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숭崇雖稱名相이나 而其順適현종玄宗之欲하여 以開末年驕侈之漸하여 幾致亡國은 요숭崇所不能辭니라
하여 以持天下之正
이라하니 斯言固二人之所長也
니라
맹자孟子有言하되 所惡於智者는 爲其鑿也니 如智者若우왕禹之行水면 則無惡於智矣리라
당唐현종玄宗은 豪俊之君也
어늘 而
요숭崇復以豪俊事之
니 方其君臣
에 天下事
는 若
니라
개원開元四年에 天下大蝗하니 民祭且拜之하고 坐視食苗而不敢捕니라
요숭崇奏遣어사御史爲포황사捕蝗使하여 分道殺포황사蝗하니 群臣多不以爲然이니라
요숭崇置之不言하고 而專以捕爲事하니 已可疑矣니라
재상宰相송경宋璟소정蘇頲이 皆言
이니 不可巡幸
이요 壞壓之變
은 天戒也
니 請罷
동도東巡
하고 修德以答至譴
하소서하니라
帝以問요숭崇하니 요숭崇曰 此부견苻堅故殿也니이다
今관중關中無年하여 饋餉勞弊하니 出幸동도東都는 所以爲人이요 非爲己也니이다
百司已戒하고 供擬已具하니 請車駕卽동도東하여 而遷神主太極殿하고 更作新廟하소서
此大孝也니이다하니 帝用其言하고 요숭崇由此復재상相하니라
개원開元末에 황제帝在동도東都라가 欲還장안長安하니
배요경裴耀卿等이 皆言 農人場圃未畢하니 須冬可還이니이다하고
이임보李林甫獨曰 二서도都本동도東서도西宮耳니 車駕往來 何用待時리오
假令妨農이면 獨赦所過租賦可也니이다하니 황제帝大悅하고 卽駕而서도西하니라
요숭崇建동도東幸之計하고 이임보林甫獻서도西還之議하니 其意同耳니라
從요숭崇之議하여 使人君上不畏天戒하고 中不敬종묘宗廟하고 下不䘏人言하니라
三者는 皆忠臣之所諱어늘 而요숭崇居之不疑는 何哉오
其後요숭崇송경璟旣歿하니 현종玄宗愈老愈輕蔑群臣이니라
하고 요 方嬖
양국충楊國忠하고 而縱
안녹산安祿山하니 則用輔璆琳
하되 專以適己爲悅
이니라
故로 吾謂개원開元之治가 雖出於요숭崇이나 而천보天寶之亂도 亦요숭崇之所自致니 此人臣之至戒也니라
요숭姚崇은 비록 명상名相이라 칭하나 현종玄宗이 하고 싶어 하는 일에 순종하고 맞춰주어, 말년의 교만 사치의 조짐을 열어서 거의 나라를 망하게 한 것에 대해서는 요숭姚崇이 사피할 수 없는 잘못이다.
당唐나라 사관史官이 “요숭姚崇은 임기응변을 잘하여 천하天下의 일을 이루고, 송경宋璟은 법도 준수를 잘하여 천하天下의 정의를 유지했다.”라고 칭하였으니, 이 말은 참으로 두 사람의 장점을 적시한 것이다.
그러나 임기응변을 하는 것은 필수적으로 정의를 잃지 않은 뒤에야 가능하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지자智者를 미워하는 까닭은 천착하기 때문이니, 만일 지자智者가 마치 우왕禹王이 물을 아래로 흘러가게 했듯이 한다면 지혜를 미워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우왕禹王이 물을 아래로 흘러가게 한 것은 힘들이지 않을 일을 행한 것이니, 만일 지자智者 또한 힘들이지 않을 일을 행한다면 지혜 또한 클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唐 현종玄宗은 호준豪俊한 임금인데, 요숭姚崇이 다시 호준豪俊으로써 섬겼으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남에 천하天下의 일이 쉽게 해결됨은 힘들임 없이 수월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러나 물에 물을 탄 뒤에는 장차 먹을 수 없는 것이 있을 터이다.
개원開元 4년(716)에 천하天下에 황충蝗蟲의 재해가 크게 발생하니, 백성들은 제사나 지내고 절이나 하며 그저 앉아서 황충蝗蟲이 싹을 갉아먹는 것을 보고만 있고 감히 잡지를 못하였다.
요숭姚崇이 임금께 아뢰어 어사御史를 포황사捕蝗使로 삼아 보내 도道를 나누어 황충蝗蟲을 잡아 죽이게 하니, 뭇 신하들은 대부분 옳지 못한 일로 여겼다.
황제皇帝 또한 그 일을 의심하였으나 요숭姚崇은 더욱 힘써 행하였고, 황충蝗蟲 또한 멎었다.
황충蝗蟲을 잡는 것은 비록 옛적의 유법遺法이나, 재해를 만나면 두려워하고 덕德을 닦아 천변天變에 답하는 것이 옛날의 정도正道였다.
그런데 요숭姚崇은 그 일은 놓아둔 채 말하지 않고서 오로지 황충蝗蟲을 잡는 것으로 일을 삼았으니, 일단은 의심을 살 만한 일이었다.
이윽고 요숭姚崇이 친하게 지내던 관리 조회趙誨가 뇌물수수죄로 사형을 받고 죽으니, 요숭姚崇은 두려워서 재상 자리를 내놓았다.
이때에 황제皇帝가 동도東都를 순행하려고 하였는데, 태묘太廟의 집이 무너졌다.
재상宰相 송경宋璟과 소정蘇頲이 모두 말하기를 “삼년상三年喪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순행巡幸할 수 없는 처지이고, 괴압壞壓의 변變은 하늘의 경고이니, 청컨대 동도東都의 순행을 취소하고 덕德을 닦아 지극한 견책譴責에 회답하소서.”라고 하였다.
황제皇帝가 그 까닭을 요숭姚崇에게 물으니, 요숭姚崇이 대답하기를 “이곳은 부견苻堅의 옛 궁전입니다.
산山에 썩은 토양土壤이 있어서 무너지고 나무는 좀이 먹어 꺾인 것이니, 이치상 괴상히 여길 것이 없습니다.
다만 무너지는 일이 순행하시려는 때에 맞추어 일어났을 뿐이고, 순행으로 인하여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관중關中에 흉년이 들어 노곤勞困하고 피폐疲弊한 사람들을 궤향饋餉하고 있으니, 동도東都로 출행出幸하시는 것은 사람들을 위하는 일이고 자신을 위하는 일이 아닙니다.
백관百官들이 이미 경계태세에 들어갔고 공급물자가 이미 준비되었으니, 청컨대 거가車駕가 동도東都로 가서 신주神主를 태극전太極殿으로 옮기고 다시 신묘新廟를 건립하소서.
이렇게 하시는 것이 큰 효도입니다.”라고 하니, 황제皇帝는 그 말을 따랐고, 요숭姚崇은 이로 인하여 재상宰相에 복귀되었다.
개원開元 말기에 황제皇帝가 동도東都에 있다가 장안長安으로 돌아오려고 하니,
배요경裴耀卿 등은 모두 말하기를 “농민農民의 장포場圃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겨울철을 기다려서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고,
이임보李林甫는 홀로 말하기를 “서도西都와 동도東都는 본래 동東‧서궁西宮일 뿐이니, 거가車駕의 왕래를 어찌 시기를 기다려서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가령 농사에 피해를 준다면 통과하는 곳의 조부租賦만을 면제해주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황제皇帝가 크게 기뻐하고 곧 거가車駕가 서도西都로 향하였다.
요숭姚崇은 동도東都로 순행할 계책을 제출하였고, 이임보李林甫는 서도西都로 돌아갈 의논을 드렸으니 그 뜻은 같을 뿐이다.
그런데 누가 요숭姚崇만이 훌륭하다고 하겠는가?
요숭姚崇의 의논에 따라 임금이 위로는 하늘의 경고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고, 그 다음으로는 종묘宗廟를 공경하지 않게 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의논을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충신忠臣이 기휘忌諱할 바인데도, 요숭姚崇이 그런 일들을 의심 없이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뒤에 요숭姚崇과 송경宋璟이 이미 죽고 나니, 현종玄宗은 늙으면 늙을수록 더욱 신하들을 경멸하였다.
바야흐로 장구령張九齡을 임용하였다가 태자太子 영瑛을 폐하였으며, 우선객牛仙客을 등용한 것은 이임보李林甫의 말을 들어준 것이고, 양국충楊國忠을 총애하고 안녹산安祿山을 제멋대로 놀아먹게 하였으니, 인재를 써서 보상輔相으로 삼되 오로지 자기의 마음을 맞추는 사람을 좋아하였다.
이러한 문로門路는 요숭姚崇이 열어놓은 듯하다.
그러므로 나는 “ ‘개원開元의 정치’가 비록 요숭姚崇에게서 나왔지만, ‘천보天寶의 난亂’ 역시 요숭姚崇이 이르게 한 것이다.”라고 여기니, 이것은 남의 신하로서 깊이 경계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