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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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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三代之得天下 其所以異於後世者 니라
태공太公蓋善用사마병법하고 老而不衰하여 이니라
要之皆仁人이어늘 豈以詭詐爲之하여 而傾人以自立者哉
관중管仲之智而不免於此하니 蓋物有以蔽之歟
古者 將治天下인댄 必先治家以爲其道 當自是往이니라
夫古之聖人 爲君臣父子夫婦之禮 皆有本末이니 不徒設也니라
以舊坊爲無用而毁之者 必有水患이요 以舊禮爲無益而去之者 必有亂患이니라
古之君子 身修而家治 安而行之하면 不知其難而亂自去니라
관중管仲婾取一時之欲하여 而僥倖於長久하니 難哉로다
환공桓公季年 將立세자世子하니 관중管仲知其將有適庶之禍하고 遂與환공桓公효공孝公양공襄公하니라
관중管仲智有餘而德不足 於是窮矣니라


01. 나라
삼대三代(夏‧)가 천하天下를 얻은 것이 후세後世와 다른 까닭은, 구하지 않고 얻은 것일 뿐이다.
세상에서 이윤伊尹태공太公을 논하는 자는 대부분 음모陰謀기계奇計로 돌려버렸으니, 그 이 바로 나라의 진평陳平이나 나라의 가후賈詡와 다를 것이 없다.
무릇 진평陳平가후賈詡의 일은 장자방張子房(張良)과 순문약荀文若(荀彧)도 하지 않는 것이거늘 이윤伊尹태공太公이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태공太公은 대개 용병用兵을 잘하였고 늘그막에도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여 문왕文王과 더불어 기산岐山을 다스렸고 《사마병법司馬兵法》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요컨대 〈문왕文王태공太公은〉 다 인인仁人이었거늘 어찌 궤사詭詐로써 남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자립하여 〈군주君主가 될 리 있었겠는가?〉
관중管仲환공桓公을 도와 제후諸侯들의 패자霸者가 되게 하였고, 한 번 천하天下의 기강을 바로잡아 사람들이 좌임左袵하는 를 면하게 하였으므로 공자孔子께서 으로 허여하였다.
그러나 죽자마자 적자適子(長子)와 서자庶子(次子)가 군주의 지위를 다퉈서 환공桓公을 장사 지낼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관중管仲의 지혜로써 이것을 면하지 못했으니, 아마 사물에 가려지는 것이 있어서 〈예견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옛날에는 장차 천하天下를 다스리려고 하려면 반드시 먼저 집안을 다스리는 것을 로 삼았으니, 마땅히 여기에서부터 가야 할 것이다.
관중管仲나라 대부大夫가 되었을 때에 색문塞門반점反坫을 두고, 몸소 삼귀三歸를 갖추었으며, 환공桓公부인夫人과 자격이 동등한 들이 여섯이었으니, 그 행실이 몹시 더러웠지만 관중管仲패업霸業에 무방하다고 여겨 금하지 않았다.
옛날 성인聖人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를 창제함에 있어서 모두 본말本末을 두었으니, 공연히 실시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옛날 제방堤防이 쓸모없는 것이라 하여 헐어버리면 반드시 수환水患이 있게 되고, 옛 를 무익한 것이라 하여 없애버릴 경우는 반드시 난환亂患이 있게 된다.
옛날 군자君子는 몸을 닦음에 집안이 다스려졌으니, 편안히 행하면 그 어려움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 관중管仲은 한때의 욕심을 취하여 장구長久하기를 요행히 바랐으니, 곤란한 일이었다.
환공桓公이 만년에 장차 세자世子를 세우려고 하니, 관중管仲은 장차 적서適庶가 있을 것을 알고 드디어 환공桓公과 함께 효공孝公 양공襄公에게 부탁하였다.
가사 환공桓公처첩妻妾적서適庶의 구분을 본래 분명하게 하여 집안일이 평소 정해졌다면 태자太子는 말 한마디에 세워졌을 것이니, 다른 사람(宋 양공襄公)이 어찌 그 일에 관여했겠는가?
아마 관중管仲은 지혜는 넉넉하지만 은 부족하다는 것이 이에 드러난 것이리라.


역주
역주1 : 周 武王이 周 王朝를 세우고 姜太公을 齊나라에 봉하였다. 춘추시대에 와서는 齊 桓公이 管仲을 정승으로 삼아 五霸의 하나가 되었고, 齊 威王에 와서는 또 七雄의 하나가 되었는데, 뒤에 秦나라에 멸망하였다.
이 글은 《古史》 卷9 〈齊太公世家 제2〉에서 篇名으로 취하였다.
역주2 惟不求而得之耳 : 商 湯王이 夏 桀王을 멸하고, 周 武王이 商 紂王을 정벌한 것을 역사에서 “仁으로 暴를 쳤다.[以仁伐暴]”라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3 世之論伊尹太公 多以陰謀奇計歸之 : 《史記》 〈殷本紀〉에는 “伊尹은 일찍이 商 湯王을 도와 夏 桀王을 쳤고, 뒤에 太甲이 즉위하여 현명하지 못하자, 그를 桐宮으로 내쳤다. 3년 만에 太甲이 자책하고 改過遷善하였으므로 伊尹은 국정을 그에게 돌려주었다.”고 하였다.
《史記》 〈齊太公世家〉에는 “周 西伯 昌(文王)이 羑里獄에서 석방돼 돌아와서 呂尙(太公)과 더불어 모의하여 덕을 닦아 商을 전복시켰는데, 그 일에 兵權과 奇計가 많았기 때문에 후세에서 兵權과 周의 陰權을 말하는 자는 모두 太公을 宗主로 하여 本謀를 삼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多以陰謀奇計歸之’는 바로 여기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나 蘇轍은 《史記》의 설에 동의하지 않았으니, 곧 〈歷代引〉 중에 이른바 “先儒가 옛적에 깨닫지 못한 바가 있었다.[先儒昔有所未悟也]”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역주4 其說乃與漢陳平魏賈詡無異 : 대의는 “伊尹과 太公이 陰謀와 奇計로써 하였다면 陳平이나 賈詡와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란 것이다. 《史記》에 의하면 “陳平은 漢初의 政治家로 黃老術을 숭상하였으며, 劉邦과 項羽가 서로 다툴 때에 反間計를 써서 項羽로 하여금 謀士인 范增을 제거하게 하고, 爵位로써 韓信을 농락하였다.”고 하였고, 《三國志》에 의하면 “賈詡는 謀計를 잘하였다.”고 하였다.
역주5 夫陳平賈詡之事……而謂伊尹太公爲之乎 : 대의는 “陳平과 賈詡가 陰謀와 奇計로써 君主를 섬기는 것은 張子房과 荀文若도 하려고 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伊尹과 太公이 그런 일을 하였겠는가?”란 것이다. 《史記》 〈留侯世家〉에 의하면 “張良은 字가 子房으로 漢初의 政治家이다. 劉邦이 일찍이 ‘帷帳 속에서 籌策을 운용하여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하였다.’고 張良을 칭찬했다.”고 하였고, 《三國志》 〈荀彧傳〉에 의하면 “荀彧은 字가 文若으로 曹操의 謀士인데, 曹操는 그를 張良에 비유했다.”고 하였다.
역주6 與文王治岐而司馬兵法出焉 : 司馬遷은 《史記》 〈司馬穰苴傳〉에서 “齊 威公이 大夫로 하여금 옛날의 《司馬兵法》을 追論하게 하면서 그 가운데 穰苴를 붙여 이름을 《司馬穰苴兵法》이라고 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三代時代의 병법을 막연히 《司馬兵法》이라고 한 것이다. 蘇轍은 《司馬兵法》이 姜太公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단정하였다.
역주7 管仲相桓公霸諸侯……孔子以仁許之 : 《史記》 〈管晏列傳〉에 “齊 桓公이 霸者로써 諸侯를 규합하여 천하의 기강을 바로잡은 것은 管仲의 계책이었다.[齊桓公以霸九合諸侯 一匡天下 管仲之謀也]”란 내용이 보인다.
또 《論語》 〈憲問〉에 “子貢이 말하기를 ‘管仲은 仁者가 될 수 없지 않습니까? 桓公이 公子 糾를 죽였는데도 따라 죽지 못하고 도리어 桓公을 도왔으니 말입니다.’라고 하니,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管仲은 桓公을 도와 諸侯들의 霸者가 되게 하여 천하의 기강을 바로잡았으므로 사람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느니라. 만일에 管仲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은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옷을 입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니라.[子貢曰 管仲非仁者與 桓公殺公子糾 不能死 又相之 子曰 管仲相桓公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 한 내용과, “子路가 묻기를 ‘桓公이 公子 糾를 죽이자, 召忽은 따라 죽었는데 管仲은 따라 죽지 않았으니, 말하자면 不仁한 짓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니,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桓公이 諸侯들을 규합할 때에 무력을 쓰지 않은 것은 모두 管仲의 힘이었느니라. 그러니 누가 管仲의 仁을 따를 수 있겠느냐? 누가 管仲의 仁을 따를 수 있겠느냐?’ 하였다.[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未仁乎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如其仁]”란 내용이 보인다.
역주8 然死不旋踵……幸而不亡 : 《史記》 〈齊太公世家〉에 “桓公이 병을 앓자 다섯 公子들은 각각 黨을 조직하여 군주의 지위를 다투었고, 桓公이 죽자 서로 공격하였기 때문에 궁중이 비어서 棺을 만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桓公의 시신이 床 위에 67일 동안 있어서 시체에서 벌레가 생겼다.”고 하였다.
역주9 管仲爲齊大夫……不禁也 : 管仲은 齊나라 大夫로, 성은 管, 이름은 夷吾, 자는 仲이다. 孔子보다 2백 년 전 사람으로 齊 桓公을 도와 霸者가 되게 한 뛰어난 정치가였다. 《史記》 〈管晏列傳〉에 “管仲은 公室에 견줄 만큼 부자였기 때문에 三歸와 反坫을 두었으나 齊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사치라고 여기지 않았다.[管仲富擬公室 有三歸反坫 齊人不以爲侈]”고 하였다.
塞門은 병풍으로 문을 가리는 것이고, 反坫은 孔穎達의 疏에 “두 나라 임금이 친선을 다지는 연회석에서 술을 마시고 빈 잔을 되돌려놓는 坫臺다.”라고 하였으니, 곧 술을 마신 뒤에 잔을 臺에 엎어놓는 것이다.
三歸에 대해서 劉向은 臺 이름으로, 安師古는 세 성씨의 여자에게 장가가는 것으로 보았다. 《論語》 〈八佾〉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內嬖는 곧 內寵이니, 천하면서 임금의 총애를 얻은 것을 말한다.
역주10 桓公季年……而他人何與哉 : 《史記》 〈姜太公世家〉에 “〈桓公 43년에〉 管仲과 함께 孝公을 宋 襄公에게 부탁해 太子로 삼았다. 雍巫가 衛共姬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宦者 竪刁를 통해 桓公에게 후한 선물을 바치고 또한 총애를 받았으므로 桓公이 無詭를 태자로 세울 것을 허락하였다. 管仲이 죽으니, 다섯 公子는 모두 태자가 될 것을 요구하였다. 10월에 齊 桓公이 죽었다. 易牙가 들어가서 竪刁와 함께 內寵을 통하여 群吏를 죽이고 公子 無詭를 君主로 세우니, 太子 昭는 宋나라로 도주했다.”라고 하였다. ‘他人’은 곧 宋 襄公을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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