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秋之際엔 未嘗出與諸侯會盟하고 至於戰國에도 亦以耕戰自守하여 安樂無事하고 未嘗被兵이니라
문공文公二十八年에 소진蘇秦入연燕하여 始以縱橫之事說之니라
오吳自
태백太伯至
수몽壽히 수몽夢不通諸侯
라가 이니라
연燕오吳雖南北絶遠이나 而興亡之迹이 大略相似니라
彼說客
책사策士 借人之國
하여 以自快於一時
는 可矣
나 而
因而徇之
하여 猖狂恣行
하여 以速滅亡
은 何哉
오
하여 而奮於諸侯之上
을 如
以德服人則可
어니와 不然
이면 皆禍也
니라
하니 雖使
형가荊軻로 能害
진왕秦王이라도 亦何救
진왕秦之滅
연燕이온
연燕僻北徼라 故로 其與中國相傾危者後耳요 非以소진蘇秦入而後被兵也니라
문장은 세 번 변환하였으나 모두 법도法度에 맞았다.
연燕나라는 소공召公의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나라가 만맥蠻貊의 사이에 처해 있으므로 예악禮樂이 미미하였다.
춘추시대에는 한 번도 나가서 제후諸侯들과 회맹會盟하지 않았고, 전국시대에 와서도 농사를 짓고 전쟁을 함으로써 스스로 나라를 지키며 태평세월을 누렸고 한 번도 병란兵亂을 겪은 적이 없었다.
문공文公 28년에 소진蘇秦이 연燕나라에 들어가서 비로소 종횡縱橫의 일을 가지고 문공文公에게 유세를 하였다.
이로부터 중국中國(中原)에 전쟁이 일어나서 다시 편할 날이 없었고 연燕나라는 6대代 만에 망하였다.
오吳나라는 태백太伯으로부터 수몽壽夢에 이르기까지 17대代 동안 제후諸侯들과 통교通交하지 않았다가, 무신巫臣이 오吳나라에 들어가서 오吳나라에 전차 타는 법과 전진戰陣하는 법과 활 쏘는 법을 가르쳐준 이래로 진晉나라, 초楚나라와 더불어 힘을 겨뤄 다투다가 7대 만에 망하였다.
연燕나라와 오吳나라는 비록 남북南北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흥망興亡의 자취가 대략 서로 같았다.
저 세객說客과 책사策士가 남의 나라를 빌어서 일시적 통쾌함을 도모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그대로 따라 멋대로 자행하여 멸망滅亡을 부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벽루僻陋한 초야草野 속에서 우뚝 일어나 제후諸侯들 위에서 분발하기를 마치 상商나라와 주周나라의 선왕先王들처럼 덕德으로써 사람을 심복시키는 것은 괜찮지만, 그렇지 않으면 모두 재화災禍만 이룰 뿐이다.
태자太子 단丹에 이르러서는 국무鞠武의 계책은 듣지 않고 전광田光의 계책을 써서 비수匕首 하나로 진왕秦王을 죽이려고 하였으니, 설사 형가荊軻가 능히 진왕秦王을 해쳤다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진秦나라가 연燕나라를 멸하는 것을 구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진왕秦王을〉 능히 해치지 못하지를 않았던가?
이것은 또한 소진蘇秦이 취하는 바가 아니었다.
연燕나라는 궁벽하게 북쪽 변두리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공격대상이 된 것이 최후였을 뿐이고, 소진蘇秦이 들어간 뒤에 병란兵亂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