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공太公蓋善用
사마병법兵하고 老而不衰
하여 이니라
要之皆仁人이어늘 豈以詭詐爲之하여 而傾人以自立者哉아
古者에 將治天下인댄 必先治家以爲其道니 當自是往이니라
夫古之聖人은 爲君臣父子夫婦之禮에 皆有本末이니 不徒設也니라
故로 以舊坊爲無用而毁之者는 必有水患이요 以舊禮爲無益而去之者는 必有亂患이니라
古之君子는 身修而家治니 安而行之하면 不知其難而亂自去니라
今관중管仲婾取一時之欲하여 而僥倖於長久하니 難哉로다
환공桓公季年에 將立세자世子하니 관중管仲知其將有適庶之禍하고 遂與환공桓公屬효공孝公於송宋양공襄公하니라
삼대三代(夏‧은殷‧주周)가 천하天下를 얻은 것이 후세後世와 다른 까닭은, 구하지 않고 얻은 것일 뿐이다.
세상에서 이윤伊尹과 태공太公을 논하는 자는 대부분 음모陰謀와 기계奇計로 돌려버렸으니, 그 설說이 바로 한漢나라의 진평陳平이나 위魏나라의 가후賈詡와 다를 것이 없다.
무릇 진평陳平과 가후賈詡의 일은 장자방張子房(張良)과 순문약荀文若(荀彧)도 하지 않는 것이거늘 이윤伊尹과 태공太公이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태공太公은 대개 용병用兵을 잘하였고 늘그막에도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여 문왕文王과 더불어 기산岐山을 다스렸고 《사마병법司馬兵法》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요컨대 〈문왕文王과 태공太公은〉 다 인인仁人이었거늘 어찌 궤사詭詐로써 남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자립하여 〈군주君主가 될 리 있었겠는가?〉
관중管仲은 환공桓公을 도와 제후諸侯들의 패자霸者가 되게 하였고, 한 번 천하天下의 기강을 바로잡아 사람들이 좌임左袵하는 화禍를 면하게 하였으므로 공자孔子께서 인仁으로 허여하였다.
그러나 죽자마자 적자適子(長子)와 서자庶子(次子)가 군주의 지위를 다퉈서 환공桓公을 장사 지낼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관중管仲의 지혜로써 이것을 면하지 못했으니, 아마 사물에 가려지는 것이 있어서 〈예견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옛날에는 장차 천하天下를 다스리려고 하려면 반드시 먼저 집안을 다스리는 것을 도道로 삼았으니, 마땅히 여기에서부터 가야 할 것이다.
관중管仲은 제齊나라 대부大夫가 되었을 때에 색문塞門과 반점反坫을 두고, 몸소 삼귀三歸를 갖추었으며, 환공桓公은 부인夫人과 자격이 동등한 첩妾들이 여섯이었으니, 그 행실이 몹시 더러웠지만 관중管仲은 패업霸業에 무방하다고 여겨 금하지 않았다.
옛날 성인聖人은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의 예禮를 창제함에 있어서 모두 본말本末을 두었으니, 공연히 실시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옛날 제방堤防이 쓸모없는 것이라 하여 헐어버리면 반드시 수환水患이 있게 되고, 옛 예禮를 무익한 것이라 하여 없애버릴 경우는 반드시 난환亂患이 있게 된다.
옛날 군자君子는 몸을 닦음에 집안이 다스려졌으니, 편안히 행하면 그 어려움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난亂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 관중管仲은 한때의 욕심을 취하여 장구長久하기를 요행히 바랐으니, 곤란한 일이었다.
환공桓公이 만년에 장차 세자世子를 세우려고 하니, 관중管仲은 장차 적서適庶의 화禍가 있을 것을 알고 드디어 환공桓公과 함께 효공孝公을 송宋 양공襄公에게 부탁하였다.
가사 환공桓公이 처첩妻妾과 적서適庶의 구분을 본래 분명하게 하여 집안일이 평소 정해졌다면 태자太子는 말 한마디에 세워졌을 것이니, 다른 사람(宋 양공襄公)이 어찌 그 일에 관여했겠는가?
아마 관중管仲은 지혜는 넉넉하지만 덕德은 부족하다는 것이 이에 드러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