蓋天心之所付予와 人心之所歸向이 其在태종太宗者審矣니라
至立太子에 고조高祖以長立건성建成하니 건성建成當之不辭하니라
에 廢
중종中宗立
예종睿宗하고 以
예종睿宗長子
헌憲으로 爲太子矣
니라
에 임치왕臨淄以兵入討
하고 예종睿宗踐祚
하니 而
당唐室復安
이니라
又將以長立헌憲하니 헌憲辭曰 時平이면 先長嫡이요 國亂이면 先有功이니이다
不如此면 必且有難이니 敢以死請이니이다하니 예종睿宗從之하니라
현종玄宗之賢이 不逮태종太宗이나 而晏然受命하니 則헌憲之讓은 賢於人遠矣니라
其欲立長은 非專其私也요 以爲立嫡以長은 古今之正義也니라
헌憲與현종玄宗兄弟相安하여 終身無間言焉하니 蓋古今一人而已니라
당唐 고조高祖가 태원太原에서 일어났는데, 그 모사는 태종太宗에게서 나왔고, 여러 아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장안長安를 정복하고 군도群盜를 제거함에 천하天下가 통일되었으니, 그 공功 또한 태종太宗에게서 나왔다.
대개 천의天意의 부여附與와 인심人心의 귀향歸向이 태종太宗에게 있음이 분명하였다.
태자太子를 세울 때에 가서 고조高祖가 장자長子란 이유로 건성建成을 태자太子로 세우니, 건성建成은 편안히 접수하고 사양하지 않았다.
이에 형제兄弟들이 시의猜疑하고 이간離間하여 끝내는 대란大亂에 이르렀다.
무릇 건성建成은 족히 말할 것이 못 되고, 그 허물은 고조高祖에게 있다.
그 뒤 무씨武氏의 난亂에 중종中宗을 폐위시켜 예종睿宗을 세우고, 예종睿宗의 장자長子 헌憲으로 태자太子를 삼았다.
중종中宗이 복위復位됨에 예종睿宗의 부자父子는 모두 왕王의 신분으로 황궁皇宮을 나와 도로 자기의 주택으로 갔다.
위씨韋氏의 난亂에 임치왕臨淄王(玄宗)이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서 토평討平하고 예종睿宗이 즉위하니 당唐나라의 왕실王室이 다시 안정되었다.
또 적장嫡長이기 때문에 헌憲을 태자太子로 세우려고 하니, 헌憲이 겸양하기를 “태평할 때에는 적장嫡長을 우선으로 해야겠지만, 나라가 어려울 때에는 공이 있는 이를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아니하면 반드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니, 감히 죽음으로써 청합니다.”라고 하니, 예종睿宗이 그 청을 따랐다.
태종太宗의 어짊으로도 쟁탈爭奪을 면하지 못하였다.
현종玄宗의 어짊이 태종太宗에 미치지 못했지만 편안히 명命을 받았으니, 헌憲의 겸양은 어느 사람보다 월등한 것이었다.
나는 논하건대, 고조高祖와 예종睿宗은 모두 중등의 재덕才德을 가진 군주君主였다.
그들이 장자長子를 세우려고 했던 것은 오로지 사심私心으로 한 것이 아니고, 적자嫡子를 왕으로 세울 경우는 먼저 연장자를 세우는 것이 고금의 공정하고 정당한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당한 도리라고 여겨 감히 어기지 않았으니, 어찌 전대前代를 상고하지 않았겠는가?
태왕太王은 태백太伯(泰伯)과 중옹仲雍(仲虞)을 놓아두고 계력季歷을 세웠고, 문왕文王은 백읍고伯邑考를 놓아두고 무왕武王을 세웠으니, 주周나라가 이로써 흥기興起하였다.
진실로 천명天命이 있는 바에 내가 사심私心을 가지지 않는다면 난亂이 어디로부터 생기겠는가?
그러나 태백太伯은 오吳나라로 도망하여 왕계王季를 피하였으니, 또한 난亂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장자長子를 폐하고 소자少子를 세우는 것은 비록 성현聖賢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어렵게 여겼다.
헌憲과 현종玄宗의 형제兄弟는 서로 편안함을 누리고 종신토록 이간하는 말이 없었으니, 아마 고금을 통하여 단 한 사람뿐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