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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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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7.
왕전提兵六十萬以擊하니 非盡合戰之兵也니라
方二千里 中多關塞要害 非多兵이면 則無以分其戍守 니라
兩壘相陣이면 自古鮮有二十三十萬以上而能有功者니라
전단田單爲相하니 전단조사趙奢曰 非吾不說장군將軍之兵法이나 所不服者 장군將軍之用衆也니이다
帝王之兵 不過三萬이나 而天下服矣니이다
장군將軍必負十萬二十萬而後用之하니 使民不得耕作하여 糧食輓賃不可給也니이다하니
조사曰 君非徒不達兵이요 又不明時勢矣니이다
干之劒 肉試則斷牛馬하고 金試則截盤匜이어니와
薄之柱上而擊之 則絶爲三이요 質之石上而擊之 則碎爲百이니이다
今以三萬之衆으로 而應彊國之兵이면 是薄柱擊石之類也니이다
且夫劒之爲用 無脊之厚 則鋒不入하고 無髀之薄이면 則刃不斷이니이다
無鉤鐔蒙須之便하고 操其刃而刺 則未入而手斷이니이다
今君 無十萬二十萬之衆으로 以爲釣咢鐔蒙須之便하고
古者 四海萬國이라 城大不過三百丈이요 人雖多 無過三千家
則以三萬拒之足矣니이다
今取古萬國하여 分爲戰國七兵이니 能具數十萬하고 食能支數歲하며 千丈之城 萬家之邑 相望也니이다
君奈何以三萬衆攻之오한대 전단田單喟然歎息曰 전단未至也니이다하니라
由此觀之컨대 攻千里之하고 毁百年之業이면 不乘大隙인댄 非大衆不可니라
彼決機兩陣之間하여 爲一日成敗之計라야 乃可以少擊衆耳니라


17. 왕전
왕전王翦이 60만 군사를 이끌고 가서 나라를 공격하였는데, 〈60만 군사는〉 모두가 전투에 참가한 군사들은 아니었다.
나라는 사방 2천 리여서 그중에는 관새關塞요해지要害地가 많으니, 많은 군사가 아니면 수수戍守를 나누고 적이 도모하는 바를 어긋나게 할 수 없다.
군루軍壘가 서로 을 쳐 대치했을 경우에는 예전부터 군사 20만이나 30만 이상을 가지고서도 공을 세운 자가 적었다.
왕전王翦시황始皇과 더불어 나라를 멸할 대책을 의논할 때에 ‘60만 군사가 아니면 갈 수 없다.’고 하였으니, 나는 처음에 요청한 군사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그러다가 전단田單조사趙奢와 더불어 용병用兵하는 방도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보고서야 노장老將의 말이 망언妄言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라가 나라 전단田單을 정승으로 삼으니, 전단田單조사趙奢에게 말하기를 “내가 장군將軍병법兵法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심복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장군將軍이 많은 군사를 쓰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왕帝王의 군사는 3만에 불과하였으나 천하天下가 복종하였습니다.
지금 장군將軍은 반드시 군사 10만이나 20만을 확보한 뒤에야 쓰고자 하니, 백성들로 하여금 제대로 경작耕作하지 못하여 군량을 운송하여 지급할 수 없게 만듭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사趙奢가 말하기를 “당신은 병법에 통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또한 시대의 추세에도 밝지 못합니다.
나라의 간장검干將劒은 고기에 시험하면 소와 말을 자를 수 있고, 쇠에 시험하면 소반과 주전자를 절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장검干將劒으로〉 기둥을 내리치면 잘려서 세 동강이가 나고, 돌을 가격하면 부서져서 수백 조각이 됩니다.
지금 군사 3만으로 강국强國의 군사에 응전應戰한다면 이는 〈간장검干將劒으로〉 기둥과 돌을 가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을 사용함에 있어서 의 등 부위가 두껍지 않으면 찔러도 칼끝이 들어가지 않고, 의 두께가 얇지 않으면 칼날이 자르지 못합니다.
이 이러한 두 가지 장점을 가졌더라도〉 의 고리‧자루‧콧등‧줄과 같은 편리한 부분이 없을 경우, 그 칼날을 잡아 찌른다면 칼날은 들어가지 못하고 손이 잘릴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10만이나 20만의 군사로 의 고리‧자루‧콧등‧줄과 같은 편리한 부분을 갖춤이 없고서 어떻게 3만 명의 군사만 가지고 천하를 휘젓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는 사해四海 안이 만국萬國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3백 길이 넘는 나라가 없었고, 사람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3천 가구가 넘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군사 3만 명을 가지고 대항해도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의 만국萬國을 취하여 전국칠국戰國七國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군사는 수십만을 갖춰야 되고, 군량은 몇 해를 지탱할 수 있어야 하며, 1천 길이나 되는 과 1만 가구나 되는 이 서로 마주 볼 정도로 즐비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3만 군사로 이를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전단田單은 크게 한숨을 쉬며 “나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했소.”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천 리나 되는 을 공격하고 백 년가량 쌓아온 기업基業을 파괴할 경우, 상대방에게 틈이 크게 생긴 기회를 타지 못할진댄 대량의 군대를 동원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저 사람(田單)의 생각대로라면, 두 군진軍陣 사이에서 승부의 관건인 시각을 결정하여 단 하루 만에 성패를 판가름하는 확고한 계산을 해야만 이에 적은 군대로 많은 군대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역주
역주1 王翦 : 王翦은 전국 말기 秦나라 將領이다. 소시에 군사관계를 곧잘 말하였기 때문에 始皇 때 장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軍中에서 兵卒들과 함께 생활하여 그들의 사기를 길렀다. 통일전쟁 중에는 군대를 이끌고 趙나라와 燕나라를 멸하였고, 또 60만 대군을 거느리고 楚나라를 격파하여 壽春을 탈취하는 동시에 楚王을 사로잡고 項燕을 淮南으로 추격하여 죽였으니, 이 공으로 武成侯에 봉해졌다.
이 글은 《古史》 卷44 〈白起王翦列傳 제21〉에서 篇目으로 취한 것이다.
역주2 乖其所之 : 《孫子》 〈虛實〉에 “우리가 전투를 원하면 비록 적이 성루를 높게 하고 참호를 깊게 파서 방비한다 하더라도 우리와 싸우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은 우리가 적이 꼭 구해야 되는 곳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싸우기를 원하지 않으면 땅바닥에 선만 그어놓고 지키더라도 적은 우리와 싸울 수 없으니, 그것은 적이 도모하는 바를 어긋나게 만들기 때문이다.[我欲戰 敵雖高壘深溝 不得不與我戰者 攻其所必救也 我不欲戰 雖劃地而守之 敵不得與我戰者 乖其所之也]”란 내용이 보인다.
역주3 王翦與始皇議滅楚 非六十萬不行 : 《史記》 〈白起王翦列傳〉에 의하면 “秦 始皇이 李信에게 ‘荊楚를 攻取하려고 하는데, 將軍의 생각에는 군사 몇 명이면 충분하겠는가?’라고 묻자, 李信은 ‘20만 명을 쓰는 데에 불과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始皇이 王翦에게 물으니, 王翦은 ‘60만 명이 아니면 불가합니다.’라고 하였다. 荊楚가 李信의 군사를 대파하니, 始皇이 대노하여 다시 王翦에게 出軍하기를 청하니, 王翦은 말하기를 ‘大王께서 부득이 臣을 쓰시려고 하면 60만 명이 아니면 불가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王翦이 60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니, 始皇이 직접 그를 전송하여 灞上에 이르렀다.”고 한다.
역주4 及觀田單與趙奢論兵 乃知老將之言不妄也 : 田單은 전국시대 齊나라의 名將이고, 趙奢는 전국시대 趙나라의 名將이다. 趙 惠王 29년에 秦나라 군사가 閼與로 進攻하자, 趙奢는 왕명을 받들고 가서 구원하여 秦나라 군사를 대파하였고, 그 공으로 馬服君에 봉해졌다. ‘論兵’은 用兵하는 방도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고, ‘老將’은 王翦을 가리킨다. 자세한 내용은 《戰國策》 〈趙策〉에 보인다.
역주5 : 저본에는 ‘罕’으로 되어 있는데, 《戰國策》 〈趙策〉에 의거하여 ‘咢’으로 바꾸었다.
역주6 焉能以三萬 行於天下 : 《戰國策》 〈趙策〉에는 “한갓 3만의 군사만 가지고 천하를 휘젓고자 한다면 당신이 어떻게 해낼 수 있겠습니까?[徒以三萬行於天下 君焉能乎]”로 되어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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