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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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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백기處是니라
慨然歎曰 백기以武夫 無所屈信이라가 而困於游談之士하니 使백기勉彊一行이면 兵未必敗而免於死矣라하노라
하고 이요백기非特以怨不行이니 蓋爲之流涕也니라
조충국趙充國서강西羌 守便宜不肯奉詔出兵이니라
신무현辛武賢雖兵出有功이나 조충국充國竟爲선제明其非하니신무현武賢怨之至骨이니라
嗚呼
循道而不阿 自古而難之歟인저


23. 백기
백기白起를 논의한 부분은 옳다.
내가 일찍이 태사공太史公(司馬遷)의 〈백기열전白起列傳〉(《史記》 〈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에서 ‘나라가 재차 한단邯鄲을 칠 때에 백기白起범수范睢와 원한관계가 있어 병을 핑계로 싸우러 가지 않았다가 자기 몸을 죽게 한 것’을 읽고,
백기白起무부武夫로서 융통성이 없다가 유담사游談士에게 곤욕을 당하였으니, 가사 백기白起가 억지로라도 한 번 출병을 하였더라면 군사는 반드시 패하지 않을 것이고 죽음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개연慨然히 탄식하노라.
전국책戰國策》을 읽을 때에 백기白起가 스스로 성패의 사적을 진술한 것을 보고서야 한단邯鄲은 결코 재차 칠 수 없었던 양심 때문이었지, 백기白起가 〈범수范睢와〉 원한관계 때문에 출병하지 않은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았으니,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노라.
조충국趙充國서강西羌을 칠 때에 편의便宜한 방법을 지키고 왕명을 받들어 출병하려 하지 않았다.
신무현辛武賢은 비록 출병하여 공을 세웠으나 조충국趙充國은 결국 선제宣帝를 위하여 그 잘못을 밝혔으니, 이는 신무현辛武賢이 뼈에 사무칠 정도로 원망한 일이었다.
비록 조충국趙充國을 해치지 못하였으나 마침내 그 아들 조앙趙卬을 모함하였다.
아!
정도正道를 따르고 아부하지 않는 것은 예부터 어려운 일이었도다.


역주
역주1 白起 : 白起(?~B.C. 257)는 전국시대 秦나라 사람으로 用兵術이 뛰어났다.
昭襄王 13년에 左庶長將이 되어 韓나라의 新城을 격파하였고, 이해에 魏冉의 추천으로 漢中守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左更이 되어 漢나라와 魏나라의 연합군을 伊闕山에서 공격하여 24만 명을 斬首하고, 또 그 장수 公孫喜를 사로잡고 다섯 城을 빼앗은 뒤에 國尉로 승진하였다.
다음해에는 大良造가 되어 魏나라를 쳐서 61城을 빼앗고, 5년 뒤에는 趙나라를 쳐서 光狼城을 빼앗고, 7년 뒤에는 楚나라를 쳐서 鄢‧鄧 등을 빼앗고, 다음해에는 楚나라를 쳐서 郢을 빼앗았으며, 그 공으로 武安君에 봉해졌다. 昭襄王 47년에는 上將軍이 되어 長平에서 趙나라 군사를 대파하고 降卒 40여만 명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뒤에 范睢(應侯)와 의견이 맞지 않아 昭襄王의 激怒를 사서 핍박을 받아 자살하였다.
이 글은 《古史》 卷44 〈白起王翦列傳 제21〉에서 篇目으로 취한 것이다.
역주2 秦之再攻邯鄲也……以亡其軀 : 秦 昭襄王 49년에 五大夫 王陵으로 하여금 다시 邯鄲을 치게 하였으나 빼앗지 못하였다. 秦 昭襄王 48년 10월에 范睢가 趙나라 사신 蘇代에게 뇌물을 받고 昭襄王을 설득해서 趙나라를 치는 일을 정지시켰다.
《史記》 〈白起王翦列傳〉에 “應侯(范睢)가 秦王에게 말하기를 ‘秦나라 군사가 지쳐 있으니, 청컨대 韓나라와 趙나라가 땅을 떼어 화친을 맺는 일을 허락하소서. 따라서 士卒을 휴식시키소서.’라고 하니, 秦王은 그 말을 들어주었다. 韓나라는 垣雍城을, 趙나라는 6城을 떼어서 화친을 맺었다. 정월에 모두 군사를 철수하였다. 武安君(白起)은 이 소식을 들었고, 이로 말미암아 應侯와 틈이 생겼다.
그해 9월에 秦나라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五大夫 王陵으로 하여금 趙나라 邯鄲을 치게 하였다. 이때에 武安君은 병 때문에 출군할 수 없었다. 昭襄王 49년에 정월에 王陵이 邯鄲을 공격하여 약간 승리하자, 秦나라는 더 군사를 징발하여 王陵을 도왔다. 그런데 王陵의 군사는 다섯 부대를 잃었고, 武安君의 병은 더 심하였다. 秦王이 武安君으로 하여금 王陵을 대신하여 장수가 되게 하니, 武安君은 말하기를 ‘邯鄲은 실제로 쉽게 공격할 수 없습니다. 또한 諸侯들의 구원이 날로 이르는데, 저 諸侯들은 秦나라를 원망한 지 오래입니다. 지금 秦나라가 비록 長平의 군사를 격파하였으나 秦나라 군사도 죽은 자가 절반이 넘습니다. 나라 안이 텅 비었는데, 멀리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서 남의 國都를 다툰다면 趙나라는 그 안에서 응전하고 諸侯들은 그 밖을 공격하여 秦나라 군사를 깨뜨릴 것이 분명하니 불가합니다.’라고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3 及讀戰國策 觀起自陳成敗之蹟 : 자세한 내용은 《戰國策》 〈中山策〉에 보인다. “秦 昭王이 이미 백성을 휴식시키고 군병을 정비한 뒤에 다시 趙나를 치고자 하니, 武安君이 말하기를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昭王이 말하기를 ‘지난 해 나라가 텅 비고 백성이 굶주렸을 때에도 그대는 백성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군사 군량을 더 요구하면서 趙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하더니, 지금 과인이 백성을 휴식시키고 군사를 양성하였으며 식량과 물자를 쌓아 三軍의 급료가 전보다 배로 늘었는데 그대는 안 된다 하니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한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武安君은 말하기를 ‘長平 전투 때에는 秦나라 군사가 크게 이기고 趙나라 군사가 크게 깨졌기 때문에 秦나라 사람들은 기뻐하고 趙나라 사람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秦나라 백성으로 전투에서 죽은 자는 후한 장례를 치러주고 다친 자는 충분히 요양하도록 하며 노역한 자에게는 잔치를 베풀어주었으니, 음식값 등으로 지출된 재물의 손실이 많았습니다. 趙나라 사람으로 전투에서 죽은 자는 제대로 수습도 못했을 뿐더러, 다친 자는 제대로 요양도 못했기 때문에 서로 슬피 울고 함께 걱정하면서 힘을 다해 농사를 지어 재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 王께서 군사를 출발시키면 비록 전보다 배나 되겠지만, 臣은 헤아려보건대 趙나라의 수비 역시 열 배나 될 것입니다. 趙나라는 長平 전투 이래로 君臣이 함께 걱정하면서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며, 겸손한 말과 후한 폐백으로 사신을 보내고 사방 제후국에 출가시켜 燕나라‧魏나라와는 친교를 맺었고, 齊나라‧楚나라와도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근심이 쌓일수록 마음을 합하여 오로지 秦나라 방비에만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안으로는 재정이 충분하고 밖으로는 외교를 맺고 있으니, 지금으로서는 趙나라를 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秦나라는 趙나라 군사를 長平에서 격파할 때에 趙나라 군사가 벌벌 떠는 기회를 이용해서 전멸시키지 않고 도리어 두려워서 그들을 놓아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지어 축적을 증가시킬 수 있게 하고, 유아를 길러 군중이 늘어날 수 있게 하고, 兵甲을 수선하여 더욱 강해질 수 있게 하고, 城池를 증축하고 준설하여 더욱 견고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또한 그 임금은 자세를 낮춰서 신하를 대하고, 신하는 몸을 굽혀서 죽기를 각오하고 나선 군사를 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平原君(趙勝)과 같은 자들은 모두 그 妻妾으로 하여금 行伍 사이에서 군복을 깁고 꿰매게 하였습니다. 신하와 백성이 한마음을 가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힘을 모으고 있는 모습은 마치 越王 句踐이 會稽山에서 〈吳王 夫差에게 패하여〉 곤욕을 겪은 때와 같습니다.
지금 그를 친다면 趙나라는 반드시 굳게 지킬 것이고,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반드시 나와서 싸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趙나라의 도읍을 포위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기지 못할 것이고, 성을 친다 하더라도 반드시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고, 郊野를 약탈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군사가 출동하여 공을 세우지 못한다면 제후들은 마음이 달라져 趙나라를 구하려고 밖에서 달려들 것입니다. 臣은 이번 전쟁은 손해만 보일 뿐, 이익은 보이지 않으며, 또 지금 병이 나서 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와 같은 《戰國策》의 내용을 蘇轍은 그의 《古史》에 轉載하고 있다.
역주4 乃知邯鄲決不可再攻 : 《史記》 〈白起王翦列傳〉에 “秦王이 使者를 시켜서 칼을 주며 스스로 자결하게 하니, 武安君은 그 칼을 끌어 스스로 목을 베려고 하면서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이 되었는가?’라고 하였고, 한참 있다가는 ‘나는 응당 죽어야 한다. 長平의 전쟁에서 趙나라 군사 중에 투항한 자가 수십만 명이나 되었는데, 나는 그들을 속여서 다 구덩이에 묻어 죽였으니, 이 죄가 족히 죽을 만하다.’고 했다.”는 내용을 보면, 재차 邯鄲을 치지 못한 白起의 양심을 읽을 수 있다.
역주5 趙充國征西羌……而卒陷其子卬 : 趙充國은 西漢 宣帝 때의 名將이다. 《漢書》 〈趙充國傳〉에 의하면 “趙充國은 70여 세 때 西羌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은혜와 위엄을 병용하여 西羌의 각 부족을 分化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酒泉太守 辛武賢이 宣帝에게 글을 올리기를 ‘趙充國은 羌虜를 두려워하고 있는데, 서둘러서 虜敵과 싸워야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宣帝가 가상히 여기고 명하여 그를 破羌將軍으로 삼았다. 詔書가 자주 이르렀으나 趙充國은 끝까지 詔書를 받들어 進兵하지 않고 누차 글을 올려 ‘羌虜를 격파하는 일은 빨리 결행해서는 안 되고 分化시켜야 한다.’는 계략을 진술하였다.
글이 매번 올라갈 때마다 宣帝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趙充國이 옳다고 하는 이가 10분의 3이었고, 중간에는 10분의 5였고, 나중에는 10분의 8이었다. 宣帝는 마침내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옳다고 여겨 趙充國의 계략을 따르고, 辛武賢은 破羌將軍에서 면직시키고 酒泉太守官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辛武賢은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비록 趙充國에게는 어떻게 하지 못하였으나 趙充國의 아들 趙卬이 宮禁의 기밀을 누설하였다고 탄핵하니, 趙卬은 하옥되어 자살하였다.”고 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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