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恬曠之趣는 不如문충공文忠公之초연대기超然臺記나 而亦自悽愴可誦이니라
未至에 大雨하니 筠水泛溢하여 蔑남시南市하고 登北岸하여 敗刺史府門이니라
旣至에 敝不可處어늘 乃告於郡하여 假部使者府以居하니 郡憐其無歸也하여 許之니라
歲十二月에 乃克支其欹斜하고 補其圮缺하며 闢청사당聽事堂之東爲軒하고 種杉二本과 竹百箇하여 以爲宴休之所니라
然이나 鹽酒稅 舊以三吏共事러니 余至에 其二人者는 適皆罷去하고 事委于一이니라
晝則坐市區하여 鬻鹽沽酒稅豚魚하며 與市人爭尋尺以自效하고 莫歸筋力疲廢하여 輒昏然就睡면 不知夜之旣旦하고
私以爲雖不欲仕
나 然
이나 도 尙可自養
이요 而不害於學
이어늘 何至困辱貧窶自苦如此
오하니라
及來균주筠州에 勤勞鹽米之間하여 無一日之休하니 雖欲棄塵垢하고 解羈縶하여 自放於道德之場이나 而事每劫而留之니라
然後에 知안자顔子之所以甘心貧賤하고 不肯求斗升之祿以自給者는 良以其害於學故也니라
士方其未聞大道엔 沈酣勢利하여 以玉帛子女自厚로 自以爲樂矣나 及其循理以求道하여 落其華而收其實하여 從容自得이면 不知夫天地之爲大與死生之爲變이온 而況其下者乎아
雖南面之王이라도 不能加之니 蓋非有德이면 不能任也니라
余方區區欲磨洗濁汚
하고 睎聖賢之萬一
이면 自視缺然
이요 而欲庶幾
안씨顔氏之
이면 宜其不可得哉
인저
若夫공자孔子周行天下하여 高爲노魯사구司寇하고 下爲승전乘田위리委吏는 惟其所遇니 無所不可나 彼蓋達者之事요 而非學者之所望也니라
獨幸歲月之久면 世或哀而憐之하여 使得歸復田里리니 治先人之弊廬하여 爲環堵之室而居之然後에 追求안씨顔氏之樂하고 懷思東軒하여 優游以忘其老니라
편안하고 활달한 뜻을 풍기는 문장은 문충공文忠公(蘇軾)의 〈초연대기超然臺記〉만 못하지만, 처창悽愴한 뜻을 마냥 표현한 문장은 송독誦讀할 만하다.
나는 일단 죄를 짓고 폄적貶謫되어 균주염주세筠州鹽酒稅에 대한 일을 감시하게 되었다.
아직 임지에 이르기 전에 큰 비가 내렸으니, 균수筠水가 넘쳐서 남시南市를 침몰시키고 북안北岸을 넘어 자사부刺史府의 문門을 망가뜨렸다.
염주세청사鹽酒稅廳舍는 강가에 임해 있었으니, 수환水患이 더욱 심하였다.
이미 임지에 이름에 청사가 부서져 거처할 곳이 없거늘, 곧 군郡에 고하여 사군使君(知府)의 관부官府를 빌려서 거처하고자 하니, 군郡에서는 돌아갈 곳이 없는 나의 형편을 불쌍히 여겨 허락하였다.
그해 12월에 기울어진 청사를 떠받치고 허물어진 부분을 보수하였으며, 청사당聽事堂의 동쪽에 마루를 만들고 삼杉나무 두 그루와 대나무 1백 그루를 심어서 연휴宴休할 장소로 삼았다.
그러나 염주세鹽酒稅에 대하여 옛적에는 세 명의 관리가 함께 일을 보았는데, 내가 이름에 그중 두 사람은 다 파직되어 가고 일이 한 관리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낮에는 저자거리에 앉아서 소금과 술을 팔고 돼지와 생선에 대한 세금을 거두며 저자 사람들과 미세한 이익을 다투어 직무수행에 힘을 다하고, 저녁에 돌아와서는 피곤에 지쳐서 곤하게 잠이 들면 아침이 된 줄도 몰랐다.
아침에 다시 나가서 직무를 수행하였으니, 끝내 이른바 동헌東軒이란 데서 편안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매일 조석으로 동헌東軒의 곁을 드나드니, 동헌東軒을 돌아봄에 기가 막혀 스스로 웃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는 옛날 소년시절 글을 읽을 때에 “안자顔子여!
한 도시락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시골에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괴롭게 여겨 견디지 못하는데, 안자顔子는 그것을 즐거움으로 알고 변개하지 않았다.”는 대문을 가지고 속으로 괴상히 여겼다.
그래서 사사로이 생각하기를 ‘비록 벼슬을 하고 싶지 않았다면 문지기 노릇을 하고 목탁木柝을 치면서 야경夜警을 하는 최하위직의 일을 하더라도 오히려 먹고살 수 있고 학문에 방해가 되지 않았을 것인데, 어찌 빈궁에 곤욕을 당하여 그처럼 괴로웠어야 했을까?’라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막상 균주筠州에 와 염미鹽米의 사이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하루도 쉴 겨를이 없으니, 비록 오염된 세속을 버리고 관직의 속박에서 벗어나 도덕道德의 광장에서 자유로이 방일放逸하려고 하나 일이 매번 겁을 주며 놓아주지 않는다.
이렇게 된 뒤에야 안자顔子가 빈천貧賤을 달게 여기고 두승斗升의 녹祿을 추구하여 자양自養을 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그것이 학문을 해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선비가 아직 대도大道를 듣기 전에는 세리勢利에 심취하여 옥백玉帛, 금은金銀, 자녀子女, 부귀富貴같이 자신을 후하게 해주는 것을 가지고 스스로 즐거움으로 삼지만, 이치를 따라 도道를 추구하여 번화한 꽃을 떨어뜨리고 소박한 열매를 수확하여 조용히 자득하는 경지에 이르면 천지의 큰 것과 사생死生의 변한 것도 모르는데, 하물며 그 아래의 단계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즐거움은 족히 궁아窮餓와 바꾸되 원망하지 않는다.
비록 남쪽으로 낯을 향하고 앉는 왕王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으니, 대개 덕德을 가진 자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구구하게 진세塵世의 더러운 때를 씻어버리고 성현聖賢을 만분의 일이라도 바라려고 하면 자신을 돌아볼 때 너무도 모자라고, 안씨顔氏의 복福을 바라려고 하면 그것은 얻을 수 없음이 마땅하다.
공자孔子께서 천하를 두루 다니시어 높게는 노魯나라의 사구司寇가 되고 낮게는 승전乘田과 위리委吏가 되신 것과 같은 것은 오직 만난 처지에 따라 하셨으니 불가할 바가 없지만, 그것은 대개 달자達者의 일이니, 학자學者가 바랄 바가 아니다.
나는 이미 견책譴責으로 여기에 왔으니, 비록 질곡桎梏의 해害를 알지만 형세상 떠날 수가 없다.
다행히 세월이 오래 흐르면 세상에서 나를 애련哀憐히 여겨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할 것이니, 그때에 선인先人의 낡은 집을 수리하여 담이 둘러진 집으로 만들어서 거처한 연후에야, 안씨顔氏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동헌東軒을 생각하여 한가히 놀며 늙어가는 것을 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