此等見解는 자유子由晩年還영상潁上하니 歷世故多라 故로 能爲論如此니라
이나 然
이나 兵革之禍
는 比
무제武帝世十一二耳
니라
오왕吳王비濞包藏禍心
하고 稱病不朝
한대 문제帝賜之几杖
하니 비濞無所發怒
하고 이니라
한漢遣三十六장군將軍하고 竭天下之力하여 僅乃破之니라
조조錯言諸侯彊大하니 削之亦反이요 不削亦反이나 削之則反疾而禍小하고 不削則反遲而禍大라하니 世皆以其言爲信이나 吾以爲不然이니라
遷延數歲之後에 變故不一이니 徐因其變而爲之備면 所以制之者 固多術矣니라
猛虎在山하여 日食牛羊하면 人不能堪하여 荷戈而往刺之니라
若能高其垣牆하고 深其陷穽하여 時伺而謹防之면 虎安能必爲害리오
爲天下慮患
하여 而使好名貪利小丈夫制之
면 其不爲
조조鼂錯者鮮矣
리라
이와 같은 견해見解는 자유子由가 만년晩年에 영상潁上으로 돌아오니 세고世故를 겪은 것이 많았으므로 이와 같은 논論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노자老子》에 이르기를 “유한 것이 억센 것을 이기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하였다.
한漢 문제文帝가 유한 마음으로 천하를 통치하니, 굳세고 강한 자들이 모두 바람을 따라 쓰러지듯이 감화되었다.
위타尉佗가 남월南越에서 참람하게 ‘제호帝號’를 칭하자, 문제文帝가 그 부모의 분묘墳墓를 잘 보살펴주고, 그 형제들을 불러서 높은 벼슬을 시키니, 위타尉佗는 제호帝號를 제거하고 부복俯伏하여 ‘신臣’이라 칭하였다.
흉노匈奴가 사납고 드세어 중국中國을 능가陵駕하자, 문제文帝는 몸을 낮추어 서신書信을 보내고 증서繒絮(비단과 솜)를 후하게 주었으니, 비록 그들을 항복시키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병혁兵革의 화禍는 무제武帝 세대에 비하여 10분의 1, 2밖에 안 되었다.
오왕吳王 비濞가 화심禍心을 품고 병病을 핑계로 조회하러 오지 않자, 문제文帝가 그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더니, 비濞는 화를 내지 않았고, 따라서 난亂이 일어나지 않았다.
가사 문제文帝가 아직 살아 있고 10년을 넘기지 않아 비濞 또한 이미 늙어 죽었더라면 동남東南의 난亂은 말미암아 일어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경제景帝에 이르러 능히 인내忍耐하지 못하고 조조鼂錯의 계책을 써서 제후諸侯의 땅을 삭탈削奪하니, 비濞가 7국國을 불러서 서쪽으로 향하여 관중關中에 들어갔다.
한漢나라가 36명의 장군將軍을 파견하고 천하天下의 힘을 다 기울여서 겨우 격파하였다.
조조鼂錯가 말하기를 “제후諸侯가 강대强大하니 삭탈削奪해도 배반하고, 삭탈削奪하지 않아도 배반할 것이지만, 삭탈削奪하면 배반은 빨라지는 대신 화禍는 작을 것이고, 삭탈削奪하지 않으면 배반은 더딘 대신 화禍는 클 것이다.”라고 하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말을 믿을 만한 말이라고 하였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참으로 문제文帝처럼 꾹 참고 삭탈削奪하지 않았더라면 비濞는 반드시 배반하지 못했을 것이다.
몇 해를 미루어온 뒤에 변고變故가 일어남이 하나뿐이 아니었으니, 서서히 그 변고를 인하여 준비를 하였더라면 제어할 방책은 얼마든지 많았을 것이다.
맹호猛虎가 산에 있어 날마다 우양牛羊을 잡아먹으면 사람들은 견딜 수 없어서 창을 메고 가서 찌를 것이다.
다행히 〈성사할 경우는〉 범이 죽을 것이고, 불행히 〈성사하지 못할 경우는〉 사람이 죽을 것이니, 그 해害는 빨리 결판이 날 것이다.
만일 원장垣牆을 높이 쌓고 함정陷穽을 깊이 파서 수시로 망을 보아 조심스레 방어한다면 범이 어떻게 반드시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바로 문제文帝가 오吳나라를 방비한 방책이다.
천하天下를 위할 목적으로 우환憂患을 염려하여 이름을 좋아하고 이익을 탐하는 소장부小丈夫로 하여금 제어하게 한다면 조조鼂錯처럼 되지 않을 자가 적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