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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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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議論甚正
衰禮義不明한대 而小人奮身以犯上으로 相夸以爲賢하니 공자孔子疾之하시다
하고 공손편公孫대부大夫 한대 춘추春秋皆以書而不名하니 니라
태사공太史公傳刺客凡五人제표공손편之類耳어늘 而其稱之不容口하니춘추春秋之意矣니라
예양豫讓爲舊君報조양자趙襄子하니 有古復讐之義니라
형가荊軻시황始皇시황始皇以彊暴失天下心하여 聞者快之 要以盜賊으로 乘人主不意 法不可長也니라
自是未嘗敗하고 十三年 而會제후齊侯가읍하니 安得所謂三戰三敗리오
하니 其後戰國游士 多稱조말以爲口實이나 而實非也니라
이라하니 조말蓋知義者也어늘 而肯以其身爲刺客之用乎
춘추春秋 盟于城下 盟于협곡夾谷 皆以要盟不書하고 니라
使조말信以匕首劫환공桓公이면 得非要盟乎
하니 足以知其非要盟也니라
是以 削去조말曹沫하고 而錄其四人이니라
이나 亦非所謂賢也니라


18. 자객
의론議論이 매우 바르다.
나라가 쇠퇴기에 접어들어 예의禮義가 밝지 못하자, 소인小人들이 분기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윗사람을 침범하는 것으로써 서로 뽐내며 현명하다고 여기니, 공자孔子께서 그것을 미워하셨다.
제표齊豹나라 사구司冦로서 위후衛侯 을 죽이고 나라 공손편公孫翩대부大夫로서 그 임금 을 죽였거늘, 《춘추春秋》에서 모두 ‘’로 적고 이름을 적지 않았으니, 이른바 “〈용맹하다는〉 명성을 구했지만 얻지 못하였다.[求名而不得]”란 것이다.
태사공太史公입전立傳자객刺客 다섯 사람은 모두가 제표齊豹공손편公孫翩 따위였을 뿐인데, 그들을 몹시 칭찬하였으니, 《춘추春秋》의 뜻을 잃은 것이다.
예양豫讓만은 옛 임금(智伯)을 위하여 조양자趙襄子에 대해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으니, 옛날에 복수復讐하는 의의가 있었다.
형가荊軻 시황始皇을 찌른 것과 같은 일은 비록 시황始皇강포强暴로 천하의 인심을 잃어서, 그 소식을 듣는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지만, 결과적으로 도적盜賊(刺客)들에게 임금(始皇)이 유의치 못한 것을 틈타게 한 것이니, 그러한 은 조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조말曹沫의 일로 말하면 내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가지고 상고하건대, 장공莊公 10년에 조말曹沫이 처음 모책謀策을 가지고 장공莊公을 찾아뵈니, 장공莊公이 그 모책謀策을 써서 나라를 장작長勺에서 패배시켰다.
이로부터 나라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고, 13년에 제후齊侯(齊 환공桓公)와 〈나라〉 가읍柯邑에서 회맹會盟하였으니, 어떻게 이른바 ‘세 번 싸워 세 번 패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조말曹沫이 어찌 비수匕首를 가지고 환공桓公을 위협하여 제나라에 빼앗긴 땅을 요구한 사람이었겠는가?
처음에 공양고公羊高이설異說을 채취하여 조말曹沫의 일을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기재하니, 그 뒤에 전국戰國유사游士(遊說客)들이 대부분 조말曹沫을 칭찬하는 것으로 구실口實을 삼았으나 실은 사실이 아니었다.
장공莊公이 〈침입한〉 나라의 군대를 막을 때에 조말曹沫이 〈장공莊公에게〉 싸울 방법을 묻고 “작은 은혜와 신의는 믿을 것이 못 되며, 〈백성을 위하는〉 에 해당된 일이면 한번 싸워볼 만합니다.”라고 하였으니, 조말曹沫은 아마 의리義理를 안 사람이었을 것인데, 자신이 자객刺客이 되려고 했겠는가?
춘추春秋》에서는 나라와 나라가 성하城下에서 회맹會盟한 것과 나라와 나라가 협곡夾谷에서 회맹會盟한 것을 모두 ‘요맹要盟(맹약을 요구한 것)’으로 적지 않고 ‘(화평)’과 ‘(회합)’로 적었을 뿐이다.
가사 조말曹沫이 참으로 비수匕首를 가지고 환공桓公을 위협하였다면 어찌 ‘맹약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춘추春秋》에서 “장공莊公나라 임금을 가읍柯邑에서 만나 동맹을 맺었다.”고 적었으니, 그것이 ‘맹약을 요구한 것’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조말曹沫을 삭제하고 그중 네 사람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또한 〈조말曹沫이〉 이른바 ‘어진 사람’은 아니었다.


역주
역주1 刺客 : 司馬遷은 《史記》 〈刺客列傳〉에서 魯나라의 曹沫, 吳나라의 專諸, 晉나라의 豫讓, 韓나라의 聶政, 燕나라의 荊軻 등 다섯 명의 刺客을 다루었는데, 蘇轍은 《古史》 〈刺客列傳〉에서 專諸‧豫讓‧聶政‧荊軻 등 네 명의 刺客만 다루고, 曹沫은 의리를 아는 사람이라고 하여 刺客에서 제외시켰다.
이 글은 《古史》 卷59 〈刺客列傳 제36〉에서 篇目으로 취한 것이다.
역주2 齊豹以衛司冦 殺衛侯之兄縶 : 《春秋左氏傳》 昭公 20년에 의하면 “齊豹(齊惡의 아들)는 衛나라 大夫로서 司寇를 맡았다. 이때 公孟縶이 어질지 못하여 齊豹를 경멸하였으므로 齊豹는 北宮喜‧褚師圃‧公子朝와 함께 亂을 일으켜 衛侯(衛 靈公)의 兄 公孟縶을 죽였다.”고 한다.
역주3 : 저본에는 ‘翻’으로 되어 있는데, 《春秋左氏傳》‧《史記》‧《古史》 등에 의거하여 ‘翩’으로 바꾸었다.
역주4 弑其君申 : 《春秋左氏傳》 哀公 4년의 經에 “도적이 蔡侯 申을 살해했다.[盜殺蔡侯申]”란 내용이 보인다.
역주5 所謂求名而不得者也 : 《春秋左氏傳》 昭公 31년에는 “그러므로 군자는 움직일 때에는 禮를 생각하고 일을 처리할 때에는 義를 생각하여 이익 때문에 마음이 동요되어서도 안 되고 義 때문에 고민해서도 안 된다. 어떤 이는 이름을 드러내려 해도 달성할 수가 없고, 어떤 이는 숨기려 해도 그 이름이 더욱 드러나는 것은 不義를 징계하기 때문이다. 齊豹는 衛나라 司寇로서 세습한 大夫였지만 행동이 의롭지 못했기 때문에 經에서 ‘盜(도적)’라고 적은 것이다.[是故 君子動則思禮 行則思義 不爲利回 不爲義疚 或求名而不得 或欲蓋而名章 懲不義也 齊豹爲衛司宼 守嗣大夫 作而不義 其書爲盜]”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注疏》에는 “ ‘이름을 드러내려 해도 달성할 수가 없다.’는 것은 20년에 齊豹가 衛侯의 형을 죽였으니, 권세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이름을 드러내려 했다.[求名而不得也 二十年 豹殺衛侯兄 欲求不畏彊禦之名]”라고 하였다.
역주6 曹沫 : 曹劌, 曹翽라고도 하는데, 춘추시대 魯나라 大夫로서 智略과 의리가 뛰어났다고 한다.
역주7 魯莊公十年……敗齊於長勺 : 《春秋左氏傳》 莊公 10년의 經에 “10년 봄 정월에 莊公이 齊나라 군사를 長勺에서 패배시켰다.[十年春王正月 公敗齊師于長勺]”라고 하였다.
역주8 安得所謂三戰三敗 沫以匕首劫齊桓求侵地者哉 : 《史記》 〈刺客列傳〉에 “曹沫이 魯나라 장수가 되어 齊나라와 싸워 세 번 패배했다.[曹沫爲魯將 與齊戰三敗北]”고 하였고, 또 “桓公과 莊公이 壇上에서 盟約을 하고 있을 때 曹沫이 匕首를 가지고 〈단상으로 올라가서〉 齊 桓公을 위협하니, 桓公의 부하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는데, 〈管仲이 나와서〉 묻기를 ‘君(莊公)은 무엇을 원하오?’라고 하니, 曹沫이 말하기를 ‘齊나라는 강하고 魯나라는 약한데, 大國이 魯나라를 침범한 것 또한 심하오…….’라고 하자, 桓公은 침탈한 魯나라의 땅을 모두 돌려줄 것을 허락했다.[桓公與莊公 旣盟於壇上 曹沫執匕首劫齊桓公 桓公左右莫敢動 而問曰 子將何欲 曹沫曰 齊彊魯弱 而大國侵魯 亦以甚矣……桓公乃許盡歸魯之侵地]”라고 하였다.
역주9 始公羊高采異說 載沫事於春秋 : 《春秋公羊傳》 莊公 13년에 “莊公이 壇에 오르자 曹子(曹劌)가 손에 칼을 들고 따라갔다. 管子(管仲)가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君(莊公)께서 무엇을 요구하시오?’라고 하니, 曹子가 말하기를 ‘城이 무너져서 〈齊나라의 영토가〉 魯나라에 깊이 들어왔는데, 君(桓公)은 도모하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管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君께서 장차 무엇을 요구하겠소?’라고 하니, 曹子는 ‘원컨대 汶陽의 田地를 청하오.’라고 하였다. 管子가 돌아보며 말하기를 ‘君(桓公)께서 허락하십시오.’라고 하니, 桓公은 ‘허락한다.’고 하였다. 曹子가 盟約을 청하니, 桓公은 단상에서 내려와서 曹子와 더불어 盟約을 체결하였다.[莊公升壇 曹子手劒而從之 管子進曰 君何求乎 曹子曰 城壞壓竟 君不圖與 管子曰 然則君將何求 曹子曰 願請汶陽之田 管子顧曰 君許諾 桓公曰 諾 曹子請盟 桓公下與之盟]”란 내용이 보인다.
역주10 莊公之禦齊……惟忠爲可以一戰 : 《春秋左氏傳》 莊公 10년의 傳에 “齊나라 군사가 魯나라로 쳐들어왔으므로 魯 莊公은 장차 싸우려고 하였다. 이때 魯나라 曹劌가 莊公께 뵙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시골 사람들이 曹劌에게 말하기를 ‘그런 말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생각할 것이니, 관여할 필요가 없소.’라고 하니, 曹劌가 말하기를 ‘지위가 높은 사람은 생각과 식견이 낮아 원대한 생각을 할 수 없소.’라고 하고, 대궐에 들어가 莊公을 뵈었다.
曹劌가 묻기를 ‘어떻게 싸우실 겁니까?’라고 하니, 莊公이 말하기를 ‘생활에 필요한 의류나 음식물은 결코 독점하지 않고 반드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하네.’라고 하였다.
曹劌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작은 은혜라 널리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니,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莊公이 말하기를 ‘제사에 쓰이는 犧牲이나 玉帛에 품목을 더 늘리지 않고 반드시 신실한 축사로서 거행할 것이네.’라고 하였다.
曹劌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작은 신용에 불과해서 神도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莊公이 말하기를 ‘백성들의 소송에는 작은 사건과 큰 사건이 있어 비록 잘 살필 수는 없으나 반드시 진정으로 다스릴 것이네.’라고 하였다.
曹劌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충실에 속하는 방법이니 한번 싸워볼 만합니다. 싸우신다면 저도 따르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齊師伐我 公將戰 曹劌請見 其鄕人曰 肉食者謀之 又何間焉 劌曰 肉食者鄙 未能遠謀 乃入見 問何以戰 公曰 衣食所安 弗敢專也 必以分人 對曰 小惠未徧 民弗從也 公曰 犧牲玉帛 弗敢加也 必以信 對曰 小信未孚 神弗福也 公曰 小大之獄 雖不能察 必以情 對曰 忠之屬也 可以一戰 戰則請從]”란 내용이 보인다.
역주11 書平及會而已 : 《春秋》의 宣公 15년에 “宋나라 사람들은 楚나라 사람들과 화평하였다.[宋人及楚人平]”라는 것과, 定公 10년에 “定公이 齊나라 임금과 夾谷에서 회합하였다.[公會齊侯于夾谷]”라는 것을 가리킨다.
역주12 春秋 書公會齊侯盟于柯 : 《春秋》 莊公 13년에 “겨울에 莊公이 齊나라 임금을 柯邑에서 만나 동맹을 맺었다.[冬公會齊侯盟于柯]”라고 적고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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