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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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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무기無忌之名 發於후생侯生하고 而全於모공설공이니라
후생侯生之奇 모공설공之正 廢一不可 而正之所全者多矣니라


14. 위공자
위공자魏公子가 비로소 후영侯嬴의 계략을 써서 병부兵符를 훔쳐 진비晉鄙를 죽이고 그 군사를 빼앗아 나라를 쳐서 나라를 보전시켜 환공桓公 문공文公 같은 을 이루었다.
그러나 형제兄弟가 이때부터 서로 화목을 잃고 10년 동안 감히 나라에 돌아오지 못하여 거의 그 몸을 안보할 수 없었으니, 몹시 위험하였다.
그 뒤에 나라 군사가 나라를 공격하자, 무기無忌나라로 돌아올 마음이 없었는데, 〈나라 은사隱士인〉 모공毛公설공薛公이 〈무기無忌를〉 설득시키니, 〈무기無忌는〉 퍼뜩 나라로 돌아와 제후諸侯의 군사를 모아 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종묘宗廟가 다시 안정을 찾고 형제兄弟가 예전처럼 화목하게 하니, 이렇게 한 연후에야 명성을 얻고 따라서 세상에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대개 무기無忌의 명성은 후생侯生에게서 출발되고 모공毛公설공薛公에게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후생侯生기계奇計모공毛公설공薛公정법正法은 그 어느 것도 폐지할 수 없으나, 정법正法이 〈무기無忌의 명성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한 점이 많았다.


역주
역주1 魏公子 : 魏公子는 곧 魏나라 無忌(?~B.C. 243)로, 魏 昭王의 少子이자 安釐王의 異母弟이다.
일찍이 相國을 맡고 信陵君에 봉해졌으며, 食客이 3천 명이나 있었다. 安釐王 20년에 술책으로 兵符를 훔쳐서 將軍 晉鄙를 죽이고 兵權을 탈취하여 趙나라를 구제하고 秦나라를 쳐서 승리하였다. 뒤에 上將軍이 되어 5國과 연합하여 秦나라 장수 蒙驁의 進攻을 물리쳤다.
이 글은 《古史》 卷47 〈魏公子列傳 제24〉에서 篇目으로 취한 것이다.
역주2 魏公子……成桓文之功矣 : 《史記》 〈信陵君列傳〉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侯嬴은 전국시대 魏나라 隱士인데, 나이 70에 집이 가난하여 大梁의 夷門監이 되었다. B.C. 257년에 秦나라가 趙나라를 공격하여 邯鄲을 포위하자, 趙나라에서 魏나라에 구원을 청하니, 魏王은 將軍 晉鄙에게 명하여 군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趙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중도에서 秦나라의 보복이 무서워 그만두고 전진하지 않았다.
그러자 魏公子가 侯嬴에게 대책을 물으니, 侯嬴이 조용히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晉鄙의 兵符는 항상 王의 卧內에 있다.’고 하는데, 如姬가 王에게 가장 총애를 받아 王의 臥內를 드나드니, 그가 兵符를 훔칠 수 있습니다. 제가 들으니 ‘如姬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에게 살해되었으므로 如姬는 복수심을 품은 지 이미 3년이 되었는데, 王 이하 모든 사람들이 그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나 범인을 찾을 수 없자, 如姬가 公子께 애원하므로 公子께서는 刺客을 시켜 그 원수의 머리를 베어 오게 해서 如姬에게 정중하게 건네주었다.’고 하니, 如姬는 公子를 위하는 일이라면 죽어도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公子께서 한 번 입을 열어 如姬에게 청하여 如姬가 반드시 허락한다면 虎符를 얻어 晉鄙의 군사를 빼앗아 북쪽으로 趙나라를 구원하고 서쪽으로 秦나라를 물리치면 이것은 五霸의 정벌입니다.”라고 하자, 公子가 그 계략에 따라 如姬에게 청하니, 如姬가 과연 晉鄙의 兵符를 훔쳐다가 公子에게 주었다.
公子는 그 兵符를 가지고 가서 晉鄙의 兵權을 빼앗아 趙나라를 구원하고 秦나라를 퇴각시켰다.
역주3 兄弟自是相失……殆哉 : ‘兄弟’는 魏나라의 安釐王과 公子 無忌를 가리키고, ‘相失’은 서로 화목을 잃은 것을 말한다. ‘十年不敢還’은 無忌가 趙나라에 머물고 감히 魏나라에 돌아오지 못한 것을 말한다. 《史記》 〈信陵君列傳〉에 “魏王(安釐王)이 公子가 兵符를 훔쳐다가 晉鄙를 矯殺한 것에 노하였다. 公子도 그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秦나라 군사를 물리쳐 趙나라를 보존시키고 나서 장수들로 하여금 군사들을 거느리고 魏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公子는 홀로 賓客과 함께 趙나라에 머물렀다.”란 내용이 보인다.
역주4 其後……因以立於世 : 《史記》 〈魏公子列傳〉, 《資治通鑑》 〈秦紀〉에 “〈秦나라 장수〉 蒙驁가 군사를 거느리고 魏나라를 쳐서 高都汲을 취하자 魏나라 군사가 자주 패하였다. 魏王이 이를 걱정하여 이에 사람을 시켜서 信陵君을 趙나라에서 청하니, 信陵君은 죄를 얻을까 두려워서 돌아오려 하지 않았고, 門下를 경계하기를 ‘감히 魏나라의 使者가 통하도록 주선하는 자가 있을 경우는 죽일 것이다.’라고 하니, 賓客들은 감히 諫하지 못하였다.
毛公과 薛公이 信陵君을 보고 말하기를 ‘公子께서 諸侯들에게 존중을 받는 것은 오로지 魏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魏나라가 위급한데 公子께서 救恤하지 않아 하루아침에 秦나라 군사가 大梁을 격파하여 先王의 宗廟를 훼손한다면 公子께서는 무슨 면목으로 天下에 서시겠습니까?’라고 하니,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信陵君은 얼굴빛이 상기되어 수레를 재촉해서 魏나라로 돌아오니, 魏王은 信陵君을 붙들고 울었고 그를 上將軍으로 삼았다.
信陵君이 사람을 시켜 諸侯들에게 구원을 청하니, 諸侯들은 信陵君이 다시 魏나라 장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군사를 보내 魏나라를 구원하니, 信陵君은 다섯 나라의 군사를 통솔하고 蒙驁를 河外에서 격파하였다.”란 내용이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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