辯之而有窮이요 攻之而有間이면 則是不足以爲道니라
夫天下之人
은 不可以絶其
之親
하고 而合其
之懽
이니 此其勢然也
니라
故
로 노담老耼장주莊周는 知天下之
也
하고 起而承之
하여 以爲兼愛爲我之不足以收天下
라
是以로 不爲爲我不爲兼愛하고 而處乎兼愛爲我之外니라
此其意以爲 不兼愛면 則天下議其無親하고 不爲我면 則天下譏其爲人이라
故
로 하여 而
而曰 我皆無所爲
니 以是足以自免而逃天下之是非矣
라하니라
今以
노담老장주莊無所是非
하고 而其終歸於
하니 此其思之亦已詳矣
니라
양씨楊氏之爲我와 묵씨墨氏之兼愛는 此其爲道莫不有所執也니라
故로 爲我者는 爲兼愛之所詆하고 而兼愛者는 爲爲我之所毁니라
然而得其間而固守之면 則可以杜天下之異端而絶其口니라
今노담老耼장주莊周는 不得由大道而見其隙하고 竊入於其間하여 而執其機라
夫惟聖人
은 能處於其間而
이나 然
이나 兼愛爲我
도 亦莫棄也
하고 而能用之
하여 以
하며 處天下之紛紜
하되 而不失其當
이니라
故曰 백이伯夷숙제叔齊는 不降其志하고 不辱其身하며
而유하혜柳下惠소련少連은 降志而辱身이나 言中倫하고 行中慮하며
우중虞仲이일夷逸은 隱居放言이나 身中淸하고 廢中權하며
夫無可無不可는 此노담老耼장주莊周之所以爲辯也요 而중니仲尼亦云하니 則夫노담老耼장주莊周는 其思之不可以爲不深矣니라
蓋嘗聞之
컨대 聖人之道
는 處於可不可之際
하고 而遂從而
라
是以
로 其說萬變而不可窮
하며 노담老耼장주莊周는 從而
라
是以로 其說汗漫而不可詰이라하니 今將以求夫중니仲尼노담老耼是非者는 惟能知夫虛實之可用與否而已矣니라
是故
로 聖人
而制其御有之道
하여 以治其有實之事
니 則於天下
에 夫亦何事之不可爲
리오
夫노담老耼장주莊周는 則亦嘗自知其窮矣니 夫其窮者는 何也오
故曰
無欲以觀其妙
라하고 而又曰 常有欲以觀其徼
라하니라
而至於佛者하여는 則亦曰 斷滅이라하고 而又曰 無斷無滅이라하니라
旣斷滅矣하고 又恐斷滅之適以爲累하니 則夫其情을 可以見矣니라
夫
노담老耼장주莊周는 其亦近於中庸而無忌憚者哉
인저
천하天下의 도道는 아무리 변론해도 궁진窮盡이 없고, 아무리 공격해도 이론상에 파탄이 없는 것이다.
변론해서 궁진窮盡이 있고 공격해서 이론상에 파탄이 있다면 이는 족히 도道다운 도道가 되지 못한다.
옛날 육국시대六國時代에 초야草野의 선비들이 멋대로 의논하여 천하天下를 현혹시키니, 양씨楊氏는 자신만을 위하는 ‘위아爲我’의 학설을 내놓고, 묵씨墨氏는 똑같이 사랑하는 ‘겸애兼愛’의 학설을 내놓았다.
천하天下의 사람들 중에 군신君臣, 부자父子의 친속을 고념顧念하지 않는 자들은 전부 양씨楊氏에게 돌아가고, 생판 모르는 길 가는 사람이 모두 부자父子, 형제兄弟처럼 친한 관계가 될 수 있는 자들은 전부 묵씨墨氏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천하天下 사람들은 천속天屬의 친親을 끊고 친연관계가 없는 사람과 어울릴 수 없는 법이니, 이는 그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담老耼과 장주莊周는 천하天下의 부정확한 것임을 알고 일어나서 이어받아 ‘겸애兼愛’와 ‘위아爲我’는 족히 천하天下를 수습하지 못한다고 여겼다.
이러므로 ‘위아爲我’도 하지 않고 ‘겸애兼愛’도 하지 않고서 ‘겸애兼愛’와 ‘위아爲我’의 밖에 처하였다.
그들 생각은 또 “ ‘겸애兼愛’를 하지 않으면 천하天下 사람들이 친속이 없음을 비방하고, ‘위아爲我’를 하지 않으면 천하天下 사람들이 남을 위함을 기롱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므로 ‘위아爲我’와 ‘겸애兼愛’ 둘 다 갈 만한 곳이 없어서 범범泛泛하게 그 사이에 부유浮游하면서 “나는 모두 하는 바가 없으니, 이로써 족히 스스로 면하여 천하天下의 시비是非를 도피한다.”라고 한 것이다.
천하天下 사람들은 옳은 건 옳다고 하고 그른 건 그르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 학설은 시말始末을 고찰할 수가 있다.
그런데 지금 노담老耼과 장주莊周는 옳고 그른 바가 없고 결국은 ‘무유無有’에 귀착하였으니, 이것은 그 생각이 또한 치밀하고 자상한 것이다.
양씨楊氏의 ‘위아爲我’와 묵씨墨氏의 ‘겸애兼愛’, 이것은 그 도를 행함에 집착하는 바가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위아爲我’는 ‘겸애兼愛’의 비난을 받고, ‘겸애兼愛’는 ‘위아爲我’의 훼방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은 그 땅에서 다 거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사이를 얻어서 고수하면 천하天下의 이단異端을 막아 그 입을 다물게 할 수가 있다.
이 때문에 천하天下 사람들이 크게 복종하였고 그 도道는 드디어 후세後世에 전해졌다.
그런데 지금 노담老耼과 장주莊周는 대도大道를 경유함으로써 그 틈을 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그 사이에 들어가서 그 관건關鍵을 잡았다.
이 때문에 그 이론이 종횡縱橫하고 견고堅固하여 깨뜨릴 수가 없다.
또한 천하天下의 일을 어떻게 한마디 말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저 두 사람은 ‘겸애兼愛’를 가지고 일관하려 하고, ‘위아爲我’를 가지고 결단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그 설說은 결국 한계를 드러낼 때가 있게 된다.
성인聖人은 그 사이에서 합당하게 처리하였으나, ‘겸애兼愛’와 ‘위아爲我’도 버리지 않고 잘 이용하여 대도大道에 부합시켰으며, 천하天下가 어지러운 때에 처하더라도 그 온당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뜻을 굽히지 않고 몸을 더럽히지 않았으며,
유하혜柳下惠와 소련少連은 비록 뜻을 굽히고 몸을 더럽혔으나 말이 도리에 맞고 행실이 사리에 맞았으며,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은 숨어 지내면서도 호언장담하였으나, 그들의 몸가짐이 청렴결백하였고, 세상을 버리는 행위도 때에 알맞았다.
나는 그들과는 달라서 가可한 것도 없고 불가不可한 것도 없다.”고 하였다.
‘가可한 것도 없고 불가不可한 것도 없는 것’은 바로 노담老耼과 장주莊周가 변론한 바요, 중니仲尼도 그렇게 말하였으니, 노담老耼과 장주莊周는 그 생각이 깊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일찍이 듣건대 “성인聖人의 도道는 가可하고 불가不可한 어름에 처하고 따라서 도道를 충실充實하게 한다.
이 때문에 그 설說이 만변萬變하여 궁진窮盡할 수가 없으며, 노담老耼과 장주莊周는 따라서 도道를 부실하게 허부虛浮한다.
이 때문에 그 설說이 한만汗漫하여 힐문詰問할 수가 없다.”고 하니, 지금 중니仲尼와 노담老耼의 옳고 그른 것을 구하려고 하는 자는 오직 허虛와 실實 그 어떤 것이 쓸 수 있는가의 여부만을 알면 될 뿐이다.
물체物體가 있어 서로 만나면 또한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그 실체 존재인 ‘유有’에 의거하여 그 ‘유有’를 운용하는 방도를 마련함으로써 그 실체가 있는 일을 다스렸으니, 천하天下에 또한 무슨 일이든 할 수 없겠는가?
그런데 구구하게 ‘유有’를 구해서 ‘무無’ 속에 넣기까지 한다면 힘쓰는 것이 너무 수고롭지 않겠는가?
노담老耼과 장주莊周는 또한 일찍이 그 ‘궁진窮盡’을 스스로 알았을 것이니, 그 ‘궁진窮盡’이란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자면, 그 실체 존재에 의거하여 실체를 존재시키는 것처럼 쉬운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언제나 무無의 견지에서 그 〈도체道體의〉 오묘함을 볼 것이다.”라고 하고, 또 “언제나 유有의 견지에서 그 〈도용道用의〉 광대무변함을 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미 “ ‘무無’가 활용되기 때문이다.”고 하고, 또 “ ‘유有’의 물건이 이롭게 쓰이는 까닭이다.”고 하였다.
불자佛者에 와서는 또한 “단멸斷滅한다.”라고 하고, 또 “ ‘단斷’도 없고 ‘멸滅’도 없다.”라고 하였다.
이미 “없다.”고 해놓고는 또 ‘없다.’는 것이 도리어 ‘다함’이 될까 염려하였다.
이미 “단멸斷滅한다.”고 하고 또 ‘단멸斷滅’이 마침 누累가 될까 염려하였으니, 그 정상을 볼 수가 있다.
중니仲尼가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중용中庸을 하는 것은 군자君子의 덕德을 가지고 또 때에 따라 ‘중中’에 잘 처하였고, 소인小人이 중용中庸을 하는 것은 소인小人의 마음을 가지고 또 기탄忌憚하는 바가 없다.”라고 하였다.
노담老耼과 장주莊周 역시 아마도 중용中庸을 하되 기탄忌憚함이 없는 자에 가까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