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6.
하니 之人 歸心焉이니라
하고 靖而待之하여 若將終焉者니라
至於하여 起而赴之하되 如恐不及이니라
然後 문공文公徐起而收之하니 無尺土之賂 一金之費로되人戴之하여 遂霸諸侯니라
彼其處利害之計 誠審哉인저
雖取天下 而無取天下之患하고 니라
문공文公 德雖未足이나 而待其自至하니 則庶幾王者之事也니라
是以 主盟中夏 幾二百年이니 其功業與환공이요 而子孫過之遠甚하니 夫豈非其積之有厚薄故耶
도공悼公之復霸也하여 合諸侯之師하되 未嘗一與하고 卒以救而服이니라
蓋古之善用兵者 皆以不戰으로 屈人之兵하니 非不得已 不戰이니라
不然이면 리니지앵 可謂지앵兵矣니라


06. 나라
문공文公여희驪姬을 피하여 땅에서 12년을 살았다.
해제奚齊탁자卓子가 서로 이어서 죽으니, 나라와 나라의 민심이 문공文公에게로 돌아왔다.
문공文公구범咎犯을 깊이 믿고 조용히 살며 한평생을 마칠 것처럼 하였다.
혜공惠公에 와서 몸을 일으켜 나라로 달려가되 행여 미치지 못할세라 급히 서둘렀다.
이에 나라 사람은 밖에서 〈혜공惠公의 입국을 도운〉 대가를 요구하고 이극里克비정丕鄭은 안에서 〈혜공惠公옹립擁立한〉 공을 요구하였는데, 서로 참지 못하고 잇따라 패멸敗滅하였으니, 국내 사람과 국외 사람은 절망絶望하여 문공文公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러한 뒤에 문공文公이 서서히 일어나서 수습하였으니, 1의 토지와 1냥의 돈을 쓰지 않았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여 결국 제후諸侯패자霸者가 되었다.
문공文公은 이해를 처리하는 계획이 참으로 세밀하였던 것이다.
나라와 나라가 쇠미衰微할 때에 나라 나라 문왕文王이 모두 제후諸侯에서 일어나서 심후深厚하게 쌓자 천하 인심이 돌아왔으므로 부득이한 뒤에 상대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천하天下를 취하였으나 천하天下화환禍患을 취한 일이 없고 그 뒤에 모두 수십 세대를 누렸다.
문공文公 같은 경우는 은 비록 부족하였지만 그 천하가 절로 이르는 것을 기다렸으니, 왕자王者의 사업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중하中夏(中原)에서 거의 2백 년이나 맹주盟主(霸主) 역할을 하였으니, 그 공업功業 환공桓公과 같고 자손子孫이 임금의 지위를 계승한 세대는 〈환공桓公의 자손보다〉 훨씬 많았으니, 어찌 그 덕을 쌓은 것에 후박厚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도공悼公이 다시 패주霸主가 됨에 나라와 더불어 나라를 다투어 세 번이나 제후諸侯의 군대를 연합하되 일찍이 한 번도 나라와 싸우지 않았고, 결국은 나라를 구제하고 나라를 복종시켰다.
대개 옛날에 용병用兵을 잘한 사람들은 모두 싸움을 하지 않고도 남의 군사를 굴복시켰으니,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싸우지 않았다.
나라가 아직 복종을 하지 않았을 적에 중항언中行偃난염欒黶은 모두 싸워서 나라를 이기려고 하였고, 오직 (知)罃만은 용병用兵의 어려움과 승부勝負의 기필할 수 없음을 알고 시일을 질질 끌며 지체하고 있으니, 나라 군사가 스스로 패하여 겨루지 않고 가버렸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중항언中行偃난염欒黶 두 사람은 장차 선곡先縠이 되고 지앵知罃은 장차 임보林父가 되었을 것이니, 지앵知罃 같은 사람은 병법兵法을 알았다고 할 수 있겠다.


역주
역주1 : 周 成王이 아우 叔虞를 唐나라에 봉했는데, 叔虞의 아들 燮父가 국호를 ‘晉’으로 고쳤으며, 뒤에 그 大夫인 韓‧魏‧趙 三家에게 분할을 당해서 멸망하였다.
이 글은 《古史》 卷16 〈晉唐叔世家 제9〉에서 篇名으로 취하였다.
역주2 晉文公……處狄十有二年 : 《史記》 〈晉世家〉에 의하면 “驪姬는 춘추시대 驪戎國君의 딸인데, 晉 獻公이 驪戎을 쳐서 승리하고 그녀를 얻어 총애하였으며, 그녀는 奚齊와 卓子를 낳았는데, 奚齊를 太子로 세우려고 하였다. 마침 太子 申生이 그 어머니를 曲沃에서 제사 지내고 胙肉을 獻公에게 보내왔다. 驪姬는 몰래 사람을 시켜서 胙肉 속에 독약을 넣고 太子가 모반을 꾀한다고 무함해서 태자를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였고, 아울러 公子 重耳를 몰아냈으므로 重耳는 그 어머니의 나라인 狄(翟) 땅에서 12년을 살았다.”고 한다.
역주3 奚齊卓子 相繼戮死 : 《史記》 〈晉世家〉에 의하면 “里克이 奚齊를 喪次(祭廳)에서 죽이고, 悼子(卓子)를 조정에서 죽였다.”고 한다.
역주4 文公深信咎犯 : 《國語》 〈晉語〉에 “里克과 丕鄭이 屠岸夷를 시켜서 翟 땅에 있는 公子 重耳에게 고하기를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얻을 적기는 어지러울 때에 있고, 백성을 다스릴 적기는 동요할 때에 있으니, 公子께서는 어찌 晉나라에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公子를 위하여 인도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重耳가 이 일을 舅犯에게 고하기를 ‘里克이 나를 晉나라에 들이려고 합니다.’라고 하자, 舅犯이 말하기를 ‘옳지 못한 일입니다. 나무를 견고하게 심자면 처음에 잘 심어야 하니, 처음에 뿌리를 견고하게 심지 않으면 종말에는 반드시 말라버립니다.’라고 하였다.[里克及丕鄭 使屠岸夷告公子重耳於翟曰 國亂民擾 得國在亂 治民在擾 子盍入乎 吾請爲子鉥 重耳告舅犯曰 里克欲納我 舅犯曰不可 夫堅樹在始 始不固本 終必槁落]”는 내용이 보인다. 狐偃의 자가 子犯인데, 重耳의 외숙이기 때문에 ‘舅犯’이라고 한다. 咎는 舅와 통한다.
역주5 惠公 : 姬夷吾로 重耳와는 同父異母의 관계인데, 獻公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여 惠公이 되었다.
역주6 秦人責報於外……繼以敗滅 : 秦나라 사람은 惠公의 入國을 도운 대가를 요구하고 晉나라 大臣인 里克과 丕鄭은 惠公을 擁立한 공을 요구했다는 말이다.
《春秋左氏傳》 僖公 15년에 “惠公은 국내의 大夫들에게 자기를 국내로 맞아들이면 뇌물을 주겠다고 약속하고서 그것을 모두 위반하였고, 秦나라 임금에게는 자기가 晉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도와주면 河南의 다섯 城과 기타 동쪽으로는 虢나라의 국경에까지, 남쪽으로는 華山까지, 河內‧河北으로는 解梁 지방까지 주겠다고 약속하고서는 그것도 위반하였다.”란 내용이 보인다.
또 《春秋左氏傳》 등에 의하면 “惠公은 즉위한 뒤에 里克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뒤에 丕鄭을 죽였으며, 오래지 않아 秦나라가 기근이 든 틈을 타서 군사를 내어 秦나라를 공격하였으나 韓原에서 싸우다가 패하였으므로 惠公은 사로잡혔다가 얼마 안 가서 풀려나 돌아왔는데, 僖公 23년에 죽고, 그 아들 圉를 세우니 이가 바로 懷公인데, 懷公은 쫓겨났다가 19년 만에 귀국하여 정권을 잡은 晉 文公 重耳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역주7 夏商之衰……不得已而後應 : 商 湯王은 夏 桀王을 멸망시키기 전에는 商나라 부족의 수령으로 있었고, 周 文王은 商 紂王을 토벌할 때에는 西伯으로 있었다. ‘不得已而後應’은 상황이 어쩔 수 없게 된 뒤에 湯王은 桀王을, 文王은 紂王을 상대하였다는 말이다.
역주8 其後皆數十世 : 商나라는 湯에서 帝辛까지 30代였고, 周나라는 文王에서 赧王까지 36代를 이었다.
역주9 : 《史記》 〈晉世家〉에는 ‘九’로 되어 있다.
역주10 方鄭之未服也……不較而去 : 《春秋左氏傳》 襄公 9년(晉 悼公 9년)에 의하면, 晉나라가 鄭나라를 치자 楚나라가 와서 구제하니, 中行偃은 ‘楚나라를 유인해서 싸울 것’을 주장하고, 知罃은 ‘盟約을 허락하고 돌아와 楚나라 사람을 패배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또 襄公 10년에 晉나라가 鄭나라를 치자 楚나라가 鄭나라를 구제하니, 欒黶은 “楚나라를 피하는 것은 晉나라의 수치인데, 諸侯를 연합하여 부끄러움을 증가시켰으므로 전진하는 것만 못하니, 나는 혼자 전진할 것이다.”라고 하고, 知罃은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諸侯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는데, 승리를 보장할 수 없으니 돌아가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中行偃‧知罃‧欒黶은 다 晉나라 장수였다.
역주11 二子……將爲林父 : 二子는 中行偃과 欒黶을 가리킨다. 先縠과 林父(荀林父)는 晉나라 장수이다. 《春秋左氏傳》 宣公 12년‧13년과 《史記》 〈晉世家〉에 의하면 “晉 景公 3년에 楚나라가 鄭나라를 치자 晉나라가 鄭나라를 구제하였다. 晉나라 군대가 이르니, 楚나라는 이미 鄭나라를 쳐서 승리하고 아울러 맹약을 맺었다. 主將 荀林父는 싸움이 무익한 일임을 알고 退軍을 주장하고, 副將 先縠은 싸움을 주장하였다. 晉나라와 楚나라가 접전을 하고 있을 때에 鄭나라가 楚나라를 도우니 晉나라 군사가 대패하였다. 荀林父는 죽음을 청하였고, 先縠은 誅斬이 두려워 翟 지방으로 달아나 翟과 더불어 晉나라를 칠 것을 도모했는데, 晉나라가 그것을 깨닫고 곧 先縠을 誅斬하였다.”고 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