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宗
이 春秋高
하니 轍慮倦勤
하고 因極言得失
하되 而於
之事
에 하니라
仁宗曰 以直言召人하고 而以直言去之하면 天下其謂我何리오하니
宰相
이 不得已
하여 寘之下等
하고 授商州
이라가 徙大名
하다
時
에 王安石
이 與陳升之
와 領三司條例
하고 命轍
하다
安石
이 出
하여 使轍熟議
하니 轍曰 錢入民手
하면 雖良民
이라도 不免妄用
이요 及其納錢
엔 雖富民
이라도 不免踰限
이니이다
唐劉晏이 掌國計에 未嘗有所假貸니이다 有賤必糴하고 有貴必糶하니 以是로 四方에 無甚貴甚賤之病이니이다
此常平舊法이니 公誠擧而行之면 晏之功을 可立俟也니이다하니 安石曰 當徐思之라하니라
旣逾月
에 河北轉運判官王廣廉
이 奏乞
하여 於陝西漕司
에 私行靑苗法
하니 與安石意合
이라 於是
에 靑苗法
이 遂行
하니라
轍이 以書抵安石하여 力陳不可라가 觸其怒하여 徙他職하다
後坐兄
하여 謫監筠州鹽酒稅
하고 五年不得
라가 移知績溪縣
하니라
蔡確韓縝章惇을 轍이 皆論去之하고 而呂惠卿도 亦被論從竄典하니라
司馬光
이 한대 轍言 行之徐緩
이라야 乃得審詳
이라하니라
光
이 又欲改安石新
試士格
한대 轍言 進士來年
하니 日月無幾
라 徐議元祐五年以後格式
이라도 未晩
이라하니 光皆不能從
하니라
初
에 神宗
이 以
內亂
으로 用兵攻討
하여 乃於熙河
에 增蘭州
하고 於延安
에 增安疆米脂等五
하니라
朝廷이 知其有請蘭州五砦意하고 大臣議棄守未決하니라
轍言 一失此機면 必爲後悔라하니라 於是에 朝廷許之하니 夏人遂服하니라
朝廷이 議回河故道한대 轍爲公著言 河決而北은 自先帝不能回어늘 今乃欲取而回之하니 是謂智勇勢力이 過先帝也니이다
善爲國者는 藏之於民하고 其次는 藏之州郡이니이다
熙寧以來로 言利之臣이 不知本末이라 內帑別藏이 雖積如丘山이나 而委爲朽壤하여 無益於算也니이다하다
願罷外水監丞
하고 擧
北河事及諸路都作院
하여 皆歸轉運司
하고
轍曰 此群吏身計所係라하고 乃具以白宰執하여 請據實立額하고 缺者勿補하면 不過十年에 羨額當盡矣라하다
代軾爲翰林學士하고 尋權吏部尙書하며 使契丹還에 爲御史中丞하다
時
에 이 多起邪說
하여 以搖撼在位
하니 呂大防劉摯患之
하여 欲稍引用
하여 以平夙怨
하니 謂之
이니라
宣仁后 疑不決한대 轍面斥其非하고 復上疏云云하니라
宣仁后 命宰執讀於簾前하고 曰 轍疑吾君臣兼用邪正하니 其言極中理라한대
轍又奏言 大臣宜正己平心하여 無生事要功하고 因弊修法하여 以安民靖國이니이다하니라
初에 夏人이 相繼求和하니 朝廷이 許約하고 地界는 久之不決하니라
夏人이 乃於疆事에 多方侵求한대 熙河將佐范育种誼等이 遂背約하니 西邊騷然하니라
轍乞罷育誼하고 別擇老將하니 宣仁后以爲然이나 大臣竟主育誼하고 不從하니라
會에 熙河奏 夏人十萬騎가 壓境殺人하고 三日而退하니
乞因其退하여 急移近裏堡砦於界하고 乘利而往하고 不須復守誠信이니이다하니 下大臣議하니라
轍與呂大防劉摯로 極辨用兵曲直하고 復上奏曰 此非西人之罪요 皆朝廷不直之故니 臣欲詰責帥臣生事耳니이다하니라
時
에 이 除李淸臣吏部尙書
하니 給事中范祖禹
가 封還詔書
하다
今又用宗孟하니 此與去年用鄧溫伯無異라 恐朝廷自是不安靜矣리이다하니 議遂止하니라
紹聖初에 哲宗이 起李淸臣爲中書舍人하고 鄧潤甫爲尙書左丞하다
二人
은 久在
하여 不得志
러니 稍復言熙豊事
하여 以激怒哲宗
하니라
會에 廷試進士커늘 淸臣이 撰策題하니 卽爲邪說이라 轍諫謂 事有失當이 何世無之리잇가
父作之於前하고 子救之於後하여 前後相濟하니 聖人之孝也니이다하고
落職知汝州
하고 再責知袁州
러니 未至
에 降秩試少府監
하고 分司南京
하며 筠州
하니라
三年에 又責化州別駕하고 雷州安置라가 移循州하다
徽宗卽位
하여 徙永州岳州
라가 已而復太中大夫
하고 하다
蔡京當國
에 又降秩罷祠
하고 居許州
라가 再復太中大夫
하다
築室于許하여 號潁濱遺老라하고 自作傳萬餘言하며 不復與人相見하고 終日黙坐하니 如是者幾十年이라
卒年七十四
요 端明殿學士
하다 淳熙中
에 諡文定
하다
轍性沈靜簡潔하고 爲文汪洋澹泊하여 似其爲人하며 高處는 殆與軾軋하다
其使契丹也에 館客이 能誦其茯苓賦及洵軾文云이라하다
所著詩傳春秋傳古史老子解는 居許時에 乃成編하니라
소철蘇轍은 자는 자유子由이고, 19세에 형 소식蘇軾과 함께 진사과進士科에 올랐고, 또 책제거策制擧에도 함께 응시하였다.
인종仁宗이 나이가 많자, 소철은 인종이 정무에 나태해질까 염려하였고, 따라서 득실得失에 대해 심한 말을 하였으며, 금정禁庭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절실하게 말하였는데,
고신考臣 호숙胡宿이 〈소철이 주장한 대책對策의 말이〉 불손하다고 하여 폐출시킬 것을 청하자,
인종은 “직언直言을 해달라고 사람을 불러놓고서 직언을 했다 하여 사람을 버린다면 천하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재상宰相이 부득이 소철을 하등下等에 두어서 상주군사추관商州軍事推官으로 제수하였다가 뒤에 대명부유수추관大名府留守推官으로 고쳐 제수하였다.
신종神宗이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되던 해에 소철이 부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글을 올려 일을 말함으로써 소대召對의 기회를 얻었다.
이때 왕안석王安石이 진승지陳升之와 함께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를 거느리고 소철에게 명하여 속관屬官이 되게 하였다.
여혜경呂惠卿이 왕안석에게 붙어 있었는데, 소철이 그와 더불어 일을 논의할 때에 서로 의견충돌이 많았다.
왕안석이 〈청묘서靑苗書〉를 내놓고 소철로 하여금 숙의熟議하게 하면서 〈“불편한 점이 있거든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니, 소철이 말하기를 “〈돈을 백성에게 대여하고 2분의 이식을 내게 한 것은 본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함이요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출납할 때에 아전들이 간계를 부리는데, 비록 법이 있어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돈이 백성의 손에 들어가면 아무리 선량한 백성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남용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돈을 납입할 때에 가서는 아무리 부유한 백성이라 하더라도 기한을 넘기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을 경우엔 아마도 회초리를 반드시 써야 할 것이니, 주현州縣의 일이 번거로움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당唐나라 유안劉晏이 국가재정을 맡았을 때 대여貸與하는 일이 없고, 곡물 값이 헐하면 반드시 곡물을 사들이고, 곡물 값이 비싸면 반드시 곡물을 내다 팔았으니, 이렇게 함으로써 사방에 너무 헐하거나 너무 비싸거나 하는 병폐가 없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옛 상평법常平法을 거행하면 유안의 공을 당장에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안석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에 일리가 있으니,〉 서서히 생각해보아야 하겠다.”라고 하였다.
달포 후에 하북전운판관河北轉運判官 왕광렴王廣廉이 조정에 아뢰어 도승첩度僧牒 〈수천 장을 발급하고 받은 돈으로 본전本錢을 삼아〉 섬서조사陝西漕司에서 사적私的으로 청묘법靑苗法을 시행하니, 왕안석과 뜻이 맞았고, 이에 청묘법이 드디어 시행되었다.
소철은 왕안석에게 서찰을 보내 그 불가함을 힘주어 개진하였다가 왕안석의 노여움을 사서 다른 관직으로 옮겨졌다.
뒤에 소철은 또 형 소식이 풍자시로 죄를 받은 일에 연좌되어 귀양 가서 균주염주세筠州鹽酒稅에 관한 일이나 감시하고 5년 동안 조용調用되지 못했다가 적계지현績溪知縣으로 옮겨갔다.
철종哲宗이 즉위하여 소철을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으로〉 불러들였고, 원우元祐 원년元年(1086)에는 우사간右司諫으로 삼았다.
〈선인후宣仁后가 조정에 임어臨御하여 사마광司馬光과 여공저呂公著를 써서 폐단이 되는 일을 혁파하려고 하였는데,〉 채확蔡確‧한진韓縝‧장돈章惇이 〈아직 관직에 있기 때문에〉 소철이 모두 논죄하여 제거시켰고, 여혜경도 논죄를 입어 유배되었다.
사마광이 차역법差役法을 회복시키려고 하자, 소철은 말하기를 “서서히 시행해야만 그 자세한 것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사마광이 또 왕안석이 《시서신의詩書新義》로 선비들을 고시하던 과거제도를 개정하려고 하자, 소철은 말하기를 “진사를 뽑는 내년 가을 과거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의논이 아직 정해지지 못했으니 …… 과거 볼 사람들로 하여금 정론이 있음을 알아서 일심一心으로 공부하여 선시選試를 기다리게 한 연후에〉 원우元祐 5년 이후의 과거격식을 서서히 의논해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사마광은 모두 따르지 않았다.
전에 신종神宗이 하국夏國의 내란을 빌미로 군사를 일으켜서 공토攻討하여 희하熙河에 난주蘭州를 증설하고, 연안延安에 안강安疆‧미지米脂 등 5채砦를 증설하였다.
원우元祐 2년(1087)에 하국이 사신을 계속 보내왔다.
조정에서는 하국이 난주와 5채의 땅을 되돌려줄 것을 청하러 온 눈치를 알아챘으나 그 땅을 버릴 것인가 지킬 것인가에 대한 대신들의 의논은 결정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소철이 나서서 말하기를 “한번 이 기회를 놓치면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저들이 만일 군사를 집합하여 국경에 주둔할 때에 되돌려줄 것을 허락한다면 이는 군사를 길러서 주는 격이니, 은혜가 되지 못합니다. 되돌려주지 않는다면 변방의 틈이 한번 열려 화란禍亂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되돌려줄 시기는 바로 이때이니,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이에 조정에서 〈5채를 되돌려줄 것을〉 허락하자, 하국 사람들이 드디어 굴복하였다.
소철은 기거랑起居郞에 이어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벼슬자리를 옮겨갔다.
조정에서 황하黃河의 옛 물길을 회복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자, 소철이 여공저呂公著를 위하여 말하기를 “황하가 터져서 북쪽으로 흘러간 것을 선제先帝 때부터 〈옛 물길로〉 회복시킬 수 없었거늘, 지금 그것을 회복시키려고 하니, 이것은 지용智勇과 세력勢力이 선제보다 뛰어나다고 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소철이 전대轉對를 인하여 말하기를 “재부財賦의 근원은 사방에서 나와서 경사京師로 실려와 버려집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재부를 백성에게 저장하고, 그 다음은 재부를 주군州郡에 저장합니다.
희령熙寧 이후로 이익을 말하는 신하들이 본말에 관한 것을 알지 못하여 〈부국富國을 구하려 하면서 먼저 전운사轉運司를 피곤하게 합니다. 전운사가 이미 피곤하면 상공上供이 이어지지 못하고, 상공이 이어지지 못하면 호부戶部 또한 피곤해집니다. 그러므로〉 내탕內帑과 별장別藏이 비록 구산丘山처럼 쌓였으나 버려져서 썩은 물건이 되므로 재정에 이익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소철은〉 또 말하기를 “수십 년 이래로 이권이 나누어져 용도에 법도가 없으니,
원컨대 외수감승外水監丞을 없애고 하북하사河北河事 및 제로諸路의 도작원都作院을 모두 전운사에 귀속시키고,
도수감都水監‧군기감軍器監‧장작감將作監은 모두 호부에 예속시키소서.”라고 하니,
철종이 이를 따랐고, 오직 도수감만은 예전대로 놓아두었다.
조정의 논의에서 “원풍元豐시대에 정한 이서吏胥의 인원수가 정원에 넘친다.”고 해서 소철에게 명하여 일을 헤아려 감원하도록 하니,
소철이 말하기를 “이는 뭇 이서들의 생계가 매인 바입니다. 〈만일 분수分數대로 인원수를 정한다면 반드시 크게 감원을 해야 하니, 장차 소송이 어지럽게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하고, 이내 사유를 갖추어 재집宰執에게 아뢰어 “실제에 의하여 인원수를 확립하고 결원을 보충하지 않으면 10년 안에 응당 남아도는 인원이 다 줄어들 것”이라고 청하였다.
〈소철은〉 소식蘇軾을 대신해서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고, 얼마 후에는 임시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겸하였으며,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와서는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
당시 원풍구당元豐舊黨이 사설邪說을 많이 일으켜서 재위자在位者를 흔들거늘, 여대방呂大防과 유지劉摯가 이를 걱정하여 그들을 조금 안으로 끌어들여 써서 숙원宿怨을 없애려고 하니 이를 일러 ‘조정調停’이라 하였다.
선인후宣仁后가 〈조정설에 대해〉 의심하며 결정하지 않자, 소철이 면전에서 그 잘못된 〈조정설을〉 지척指斥하고 다시 상소하니,
선인후가 재집宰執에게 명하여 그 상소를 주렴 앞에서 읽게 하고 이르기를 “소철은 우리 군신君臣이 사邪와 정正을 겸용한다고 의심하니 그 말이 매우 이치에 맞다.”라고 하고,
여러 신하들이 따라서 화답하자, 조정하자는 설이 드디어 중단되었다.
소철은 또 아뢰기를 “대신은 마땅히 몸을 바르게 단속하고 마음을 화평하게 가져서 일을 내어 공을 노리지 말아야 하고, 폐단에 따라 법을 수정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평화롭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원우元祐 6년(1091)에 소철은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임명되었다가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승진되었다.
전에 하국夏國 사람이 계속해서 화친和親을 요구하니 조정에서 허락하였고, 국토의 경계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결정하지 못하였다.
하국 사람이 강역에 관한 일에 있어서 여러 방면으로 침범하자, 희하장좌熙河將佐 범육范育‧충의种誼 등이 드디어 〈하국과 맺은〉 조약을 어기고 〈질고보質孤堡와 승여보勝如堡를 쌓으니,〉 서쪽 변방이 소란스러웠다.
그러자 소철이 범육과 충의를 파직시키고 별도로 노장老將을 뽑아 〈희하를 지키게 할 것〉을 청하니, 선인후는 받아들였으나 대신이 끝내 범육과 충의를 주장하고 따르지 않았다.
때마침 희하에서 상주하기를 “하국의 10만 기병騎兵이 〈통원군通遠軍의〉 경계를 침범하여 사람을 죽이고 3일 만에 물러갔으니,
그들이 퇴군退軍했을 때에 급히 서둘러서 가까이 있는 보채堡砦를 국경으로 옮겼다가 편리한 기회를 틈타서 쳐들어갈 것이고, 〈잠시 논의했던 국경문제에 대한〉 신의를 다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선인후가 그 주문奏文을〉 대신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자 소철은 여대방‧유지와 함께 용병술의 잘잘못에 대해 심하게 변론하고, 다시 상주하기를 “이것은 하국 사람의 죄가 아니라 모두 조정에서 정직하지 못한 탓이니, 소신은 일을 낸 수신帥臣을 힐책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뒤에 자주 변경의 군사가 하국 땅에 깊숙이 들어감으로 인하여 선인후는 결국 소철의 상주에 따라 〈변경의 수비에 주의를 시켰다.〉
당시에 삼성三省에서 이청신李淸臣에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제수하니, 급사중給事中 범조우范祖禹가 〈임명에 관한〉 조서詔書를 봉해서 돌려보냈다.
삼성에서 다시 포종맹蒲宗孟에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제수하거늘
소철이 상주하기를 “전에 이청신에게 이부상서를 제수하니, 급사중 범조우가 어지럽게 간하여 그 논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지금 또 포종맹을 등용하니 이는 거년去年에 등온백鄧溫伯을 등용한 일과 다를 것이 없는지라, 조정이 이로부터 안정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 〈포종맹에게 병부상서를 제수하려는〉 논의가 드디어 중지되었다.
소성紹聖(송宋 철종哲宗의 연호) 초년에 철종哲宗이 이청신을 기용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삼고, 등륜보鄧潤甫(鄧溫伯)를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삼았다.
이 두 사람은 오랫동안 외조外朝에 있어서 뜻을 얻지 못하였더니, 다시 희령熙寧‧원풍元豐 연간에 〈신종이 법을 변경한〉 일을 말하여 철종의 노여움을 격발하였다.
때마침 대궐 뜰에서 진사進士를 시험 보이게 되어 이청신이 책제策題를 지었는데, 곧 사설邪說인지라, 소철이 간하기를 “일에 실수가 있는 것이 어느 세대인들 없겠습니까?
아버지는 앞에서 일으키고 아들은 뒤에서 구원하여 앞뒤에서 서로 도와 성취시켰으니, 성인의 효도였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한漢나라의 소제昭帝가 무제武帝의 법도를 변경한 일을 언급하니,
철종이 ‘한나라 무제를 이끌어 선조先朝에 빗댔다.’고 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는
〈소철의〉 관직을 떨어뜨려서 여주汝州를 맡아 다스리게 하였고, 재차 책임을 물어서 원주袁州를 맡아 다스리게 하였는데, 〈소철이〉 원주에 이르기 전에 관질官秩을 깎아내려서 소부감小府監에 이어 남경분사南京分司에서 봉사케 하였고, 또한 균주筠州에서 거주하도록 하였다.
3년에 또 책임을 물어 화주별가化州別駕를 시키고 뇌주雷州에 안치安置시켰다가 순주循州로 옮겨 안치하였다.
휘종徽宗이 즉위하여 〈소철을〉 영주永州‧악주岳州로 옮겨 안치시켰다가, 이윽고 태중대부太中大夫에 복직시키고 봉사奉祠하도록 하였다.
채경蔡京이 정권을 잡자 또 〈소철은〉 관질이 강등되는 동시에 사록관祠祿官을 박탈당하고 허주許州에 거주하다가 다시 태중대부太中大夫로 복직되어 치사致仕하였다.
허주許州에 집을 짓고 살면서 영빈유로潁濱遺老라고 호를 짓고 만여언萬餘言이나 되는 자서전을 지었으며, 다시는 사람들을 만나보지 않고 종일 조용히 앉아 있었으니 이와 같이 하기를 거의 10년이나 하였다.
74세에 졸卒하였고, 사후에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로 복직되었으며, 순희淳熙 연간에 문정文定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소철은 성품이 침정沈靜하고 간결簡潔하며, 문장은 왕양汪洋하고 담박澹泊하여 그 사람 됨됨이와 같았으며, 〈문장의 품격이〉 높은 부분은 소식蘇軾과 백중을 겨루었다.
그가 거란으로 사신 갔을 때에 어떤 관객館客이 그의 〈복령부茯苓賦〉 및 소순蘇洵과 소식蘇軾의 글을 줄줄 외었다고 한다.
〈소철이〉 지은 《시전詩傳》‧《춘추전春秋傳》‧《고사古史》‧《노자해老子解》는 허주許州에 있을 때 편집한 것이다.
또 《난성집欒城集》이 있어 아울러 세상에 유포되었다.
〈소철이〉 이미 당적黨籍에 기입되었기 때문에 왕명으로 삼소三蘇의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세 명의 아들 이름은 지遲‧괄适‧손遜이고 족손族孫은 원로元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