只看자유子由行文은 如神龍乘雲於天之上하고 風雨上下하여 不可捉摸하고 不可測識하고 不可窮詰이니라
學者 如能靜坐窓几間하여 將此心黙提出來하여 與此二篇文字로 打作一片이면 忽焉而飛於九天之上하고 忽焉而逐於九淵之下하며 且令自我胸中으로 亦頓覺變幻飄蕩而不可覊制면 則文思之懸이 一日千里矣리라
當其思起氣溢하얀 如急風驟兩가 噴山谷 撼丘陵하고 及其語竭氣盡하얀 如雨散雲收에 山靑樹綠하여 塵無一點이니라
善與人言者는 因其人之言而爲之言이니 則天下之辨者服矣니라
與其里人言而曰 吾父以爲不然이라하면 則誰肯信以爲爾父之是是리오
故로 不若與之論曲直이니 雖초楚人可以與진秦人言之而無害니라
故
로 夫天下之所爲多言
은 以
이나 而終以不明者
는 惟不務辨其是非利害
하고 而以其父屈人也
니라
夫聖人之所爲尊於天下
는 爲其知夫理之所在也
요 而
주공周公중니仲尼所以爲信於天下
는 以其
而知之也
니라
故로 非其子弟면 則天下有不知주공周公之爲주공周公이요 而중니仲尼之爲중니仲尼者矣니라
是故로 노담老耼장주莊周其爲說은 不可以장주周공자孔辨也니라
天下之人
은 信規矩之于方圓
이니 而以規矩辨天下之不方不圓
인댄 則不若求其
하여 以陰合于規矩
니라
使彼以爲規而不圓하고 矩而不方이라도 則亦無害于吾說이니 若此면 則其勢易以折天下之異論이니라
에 天下之士 其論
노담老耼장주莊周與
불佛之道
하되 皆未嘗得其要也
니라
而吾之說曰 父子夫婦하고 食鷄豚하여 以遂萬物之性이라하니라
夫彼
하고 而吾亦以其說
하니 彼之不吾信
은 如吾之不彼信也
니라
故로 夫仁以安人하고 而行之以義하고 節之以禮하고 而播之以樂하고 守之以君臣하고 而維之以父子兄弟하고 食肉而飮酒하니라
此明於공자孔子者之所知也하여 而欲以諭其所不知之人而曰 공자孔子則然이라하니 嗟夫라
辯之而有窮이요 攻之而有間이면 則是不足以爲道니라
蓋天下有能平其心而觀焉하고 而不牽夫중니仲尼노담老耼之名而後에 可與語此也니라
이 글은 하편下篇과 함께 1편篇이 되어야 하겠다.
자유子由의 행문行文만을 본다면 마치 신룡神龍이 천상에서 구름을 타고 비바람을 따라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것과 같아, 더듬어 찾을 수도 없고 헤아려서 알 수도 없고 따져서 물을 수도 없다.
학자學者가 만일 창문 아래에 놓인 책상 앞에 조용히 앉아서 묵묵한 마음을 이끌어내어 이 2편篇의 글과 한 덩어리로 만든다면 홀연히 높은 하늘 위를 날고 홀연히 깊은 못 속을 다닐 수 있으며, 또한 나의 흉중胸中이 돈연히 변환變幻하고 표탕飄蕩하여 얽맬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면 문사文思의 속도는 하루 천 리를 달릴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 떠오르고 기氣가 넘칠 때에는 마치 급풍취량急風驟兩가 산곡山谷을 뿜어내고 구릉丘陵을 뒤흔드는 것과 같고, 말이 끝나고 기氣가 다할 때에는 마치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혀 산은 짙푸르고 나무는 녹색을 띠어 티끌 한 점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은 학자學者가 응당 자득自得해야 할 일이다.
남과 더불어 변론을 잘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말에 따라서 말을 하니, 천하天下의 변론자辨論者가 복종을 할 것이다.
마을 사람들과 말을 할 때에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한다면 누가 그것을 믿고 네 아버지의 주장이 옳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남과 더불어 곡직曲直을 논하는 것만 못하니, 비록 초楚나라 사람이 진秦나라 사람과 말을 한다 하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다.
그러므로 천하天下에서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이단異端을 배척하기 위함이나, 끝내 밝히지 못하는 것은 오직 시비是非와 이해利害를 변별하기만을 힘쓰지 않고, 그 아버지를 내세워서 사람을 굴복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성인聖人이 천하天下에서 존경을 받는 것은 이理의 소재所在를 알고 있기 때문이고, 주공周公과 중니仲尼(孔子)가 천하天下에서 믿음을 받는 이유는 그 자제子弟로 인해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제子弟가 아니라면 천하天下에 주공周公이 주공周公이란 것과 중니仲尼가 중니仲尼라는 것을 모르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노담老耼과 장주莊周가 한 말은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로써 변론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저들은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는 족히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성인聖人이 사물의 준칙準則이 되는 것은 비유하건대 규구規矩가 방원方圓의 준칙準則이 되는 것과 같다.
천하天下 사람들은 규구規矩가 방원方圓의 준칙準則이란 것을 믿으니, 규구規矩를 가지고 천하天下의 모나지 않고 둥글지 않은 것을 변론하느니보다는, 아예 그 지극히 모가 나고 지극히 둥근 것을 구하여 은연히 규구規矩에 합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가사 저들이 ‘규規인데도 둥글지 않고 구矩인데도 모나지 않다.’고 여기더라도 또한 나의 말에는 해로울 것이 없으니, 이와 같이 한다면 그 형세는 천하天下의 이론異論을 쉽게 꺾을 수 있을 것이다.
옛날에 천하天下의 선비들은 노담老耼‧장주莊周 및 불佛의 도道를 논하였으되 모두 그 요점은 터득하지 못하였다.
노담老耼의 학설은 “인의仁義를 버리고 예악禮樂을 끊은 뒤에야 천하天下가 편안해진다.”고 하였고,
우리 유가儒家의 학설은 “인의仁義와 예악禮樂은 천하天下가 그를 빙자해서 다스려지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불佛의 학설은 “아버지를 버리고 자식을 끊고 부부夫婦 관계를 갖지 않고 닭고기와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를 먹은 뒤에야 만물이 이루어진다.”라고 하였고,
우리 유가儒家의 학설은 “부자父子 관계를 갖고 부부夫婦 관계를 가지며 닭고기와 돼지고기를 먹어 만물의 성품을 이룬다.”라고 하였다.
저들은 자기의 학설을 견지하고 우리 또한 우리의 학설을 견지하니, 저들이 우리를 믿지 않는 것은 우리가 저들을 믿지 않는 것과 같다.
대개 천하天下가 따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것보다 더 급박한 것이 없거늘, 남의 의지意志를 강력하게 간섭해서 자기의 관점을 믿게 한다.
그러므로 인仁으로써 사람을 안정시키고, 의義로써 행하고, 예禮로써 절제하고, 악樂으로써 전파하고, 군신君臣의 질서를 지키고, 부자父子‧형제兄弟의 관계를 유지하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신다.
이것은 공자孔子를 배운 사람의 아는 바를 밝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깨우치려고 하면서 “공자孔子는 그렇게 했다.”라고 하는 것이니, 아!
나는 그렇게 여기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하天下의 도道는 아무리 변론해도 궁진窮盡이 없고, 아무리 공격해도 이론상에 파탄이 없는 것이다.
변론해서 궁진窮盡이 있고 공격해서 이론상에 파탄이 있다면 이는 족히 도道다운 도道가 되지 못한다.
과연 공자孔子로서도 이론이 궁진窮盡이 있었다면 또한 이 이론을 놓아두고 다른 이론을 따라갔을 것이다.
그것이 궁진窮盡이 없으니, 이로써 그 도道다운 도道라는 것을 알아 의심치 않았다.
대개 천하天下에 능히 그 마음을 공평하게 써서 보고 중니仲尼와 노담老耼의 이름에 끌리지 않는 의지력이 있는 뒤에야 더불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