 것은 실상 六藝의 여러 서적들을 정확히 해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문자의 의미를 實事求是的이고 실용적인 방식으로 논구함으로써 ‘六經’을 비롯한 수많은 유가 경전의 의미를 천명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왕필이 보기에 언어의 字意에 매인 것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 도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왕필이 앞에서 ‘可道’와 ‘可名’을 ‘문자로 표현할 수 있다’와 ‘규정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은 이러한 취지에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질은 ‘常’과 대립되는 것이다. 즉 ‘常’의 영역을 언어적 규정성의 세계로 포괄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의 중심에 경전의 근간이 되는 언어적 고정에 대하여 거리를 두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경전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언어에 의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완성된 체계가 아니며,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자각하고 실현하려는 인간의 능동적 실천성에 있다고 본 것이다.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으며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정신이 중요하기에, 이는 언어적 고정성에 의해 갇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언명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가는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도 자체가 지닌 본성으로부터 오는 긴장이고 또한 성인이 전하고자 하는 뜻과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을 매개하는 경전의 언어에서 오는 긴장 두 가지를 함축한다.
역주2 稱之曰道 : 經25.5를 참조하면 좋다.
역주3 謂之曰玄 : 經1.5를 참조하면 좋다.
역주4 域中有四大也 : 經25.10과 그에 대한 注를 참조하면 좋다.

노자도덕경주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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