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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3)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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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思深故 其旨遠이니라
古之帝王 皆聖人也니라
其於爲善 如水之必寒하고 如火之必熱하며 其於不爲不善하고이니라
不學而成하고 不勉而得이니라
공씨孔氏유서遺書曰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이요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니라
天地萬物 猶將賴之以存이온 而況於人乎
自三代之衰 聖人不作하니 世不知하여 而馳騁於喜怒哀樂之餘니라
其發於事業 日以鄙陋하여 不足以睎聖人之萬一이니라
雖春秋之際 王澤未竭하니 士生其間하여 習於禮義而審於利病이니라
관중管仲안자晏子자산子産숙향叔向之流 皆不足以知之하고 이요 맹자孟子知其一二하여 時以告人이나 而天下亦莫能信也니라
陵遲及於秦漢하여는 士益以功利爲急하고 言聖人者 皆以其所知臆之니라
儒者流於度數하고 而智者溺於權利하여 皆不知其非也니라
태사공太史公 始易編年之法하여 爲本紀世家열전列傳하여以來하니 後世莫能易之니라
경제무제之間 皆不列於하니 世能讀之者少니라
其記요순堯舜三代之事 皆不得聖人之意니라
戰國之際 各自著書하되 或增損古事하여 以自信一時之說이어늘 사마천一切信之하고 甚者 或採世俗相傳之語하여 以易古文舊說이니라
焚書 戰國之史 不傳於民間이니라
惡其議已也하여 焚之略盡이니라
幸而野史一二存者 사마천亦未暇詳也니라
其記戰國有數年 不書一事者하니 余竊悲之니라
사마천之舊하여 上觀시경서경하고 下考춘추春秋漢雜錄하여 시황제복희伏羲신농神農하고시황제始皇帝하여 爲七本紀 十六世家 三十七열전列傳하고 謂之고사古史라하니라
追錄聖賢之遺意하여 以明示来世하고 至於得失成敗之際에도 亦備論其故니라
嗚呼
由數千歲之後 言數千歲之前하니 其詳不可得矣 幸其猶有存者 而或又失之니라
고사古史之所爲作也니라
당형천唐荊川曰 前一段고사古史所載之意 後一段 敍作고사古史之由니라


02. 《고사古史》에 대한 서문
사려思慮가 깊었기 때문에 그 뜻이 원대하였다.
옛적의 제왕帝王들은 모두 성인聖人이었다.
는 ‘무위無爲’로 종지宗旨를 삼으니, 만물萬物이 거기에 매여 순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을 함에 있어서는 마치 물이 반드시 차가운 것과 같고, 불이 반드시 뜨거운 것과 같았으며, 그 불선不善을 하지 않음에 있어서는 마치 추우騶虞생물生物을 죽이지 않은 것과 같고, 절지竊脂가 곡식을 먹지 않는 것과 같았다.
전문적으로 학습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고, 특별히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졌다.
속에 쌓인 것이 넉넉하므로 그것을 미루어서 천하를 다스리는 것에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있었다.
공씨孔氏유서遺書에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이 아직 발현하지 않은 것을 ‘’이라 이르고, 발현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라 이르니, ‘’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라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이다.
를 미루어 극도로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안착되고, 만물이 잘 생육生育된다.”고 하였다.
천지와 만물도 오히려 그를 힘입어 존재하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삼대三代쇠락衰落한 이래로 성인聖人흥기興起하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 근본을 알지 못하여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의 감정에 방종하고 절제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업상에 발현된 것이 날로 비루鄙陋해져서 족히 성인聖人작위作爲를 만분의 일에 도달됨을 바랄 수 없었다.
춘추春秋의 시기에도 선왕先王예교禮敎 영향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으니, 선비가 그 시기에 태어나서 선왕이 제정한 예의제도禮義制度를 학습하여 이해관계를 밝게 살폈다.
그런데 관중管仲안자晏子자산子産숙향叔向의 무리 같은 이는 모두 족히 선왕의 예법제도를 알지 못하였고, 공자孔子에 이르러 선왕의 를 아는 정도가 지극하였지만 말씀하지 않았으며, 맹자孟子는 한두 가지를 알고 때로 사람들에게 알려주었으나 천하 사람들은 또한 잘 믿지 않았다.
쇠퇴衰頹하여 진한시대秦漢時代에 미쳐서는 선비들이 더욱 공명功名이록利祿을 추구하는 것을 급한 일로 여기고, 성인聖人를 말할 경우는 모두 자기가 아는 를 가지고 억측하였다.
유자儒者법도法度규구規矩에 치중하고 지자智者는 권력과 이익에 빠져서 모두 그것이 잘못임을 알지 못하였다.
태사공太史公(司馬遷)이 비로소 편년체編年體를 바꾸어 본기本紀세가世家열전列傳으로 편성하는 기전체紀傳體를 만들어 오제五帝삼왕三王 이래의 사적을 기재하였으니, 후세에서 〈그 기전체를〉 바꾸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됨이 천근淺近하여 학습을 하지 않고, 소략疎略하여 경솔하게 믿었다.
나라 경제景帝무제武帝 연간에 고문古文의 《상서尙書》와 모장毛萇한 《시경詩經》 및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 관학官學열입列入되어 교본敎本으로 정해지지 않으니, 세상에서 그 책들을 읽은 자가 적었다.
그러므로 요순堯舜삼대三代의 사적을 기재한 것은 모두 진정한 성인聖人의 뜻을 얻지 못하였다.
전국시대에는 제자諸子변사辨士들이 각각 스스로 책을 저술하되 혹은 고대 사실을 첨가하기도 하고 산삭하기도 하여 스스로 한때의 을 펼쳐놓았는데, 사마천司馬遷은 그 을 일체 믿었고, 심한 경우는 더러 세속에서 서로 전하는 말을 채록하여 고문구설古文舊說을 바꾸었다.
그러나 시황始皇이 서적을 불태운 뒤에는 전국시대의 사료가 이미 민간에 유전된 것이 없었다.
시황始皇이 자기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미워하여 〈선비들이 읽는 서적을〉 불태워 없앴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두 권 남아 있는 야사野史사마천司馬遷이 또한 상세하게 읽어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국시대를 수년간 기재하면서 야사野史에 있는 사건은 하나도 적지 않았으니, 나는 그것을 슬퍼한다.
그러므로 사마천司馬遷의 옛 《사기史記》의 체례體例를 인습하여 위로는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보고, 아래로는 《춘추春秋》 및 진한시대秦漢時代잡록雜錄을 상고하여 〈편사기간을〉 복희伏羲신농神農에서 시작하고 시황제始皇帝에서 끝마쳐서 7개의 본기本紀, 16개의 세가世家, 37개의 열전列傳을 만들고 이것을 《고사古史》라 했다.
성현聖賢유의遺意추록追錄하여 후세에 밝게 보였고, 득실得失성패成敗의 사이에 이르러서도 그 원인을 상세하게 분석하였다.
아!
수천 년 후에 수천 년 전의 일을 말하려니, 그 상세함을 얻을 수 없거니와 다행히 아직 존재한 것마저 혹시 또 잃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고사古史》를 저작하게 된 동기이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기를 “앞의 1에서는 《고사古史》에 기재된 뜻을 서술하고, 뒤의 1에서는 《고사古史》를 저작하게 된 동기를 서술했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古史敍 : 〈古史敍〉는 《古史》를 짓게 된 동기를 밝히기 위한 것인데, 蘇籒가 편찬한 《欒城先生遺言》에 의하면, 政和 6년에 제작되었다. 孫汝聽이 찬한 《年表》에는 이 관계가 실리지 않고, 《欒城集》에는 이 서문이 없다.
역주2 其道以無爲爲宗 :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은 ‘無爲’로 근본을 삼았다는 뜻이다. ‘無爲’는 인위적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다. 先秦時代에는 儒家와 道家가 모두 ‘無爲’를 강구하였다. 道家에서 강구하는 ‘無爲’는 일체 자연변화의 순응을 가리키고, 儒家에서 강구하는 ‘無爲’는 《論語》 〈衛靈公〉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스린 사람은 저 舜임금뿐이셨다. 대체로 그분은 어떻게 하셨던가? 오로지 자신을 공손하게 가지고 바르게 남쪽을 향하여 임금의 자리에 계셨을 뿐이다.[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라고 보이는데, 朱子의 해석에 따르면 “ ‘無爲而治’라는 것은 聖人의 德이 성대함에 백성이 저절로 교화되고 作爲하는 바가 있음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無爲而治者 聖人盛德而民化 不待其有所作爲也]”란 뜻이다. 蘇轍이 이곳에서 말한 ‘無爲’도 儒家의 학설에 입각한 것이다.
역주3 萬物莫能嬰之 : 천하의 모든 사물이 매여서 순응한다는 뜻이다.
역주4 騶虞之不殺 : 騶虞는 상상의 신령스런 짐승이다. 흰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고 꼬리가 길며, 聖人의 德에 감응하여 나타난다고 한다. 《詩經》 〈召南 騶虞〉에 “아! 이것이 騶虞로다.[嗟乎騶虞]”라고 보인데, 그 註에 “騶虞는 짐승 이름인데, 흰 범의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으며, 생물을 먹지 않는다.[騶虞獸名 白虎黑文 不食生物者也]”고 하였고, 毛序에는 “인자함이 騶虞 같으면 王道가 이루어질 것이다.[仁如騶虞 則王道成矣]”라고 하였다.
역주5 竊脂之不穀 : 竊脂는 콩새이다. 몸빛은 上面은 갈색, 腹面은 담갈색, 목은 회색, 날개는 청흑색, 부리와 눈의 주위는 흑색이다. 《詩經》 〈小雅 小弁〉에 “왔다 갔다 하는 桑鳸여 마당을 따라가 곡식을 쪼아 먹도다.[交交桑鳸 率場啄粟]”라고 하였는데, 그 註에 “桑鳸는 竊脂이다. 세속에서는 ‘靑觜’라 부르는데, 육식을 하고 곡식을 먹지 않는다.[桑鳸竊脂也 俗呼靑觜 肉食不食粟]”라고 하였다.
역주6 其積之中者有餘……有不可得而知也 : 성인 자신에게 충분한 지혜와 도덕이 쌓였기 때문에, 그 지혜와 도덕을 발휘하고 확장하여 천하를 다스리면 천하가 자연히 다스려지는 것에는 후인으로서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있었다는 말이다.
역주7 孔氏之遺書……萬物育焉 : 孔氏는 孔子를 가리키고, 遺書는 여기서는 《中庸》을 가리킨다. 인용문은 《中庸》 제1장에 보인다.
역주8 : 여기서는 中和의 道를 가리킨다.
역주9 至於孔子……而未嘗言 : 《論語》 〈公冶長〉에 “夫子께서 性과 天道를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 없었다.[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란 말이 보인다.
역주10 五帝三王 : 五帝는 《史記》 〈五帝本紀〉에 의하면, 黃帝‧顓頊‧帝嚳‧唐堯‧虞舜을 가리킨다. 이 밖에 두 說이 있으니, 하나는 太皞(伏羲)‧炎帝(神農)‧黃帝‧少皞‧顓頊이고(《禮記》), 다른 하는 少昊(皞)‧顓頊‧高辛(帝嚳)‧唐堯‧虞舜이다(〈尙書序〉). 三王은 夏禹‧商湯‧周 文王(일설에는 周나라의 文王과 武王)을 가리킨다.
역주11 其爲人……疎略而輕信 : 蘇軾과 蘇轍은 《史記》를 좋아하지 않고 《漢書》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蘇轍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2 尙書古文詩毛氏春秋左氏 : 尙書古文은 古文의 《尙書》, 詩毛氏는 毛氏 곧 毛萇이 傳한 《詩經》, 春秋左氏는 《春秋左氏傳》을 말한 것이다.
역주13 學官 : 여기서는 官學 곧 국가에서 주관하는 학교를 가리킨다.
역주14 諸子辨士 : 諸子는 각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 辨士는 謀士‧說客 등을 가리킨다.
역주15 <주석명/> : 孫琮은 《山曉閣選宋大家蘇潁濱全集》에서 “《古史》를 지은 목적은 전부 聖人의 뜻이 천하에 밝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子由가 특별히 表出하여 드러낸 것이다. 한 번 序頭를 일으켜서 王道와 聖學을 가져다 提出하여 作史의 本源이 이와 같음을 보였고, 아래에서는 春秋時代와 秦漢時代에 聖人의 뜻을 밝히지 않은 것을 죽 이끌어서 作史의 根由가 이와 같음을 보였다. 作史에 本源을 둔 것은 문득 地步의 높은 곳을 점령한 것이고, 作史에 根由를 둔 것은 문득 이 책에 관계가 있음을 보인 것이다.[古史之作 全爲聖人之意不明于天下 故子由特表而彰之 一起將王道聖學提出 見得作史本源如是 下歷引春秋秦漢不明聖人之意 見得作史根由如是 作史有本源 便是占得地步高 作史有根由 便是見得此書有關係]”라고 비평하였다.
張伯行은 《唐宋八家文鈔》에서 “이 서문은 극히 견해가 있는 論이다. 다만 순수하지 못할 뿐이다. 朱子는 ‘그 「옛적의 帝王은 반드시 善을 하기를 마치 불은 반드시 뜨겁고 물은 반드시 차가운 것과 같았다.」 한 등의 말이 극히 좋다.’라고 칭찬하였다.
다만 序頭를 일으키기를 ‘帝王의 道는 無爲로 宗旨를 삼았다.’고 하였으니, 序頭의 文勢만 크게 떠벌려놓았을 뿐, 下面은 또 모두 空疎하였으니, 또한 司馬遷의 禮書에 이르기를 ‘크다. 禮樂의 道는 洋洋하게 萬物을 宰制하고 群衆을 使役한다.’고 하여 序頭의 文勢는 크게 떠벌려놓았으나 下面은 또한 空疎하게 하고는 문득 荀子 등의 諸說을 끌어서 충족시킨 것과 같다.
이 篇에서 ‘司馬遷은 淺陋하여 배우지 않고 疏略하여 가볍게 믿었다.’고 말하였으니, 이 두 글귀는 司馬遷의 실수를 가장 잘 지적한 것이다.[此序極有見到之論 但未純耳 朱子曰 其云古之帝王必爲善 如火之必熱 水之必寒等語 極好 但起云 帝王之道 以無爲爲宗 只說得頭勢大 下面又皆空疎 亦猶司馬遷禮書云 大哉 禮樂之道 洋洋乎宰制萬物 役使群動(衆) 說得頭勢甚大 然下面亦空疎 却引荀子諸說以足之 至如此篇言司馬遷淺陋而不學 疏略而輕信 此二句 最中司馬遷之失]”라고 비평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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