然後에 문공文公徐起而收之하니 無尺土之賂와 一金之費로되 而진晉人戴之하여 遂霸諸侯니라
若진晉문공文公은 德雖未足이나 而待其自至하니 則庶幾王者之事也니라
是以로 主盟中夏 幾二百年이니 其功業與제齊환공桓等이요 而子孫過之遠甚하니 夫豈非其積之有厚薄故耶아
진晉도공悼公之復霸也
에 與
초楚爭
정鄭하여 合諸侯之師
하되 未嘗一與
초楚戰
하고 卒以救
초楚而服
정鄭이니라
蓋古之善用兵者는 皆以不戰으로 屈人之兵하니 非不得已면 不戰이니라
진晉 문공文公은 여희驪姬의 난難을 피하여 적狄 땅에서 12년을 살았다.
해제奚齊와 탁자卓子가 서로 이어서 죽으니, 진秦나라와 진晉나라의 민심이 문공文公에게로 돌아왔다.
문공文公은 구범咎犯을 깊이 믿고 조용히 살며 한평생을 마칠 것처럼 하였다.
혜공惠公에 와서 몸을 일으켜 진晉나라로 달려가되 행여 미치지 못할세라 급히 서둘렀다.
이에 진秦나라 사람은 밖에서 〈혜공惠公의 입국을 도운〉 대가를 요구하고 이극里克과 비정丕鄭은 안에서 〈혜공惠公을 옹립擁立한〉 공을 요구하였는데, 서로 참지 못하고 잇따라 패멸敗滅하였으니, 국내 사람과 국외 사람은 절망絶望하여 문공文公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러한 뒤에 문공文公이 서서히 일어나서 수습하였으니, 1척尺의 토지와 1냥의 돈을 쓰지 않았으나 진晉나라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여 결국 제후諸侯의 패자霸者가 되었다.
문공文公은 이해를 처리하는 계획이 참으로 세밀하였던 것이다.
하夏나라와 상商나라가 쇠미衰微할 때에 상商나라 탕湯과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모두 제후諸侯에서 일어나서 덕德을 심후深厚하게 쌓자 천하 인심이 돌아왔으므로 부득이한 뒤에 상대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천하天下를 취하였으나 천하天下의 화환禍患을 취한 일이 없고 그 뒤에 모두 수십 세대를 누렸다.
진晉 문공文公 같은 경우는 덕德은 비록 부족하였지만 그 천하가 절로 이르는 것을 기다렸으니, 왕자王者의 사업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중하中夏(中原)에서 거의 2백 년이나 맹주盟主(霸主) 역할을 하였으니, 그 공업功業은 제齊 환공桓公과 같고 자손子孫이 임금의 지위를 계승한 세대는 〈환공桓公의 자손보다〉 훨씬 많았으니, 어찌 그 덕을 쌓은 것에 후박厚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진晉 도공悼公이 다시 패주霸主가 됨에 초楚나라와 더불어 정鄭나라를 다투어 세 번이나 제후諸侯의 군대를 연합하되 일찍이 한 번도 초楚나라와 싸우지 않았고, 결국은 초楚나라를 구제하고 정鄭나라를 복종시켰다.
대개 옛날에 용병用兵을 잘한 사람들은 모두 싸움을 하지 않고도 남의 군사를 굴복시켰으니,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싸우지 않았다.
정鄭나라가 아직 복종을 하지 않았을 적에 중항언中行偃과 난염欒黶은 모두 싸워서 초楚나라를 이기려고 하였고, 오직 지智(知)罃만은 용병用兵의 어려움과 승부勝負의 기필할 수 없음을 알고 시일을 질질 끌며 지체하고 있으니, 초楚나라 군사가 스스로 패하여 겨루지 않고 가버렸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중항언中行偃과 난염欒黶 두 사람은 장차 선곡先縠이 되고 지앵知罃은 장차 임보林父가 되었을 것이니, 지앵知罃 같은 사람은 병법兵法을 알았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