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맹猛之將死也
에 부견堅問以後事
한대 왕맹猛曰
진晉雖僻處
오吳월越이나 然
이나 하고 親仁善隣
하니 國之寶也
니이다
선비鮮卑강로羌는 我之仇讐
로 終爲人患
이니 宜漸除之
하여 以寧社稷
이니이다 言終而死
하니라
부견堅不能用
하고 卒大擧伐
진晉이라가 敗于
비수淝上
하여 歸未及國
에 而
하고 하니 니라
故로 後世皆多왕맹猛之賢하고 而咎부견堅之不明이니라
吾嘗論之컨대 부견堅雖有霸者之略이나 而懷無厭之心하여 以天下不一로 爲深恥하니라
이나 而其貪未已
하며 兵革歲克
이나 而不知懼也
니라
진晉雖微弱이나 사안謝安환충桓沖이 爲之將相이니 君臣相사안安하고 民未忘진晉이어늘 而欲以力取之하니 稽之天道하고 論之人情컨대 雖內無모용수垂요장萇之釁이라도 而부견堅之敗는 必不免矣니라
若以世俗言之면 則以漸除之를 如왕맹猛之計得矣요 若以帝왕맹王之事言之면 則부견堅之意 未必過也니라
대아大雅之稱
문왕文王曰
之孫子 其麗不億
이언만 上帝旣命
이라 侯于
주周服
이로다
德雖不若문왕文王이나 而竊慕焉하니 顧其所以處之如何耳니라
문왕文무왕武旣沒
하고 주공周公성왕成王之際
에 이 猶與
관숙管채숙蔡間
주공周之隙
하여 曰 予復
이라하고 反
비읍鄙我
주공周邦
이라하니라
故
로 주공周公克
은殷하여 改封
미자微子于
송宋하고 而遷其頑民于
낙읍洛邑하여 保釐東郊
하고 作
而撫寧之
하니 所以慮其變者至矣
니라
式化厥訓하여 旣歷三紀하여 世變風移하여 四方無虞하니 予一人以寧이라하니라
由此觀之컨대 문왕文王之用은殷人이 豈苟然而已哉아
今
부견堅畜養豺虎于其
하여 而貪心負勝
하고 不顧其後
하니 宜其斃于
모용수垂요장萇也哉
인저
使부견堅信왕맹猛之策하여 南結隣好하고 戢兵保境하여 與民休息이면 雖有모용수垂요장萇百人이라도 安能動之리오
문왕文王雖未可覬나 然이나 亦非왕맹王猛之所及矣리라
깊은 식견은 가졌지만 작문作文은 소씨蘇氏의 본의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것 같다.
부견苻堅과 왕맹王猛은 군신君臣이 서로 의기투합하여 패공霸功을 이루었으니, 비록 제齊 환공桓公과 관중管仲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뛰어날 수는 없었다.
왕맹王猛이 임종할 때에 부견苻堅이 후사後事를 물으니, 왕맹王猛이 말하기를 “진晉나라가 비록 궁벽하게 옛날 오吳나라와 월越나라가 할거하던 지역에 처해 있지만, 정삭正朔을 서로 이어가며 인자仁者와 친근하고 이웃 나라와 우호관계를 가지니 나라의 보배입니다.
신臣이 죽은 뒤에 원컨대 진晉나라를 도모하지 마소서.
선비鮮卑와 강로羌虜는 우리의 구수仇讐로 끝내 우환거리가 되니, 점점 제거하여 사직社稷을 편안케 해야 합니다.”라고 하고 말을 마치자 죽었다.
그러나 부견苻堅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끝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진晉나라를 치다가 비수淝水가에서 패하여 귀환하는데 미처 국내에 이르기 전에는 모용수慕容垂가 배반하였고, 이미 국내에 돌아옴에 요장姚萇이 배반하였으니, 땅은 나누어지고 몸은 죽는 등 끝내 두 사람의 손에 죽었다.
그러므로 후세後世에서 모두 왕맹王猛의 어짊은 훌륭하게 여기고 부견苻堅의 밝지 못함은 나무랐다.
나는 일찍이 논하건대, 부견苻堅은 비록 패자霸者의 지략智略을 가졌으나 불만스런 마음을 품어 천하天下가 통일되지 못한 것을 큰 수치로 여겼다.
비록 연燕나라를 멸하고 촉蜀나라를 평정하고 진주秦州와 양주涼州를 아우르고 서역西域을 항복시켰지만 그 탐욕은 끝이 없었으며, 전쟁으로 매년 민중을 잔살殘殺하였지만 두려워할 줄 몰랐다.
진晉나라는 비록 미약微弱하지만 사안謝安과 환충桓沖이 장상將相이 되었으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편안하고 백성들이 진晉나라를 잊지 못하는데도 힘으로 취하려고 하였으니, 천도天道로 상고하고 인정人情으로 논하건대, 비록 안에 모용수慕容垂와 요장姚萇의 화환禍患이 없었더라도 부견苻堅의 패망은 반드시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견苻堅은 이적夷狄의 후예로 제왕帝王의 도량을 가져, 모용씨慕容氏와 요씨姚氏를 멸해야 할 때에 두 성씨의 자제子弟를 거두어서 그들의 재능才能을 녹용錄用하여 벼슬을 주어 중앙과 지방에 가득하게 하였으니, 구신舊臣 중에는 의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만약 세속世俗으로 말한다면 점점 제거하기를 왕맹王猛의 계략과 같이 해야 옳고, 만약 제왕帝王의 일로 말한다면 부견苻堅의 뜻이 반드시 과도한 것은 아니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文王〉에서 문왕文王을 일컫기를 “은殷(商)나라의 자손들이 그 수가 억億뿐만이 아니었건만 상제上帝가 이미 명命한지라 주周나라에 복종하였도다.
주周나라에 복종하니 천명天命은 일정하지 않은 것이로다.
은殷나라의 선비 중에 아름답고 민첩한 자들이 주周나라 서울에서 제사를 도왔으니, 제사를 돕는 자가 됨이여!
항상 불상黻裳에 은관殷冠을 썼도다.”라고 하였다.
문왕文王이 사람을 씀이 이처럼 광범하였거늘, 부견苻堅을 어찌 나무라겠는가?
덕德은 비록 문왕文王만 못하더라도 은근히 문왕文王을 사모하였으니, 그의 처신이 어떠했는지를 고려할 뿐이다.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이미 죽고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필할 때에 은殷나라의 후예後裔가 오히려 관숙管叔‧채숙蔡叔과 함께 주周나라의 틈새를 타서 말하기를 “내 기업基業을 회복하겠노라.”라고 하고는 도리어 주周나라를 비읍鄙邑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주공周公이 은殷나라를 정복하여 미자微子를 송宋나라에 개봉改封하였으며, 〈은殷나라의〉 완악한 백성들을 낙읍洛邑으로 옮겨 동교東郊를 잘 다스리고 〈다사多士〉를 지어서 안무安撫하고 평정平定하였으니, 그 변變을 염려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군진君陳과 필공畢公 같은 어진 신하들도 모두 뒤를 이어 성주成周에 살면서 〈은殷나라 백성이 사는〉 낙읍洛邑을 유심히 살폈다.
“〈주공周公이 선왕先王을 보필하여 나라를 안정시키시고〉 은殷나라 완악한 백성들의 후환을 염려하여 낙읍洛邑으로 옮겨 왕실王室에 가깝게 하시니,
그 가르침에 교화되어 이미 3기紀가 지나 세상이 변하고 풍속이 바뀌어 사방에 근심이 없으니, 나 한 사람이 편안하노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나라의 안위는 이 은殷나라 선비들에게 달려 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건대, 문왕文王이 은殷나라 사람을 쓴 것이 어찌 무의미한 일이었겠는가?
그런데 지금 부견苻堅은 승냥이와 범을 복심腹心에 길러서 탐심을 부려 승리를 자부하고 뒤를 고려하지 않았으니, 모용수慕容垂와 요장姚萇의 손에 죽게 된 것은 마땅한 일이었도다.
가사 부견苻堅이 왕맹王猛의 계책을 믿어 남쪽으로 이웃 나라와 우호를 맺음과 동시에 전쟁을 중지하고 변경을 안보하여 백성들과 휴식을 취했더라면, 비록 모용수慕容垂와 요장姚萇이 백 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겠는가?
문왕文王은 비록 바랄 수 없지만, 또한 왕맹王猛에게도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