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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1)

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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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3.
獨見之論이니라
而仲尼亦云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하리라하시니라
予讀詩書 歷觀唐虞하고 至於夏商하여 以爲自生民以來 天下未嘗一日而不니라
文之爲言 猶曰 萬物各得其理云爾니라
父子君臣之間 兄弟夫婦之際 此文之所由起也니라
昔者生民之初 父子無義하고 君臣無禮하며 兄弟不相愛하고 夫婦不相保하니 天下紛然而淆亂하고 忿鬪而相苦하니라
文理不著而人倫不明하여 生不相養而死不相葬하니 天下之人 舉皆戚然하여 不寧於中이니라
然後 反而求其所安하여 屬其父子而列其君臣하고 聯其兄弟而正其夫婦하니라
至于虞夏之世 乃益去其鄙野之制니라
至於周而後 大備하니라
其粗始於父子之際하고 하니 其用甚廣而無窮이니라
蓋其當時 莫不自謂 而後之人 乃更以爲質也니라
是故 祭祀之禮 陳其籩豆하고 列其鼎俎하고 備其醪醴하여 俯伏以薦하고 思其飲食醉飽之樂而不可見也
於是 灌用鬱鬯하고 藉用白茅하니라
旣沃而莫之見이면 以爲神之縮之也니라
體魄降於地하고 魂氣升於天하여 恍惚誕謾而不知其所由處하니 니라
於是 하고 하여 以爲人子之心 無所不至也니라
薦之以滋味하고 重之以膾炙하되 恐鬼神之不屑也하고 薦之以하고 重之以하되 恐父祖之不吾安也니라
於是 先黍稷而稻粱하고하여 以爲不敢忘禮하고 亦不敢忘愛也니라
丁寧反復하고 優游而不忍去하여 以爲可以盡人子之心하고 而人子之心 亦可以少安矣니라
仲尼區區於衰周之末하여 收先王之遺文하고 而與曾子推論禮之所難處하여 至於毫釐纎悉하되 니라
及周之亡하여는 天下大壞하여 强凌弱하고 衆暴寡하니 而後世乃以爲用文之弊니라
夫自唐虞以至於商 漸而入於文하고 至周而文極於天下니라
當唐虞夏商之世 蓋將求周之文이나 而其하니 非有所謂質與忠也니라
自周而下 天下習於文이라 非文則無以安天下之所不足이니 此其勢然也니라
今夫冠婚喪祭而不爲之禮하고 墓祭而不廟하고 室祭而無所하니
仁人君子有所不安於其中而曰 不文하여 以從唐虞夏商之質이니라하나
夫唐虞夏商之質 蓋將以求周之文而未至者 非所以爲法也
愚竊謂忠質文三字 以之名三代之治則可어니와 以之論三代之相救하고 而又謂若循環然則不可니라
當其風氣之日開하여 而聖人以漸爲之經緯其間하고 至周而文始大備니라
及周之衰而茍有王者起라도 亦不過循文武成康之遺爾 豈得又推文而之忠與質乎哉리오
不然이면 湯何以纘禹舊服而武王之克商也리오
亦特曰 政由舊故라하나 愚獨謂夏未嘗尚忠이요 商未嘗尚質이요 周亦未嘗尚文이니라
此皆後世之所以仰觀三王之典禮 與其風俗之可見者而强名之爾니라
孔子曰 周監於二代하니 郁郁乎文哉라하니 頌美之也시니라
假令如後世儒相救之說이면 孔子於此 必深言之矣시리라
何以獨遺此一段大議리오


03. 에 대한
독창적으로 발견한 논리이다.
에 이르기를 “나라의 정치풍조는 (忠厚)을 숭상하고, 나라의 정치풍조는 (質實)을 숭상하고, 나라의 정치풍조는 (禮樂制度)을 숭상했다.”고 하였다.
중니仲尼(孔子) 또한 “나라는 두 왕조王朝()의 제도를 참작하였으니, 그 문물제도가 찬란하구나!
나는 나라 제도를 따르겠다.”고 하셨다.
나는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읽을 때에 당우唐虞시대를 대대로 살펴보고 하상夏商시대에 이르러서 ‘인류가 탄생한 이후로 온 천하가 하루도 으로 향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란 것은 “만물萬物이 각각 그 이치를 얻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부자父子군신君臣의 사이와 형제兄弟부부夫婦의 사이에서 이 이 말미암아 일어난다.
이전에 인류가 탄생하던 초기에는 부자父子간에 정분情分이 없고, 군신君臣간에 예법禮法을 지키지 않으며, 형제兄弟간에 서로 우애하지 않고, 부부夫婦간에 서로 보호하지 아니하니, 천하天下가 혼란하여 무질서하고 분투忿鬪하여 서로 고통을 안겨주었다.
문리文理(禮儀)가 현양顯揚되지 않고 인륜人倫이 밝지 아니하여 살아 있는 어른을 봉양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매장하지 아니하니,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여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그런 뒤에 반성해서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예의禮儀를 추구하여 부자父子는 정분을 가지게 하고, 군신君臣은 각각 지위를 지키게 하고, 형제兄弟는 서로 우애하게 하고, 부부夫婦는 내외관계를 바르게 하였다.
나라와 나라 시대에 와서 그 비야鄙野한 제도를 더욱 제거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천자天子지존至尊으로서 와기瓦器에 밥을 담아 먹고 토기土器에 국을 담아 먹었으며, 거실居室토계土階가 석 자 높이이고 지붕을 띠풀로 이고서 그 끝을 가지런히 자르지 않는 등 간소하고 누추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나라에 와서 예악禮樂이 크게 갖추어졌다.
예악禮樂의 대략적인 것은 부자父子의 사이에서 시작되고, 예악禮樂정화精華만물萬物의 전반에 걸쳐 베풀어졌으니 그 작용의 범위가 너무도 넓어 무궁무진하였다.
그래서 대개 그 당시에는 전대前代보다 문명文明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후세 사람은 도리어 그 문명文明질박質朴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제사祭祀 지내는 예식禮式에 있어서 대그릇과 나무그릇을 진열하고, 솥과 도마를 진열하고, 막걸리와 단술을 준비한 다음,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서 숭경崇敬하는 마음으로 제수祭需를 올리고서 조상의 영혼靈魂이 그 음식을 흐뭇한 마음으로 배불리 잡수실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그 영혼靈魂을 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울창주鬱鬯酒를 잔에 따라 모사茅沙 위에 부어 강림降臨을 구하고, 깨끗한 흰 띠를 땅에 깔아서 제품祭品을 진열하였다.
이미 울창주鬱鬯酒모사茅沙 위에 부어서 술이 그 속으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으면 영혼靈魂이 흠향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사자死者체백體魄은 땅속으로 들어가고 영혼靈魂은 하늘로 올라가므로 황홀恍惚하고 산만散漫하여 영혼靈魂이 경유하는 곳을 알지 못하니, 자손의 성음聲音기미氣味 같은 것이 행여 조상의 영혼靈魂이 오르내릴 때에 도움을 주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옥루屋漏에서 종제終祭를 지내고 에서 역제繹祭를 지내어 인자人子의 마음이 도달되지 않는 곳이 없음을 표시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올리고 다시 회자膾炙를 올리되 행여 귀신鬼神이 달갑게 여기지 않을까 염려하였고, 희생犧牲의 피와 털을 올리고 다시 반쯤 해체解體희생犧牲을 올리되 행여 부조父祖께서 우리를 돕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먼저 서직黍稷을 올리고 뒤에 도량稻粱을 올리며, 먼저 대갱大羮을 올리고 뒤에 서수庶羞를 올림으로써 감히 예의禮儀를 잊지 않음을 표시하고 또한 감히 조상의 유애遺愛를 잊지 않음을 표시하였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조상의 신령神靈에게 고하고 배회하며 차마 물러가지 못함으로써 인자人子의 마음을 다하고, 인자人子의 마음이 또한 조금 편할 수 있음을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이 이른바 ‘’이란 것은 모두 사람의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필연적인 이치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중니仲尼께서는 왕실王室쇠미衰微나라의 말기에 바삐 다니시면서 먼저 선왕先王(나라 군주君主)의 유문遺文을 수집하시고 증자曾子와 함께 의 어려운 곳을 추론推論하여 아주 세밀하고 자상하게 하되, 대개 왕도王道융성隆盛은 그 문물제도文物制度에 있어서 가장 완미完美한 경지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나라가 망함에 이르러서는 천하天下가 크게 무너져서 강자强者약자弱者를 능멸하고 다수多數소수少數를 억압하였으니, 후세後世에는 바로 문물제도文物制度시용施用한 폐단이라 여겼다.
당우唐虞로부터 나라에 이르기까지는 점차로 문명文明의 단계에 들어갔고, 나라에 이르러서는 문명文明천하天下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의 세대에는 아마 나라의 예악제도禮樂制度를 구하려고 해도 형세가 예악제도禮樂制度를 구비할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니, 이른바 ‘’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라 이후는 천하天下예악제도禮樂制度를 익혔으므로 예악제도禮樂制度가 아니면 천하의 부족한 점을 편안하게 할 수가 없었으니, 이것은 그 형세가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가관加冠혼인婚姻상장喪葬제사祭祀 때에 의식儀式을 거행하지 않는가 하면, 묘소에서는 제사 지내되 사당에서는 제사 지내지 않고, 실내에서 제사 지내되 제사 지낼 처소가 제대로 없으니,
인인仁人 군자君子가 마음속에 불안한 바가 있어서 말하기를 “문명文明하지 아니함으로써 질박質朴을 따를 것이다.”라고 하나
무릇 질박質朴은 아마 나라의 예악제도禮樂制度를 구하려고 해도 형세가 예악제도禮樂制度를 구비할 단계에 도달하지 못해서이니, 본받을 바가 아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건대, 세 글자는 삼대三代의 다스림에 대하여 이름을 매기는 것은 가하거니와, 삼대三代가 서로 구제함을 논하고 또 마치 순환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
풍기風氣가 날로 열릴 때를 당하여 성인聖人이 점차로 그 사이에서 발전시켰고, 나라에 이르러서 문물제도文物制度가 비로소 크게 구비되었다.
나라가 쇠할 때에 와서 참으로 왕자王者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또한 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유풍遺風을 따르는 것에 불과했을 뿐인데, 어찌 또 을 미루어 로 갈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은 어찌하여 의 옛일을 계승하고 무왕武王을 쳤겠는가?
또한 다만 “정치는 옛것을 따를 뿐이다.”라고 하지만, 나만은 ‘나라는 일찍이 을 숭상하지 않았고, 나라는 일찍이 을 숭상하지 않았고, 나라 또한 일찍이 을 숭상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모두 후세後世 사람들이 삼왕三王전례典禮와 그 풍속風俗 중에 볼 수 있는 것을 우러러보고 억지로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나라는 두 왕조王朝()의 제도를 참작하였으니, 그 문물제도가 찬란하구나!”라고 하셨으니, 아름다움을 칭송하신 것이다.
가령 후세의 유자儒者가 서로 구제한 말처럼 하였다면 공자孔子께서는 이에 대해 반드시 심도 있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유독 이 같은 한 문단의 대의大議만 남기었겠는가?


역주
역주1 周論 : 이 〈周論〉도 소년시절에 지은 것이다. 武王이 殷나라를 멸하고 나서 周나라를 세우고 鎬京에 도읍을 정한 뒤로부터, 幽王에 이르기까지는 ‘西周’라고 칭하고, 平王에 이르러 도읍을 洛邑으로 옮긴 이후는 ‘東周’라고 칭한다.
역주2 傳曰……尙文 : 《史記》 〈高祖本紀〉에 ‘夏之政忠’이라고 보이고, 《漢書》 〈杜欽傳〉에 “殷은 夏를 인습하여 質을 숭상하고, 周는 殷을 인습하여 文을 숭상하였다.[殷因于夏尙質 周因于殷尙文]”라고 보인다.
역주3 周監於二代……吾從周 : 이 내용은 《論語》 〈八佾〉에 보이는데, 곧 周나라는 夏나라와 商나라 두 王朝의 文物制度에 대하여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그대로 둔 뒤에 더 발전시켜 가장 文明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 文明을 따르겠다는 뜻이다.
역주4 趨於文 : 점점 禮樂制度를 중시한다는 뜻이다.
역주5 至于虞夏之世……茅茨不翦 : 《墨子》 〈節用〉에 “瓦器에 밥을 담아 먹고, 土器에 국을 담아 먹었다.[飯於土㙧 啜於土硎]”라고 보이고, 《史記》 〈太史公自序〉에 “土階는 세 계단이고, 지붕을 띠풀로 이고서 그 끝을 가지런히 자르지 않고, 서까래를 다듬지 않고, 질그릇에 밥을 담아 먹고, 土器에 국을 담아 먹었으며, 기장밥과 아욱국이었다.[土階三等 茅茨不剪 采椽不刮 食土簋 啜土刑 糲粱之食 藜藿之羮]”라고 보이고, 《漢書》 〈司馬遷傳〉에 “堂의 높이는 3尺이고, 土階는 세 계단이고, 지붕을 띠풀로 이고서 그 끝을 가지런히 자르지 않고, 서까래를 다듬지 않고, 질그릇에 밥을 담아 먹고, 토기에 국을 담아 먹었으며, 기장밥과 아욱국이었다.[堂髙三尺 土階三等 茅茨不翦 棌椽不斵 飯土簋 歠土刑 糲粱之食 藜藿之羮]”라고 보인다. ‘土階三尺’은 居室이 簡陋함을 나타내고, ‘茅茨不翦’은 陋醜함을 극도로 나타낸 것이다.
역주6 其精布於萬物 : 父子의 관계에서 禮樂의 대략을 볼 수 있고, 萬物의 관계에서 禮樂의 精華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역주7 文於前世 : 前代에 비하여 문명함을 가리킨다.
역주8 聲音氣臭之類 恐不能得當也 : 자손의 聲音과 氣味 같은 것이 행여 조상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때나 혹은 땅으로 내려올 때에 도움을 주지 못할까 염려한다는 말이다.
역주9 終祭 : 正祭. 三年喪을 마치고 처음 室內에서 지내는 제사 이름이다.
역주10 屋漏 : 室內의 서북쪽 구석을 이른다.
역주11 繹祭 : 正祭 다음날 이어서 지내는 제사 이름이다.
역주12 祊(팽) : 宗廟의 門. 또는 사당 문 안 제사를 지내는 곳을 가리킨다.
역주13 血毛 : 여기서는 犧牲의 피와 털을 가리킨다. 《禮記》 〈禮器〉에 “犧牲을 잡으면 피와 털을 가져다가 室內에서 神에게 告由한다.[血毛詔於室]”란 말이 보인다.
역주14 體薦 : 반쯤 解體한 犧牲을 올리는 것을 이른다.
역주15 : 저본에는 ‘飯’으로 되어 있는데, 《欒城集》에 의하여 ‘後’로 바꾸었다.
역주16 大羮 : 양념을 하지 않고 맹물로 끓인 순수한 고깃국을 말한다.
역주17 : 저본에는 ‘飽’로 되어 있는데, 《欒城集》에 의하여 ‘後’로 바꾸었다.
역주18 庶羞 :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말한다.
역주19 凡世之所謂文者……事之所當然也 : 세상 사람이 이른바 ‘文明’이란 것은 사람의 불안한 마음을 편안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필연적인 이치에 순응하기 때문이란 말이다.
역주20 蓋以爲王道之盛 其文理當極於此焉耳 : 대개 先王의 仁政이 隆盛한 것은 그 文物制度가 禮에 있어서 가장 完美한 경지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라고 여겼다는 말이다.
역주21 勢有所未至 : 형세가 禮樂制度를 구비할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역주22 仲尼區區於衰周之末………니라 : 呂留良의 《晩村先生八家古文精選》에는 “한번 主意를 이끌어낸 다음 거듭거듭 結束하였으니 문장이 매우 단단하고 치밀하다. ‘文이란 것은 萬物이 각각 그 이치를 얻은 것이다.’라고 하기까지 하였으니 見解가 더욱 높다. 潁濱의 經術이 그 父兄보다 훨씬 낫다.[一起提出主意 以後重重結束 文極堅緻 至謂文者 萬物各得其理云爾 見解尤高 潁濱經術 過其父兄]”라고 비평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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