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管안평중晏兩評處是하고 而요원숭姚송경宋一証更佳니라
관자管子以환공桓公伯나 然이나 其家淫侈하여 不能身蹈禮義니라
안자晏子之爲人은 勇於義하고 篤於禮하니 관자管子蓋有愧焉이리라
然이나 안자晏子事영공靈장공莊경공景公하니 皆庸君이라 功業不足道니라
至於
송경宋璟하여는 介潔特立於
무후武后世
하여 排斥
하니 身危者數矣
니라
故로 世嘗以요원숭元崇比관중管仲하고 송경璟比안자晏子하니 或庶幾焉이니라
관중管仲과 안평중晏平仲을 평한 부분은 다 옳고, 요원숭姚元崇과 송경宋璟을 증명한 대문도 아름답다.
관자管子(管仲)는 제齊 환공桓公을 패주霸主로 만들었지만, 그 가정은 음란하고 사치하여 몸소 예의禮義를 실행하지 않았다.
안자晏子(晏嬰)의 사람됨은 의義에 용감하고 예禮에 독실하였으니, 관자管子는 그에 대해 아마 부끄러운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안자晏子는 영공靈公‧장공莊公‧경공景公을 섬겼는데, 그들은 모두 용렬한 임금이라 공업功業은 족히 거론할 것이 못 된다.
가사 안자晏子가 제대로 임금을 만나기를 마치 관중管仲이 환공桓公을 만난 것처럼 하였다면 그가 성취한 것은 응당 정鄭 자산子産과 어깨를 겨루었겠지만, 제후諸侯를 규합하고 융적戎狄을 물리치는 것만은 반드시 관자管子만 못했을 것이다.
당唐나라 요원숭姚元崇과 송경宋璟은 모두 중흥中興의 현상賢相이었다.
그러나 원숭元崇은 권세權勢와 재화財貨를 좋아하여 여러 간사한 사람들과 함께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섬겼지만 윗사람을 침범하는 말을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고, 명황제明皇帝(玄宗)를 섬길 때에 미쳐서 방종한 행동을 하여 태묘太廟의 용마루가 무너졌는데도 동도東都의 순유巡遊는 아무런 해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송경宋璟으로 말하면 기개의 고결함이 무후武后의 세대에 특출하여 권행權倖을 배척하였으므로 위험한 고비를 겪은 일이 자주 있었다.
명황제明皇帝 때에도 안색을 살펴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므로 세상에 일찍이 요원숭姚元崇은 관중管仲에게 비교하고 송경宋璟은 안자晏子에게 비교하였으니 그 비교가 거의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