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涉之乎無物而不由
면 則
요 求之乎無妙而不出
이면 則
이니
故生之畜之는 不禁不塞하여 通物之性하니 道之謂也요
生而不有하고 爲而不恃하고 長而不宰는 有德而無主니 玄之德也라 玄은 謂之深者也요
道는 稱之大者也니 名號生乎形狀하고 稱謂出乎涉求하니 名號不虛生이요 稱謂不虛出이니라
故名號하면 則大失其旨하고 稱謂하면 則未盡其極하니
是以
로 謂玄
하면 則玄之又玄
이요 稱道
면 則
라하니라
이름이란 나 이외의 사물을 확정하는 것이고, 일컬음이란 말하는 사람의 의향을 따르는 것이다.
이름은 나 이외의 사물에서 생기고, 일컬음은 나에게서 나온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것을〉 ‘어떤 사물도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에 관련시켜 본다면 일컫기를 도道라고 하고, 그것을 ‘미묘해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에서 구해본다면 말하기를 ‘신비하다’라고 한다.
미묘함은 신비로움에서 나오고, 모든 것은 도에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낳아주고 길러준다는 것’은 금지하지 않고 막지 않아서 사물의 성품을 통하게 한다는 것이니, 도를 말하는 것이다.
‘생겨났지만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고 일했지만 내세우지 않으며, 장성되었지만 주재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덕은 있지만 주재자가 없다는 것이니, 신비함의 덕이다. 비함은 말의 깊은 속뜻이다.
‘도’는 일컬음의 큰 것이다. ‘명명해서 부르는 것’은 형상화된 것에서 생겼고, ‘일컬어서 말하는 것’은 관련시켜 보고 구해보는 것에서 나왔으니, 명명해서 부르는 것이 공연히 생기지 않았고, 일컬어서 말하는 것이 공연히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도나 신비함을〉 명명해서 부르면 그 뜻을 크게 잃고, 일컬어서 말하면 그 극치를 다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신비하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신비하고 또 신비함’이고, 도라고 일컫는 것이라면 ‘우주에는 네 개의 큼이 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